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13일 

 

 

 

구도의 길

 

수운 선생이 21세에 구도를 시작하고 처음  시도한 방법은 사색이었습니다. 퇴계의 학문적 맥을 잇고 있던 부친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 사이 문중 사람들의 비난을 피해 용담을 떠나 울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을 챙기기 위해 여섯 마지기 땅을 저당잡혀 용광업인 철점(鐵店)을 경영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두 해만에  망해 땅도 날려 버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다 쓰러져가는 초가라도 남아 았던 고향 용담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의 비참한 심경이 용담가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용담에 돌아온 10월부터 자와 호 이름도 바꾸고 본격적인 구도에 들어갑L다. 인생에서 좌절할 만한 상태인데도 수운 선생의 구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수운 선생의 구도는 우리 전통의 기도방법으로.바뀝니다.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인 울묘천서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수운 선생 집의 종이었다가 선생이 득도한 후 입적된 양딸의 중언에 의하면, 새 버선을 신고 나갔다 돌아올 때면 버선코가 뭉그러질 정도로 하늘을 보고 젊을 했다고 합니다.(소춘 김기전 선생과의 1928년 대담에서)

 

신비체험

 

그러던 음력 4월 5일 조카 생일잔치에 갔다 몸이 이상해 집으로 돌아온 직후,수운선생은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몸이 떨리면서 마음이 섬칫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소리의 주인공을 수운선생은 처음에는 '상제'라고 표현했습니다. 엄격한 계울의 신, 강한 절대자 이미지였습니다. 그 하늘님이 “지금까지 나는 애를 썼는데, 실체로 이룬 것이 없다가( 勞而無功) 너를 만나 성공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옵시 두려워하다 무서움을 떨치고 그리스도교로 사람들을 가르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라 영부와 주문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부( 靈符)와 주문(呪文)을 내렸습니다.  영부의 모양은 태극이고, 그 형상은 궁궁이었습니다.  ( 受我 比符 濟人疾病, 基形은 太極이요 又形은 弓弓이다) 

 

수운 선생은직접 이 영부를 불태워 마셔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검은 얼굴이 희어지고 몸도 굵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써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효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효형이 없었습니다. 그 효험은 전적으로 그 영부를 받는 사랑의 정성과 공경에 달렸던 것입니다. (주문예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러한 수운 선생의 종교체험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우선 병든 세상을 구제하고 싶어하던 수운 선생의 문제의식이 체험을 통해 일시에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은 한울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맞물린 것이었습니다: 수운 선생에게는 수행과 하늘의 계시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이 상황에 대해 '받아냈다' '얻었다"닦아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수운 선생은 '깨달았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채험을 세상에 펼쳐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나타내고 환희감, 충만감으로 홀러넘치게 됩니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귀미산수 좋은 풍경 아무리 좋다 해도 내 아니면 이러하며, 아나면 이런 산수 아동방 있을소냐. 나도 또한 신선이라 비상천 한다 해도 이내 선경 귀미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

 

 

득도 후의 새로운 세계

 

가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6개월 전 둘어 가던 용담의 씀쓸한 풍경은 어느새 신선의 세상으로 바뀝니다. 실제로 자연환경이 변한 것이 아니라 수운 선생의 눈, 구미용담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세상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 개벽의 출발은 역시 관점의 전환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하는 틀의 전환은 인간관, 우주관, 세계관의 전환으로도 드러납니다. 그것은 수운 선생의 신 관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수운 선생이 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는 대략 15. 16가지' 신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대략' 네 가지 정도 특징이 드러 납니다. 

 

수운선생의 '신'의 네 가지 특징

 

먼저 '유일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 유일한 하나가 바로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도교에서도 '대우추, 대생명체'라고 합니다. 실제 생명체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세포도, 한 개인도, 지구라는 체계도 태양계도 다른 생명체나 자신보다 더 큰 생명체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즉, 세상에는 온천지 생명체계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운 선생은 하늘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감성의 세계와 초감성의 세계를 나누고 이 세상, 저 세상을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수운 선생은 이 세상, 저 세상을 나누는 관념은 허무지설이라고 비판하며, 천지생명과 나는 둘이 아니며 하나라며 신의 유일성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신은 인격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과 나와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내재성(內在)입니다. 여기서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 주문에 나오는 시천주의 의미를 잘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수운 선생은 하늘님을 잘 모시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천주의 시는 장소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생님 어디다 모셨느냐?" “돌아가신 아버님을 선산에 모셨다”는 말처럼 모심은 봉양의 의미가 아니라 장소의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한자어를 공동으로 쓰는 동아시아 삼국의 언어에서도 한국 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네 몸에 모셨으니"란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합니다. 이중세계를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재성은 어찌보면 필연적입니다. 생명의 씨가 내 안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늘님이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시간성입니다. 시간성은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생명에는 씨가 있고 '자기조직력'이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이 자기조적력을 통해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날 표영삼 선생님의 말씀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사실 수운의 신 관념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정해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 신 관녕을 통해 동학의 인간관, 우주관, 세계관을 유추해야 하는데 그 점은 다음 시간을 기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짧게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습니다. 

표영삼 선생께, 동학의 사상을 어떻게 실천해 오셨느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겸손하게, 목숨 걸고 사회변혁을 실천했어야 하는데, 실제 그렇지 못했다고 답하셨고, 방정환 선생님과 같이 어린이운동에 앞장섰던 소춘 김기전 선생님 일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도 하늘님을 모셨으니 함부로 치지 말라'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 하기 위해 김기전 선생은 자식들에게도 늘 경어를 쓰셨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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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06년,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 표영삼선생을 모시고 몇 차례 동학강좌, 답사를 진행했다. 비교적 소상하게 강의를 채록하고, 동영상도 편집해 모심과살림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두었었는데, 후임자들이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유실돼 안타까웠다.  

