트위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보았을까. 아마 생각만하다 '다 아는 얘긴데 뭘 새삼스레...' 하고는 말았을 것이다. 다 알 것이라는 예단.
트위터에서 귀담아들을만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의 짧은 감상을 읽으면서 꼭 가서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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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교수가 37년만에, 소위 참여정부가 들어선 고국에 돌아와... 감옥에 갇혔던 2003년.
아마도 나 역시 그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다른 기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
본의였든 아니든. 아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세월이 흐른 뒤에 '본의 아니게 (노동당에)입당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정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했다. 입당이 카드가입하는 것도 아닌데, 본의의 의지와 무관하게 처리될 수 있단 말인가...  

37년을 해외에 표류하며 박해받던 양심적인 학자가
전향을 강요당하는 포로처럼 옹색한 신세로 전락했을 때... 그것을 그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며 냉담했던 것 같다. 영화에 보니 한겨레신문은 나보다도 더 보수적으로 그를 비판했던 모양이다.

영화감독 마저도 ... 스스로도 레드컴플렉스와 그것을 넘어서서 이성적으로 사태를 보려는 내면이 뒤엉켜 혼돈스러웠다고 했다. 그런 혼돈은 모처럼 독대한 송두율교수에게 '왜?' 라고 질문하고 싶어하다가... 지친 그를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할 말을 참는... 장면.  

진보신당마저도 자신들의 탈당 명분을 설명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운운하면서 사상의 자유와 선을 긋지 않았던가. 남한 땅에서는 이렇게 진보마저도 왜곡되는 모양이다. 그게 남한의 수준이고 한계일까.

영화에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국가대표급 인사들이 많이 출현한다.
세월이 흐른 뒤에 ... 그 분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니 실용적인 처세는 있어도 귀담아 들을 그럴 듯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관되게 정확한 입장을 말하는 이는 송두율교수의 부인 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게 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줄곧 말한다. 남편이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지만, 북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 남쪽으로는 귀국조차 허용되지 않던 과거의 현실을 생략한 채 실용적인 처세를 강조하는 이들에게 ...

그의 아내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고... 한번도 주저하지 않고 원칙을 말한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가... 전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시절의 친구들, 공대교수'같은 이들이 전화로 '지금 네가 너 자신을 포기하면(전향)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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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이명박, 김문수, 이재오 같은 이들 ...
조금 다를지 몰라도 본질에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야당의 386세대 정치인들.

그들이 청춘의 한 때, 때로 목숨을 내걸고 불의에 저항했던 것. 그것이 자신의 정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들은 결과적으로 젊은날 스스로의 분투를 '헤프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절박한 당위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송두율 교수를 향해 '지금은 수세국면이니 축구에서 온선수가 수비에 치중하듯 테크니컬하게 생각해 사과도 하고 반성도 하자'고 충고하던 이들처럼... 상황에 대응하는 조금더 실리적이고 조금 더 나아보이는 선택을 하다보면... 어느 덧 자신이 발딛고 있던 지점과는 정반대쪽에서 허우적거리며 다음 내디딜 땅만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살다보니 이제 그 원리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원칙없는 실용...이냐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할 것이냐 . 그
것을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만의 일이다. 옆에서 훈수두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이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이십여년 동지가 돼 버린 아내와 극장을 나서 팔짱을 끼고 안국동으로 걸어나오며 우리는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2010년 봄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2003년 무렵의 국가대표급 진보진영선수들을 향해 냉소는 할 수 있다.  그러나 ... 당시의 나는 달랐던가.

그의 '불가피했을' 입당과 또  그와 다르지 않을 전향을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마음이 과연 당시에도 있었던가... 그러고보면 냉소해야 할 것은 영화속의 국가대표들이 아니라 늘 평론가연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정작 입맛이 쓴 것은 이 대목에서 였다.













벌써 몇 주가 흘렀다.  
주말에 전북 장수 장계면에서 열린 전희식 선생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책 제목은 [엄마하고 나하고]다.



