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더마인호프 컴플렉스' 는 드라마로는 썩 훌륭지 않았다.
사실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긴, 삶에 무슨 기승전결의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국왕내외가 독일을 방문하고 68혁명이 휩쓴 독일의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반대시위를 한다. 이어지는...몸서리치는 백색터러와 경찰들의 폭력진압.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짓밟히는 사람들. 

우리도 수없이 겪어본 그 공포스런 광경이 스크린에서 재현될 때
나도 모르게 거의 의자에서 엉덩이가 붕 떠오를 정도로 감정이입이 돼 몸이 경직됐다.
호흡이 가빠지고 체온이 올라갔다.

백골단이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면 1980년대의 학생들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맹수들에게 물어뜯기는 병아리들처럼 짓밟히고 머리가 깨지고
붙잡힌 뒤에는 온갖 야비한 조롱을 견뎌야 했다.

이 때문에 어김없이 악몽을 꾸곤 했다. 
한 동안 잊고 살던 그 악몽이 이명박이 집권하고
광장에서사람들이 또다시  무참하게 두들겨 맞는 일들이 벌어지는 시대가 된 뒤로는
다시 꿈 속에서 재방송 되곤 한다. 몸서리친다.
진보적인 언론인 마인호프는 적군파의 탈옥을 돕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의 대열헤 합류한다. 그러나 결국 체포된 뒤 혁명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일행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면서 분열적인 상태로 자살하고 만다.  

8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1만 명 정도의 학생운동가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으로 '투신'했다고 한다.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분노, 개인의 무력감을 넘어서려는 생각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일 적군파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 영화... 그러나
혁명을 외친 자들이 이렇게 대책없었나 ... 싶었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을 넘어서는 더 좋은 가치, 더 인간다운 관계...
그런 것이 없다면, 혁명은 왜 하는 것일까...

사람만 바뀐 채 그 권력이 똑 같은 악행을 되풀이 한다면, 
혁명은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장일순 선생은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했고,
줄탁동시卒啄同時...
병아리가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려 입질을 할 때... 어미 닭이 밖에서 같이 쪼는 것처럼...
사람들의 요구가 충만하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결심이 가득할 때 ...
혁명을 꿈꾸고 기획하는 자들이 함께 껍질을 쪼듯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혁명은 누가 내려주는 선물일 리도 없고,
그렇다고해서 사람들의 고통이 목에 차오르는데 고상한 말만 해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판단이 자의성을 넘어서는 지점...
그것을 깨닫는 지혜. 그것이 관건일 것이다.
kCYfynJkFCR-uYnjglCyr4GrbLqKM6isu4FEWiffY6M,

그리운 벗, 이내창 의문의 죽음 20년 한 시도 그릇 잊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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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이내창이 죽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와 함께 학교에 다니던 나와 친구들은 이제 40대 후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형이 되었다. 그 사이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그도 살아 있었다면 우리처럼 머리에 흰머리가 희끗해지고 배도 조금 나온 그런 아저씨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은 광화문 뒷골목의 막걸리집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날을 추억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가 꿈꾸던 것처럼 세상과 삶을 반영한 건강한 작품을 생산하는 조각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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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만 스물 일곱의 나이로 낯선 지역, 거문도에 끌려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달변의 웅변가도 아니고, 비장한 표정의 학생운동지도자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한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의 친구였다.  더러 무섭고 힘든 일이 많았던 학생운동조직에서도 늘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겸손하고 자상한... 당시로서는 독특한 리더십을 가진 총학생회장이었다.

이내창을 기억하는 동문 선후배들은 그의 20주기를 맞아, 8월 12일 오후 3시, 장충동에 있는 만해NGO센터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사건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른 나라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토론회와 이내창 20주기를 기회로 박창수, 최우혁 등 권위주의 통치시절에 자행된 대표적인 의문사사건의 유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 담아 자료집 [죽음, 진상규명 20년 그리고 국가기구 조사, 10년]을 발간해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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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을 가진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정부가 나서서 의문사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한 일이 되었다. 유가족들은 늙어가고 있고, 사회적 관심은 희박해져가고 있다.

