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주가 흘렀다.  
주말에 전북 장수 장계면에서 열린 전희식 선생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책 제목은 [엄마하고 나하고]다.



노회찬 대표가  와있다. 두 사람은 인천에서 노동운동할 때의 동지였다고 한다.
전희식 선생은 인터뷰에서, 그 무렵 비합법 조직을 꾸릴 때... 모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국전쟁 전후에 악몽들을 떠올리며 공포에 전율하셨다고... 그 때 어머니의 정신에 충격이 있었을 것이라고...그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것 같다.

치매걸린 어머니를, 온몸으로 ...
그래, 그냥 말이나 관념,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똥오줌을 받아내면서, 또 온전치 못한 뇌의 기능 때문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그 어머니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고, 의당 그래야 하지만 누구도 못하고 있는 일을... 그는 했다.
심지어는 치매걸린 어머니가 가잔다고 대책도 없이 트럭을 타고 서울까지 다녀가기도 하면서...

나는 행사내내, 그 위대한 정신, 언행이 일치하는 그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할만큼 아픈 마음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말이다.

어머니는 지난 1월 중순, 밀양집에 혼자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그날 새벽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새벽에 잠이 깼다. 나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던 아내와 둘째딸도 모두 그랬다. 새벽 두 시 40분 경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녀가신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70여일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다지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줄 뻔히 알면서도 '잔소리'를 하시면 툴툴대기 일쑤였다. '엄마 나도 이제 어른이에요.' 하고 말이다.
정작 그 인간이 어른스러운지,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있는지는
자신을 어른이라고 강변하면서가 아니라... 전희식 선생처럼 행동으로 그리고 꾸준하고 일관된 인격으로 증명하는 것인데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께 늘 죄송한 마음이 있어 출근길에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했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잠을 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는 출근하는 아침 일곱시 전후,  해도 뜨기 전일 때가 많았다. '어쩐 일이고' '그냥 요' '출근하나' '네' '그래 단디 하고 살아라' '알았어요. 별 일 없죠?' 이 정도가 다였다.

어머니 돌아가시 두어  달 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현저하게 어머니 기력이 쇠약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예기치못한 이별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마지막 한 달 우리집에 와서 머물다 가셨다. 그러다가 부산에 가셨다가 다시 밀양으로 가신 뒤 불과 열흘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참담하고 부끄러운 죄인의 심정이 된다.

요즘도 어머니의 부재가 믿어지지 않는다. 전화를 하면 그 목소리 그대로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실 것만 같다. 49재가 끝나기 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차마 딸들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엊그제는 술에 취해 한바라를 붙들고 펑펑 울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그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날 수 없다.

어머니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를 나처럼 이해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아프고 힘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신 적이 많았다.

안성이나 안산의 내 자취방에서... 공장에 다니는 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함께 지내신 적도 있고, 형들에게 서운한 이야기를 내게 하소연 하신 일도 많았다.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지만, 내가 느끼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지옥의 유황불 속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 자식들은 하나같이 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바빴다. 자식을 위해 뭘 해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돌아가셨다. 한 순간도 느긋한 휴식이 없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담가 걸레를 빨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못난 자식들만이 ... 어머니의 성격을 탓했다. 어머니의 친구들, 이웃들 모두가
어머니를 두고 '저런 사람이 없었니더' 하면서 통곡을 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담백한 성격.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보내겠다고 여든이 넘은 노구에 수십킬로에 달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끌고 서울까지 올라와야 마음이 편했던... 사람.

나는 그런 부모일 수 있는가. 나는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어떤 자식이었나.
이런 자책이 가슴을 칠 때면  여전히 눈물이 나곤한다.

이런 이야기들조차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깊은 애도가 어쩌면 아내와 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 더 슬퍼 할 생각이다. 충분히 슬퍼하지 않은 이별은 어떤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지 않던가.  

이 때문에... 전희식 선생의 그 책은 한 장 한 장
자탄의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전희식선생처럼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자식이었다.

1992년,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추운 겨울인데도 불을 때지 않고 내 자취방에 기거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면회를 오셨다. 술 한 방울도 입에 못대는 분이 진로에서 나오는 싸구려 포도주를 사다 마셔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셨다. 이 때문인지... 작년까지도 텔레비전에 집회관련 뉴스만 나오면 내게 전화를 하시곤 했다. '지금 뭐 하냐 너는 저기 끼어 있는 게 아니제? ' 하면서 내 안부를 확인 해야만 안심을 하시곤 했다.

그런데, 나는 전희식 선생처럼은 아니라도 무엇으로 속죄를 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못한 것이 도대체 누구 탓이란 말인가. 스스로가 용서가 잘 안 된다.
그리고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하다.

왜 어머니와 창졸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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