노회찬 대표가  와있다. 두 사람은 인천에서 노동운동할 때의 동지였다고 한다.
전희식 선생은 인터뷰에서, 그 무렵 비합법 조직을 꾸릴 때... 모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국전쟁 전후에 악몽들을 떠올리며 공포에 전율하셨다고... 그 때 어머니의 정신에 충격이 있었을 것이라고...그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것 같다.

치매걸린 어머니를, 온몸으로 ...
그래, 그냥 말이나 관념,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똥오줌을 받아내면서, 또 온전치 못한 뇌의 기능 때문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그 어머니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고, 의당 그래야 하지만 누구도 못하고 있는 일을... 그는 했다.
심지어는 치매걸린 어머니가 가잔다고 대책도 없이 트럭을 타고 서울까지 다녀가기도 하면서...

나는 행사내내, 그 위대한 정신, 언행이 일치하는 그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할만큼 아픈 마음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말이다.

어머니는 지난 1월 중순, 밀양집에 혼자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그날 새벽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새벽에 잠이 깼다. 나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던 아내와 둘째딸도 모두 그랬다. 새벽 두 시 40분 경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녀가신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70여일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다지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줄 뻔히 알면서도 '잔소리'를 하시면 툴툴대기 일쑤였다. '엄마 나도 이제 어른이에요.' 하고 말이다.
정작 그 인간이 어른스러운지,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있는지는
자신을 어른이라고 강변하면서가 아니라... 전희식 선생처럼 행동으로 그리고 꾸준하고 일관된 인격으로 증명하는 것인데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께 늘 죄송한 마음이 있어 출근길에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했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잠을 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는 출근하는 아침 일곱시 전후,  해도 뜨기 전일 때가 많았다. '어쩐 일이고' '그냥 요' '출근하나' '네' '그래 단디 하고 살아라' '알았어요. 별 일 없죠?' 이 정도가 다였다.

어머니 돌아가시 두어  달 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현저하게 어머니 기력이 쇠약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예기치못한 이별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마지막 한 달 우리집에 와서 머물다 가셨다. 그러다가 부산에 가셨다가 다시 밀양으로 가신 뒤 불과 열흘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참담하고 부끄러운 죄인의 심정이 된다.

요즘도 어머니의 부재가 믿어지지 않는다. 전화를 하면 그 목소리 그대로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실 것만 같다. 49재가 끝나기 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차마 딸들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엊그제는 술에 취해 한바라를 붙들고 펑펑 울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그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날 수 없다.

어머니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를 나처럼 이해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아프고 힘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신 적이 많았다.

안성이나 안산의 내 자취방에서... 공장에 다니는 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함께 지내신 적도 있고, 형들에게 서운한 이야기를 내게 하소연 하신 일도 많았다.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지만, 내가 느끼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지옥의 유황불 속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 자식들은 하나같이 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바빴다. 자식을 위해 뭘 해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돌아가셨다. 한 순간도 느긋한 휴식이 없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담가 걸레를 빨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못난 자식들만이 ... 어머니의 성격을 탓했다. 어머니의 친구들, 이웃들 모두가
어머니를 두고 '저런 사람이 없었니더' 하면서 통곡을 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담백한 성격.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보내겠다고 여든이 넘은 노구에 수십킬로에 달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끌고 서울까지 올라와야 마음이 편했던... 사람.

나는 그런 부모일 수 있는가. 나는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어떤 자식이었나.
이런 자책이 가슴을 칠 때면  여전히 눈물이 나곤한다.

이런 이야기들조차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깊은 애도가 어쩌면 아내와 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 더 슬퍼 할 생각이다. 충분히 슬퍼하지 않은 이별은 어떤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지 않던가.  

이 때문에... 전희식 선생의 그 책은 한 장 한 장
자탄의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전희식선생처럼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자식이었다.

1992년,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추운 겨울인데도 불을 때지 않고 내 자취방에 기거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면회를 오셨다. 술 한 방울도 입에 못대는 분이 진로에서 나오는 싸구려 포도주를 사다 마셔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셨다. 이 때문인지... 작년까지도 텔레비전에 집회관련 뉴스만 나오면 내게 전화를 하시곤 했다. '지금 뭐 하냐 너는 저기 끼어 있는 게 아니제? ' 하면서 내 안부를 확인 해야만 안심을 하시곤 했다.