과거사를 명확하게 밝히고 적절한 청산 절차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역사로부터 철저히 학습을 했다면, 용산철거민을 무참히 죽음으로 몰고가거나 해고에 항의하며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향해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식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절차를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는 권력의 횡횡포는 또다시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내창 열사 추모사헙회는 토론회를 열고 자료집을 발간하는 일이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사를 정리하는 일이 과거에 집착하는 일이 아니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미래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보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년 전, 우리의 벗 이내창은 어떻게 죽어갔는가.

1989년 8월 15일, 이내창은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엎드린채 죽어서 발견되었다. 여름날이었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쌀쌀한 날이었고 외딴 섬의 해수욕장에는 야영객이 몇 있었지만 한산했했다. 당시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4학년이었고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이었지만 늘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다니던 그는 선후배들 사이에 가장 신망이 두터웠고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해 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인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 등이 그린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을 돌며 전국에서 전시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른바 '홍성담 차일환 간첩사건'을 조작한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자금을 댄 경위 등을 수사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해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하는 전대협 대표로 정해지기 전에 사진학과 4학년 모 학생을 북한에 파견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청은 그 첩보를 입수하고 중앙대학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내창은 죽기 전날인 8월 14일 오전 학교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남녀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과 무엇인가를 심각하고 논의하던 모습이 학교 앞 수퍼 주인 등에게 목격되었다. 그 뒤로 그의 학교와 안성 시내를 세 번이나 오가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저녁에 수원에 있던 서울 농대로 가서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회의(수대협)에 참석해 8월 15일 수원역광장에서 열기로 한 '민족해방절행사' 준비 등을 논의했다. 대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하던 회의는 매월 한 차례 이상 진행됐으며 회의가 끝나면 수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술도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이내창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이들과 헤어졌다.

그 다음날인 8울 15일 이내창의 행적이 확인 된 것은 아침 8시, 여수 여객터미널 승선신고서를 통해서다. 그의 필체로 나중에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진 도 모씨와 그의 남자친구라는 백 모씨 등 두 사람 등 세 사람의 이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신영훼리호라는 여객선은 12시 30분 거문도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는 그가 줄곧 주변의 서너 명의 사내들에게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 마자 도주를 했고, 선착장 인근의 남 모씨 집에 뛰어들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방 있습니까?' 외치면서 신을 신은 채 마루에 뛰어올랐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쫒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섬은 닫힌 공간이었고 달아날 곳은 없었다.

약  두 시간쯤 뒤인 오후 2시20분, 그는 희망식당에서 혼자 볶음밥을 먹었고, 오후 3시 삼호다방에서 당시 다방 종업원이던 최 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울 말을 쓰는 '머리끝이 곱슬한 단발형, 왼쪽 눈에 움품 패인 듯한 자국이 있고 빨강 꽃무늬 상의와 실밥이 풀어진 7부 청바지에 망사로 된 샌들을 신고 있던' 안기부 직원 도 모씨와 마주 앉아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방 밖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사내가 다방 안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방을 나온 이들은 유림해수욕장이 있는 서도로 건너가기 위해 뱃사공 이모씨가 운행하는 나룻배에 승선했다. 서도로 건너간 후의 저녁 6시30분경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이내창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머리와 얼굴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부검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이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채 바다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웃옷은 벗겨진 채 발견되지 않았고 늘 입고 다니던 두터운 양복바지에 캐주얼 가죽신발을 신은 채였다. 시신 바로 옆에서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와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해들은 유가족들과 학생들은 바로 거문도와 여수로 내려가 목격자들을 찾아내고 앞에 밝히 내용들을 녹취할 수 있었다.  이내창의 시신은 얼굴과 머리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 가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당시 안기부와 공안당국이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이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어떤 공작에 의해 거문도까지 유인되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안기부 직원이 이내창과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내창이 죽은 8월 15일은 북한을 방문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내창의 동문들은 국가기관에 의해 이내창이 유인 당해 살해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노태우정권은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간첩조작 사건이나 조직사건을 터뜨리며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키곤 했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의문사 유가족 등 민족민주운동 유가족협의회의 유가족들은 무려 422일 동안이나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며 과거사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기 약 5년간 이내창 사건 등 의문사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이내창 사건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조사결과는 사건 직후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사실들 중 일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시 안기부였던 국정원 관련 자료에 조사, 국정원이 학생운동조직에 대해 진행했던 내사 자료, 국정원이 운영했던 학생운동 조직 내의 프락치들에 대한 내용 등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들에 대한 조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이어 출범한 '진살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진정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전혀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며, 왜 조사를 하지 않느냐는 문의에 대해 이렇다할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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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의 어머니는 사건이 난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15년 넘게 병상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 재작년 끝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큰형 이래석은 이제 일흔살의 노인이 되었다. 다른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들 역시 거리에서 20여년을 싸우는 동안 이제 대개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예전에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주요인사들조차 '의문사 사건은 조사할 만큼 했기 때문에 더 조사할 게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내창이 살해 당한 당시나 일반 공무원들과 별반 다릇 것 없는 과거사 위원회가 무성의한 조사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우리는 국가기구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의 햇살이 비출 때 음지에 숨겨져 있던 진상이 언젠가는 밝혀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최종길 교수 사건이 그랬듯이 말이다. 영원히 감추어 둘 수 있는 진실은 없다는 것을,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가해자들은 무겁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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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일이 예배보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매일 구원받고 매일 정화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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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입구 제 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중앙교회 지하에는 채식식당이 있다.
종로 새생명 건강동호회에서 운영하는 뷔페식당이다.  

