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에 갔다가 귀가하기 전에 알라딘 중고책방에 들어가보았다. 

<이노우에야스시 여행기>라는 책이 눈에 띄어 선 채 넘겨보다가 주말동안 읽어볼까 하고 사가지고 왔다. 

마침 같은 작가의 <빙벽>이 거실 책꽂이에 있어 다시 들춰보았다.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줄거리도 생소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다. 

진선출판사에서 포켓판, 4천원짜리 책인데... 책꽂이에서 배어나온 송진이 비닐껍질에 눌어붙어 있었다. 

1996년 코오롱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본격 등반을 해보고 싶어하던 90년대 말쯤 영풍이나 교보문고에서 산 것 같다.  

당시에는 대형서점에 제법 '산악도서' 서가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여러 취미코너에 합병돼 쪼그라들었지만...  



30대 그 무렵 <빙벽>을 읽으면서 열광하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산사나이들의 낭만도 그렇지만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한 유부녀(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것 이상은 아닌) 를 향한 두 순진한 산악인의 몰입에도 꽤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서 꽤 존경받는다는 이 작가의 내면도 소설의 줄거리도 엉성하고 어설프기만하다. 

이해가 되는 점은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58년인가... 그 무렵이다. 신소설만큼이나 옛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여전히 하녀가 등장하고 여성들은 남편이나 오빠의 그늘에서 자라는 존재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가 소설의 핵심인물이다. 

여자는 아름답다고 묘사된 것 말고는 도대체 왜...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지 이해할 수도 없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 높은 인격에 대한 이성적인 대응만은 아닐지라도...

무슨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한 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1980년대의 우리들은 아니 나는, '사랑'마저도 '이성적 결단'이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물론, 사람이, 또 사랑이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 이성과 합리를 아예 부정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다울 수 있나.   

우연적인 행위의 연속, 불가지론적인 사건들의중첩? 인생을 이렇게 치부해버리면 삶은 더 부질없어진다.  


2010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이어 사별하면서 몸과 마음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던 무렵 일본 나고야에 있는 북알프스 야리가다케에 올라본 적이 있어 

책에 나오는 카미고지上高地, 가라사와, 갓파바시, 요코오,  도쿠사와, 묘진, 호타카 같은 지명들이 낯익었다. 

소설은 줄곧,산에 가기 위해 일상을 견디는 우오즈와 고사카...두 젊은 산악인의 사랑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대학산악부 동문이며 겨울철 오호다카 동벽을 초등하기 위해 설을 앞두고 휴가를 내 북알프스에 간다. 

고사카는 야시로 미나코라는 젊은 유부녀를 사랑하지만 둘 사이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미나코는 한 번 고사카와 잠자리를 가진 일에 대해 자책하면서 거리를 둔다. 

결국 고사카는 당시 신개발품인 나일론 자일이 끊어지면서 겨울산에서 죽는다. 작가는 이들 산악인들이 '다다미에 누워서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내들이라고 묘사했다.  

고사카의 어머니도 '아들은 하고 싶은 등산을 하다 산에서 죽었으니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한다. 

산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일상을 벗어나 있는 공간이다.많은 산악인들이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산에서 충족시키려고 한다. 산악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우오즈는 슬리핑백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쭈욱 펴고 눈을 감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댔다.우오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기로 들면 생각할 일은 많았다. ... 그러나 우오즈는 언제나 그렇듯이, 산에 있을 때는 되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 위해 산에 온 것은 아니니까. '   


아무튼, 이노우에 야스시의 '빙벽'은 까맣게 잊고있던 산악문고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등산에 대한 간단치 않은 물음과 대답은 오히려 역시 평화출판사의 등산문고판으로 간행된 라인홀트 메스너의  <도전>에 잘 표현돼 있었다. 

들춰보니 이 책은 1994년에 간행됐고 원로 산악인 김성진씨가 번역했다고 표기돼 있다.


' 곰곰이 생각하면 등산가인 우리도 그 희피족과 닮은 게 아닌가. 우리도 등산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일종의 구제를 바라는 게 아닌가.  ... 결국 따지고 보면 숨막히는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산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산은 스포츠다.(그것 이상은 아니다) ... 산행이 끝나면 정신이 더 맑아졌다느니 인간적으로 가치를 더 갖게 되었다는 등,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큰 착각이며 자기 기만인 것이다. '  


이런 등산서적들이 꾸준히 발행되던 1970,80년대에 비하면 등산은 훨씬 더 대중화 되었다. 더 맛있는 음주를 즐기거나, 비만과 혈압 같은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처럼 훨씬 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야유회를 가듯이 산에 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아졌다. 