그런데, 나는 전희식 선생처럼은 아니라도 무엇으로 속죄를 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못한 것이 도대체 누구 탓이란 말인가. 스스로가 용서가 잘 안 된다.
그리고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하다.

왜 어머니와 창졸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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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합리 살 때 아침에 일어나 키우던 개 강이를 데리고 달리기를 하거나
집 뒤에 산으로 산책을 하곤 했다. 해 뜨기 전 건너 편 산들이 안개에 싸인 채
희붐하게 보이던 그 광경...

집으로 내려오다보면 부엌 창으로 아내가 밥짓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사무실까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그 먼곳에 살던 그 무렵 아침이
어찌 그리 길고도 여유로웠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여행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집에 닿아 있다. 집에서 뻗어 나간다.
집은 길 위에 있다. 길 위에 오래 머무는 지점이 집이다. 모든 것이 흘러간다.
우리의 삶도 기억도 사랑도. 떠난 자만이 돌아올 수 있고
영원하다고 믿어온 것들이 조금 지체된 순간이라는 것도
떠나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쓸쓸함.
그것이 왜 쓸만한 감정인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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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용산 희생자들의 장례가 치러졌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알려준 그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뒤
계절이 네번 바뀌어 또다시 매서운 겨울이 왔다.
용산에서 매일 저녁 미사가 치러지는 동안 발 뻗고 편히 자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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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결식이 치러지는 서울역광장. 쌓인 눈들 너머로 만장들 ...
그 너머로 YTN 빌딩에 나붙은 '글로벌리더 G20 코리아'
국민을 때려죽이고 사과조차 하지않는 야만을 어떤 이들은 '글로벌리더코리아'라고 말한다.  

조사를 한 이들 가운데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작년 용산에 투입됐다 사망한 경찰 특공대 김남훈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말했다.
그 역시 옥탑방에 살던 가난한 이였다고 한다.  

재벌들의 이익추구를 위해 영세 세입자들을 공격하는 '전쟁'에 가난뱅이가 용병으로
투입된 꼴이다. 그는 무리한 진압명령에 내몰려 남일당 옥상에서 함께 죽었다.  




죽은 사람은 여섯 명인데 늘 다섯 분에 대해서만 애도를 하게 되는 것이 마음 불편했는데
노회찬대표가 그 마음을 잘 표현해줬다. 돌아가신 용산의 다섯 열사께... 이제 저승길에서 그를 만나면 잘 위로해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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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을 하다 홍대앞 두리반 형수님을 만났다. 홍대앞 칼국수집을 운영하며 가족들과 단란하게 사는 것만이 희망이었던 이 이를 거리의 투사로 내몬 재개발의 야만...
소설가 유채림 형의 아내인 이 이는 전 재산 1억원을 권리금으로 내고 칼국수와 만두를 파는 두리반을 운영해왔지만... 동교동 로터리 일대에 공항전철역이 생기고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이사비용 300만원만 줄테니 나가라며...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기를 들어내고 가게를 철거하자.
홀로 가게터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돈이 사람을 짓누르고 인간이 스스로 인긴이기를 포기한... 이 야만의 시대를...
와이티엔 건물에 내붙은 플래카드는 '글로벌리더코리아'라고 써 놓았다.






부산, 창원에 출장을 갔다가 밀양 어머니집에 가서 잤다.
차를 빌려서 몰고 다닐까 하다가 비용을 줄이자는 생각에 택시와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시간도 돈도 두 배 더 들었다.

창원에서 밀양행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리니 밤8시 지났을 뿐인데 인적이 드물다.

어두운 터미널에 중고등학교에 다닐 만한 아이들이 몰려다니는데 그 모습이 영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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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지리산 가느라 구례 터미널 인근의 여관에 갔을 때
남녀 혼숙을 하러 몰러다니던 어린 아이들 얼굴도 생각났다.