소고기 1kg 생상하는데 16kg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하고
우리나라 전체 곡물 수입량의 45%가 사료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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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끼 고기를 먹어야만 '제대로'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 고기 먹는 일에 포한이 져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대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기를 사다 삼겹살 같은 것은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요즘도 ... 회식 자리 같은 데서  고기를 많이 먹기 위해 밥을 사양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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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에 대한 집착은 단지 가난한 시절에 보상심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마빈 해리슨은 사람들이 고기에 집착하는 이유를
수만년 유전자에 각인된 습성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기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곡물과 함께 먹을 수밖에 없었고,
식탁에 동물성 음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라고...
문화인류학적 해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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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다는 부모님들의 말씀이나
생전의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에서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하겠다'고 
눈물겨운 약속을  하던 일들 떠올려보면 고기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는
꽤나 뿌리깊은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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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안 먹을 수 있는 선택.

인사동의 채식 식당에서 만난 노인들의 눈빛과 피부는 맑았다. 선입견 때문일까.
육식과 채식이 선과 악, 우와 열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고기를 지금보다 조금 덜 먹기만 해도,
지구상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곡물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을 텐데,
우리 나라의 식량 수입이 조금은 줄어들 텐데

생각하면 고기 많이 먹는 일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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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당 입구에 써놓은 '건강비결'을 읽다보니 빙그레 웃음이 머금어 진다.
매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늘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다는 말.

돈도 안 드는 그 일을 ... 왜 그토록 실천하기 어려운 것일가...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말이다.
매일 저녁 7시 지하철4호선 신용산역2번 출구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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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우리를 참혹한 슬픔에 잠기게 했던 남일당 그 건물 앞 골목에서는
거리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어제는 197일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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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을 기어이 죽음으로 몰고 간
우리 시대의 탐욕과 폭력을 회개하는 미사는
경건하고 ...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따뜻하고 자애로운 분위기 속에 치러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이 정권은 사과 한 마디 없다.
그리고는 또다시 쌍용차 노동자들을 향해 경찰 특공대 컨테이너를 들이밀었다.
진압한 노동자들을 방패로 가격하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친다.
죽여도 좋겠다는 살의가 번득인다.

그들이 적군이냐.
테러리스트냐...

국가의 공권력을 총력동원해서 무찔러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누가 그렇게 할 권리를 주었나..

슬프고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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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옥 같은 그 현장에서 또다시 암담한 절망과 마주하고 있을 그
고립무원의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나의 이 나른한 일상이 죄스럽기조차하다.



제프리 노먼의 책 제목도 똑 같다. 