산행이 무슨 구도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과거처럼 무슨 특별한 사람들의 독특한 행위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고산등반이나 거벽 초등과 같은 도전을 이어가는 등산행위에는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한계를 확장해보고 싶은, 

인간들의어떤 욕망이 반영돼 있다. 

굳이 힘든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등 따숩고 배부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어떤 욕망을 해소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8천미터 고산들을 단독으로, 무산소 등정하는가 하면 연이어 두 개 봉을 오르고, 인류 최초로 8천미터 이상 14좌를 등반하며 인간의 한계를 탁월하게 확장시킨 라인홀트 메스너는 예의 <도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돌아오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는데, 그것이 등산가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었다. 그런 위인들이 어떻게 등산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위험한 등반에서 겨우 살아온 뒤에도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정신의 근육이 우리와는 다른 경지일 것이다. 

모처럼...종이 책을 읽었다. 

우울감 때문에 달리기도 쉬고 있던 탓에 늘어진 근육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그 지점. 그 곳에 삶을 밀고가는 어떤 힘이 있는 게 아닐까.   

 

나, 다니엘블레이크 

2016. 12. 18 아트하우스 모모 

무기력하게 늙어가고 있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푸념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서 혼자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에 전개되는 영국의 현실이 한국과 다를 게 없는데,  예전처럼 분노도 저항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속 현실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고 부조리한 상황들이다. 끝없이 규정과 원칙을 내세우는 관료들. 이미 우편으로 송달된 통지서에 대해 항의를 하자, 규정이 정한 절차는 먼저 전화로 통지를 받고 의료지원금 신청을 하게돼 있으니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항고하라는 대답을 영혼없는 자동응답기처럼,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분이 안 가도록 끝없이 되풀이 하는 요령부득의 관리자들... 

다니엘 블레이크가 처한 난처한 처지보다 영혼이 증발한 것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이웃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도 '공포'일 것이다. '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이웃에게 조그만 관용도 베풀 수 없게 그들을 몰아갔을 것이다.  

20년 전에 본 '브레스드오프', '트레인스포팅', '빌리엘리엇' 같은 영국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영국이 그런 모양이다. 사람을 더 싸게 부리려는 자본의 탐욕이 인간을 구차하게 연명하는 그런 존재로 만들었다. 쌍용차 노조를 파괴하고 집단 해고를 강행해 20여 명을 자살로 내몰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역꾸역 굴러가고 있는 우리사회처럼...  

영화에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하시킨 영국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한 때는 윤택한 선진국 국민들이던 그들은 이제 일상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아사 직전에 식료품 구호소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따고 맨손으로 음식을 삼켜야 할 만큼, 사람들의 자존감은 완전히 짓밟혀 있다. 

심장 혈관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젊은 시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제법 비싸게 사들였을 중고가구들을 내다팔면서 안간힘을 쓴다. 의료연금 신청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와 이웃들이 사는 서민주택은 낡고 초라한 부엌가구, 칠이 벗겨지고 못이 삐져나온 계단... 영국의 서민들도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웃과 정을 나누고  염치와 예의를 알던 일상... 사람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던 그 일상을 집어삼킨 것은 데처 수상이 앞장섰던 신자유주의 광풍일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제어되지 않는 자본의 식욕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더 싸게 노동력을 팔다 용도폐기 되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한 때 그 사회의 자부심이었을 '사회안전망'도 앙상하게 골격만 남았다.

의사는 다니엘의 심장 혈관이 노동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지만 의료지원금을 신청은 기각된다. 판정 관리가 매뉴얼에 따라 던지는 바보같은 질문들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고 꼬박꼬박 질문을 던진 것이 그런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굴종하지 않고 질문하는 자에게는 사회는 가차없이 응징한다. 자존심을 세우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하노라..." 스무 설 적에 고민 없이 목청껏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굴욕을 감수하며 연명해야 하는가... 마음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연필세대라고 말하는 다이엘 블레이크는 의료연금 기각에 대해 재심청구를 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컴퓨터로만 접수하게 돼 있다. 써본 적 없는 인터넷에 매달려 끙끙대거나, 두 시간씩 대기 해야만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 ARS같은 절차 때문에 심장병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는다. 객석에서 지켜보다가 우리들이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관리들은 시종일관 매뉴얼이 정한대로만 대답을 한다. 이미 대회는 없다. 사람과 ARS의 차이도 무의미하다. 그들 역시 이미 외주화된 관리업체의 비정규직일 것이다. 그들도 속으로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없지는 않겠지...  그렇게 믿고싶다. 그러나 자동반복 테이프처럼 규정을 반복해 외울 뿐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내담자들에게는 낮은 평점을 매기는 식으로 '체제'에 부역을 하면서 말이다.   