아이들의 윤리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어른들과 이 사회가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탓에
아이들은 대책없이 밤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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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표충사행 버스가 있길래 단장면까지 가서 택시를 타자 생각하고  단장면에 갔더니 가게 아주머니가 그 동네에는 택시가 없단다. 택시를 부르면 읍내에서 들어온다고...  어쩔까... 10여리 길을 걸어서 갈까... 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며 주위를 배회하다보 니 깻잎 하우스에 전기불이 휘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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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아주머니들께 만 원을 주고 국전까지 태워달래서 타고 가며 물었더니... '꽃이 피면 수확이 줄어드니까 잠을 못자게 밤새 불을 밝혀두는 거지요. 인간들 참 잔인해 ' 한다.

우리가 삼겹살을 싸먹는 그 관행의 깻잎들이 안기부 취조실처럼 휘황하게 불밝혀 깨가 잠 못들게 고문해 추출한 것임을 생각하면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진다. 인간들 참... 잔인해...

영동 옥잠화 공동체 서순악 선생을 만나고 왔다.
12월 중순에 어린이집 새 건물이 완공된다고 한다. 준공식때 오시는 손님들께 대접할
구절초 꽃차. 꽃을 황토방에서 건조시켜 만드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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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을 붓고 마른꽃이 활짝 필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꽃잎보다 향기가 먼저 살아나
후각을 자극한다. 꽃을 곱게 말리기 위해 핀셋으로 정성껏 뒤집었을 수고를 잠시 떠올리게 한다.

영동사람들에게는 한 병에 6천원, 서울 사람들에게는 1만원에 파신다고 한다.
차를 팔아 모은 돈으로는 어린이집 비품을 사기도 하고, 준공식날 오실 손님들께
대접하고 선물로 줄 유리찻잔을 사기도 할 생각이라고...  

엄마학교의 서형숙 선생이 기꺼이 100병을 대신 팔아주시겠다고 했대서
서울로 실어다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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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골짜기에 번듯한 어린이집이 들어서기까지는 서순악 선생의 눈물겨운 노력이 스며있었다.
영동만해도 형펴 되는 집에서는 대단위 아파트단지 근처의 큰 어린이집으로 아이들을 보내려고 하고

이 골짜기 어린이집에는 외딴집에 사는 아이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라... 어린이집이 무슨 돈벌이를 염두에 둘 형편도 아니라고 한다. '재들 다 안고 가야해요' ... 어린이집 나서는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은 웃음을 머금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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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차를 마시다보면...
그 꽃을 지나갔을 시간들... 밤과 어둠 이슬의 아침과 비바람과 햇살까지...
응축된 그 순간들이 하나의 향기에 뒤섞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꽃병에 '꽃이 사람되고 사람이 꽃 되는 차'라고 써놓으셨는지 모르겠다.


올 가을에도 지리산 종주를 했다.

걸으면서 ... 눈 쌓인  겨울에 다시 와야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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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 고사목들도... 늙어서 머리숱이 빠지는 우리들처럼 죽은 채 늙어가는 모양이다.
이제 몇 그루 안 남았다. 고사목 지대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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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산장에만 가면 언제나...  그냥
내처 걷는 일을 포기하고 하염없이 앉아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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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에서 장터목 가는 길가의 죽어서 수십 년 서 있는 '나의 나무'는
아직은 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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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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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의 산정묘지의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이 구절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곳

오도록 혼자 걸어야만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그 곳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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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선생님.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912/IE001105310_STD.jpg

일면식도 없는 독자의 한 사람일뿐인 제가 이렇게 불쑥 편지를 드려도 되는 것인지 잠시 망설이다가 독자의 한 사람으로 독후감을 전해드리는 것 자체야 무슨 큰 흉이 되겠나 싶어 용기를 내 편지를 씁니다.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소설들은 현실과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발언했으며 생동하는 문제적 개인들을 형상화해내면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위로했고, 그러한 울림들이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하면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순이삼촌>이나 <마지막 테우리> <지상의 숟가락 하나>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읽으면서 몸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 소설가 현기영. 소설가 현기영.
ⓒ 민족문학작가회의

오랜만에 나온 선생님의 소설 <누란>(창작과 비평사)을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심하게 몸살이라도 앓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모두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께서 이 시기에 왜 이런 책을 쓰신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에는 "절망의 바닥을 천착함으로써 수면 위로 다시 솟구치기를 희망한다"고 써 놓으셨더군요. 오늘의 현실이 비관적이라는 것은,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서의 밥벌이를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푸념하곤 하는 저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고 정직하고 마주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현실을 극복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쩐지 중고등학교 때 단체 기합을 받을 때처럼 막연한 죄책감을 강요당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우리 세대의 사는 꼴이 다 이 모양인가 싶어져 스스로와 주변 친구들을 돌아보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쩐지 억울하고 불편한 감정도 들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소설책을 읽으며 왜 그런 마음이 들어야 했을까요.