2008년 표영삼선생님도 돌아가셨다. '죽어서 저 세상에 가는 게 아니'라던 생전의 말씀처럼, 일체의 장례절차도 없이 서울 의대 해부학연구실에 시신기증 신청만 단행한(연로하여 실제로 기증되지는 않았다) 그분의 마지막도 극적이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선생의 강의록을 당시 홈페이지를 캡쳐해 노트에 붙여 보관하던 분(한살림연수원 박혜영팀장)을 만나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차례로 한 편씩 이 블로그에라도 되살려볼 생각이다.   

2004년 10월 강의는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진행했다. 저녁을 급히 먹고 7시부터 2시간 남짓 강의를 하신 뒤 선생님은 양평군 용문면의 댁까지 가셔야 했기에 당시 경기도 광주에 살던 내가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곤 했다.  

1. 2004년 10월 6일 

 

 

선생님의  강의는 흔히들 수운 선생이 신비체험을 한 1860년 4월 5일을 동학의 창도일로 여기는 통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은 신비체험일일 뿐이고, 실제 ‘동학'이라는 말을 쓴 것은 1862년 남원 교룡산성 아래 은덕암에서 지은 동학론에서였습니다. 이 동학론은 나중에 논학문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또한 서학의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학을 만들었다, 유불선 삼교를 종합하여 동학을 창도했다는 이야기도 일본인들이 동학을 폄하하려고 만든 관렴이라는지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용달유사에 나오는 "12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수운 선생의 시대인식에 이르러 표영삼 선생의 강의는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수운 선생은 나라 곳곳을 둘러보며 부패한 조선이 무너지고 있고, 또한 1844년 아편전쟁 전후 중국도 이미 기울어졌으며, 아편을 파는 것이 금지되자 군함을 앞세워 중국을 침탈한 서양도 썩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병들었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방향을 '다시 개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개벽은 연다는 의미입니다. 주역에 나오는 천지개벽은 천지가 처음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운 선생이 말한 '다시 개벽'은 새로 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환경의 개벽이라기보다 “개벽후 5만년”이라는 표현을 짚어볼 때, 인간의 문화체제, 삶의 틀이 성립된 지 5만 년이 되었는데, 그것이 병들어 회볶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벽 후 오만 년에 십이제국이 병들었으니 다시 개벽, 즉 우리 삶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들은 일정한 습속, 관습, 그리고 규범의 틀, 먹고 사는 경제 배분의 들, 또 하나는 시대마다 다른 표현의 틀, 그리고 생각하는 틀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틀이 서로 맞물려 교호작용하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수운 선생은 그중에서도 생각하는 틀, 시점(視點)을 바꾸어야 다시 개벽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수운 선생이 말한 도(道)는 생각의 틀을 이루는 싹, 씨앗 삶의 들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길. 신념체계를 의미합니다.

 

동학이라는 개념도 짚어보았습니다. 수운 선생이 “도는 비록 천도지만,학은 동학"이라고 한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은 현대적인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다, 실천한다. (인품이) 풍긴다는 의미로 수행체계, 수행의 틀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하는 신앙이나 기복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 한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동학 한다, 수행한다, 동학은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수운 선생은 이 '학'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1863년 4월 제자 강수가 찾아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물으니 , 성(誠), 경(敬), 신(信)을 제시했다고 나옵니다.그런데 1879년 발간된 동학 최초의 교단서인 <최선생문집 도원기서>에는 신(信),  경(敬), 성(誠)이라 하여 순서를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선신후성 (先信後誠)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수덕문>에 신(信)과 성(誠)이  의 의미를 우리가 아는 믿음, 정성과는 다르게 해석 합니다. 즉, 파자하여 사람 인(人)에 말씀 언(言), 즉 사람의 말에는 옳은 말이 있고 그른 말이 있는데,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거듭거듭 생각해서 잘 판단해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그리고 성 자도 파자하여 이룰 성(成)에 말씀 언(言).즉 뜻있는 말을 이루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여기에서 볼 때, 수운이 말한 동학은 하나의 수행체계였으며 '생각의 틀'을 바꾸고 그 뜻을 곰곰이 새겨 실천한다”는 의 미였습니다. 같은 의미로 13자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의 지(知)에 대한 수운 선생의 해석, 즉 그 도를 알아 그 앓을 실천하라( (知其道而受其知也) )는 해석을 볼 때도 생각을 몸에 배게 하는 수행이 동학의 핵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좁은 민족적 생각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또는 세계의 평화를 염두에 두는 쪽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고, 생각의 차원을 높여 그것을 몸에 배게 닦아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표영삼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수운 선생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 표 선생님을 붙들고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동학 한다”와 “동학 믿는다”를 분리하지 말고 하나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수운 선생이 기독교의 성서를 보았을까라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에 대해 짚어보시는 표 선생님의 열린 사고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성으로서 여성을 공경하는 것을 몸소 실천해 가기 위해 가사를 분담하여 선생님께서 스스로 밥을 짓고 계시며 사모님은 빨래, 청소를 하신다는 말씀은 참석자들을 경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모님께 경어로 존대하는데까지는몇 년이 걸렸다고 하시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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