연신 한숨이 내 쉬면서 끙끙 앓으며 영화를 보았다. 

옆 좌석의 젊은이들은 내내 흐느끼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메마른 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다들 눈물세상을 고단하게 헤쳐가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영상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돼 눈물을 쏟고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오' 이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다니엘블레이크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고 사람답게 처신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서기에 현실은 거대한 파도처럼 도저하다.


켄 로치 감독은 1936년생이라고 한다. 여든 살... 지레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답게... 그래 ... 

사람다운 자존감을 버린다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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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문턱이 없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암벽 등반의 경우는, 특별히 기술을 습득하고 장비도마련해야 하지만 

그저 걷는 산행을 하고 싶다면 누구든 언제나 그렇게 하면 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작정 산이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자연스레 동네 뒷산인 정릉의 숲속을 누볐고

친구들과 석유버너와 코펠을 가지고 백운대로 '등산'을 하러 갔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등산 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그때는 샘가에서 누구나 밥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알콜로 예열을 하고 펌핑을 한 뒤 석유버너를 가동하는 일을 하는 것도 스스로 대견했고 

꽁치통조림에 감자를 썰어넣고 추장을 풀어 끓인 찌게를 끓여 

친구들과 나눠먹는 일도 무척 즐거웠다. 

아마도 형들을 따라 등산을 가본 적이 있어 그런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누구나 등산에 쉽게 엄두를 내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산에 가자고 이끈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나, 연애 시절의 아내는 대개 

나와 함께 한 산행이 생애 최초의 등산이었다고 ... 

바라보기만 하던...우리 삶의 배경처럼 버티고 선 그곳을 제 발로 걸으며 숲의 생명력과 

산마루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산 아래 마을들을 내려다보는 일들을 놀라워 했다. 


아내가 새로 쓴 책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는 아마도, 산

을 올려다만 볼 뿐 쉽게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이들에게 

길 안내를 해줄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스무 살이 훌쩍 넘어 산에 처음 올라본 아내는 

아이 둘을 낳고 나서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였는데도 코오롱등산학교에 입학했고 

그 인연으로 산악잡지 기자로도 꽤 오랫동안 일했다. 

내 벌이가 시원치 않아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매달 산으로출장을 가고 그 일을 글로 기록하는 일이 고역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길을 걷는 일은 여전히 내게 위로를 준다.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상상하지 못한 고통과 세상에 혼자인 듯 외로운 시절에도 나는 줄기차게 

북한산이나 지리산 능선, 설악산을 찾아가 걸었다.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고나면 신기하게도 살아갈 의욕이 다시 

고이고 건강도 차차 회복이 되곤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도 우리는 매주 산에 갔었다. 

내가 아이들을 앞 뒤로 안고 매고 아내가 배낭을 맨 채 가난한 시절을 풍요롭게 지냈다. 


산길을 걷는 일... 이 좋은 일을 남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으리라... 

이 책에는 그런 마음이 담겨있다. 

이 책을 발판 삼아 선량한 이웃들이 산길 걷는 즐거움을 이해하고 

또, 구체적인 안내도 받게 되기를 

그 누구보다도, 우리 아이들 또래 청소년들이 ... 우리나라 어디나 널려있는 높고 낮은 산길을 걸으면서 

어른들이 저질러놓은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기를... 

나역시 희망한다.  



네이버 책 소개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540551

누구나 부모의 자식이고 대개는 자식의 부모가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는 주인공 옥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의 아내가 흐느끼며  

‘아이들 원하는 걸 나는 해줄 수가 없어요’ 하던 말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옥스발은, 전립선암이 손 쓸 수 없게 번져 죽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멘토인 여자 무당을 찾아가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며 괴로워한다. 

무당은 옥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미 죽음의 징조에 휩싸여 해줄 게 없으니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네가 아니라 온 우주가 키우는 것을 알잖니... ’ 

옥스발은 말한다. 

‘온 우주가 월세를 내주지는 않아’ 

옥스발 역시 프랑코총통의 압제 때문에 멕시코로 도망 갔다가 2주만에 폐렴으로 죽었다는 아버지를...  당연히,  얼굴도 못 보고 자랐다. 그런 아버지를 연민하고, 한편으로는 아버지 부재상태에서 자라야했던 자신을 연민하고, 결국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서야 할 고작 다섯 살인 아들과 열두어 살 딸 아이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식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든 것을 해주려는 게 대개의 부모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부모와 완전히 단절될 때 자식은 온전히 제 힘으로 세상에 선다. 과보호가 자식을 망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제 힘으로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위해 어떤 동물이 최선을 다해 능력을 기르고 땀을 쏟겠는가.  