아비가 딸과 소통하는 일은 어렵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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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되기 전부터 딸을 품에 안고 무수히 많은 산행을 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딸들은 좀처럼 산행에 따라나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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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에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예닐곱시간 우중 산행도 힘든 기색없이 거뜬히 해냈다.
스스로 제 할 일을 찾아내 하려고 하고... 제법 어른스런 면모도 보였다.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아이에 대한 걱정은 노파심일 수도 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송과 손. 
이미 고등학생, 중학생이 된 큰 아이들만 데리고 산행을 하기로 오래 전에 약속하고
지난 주에 실행했다. 장맛비로 산행 내내 비를 맞았다. 쉽지않은 산행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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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예정된 지리산이나 설악산은 산장 예약을 하지 못해 포기하고 대신 오대산으로 갔다.
진고개에서 출발해 노인봉을 너머 소금강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 계곡길은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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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속에 아름다운 옥계해수욕장.
지금은 비어있는 삼마트.
그 발랄한 상상력이 잠시나마 통쾌했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신문에 청주시에서 하룻만에
무려 4500개의 시장 상인들 상점이 문을 닫았다는 기사...
삼성에서 운영하는 홈플러스가 24시간 철야영업을 한 덕분이란다...

이대통령 서민행보한다며 시장에 가서 '그곳은 몇시까지 문을 열고 당신들은 몇시까지 일합니까?'
추궁하듯 따져묻던 그 말도 귓가에 쟁쟁하고...

우리가 생활속에서 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있는 실천...

"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같은 대형할인점 이용 안 하기...
조금 불편할 것 같지만,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웃의 상인들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죄다 죽어나자빠지고 그나마 기신할 수 있는 이들만 대형할인점
비정규직 판매원으로 고삐묶이는 사태를 피해보자면...  











웬델베리라는 이, 미국 켄터키에 사는 농부이며 시인, 소설가. 그가 쓴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를 읽다보니 먹는 일에 대한 생각들에 눈길이 머문다.

우리는 먹는 일이 곧 '농사'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먹는 음식에 스스로의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늠 점.
결국 음식이 자신의 몸, 존재 자체를 결정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먹을 것인가.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는 일의 모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원델베리가 '책임있게 먹는 일'을 위해... 제시한 몇가지 실천지침은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제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어디서 길러진 것인지, 어떻게 운반된 것인지, 누가 어떻게 조리하는 것인지...모르는 채 먹고 사는 것은 부당하다.

관심을 기울이고, 책임있게 먹어야 한다.
또 가능한한 스스로 길러야 하고,
또 가능하다면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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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가능한 한 음식의 생산에 참여하자. 마당이나 베란다, 해가 들어오는 창문에 화분이 있다면 거기에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키우자. 주방에서 비료가 될 만한 것들을 조금씩 모아 흙을 비옥하게 하는 데 사용하자. 조금이라도 당신 스스로 음식들을 키워야만 땅으로부터 시작해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음식으로, 찌꺼기로, 결국 썩어가고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아름다운 에너지 순환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 키운 그 음식에 대해 충분히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 음식의 전 생애를 알고서 그 음식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게 될 것이다.

둘, 자신이 먹을 음식을 스스로 준비하자. 이것이 당신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부엌과 집안살림의 기술들을 되살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더욱 값싸게 먹을 수 있게 되고, ‘음식의 질 조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신은 당신이 먹는 음식에 첨가된 것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얻게 될 것이다.

셋, 당신의 사는 음식의 원산지를 알아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식품을 사도록 하자. 자기가 먹는 모든 식품의 재료가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지역에서 생산된 음식물은 가장 안전하고 신선하다. 또 지역 소비자들이 그 재료들에 관해 손쉽게 알 수 있으며, 그것의 생산과 생산 방식에 직접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넷 가능하다면 그 지역 농부, 채소 재배자, 과수원과 직접 거래하자. 앞서 제안하면서 나열된 모든 이유들이 여기에 적용된다. 덧붙이면 그런 직거래를 통해서만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희생시켜 번성하는 상인이나 운송업자, 가공업자, 포장업자, 광고업자들을 배제시킬 수 있다.

다섯, 자기방어라는 의미에서, 산업적 식품 생산의 경제적 측면과 기술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보자. 음식이 아니면서 음식에 첨가되는 것이 무엇이며, 이러한 첨가물들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되는지 등에 대해서도.

여섯, 최선의 농사와 채소가꾸기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일곱, 다양한 식품이 살아가는 역사에 해해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자.

...