소설의 주인공 허무성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거리시위 때 버스 위에 올라가 뛰어난 대중 선동을 했던 학생운동 조직의 핵심이었으며 그 때문에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사람을 인격이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작업의 대상물처럼 혹독하게 다루는 그곳의 고문은 가혹했습니다.

허무성이 경험한 지옥은 안기부 수사실이라는 극단적인 공간이었지만, 자근자근 자의식이 짓밟힌 뒤 비로소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는 대한민국 많은 어른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현기영의 <누란>은...

87년 6월항쟁을 이끄는 전위에 섰던 주인공 허무성은 오랜 수배생활 끝에 검거되어 남산 지하고문실에서 김일강 등의 손에 모진 고문을 당한다. 겁똥을 쌀 지경에 이른 허무성은 끝내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과 운동조직에 대해 자백을 하고, 장학금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김일강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에서 유학생을 한다.


역사를 전공한 허무성은 귀국 후 김일강의 사촌형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고 김일강은 국회의원이 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계를 지속하며 김일강의 정신적 노예가 된 허무성은 자신의 무기력한 현실과 잊히지 않는 고문의 기억으로 인한 공포, 과거의 배신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정신적·육체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출처 출판사 리뷰

군 훈련소의 입영문을 통과하는 순간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대가리 박아!'를 감당해야 하는 군대의 경험이나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는 순간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지급받고 새벽구보를 하면서 기업의 창업사를 외우며 회사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거치는 광경들이 바로 그러한 예들일 겁니다.

젊은 날의 이상과 가치를 포기했다고 전향서를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폭력. 또 어떤 면에서는, 사적인 사이버 공간에서 한국에 대해 좋지 않게 발언했다고 사회에서 퇴출당한 아이돌 가수의 경우처럼 사회 통념이나 상식과 다른 지향이나 가치관을 발설하는 순간 감당키 어려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들도 허무성이 마주했던 지옥과 크게 다른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소설의 출발점인 안기부 지하 수사실에서 대학생 허무성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근태 선생이 1985년에 고발한 것처럼 사람의 어깨뼈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딱 죽지 않을 만큼씩 극한의 고통을 주며 없는 간첩단도 만들어내는 기술자들과 맞서기에 당시 대학생들은 약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친구들 가운데도 누군가가 먼저 잡혀가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다른 이들이 줄줄이 잡혀가고 섬뜩하게 과장된 조직도와 함께 학생운동 조직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일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고문에 굴복했다고 모두 허무성처럼 살까요?

그러나 과연 아무리 힘이 없고, 유약했던 당시의 대학생들이었다고 해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친구의 이름을 끝까지 숨기지 못했다는 것을 추궁하며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몰인정하게 몰아붙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지점에서부터 저는 소설에 빠져들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처럼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던 같습니다.

아직도 순진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 탓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당시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기심을 넘어서 상당한 위험과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학생운동에 나서게끔 했던 것, 우리 세대를 열광하게 했던 그 힘은 어떤 열병과도 같은 시대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무단통치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지고 싹튼 탈권위에 대한 열망, 표현의 자유, 어느 조직에서건 의사결정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일, 인권, 분단극복, 약자에 배려와 사회복지에 대한 지향, 여성의 차별과 무권리를 개선하는 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가치를 얼마나 확대했는가가 어쩌면 대통령을 누구로 뽑았나 하는 문제보다도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이웃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기영의 소설 <누란>
ⓒ 창작과비평사
누란

소설 속의 허무성이 고문에 굴복했다고 해서 스스로의 사회정치적 생명이 끊겼다고 생각하는 일. 위대한 혁명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해서 김일강 같은 세력에게 자신의 운명을 모조리 의탁한 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은 상태로 세상에 대해 오만 냉소를 다 퍼붓는 일들이 저는 조금 뜨악하기도 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학생운동 조직의 한 그룹이 붕괴됐다고 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파산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구요.