먹은 것의 즐거움은 단순히 미식가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마땅히 광범위한 즐거움이어야 한다. 자신의 채소들이 자라난 정원을 알고 있고, 그 정원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라나는 작물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할 것이다. 이슬이 맺혀있는 아침 햇살 속에서 빛나는 작물의 아름다움 말이다. 그러한 기억은 그 음식과 관련이 있고, 먹을 때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지난 5월 23일, 무위당 선생님 15주기 행사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 무위당선생이 26살 때 스스로 설립한 원주 대성학교 교정에서 교훈'참되자'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은 '좁쌀만인계')

그 즈음 주말마다 비가 내렸고 그날도 원주 가는 길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모내기철이라 달게 느껴지는 비였다. 무위당 선생님 추모행가 열리는 5월에 원주에 오기 시작 한 지 5년쯤 되었다.

나는 선생님 살아계실 때 직접 뵐 기회가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기록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읽은 것도 20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엷고 어느 모로 보나 얼띠기만 한 내가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게 어쭙잖게 여겨져 약간 망설여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원주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그 독특한 호방함,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분위기가 늘 좋았다.
토요일 오후 상지대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이미 4월에 광주에서 무위당선생 서화전이 열린 탓인지, 조금 조촐하게 진행된 느낌이었다.

'생명운동 활성화'를 위한 대화마당에서 마리학교 교장을 지낸 황선진 선생과 한살림강릉의 김대진 상무가 발제를 했다.  황선진 선생은 무위당 선생이 '운동한다'고 내걸고 사시지 않은 것처럼 생명평화 뒤에 굳이 운동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며 생명평화운동은 독자적으로 대안적인 가치와 체계를 지향하되 기존의 체계를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대진 상무는 생평평화운동이 먼 훗날 생명평화세상이 온 뒤에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서 행복한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토론에 나선 이들 가운데는 이혜숙 전 부산생협 이사장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생협 활동을 하면서 어느 순간, 스스로 '개인 앞에 조직을 앞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던 말, 그리고 일본에 가서 만난 생협의 노 활동가에게 조직활동을 오랜 동안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나 질문을 하니까 대답은 안 하면서 자꾸 '호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던지…' 이런 말만 되풀이 하더라는 말.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떤 당위로 개인을 억누르는 운동이나 조직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오래 가더라도 사회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들은 또다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원주로 내려가던 그날 아침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 황망하고 어수선한 심정이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갑자기 수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퇴행적인 분위기가 역력하다. 정보기관이 전횡을 일삼고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갇히는 그런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자 하는 개인의 소망은 적어도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이 무사할 때나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박한 일상의 평화를 뿌리째 뒤흔드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무사함에 대해조차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다음 날, 구룡사 가는 길에 있는 소초면 장일순 선생 묘소에서 진행된 추모행사에서는 원주출신의 국악인 정유숙 선생이 단가 사철가와 춘향가 가운데 춘향이 옥에 갇힌 대목을 불렀다.
 


"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노대통령의 죽음을 보면서 누군들 삶이 속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랴. 신록 짙어가는 무위당 선생 묘소에서 듣는 단가는 빈 가슴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원주에서 돌아온 지 꽤 시간 흘렀다. 세상은 예전처럼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 무위당 선생의 말씀을 다시 찾아 읽어본다.

단체마다 시국선언을 하고 그 때문에 처벌을 받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무위당 선생은 유신반대 투쟁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힐 때 가만히 직장에 다니는 일이 죄 짓는 일 같다고 말하는 제자에게 ‘죄는 무슨 죄 월급 타면 감옥에 간 사람 옥바라지 좀 하면 되지 않겠어? 일선이 있으면 후방이 있는 법인데 후방 없는 일선이 있는가? 자네는 후방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새롭게 읽힌다.

어쩌면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좀 더 쉬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분노와 굴욕을 견디면서 심지를 세우고 삶을 꾸려가며 스스로의 생각대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되게 하는 일에 비하면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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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없앤 뒤 증평 평화당 한약방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먼 길 나들이를 했다.
동서울에서 증평 가는 버스에는
우리 부부와 할머니 세분, 승객이라야 모두 다섯 명이 전부였다. 

차안에서 위클리경향에 실린 박변호사님 인터뷰를 읽었다.
작심을 하고 국정원과 청와대를 겨냥한 발언들...
어쩌면 우리들의 이 평범하고도 나른한 일상을... 또 다시 가책하면서
일손을 놔야 할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증평터미널 차표는 여전히 손으로 써서 끊어주었다.
그런데, 인체권과 승차권... 이게 무슨 뜻일까... 한참 고민했다.  인체(人體)로 읽으면
나머지 부분의 승차는 뭐란 말인가...  승차(乘車)도 인체가 하는 게 아니고?

승객은 승차권을 갖고, 인체권은 기사님이 회수해 갔다.  그러면 인체는 뭐란 말인가...

우리는 필시 '인원체크'의 준말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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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터미널을 빠져나와 평화당약방이 있는 곳까지 택시를 탔다.
1985년쯤에서 시계가 멈춘 것처럼 그 순간의 사물들, 풍경들이 증평 터미널,  그곳에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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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왔을 때는 드넓은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으나
평일이라 그런지 가자마자 이내 진맥을 해주셨다.

그러나 약을 지어주지는 않으셨다.
꼭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약을 지어주시는 까닭에 그러셨겠지...
아래층에서 한방차만 한 통 사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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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을 방불케하는 뜨거운 낮,  지역의 읍내는 이렇게 한가하다.
텅 빈 거리는 증평만의 문제가 아니다. 괴괴한 정적에 휩싸인 전국의 모든 읍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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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깨어보니 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서울에 살기 위해 다들 발버둥을 친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여유있게 사는 꿈을 서울에서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백년 전에 소로우는 그런 우리에게 질문한다. 

왜 지금 당장 고향에 돌아가 그렇게 살면 안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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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민중기금 설립을 추진위원회가 2009년 7월 2일  한살림을 방문해 설명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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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과 오랜세월 교류해온 전 그린코프연합의 유키오카 전무가 아시아민중기금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유키오카씨뿐만 아니라 생활클럽연합회 카토 회장, 팔시스템즈연회생협, 민중교역을 담당해온 ATJ(Alter Trade Japan) 등 생협과 시민단체의 지도자들이 대거 함께 와 '돈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아시아 민중의 연대운동'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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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를 보면서 이들 노 운동가들은 대안적 연대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국에서도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공정무역이 '착한소비'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자족감을 느낄뿐 그것이 정말 생산지 농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개선하고 그 지역의 자립의 기반, 생태적 건강성을 복원하는데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나의 궁금증에 대해 일본에서 온 이 노 운동가들이 답을 준다. 민중교역을 이십년 가까이 했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생산지는 대개 서구 제국들의 식민지를 겪으면서, 스스로의 요구가 아니라 식민지 종주국의 필요에 따라 커피나 사탕수수 단작 플렌테이션을 하게 됐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일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지배를 거쳤다. 국토는 대개 산악지형이며 농사는 대부분 커피 뿐이다. 주식인 쌀은 베트남에서 수입해다 먹는다.  커피를 팔아서 쌀을 사다먹는 것이다.

민중교역만을 지속하는 것은 이들의 이러한 의존적인 상태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이들이 쌀이나 자급 식량 농사를 복원할 수 있게 하자.

그리고, 우리는 힘을 모아서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돈의 논리, 시장의 논리) 세상에 맞서 대항해야 한다.

* 한살림이 작년에 정책 토론회를 통해 공정무역을 하지 않기로 한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자급 기반을 무너뜨리는 방식의 (공정)무역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국제적 연대를 위한 모색은 하자! 

아시아민중기금은 기왕에 하고 있는 무역을 통해 예를 들어, 바나나 1ikg이 거래될 때마 100엔씩, 새우 100g에 5엔씩 기금을 쌓아간다는 것. 그리고 무역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단체와 개인들은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예를 들면 일본의 일본의 '화이버리사이클'같은 곳은 재활용가능한 헌옷을 수집해 재활용 판매되게 한 뒤 모인 기금으로 파키스탄 지역에 학교 설립을 돕는 방식으로... 기금 조성과 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말한다.
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로! 부드러운 연대, 서로 돕는 호혜망이 펼쳐지게 하자고...

돈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논리... 이 말은 너무 지당한 말 같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는 온통의 돈벌이의 논리만으로 스스로를, 자식을, 이웃을 몰아가고 있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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