자신들이 민중들의 삶을 좌지우지한다고 착각한 학생운동 그룹이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되짚어보자면 자신들만이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시종일관 어떤 지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는 소아적인 착각이 극단적인 전향도 불러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에 나오는 허무성의 주변의 인물들이 모조리 허무와 냉소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학생운동 관련자들 대부분이 학생운동 경력을 팔아 정치권에 구걸하면서 국회의원이 돼  보수세력의 앞잡이가 되거나, 뚜렷한 주장도 자긍심도 없이 자조하면서 논술학원의 강사가 되거나, 절망에 빠져 텔레비전에 넋을 빼앗기고 만 소설 속의 문정선 같은 사람들뿐일까요?

1980년대 대학에 다닐 때 저희 또래들은 스스로를 4.19세대와 자주 비교하곤 했습니다. 당시 이미 4.19혁명과 6.3운동 세대들은 이미 현실에 발이 묶인 기성세대가 되어 있었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그들 세대로부터 진보적인 예민함, 탈권위적이고 민주적인 가치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세대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기점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게 될 것임을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주장은 많았지만 성찰은 부족했고 스무 살 청년들다운 순수함도 있었지만 미숙함도 많았습니다. 그런 부족한 가운데서 대개의 사람들은 삶의 문제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숙했던 20대들이 그렇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선량한 이웃들로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조금씩 개선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중반에 쏟아져 나오던 성찰 없는 후일담 소설들을 혐오한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이 생각과 지혜가 부족했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악했던 면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쉽사리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북의 주체사상을 지고지순의 가치인 양 목소리 높여 주장하던 자들이 어느 순간에 표변해서는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이북을 무력침공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식의 매카시즘을 선동하는 모습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을 유지하고 움직이며 조금씩 인간다운 가치를 진전시켜온 것이 그런 분열적인 인간들의 선동에 의한 것은 아닐 겁니다.  

고민하던 그들은, 여전히 선량한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속의 우울한 인간들을 안쓰러워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스스로의 이념에서 파산한 채 삶의 어떤 희망과 전망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그 우울한 인간 군상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더러는 거들먹거리기도 하던 미성숙한 인물들. 그들은 어쩌면 동시대 동년배들 전체를 떠올려보면 지극히 예외적인 소수가 아니었을까요?  그 당시 전대협 발대식에 모여들던 5만, 10만 명의 학생들만 떠올려보아도 그렇습니다.

정확한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당시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위장취업을 했던 이들이 1만 명 이상은 된다고 하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개가 현장을 떠나오기는 했습니다만 그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선량한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는 선생님이 소설에 그린 것처럼 극단적인 절망에는 빠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 세대들은 이제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대개 배도 좀 나오고 흰머리도 희끗희끗해진 중년이 되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들이 젊은 날 스스로가 그리던 혁명가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며 땀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학부모가 되었고 사춘기 아이들의 갈등을 이해하려고 골머리를 싸매기도 하지만 그러면도 자식들에게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강한 상식을 가진 이들입니다.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현실은 비극적입니다. 용산철거 현장에서의 살인진압이나 파업현장에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광적인 적대감에 휩싸여 무자비한 폭력을 쏟아 붓는 일.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정보기관들이 온 국민을 사찰하면서도 반성이 없는 지금의 정부가 예전에 우리가 겪었던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에 비해 덜 잔혹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촛불의 광장에서 낙관하던 시민과 다중의 힘이 종잡을 수 없게 불규칙한 복류를 하면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망동이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상식의 힘이 20년 전에 비해 훨씬 커진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교육현실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과거의 우리들에 비해 더 발랄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역사는 피 흘리며 신음하면서면서라도 조금씩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믿고, 그런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글을 맺자니 선생님의 소설을 마음대로 읽고 터무니없는 저만의 생각을 늘어놓은 게 아닐까라는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결례를 무릅쓰고, 어렵게 쓴 편지를 선생님께 보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선생님의 소설을 오래도록 읽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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