어떤 술자리에선가 ... 자식을 위한 최선의 선물은 결핍감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고 ...누구가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더라도... 자식을 위해 일부러 불행한 가정환경을 조성하거나, 미리 사라져주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부모는 애면글면하면서 간도 쓸게도 다 바쳐가며 자식을 위해 살다죽게 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인간이 정한 게 아니라 '온우주'가 그렇게 해놓은 것일 게다.

영화에는 돈이 파괴한 우울한 인간사가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떼죽음을 당해 해변에 주검으로 밀려온 고레떼처럼... 세네갈에서 건너와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 맞으면서 언제 강제추방 당할지 모르는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지하실에 폐기물처럼 널부러져 자면서 열 몇 시간씩 고된 노동을 감당하다 결국 가스중독으로 비참하게 떼죽음을 당하는 중국인 노동자들.

요근래 시네큐브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럽은 대개 잿빛 하늘 아래 암담한 풍경이 이어진다. 얼마전에 본 '웰컴'도 그랬고... 바르셀로나의 빈민가가 주 무대인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다양한 장치와 발언들이 모두,  "나는 어떤 부모의 자식이고 또 자식에게 어떤 부모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환호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아이가 아플 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본 사람들에게는 더욱 감정이입이 돼 무시로 눈물이 주루륵 흐르게 하는 장면이 많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또 대개는 누군가를 자식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부모들도 나처럼 자식에게 할 수 있는한 모든 것을 다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로운 무당이 하던 말처럼,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온 우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으랴.

밥상이 무너진 황량한 풍경... 

감독이 의도한 것이겠지만, 영화속에는 쓸쓸하고 황량한 밥상이 몇 차례 나온다. 아내가 없는 부엌에서,  해산물과 야채를 상상하는 아이들에게 그것처럼 여기라는 듯 말하며 쏟아붓던 시리얼에 설탕을 듬뿍듬뿍 뿌려대던 메마른 밥상.  그리고... 다시 ‘제대로’ 가족을 꾸려 살아보자고 재활의 의욕을 보이며 돌아온 아내가 차려주었다는 (영화에서는 냄비만 보이고 음식은 보여주지않았다) ‘맛없는 스파게티’.

다들 ‘먹고살자고’ 이 눈물세상을 견디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저 세네갈 이주민들과 지하창고에서 떼로 잠을 자다 죽는 중국노동자들은 가족들과 단란한 밥상에 둘러앉을 수 있을까. 자본의 탐욕이 마을의 울타리와 가족을 무너뜨린 이 세상에서 그런 세계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의문에 대한 비극적인 전망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희망하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누구나 그랬듯이 그냥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죽은 아비가 나타나 저 세계로 인도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대장정1권~5권 /웨이웨이 글 선야오이 그림 송춘남 옮김 보리출판사

지난 여름...참 끔찍했다. 멈추지 않고 내리던 비...
그런 8월에, 윤구병 선생 인터뷰 하러갔다가
엉겁결에 받아온 다섯 권까지 소설 [대장정]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근심하면서 사나흘남짓 잠자기 전 침대맡에서 읽었다.
하룻밤을 새워 단숨에 다섯 권을 읽었다는 분들도 있었다.
워낙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문장도 번역도 훌륭했지만,

한두 페이지 넘기면 끝없이 나오는 삽화들이
소설 속의 장면들과 인물들의 심경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주어
대장정을 하고 있는 주은래나 주덕 같은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환호하면서 순식간에 읽히는 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연히...  
대장정은, 이북의 '불멸의 역사'시리즈들처럼 집권세력인 공산당이 자신들의 처지를 옹호하느라 쓴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는 조금 삐딱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슬몃 고개를 쳐든다.
말하자면 '관제'소설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수준이 있다.


우리 또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대학 1,2학년때... 이영희선생의 [우상과 이성]이나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책들에서 중국혁명을 만나고 에드가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 등을 읽으며 열광한 경험이 있다.
인간이 ... 이성의 힘으로 이렇게까지 대단해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 순정한 열정으로 고난받은 민중을 위해 목숨마저도 흔쾌히 던지며 고난을 감수하는 ... 그 인격들을 대하며 가슴이 설렜다.

실제로도... 그 무렵 선배와 동료들 가운데에도... 비록 총을 들고 대장정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비장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안위와 기득권을  모두 내던지고...
감옥이나 현장으로 가는 이들이 적잖았기에
그들의 대장정이 전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는... 그 혁명에도 그늘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아 사람아] 같은 책들이 꽤 여러권 나왔다. 동구권이 몰락하던 무렵,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분노로 질주하던
20대들이 87년 6월이 지난 뒤... 서른 즈음이 돼가고... 비로소 세상도,  자신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 이제 막 1990년대가 시작되던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을까...
때마침 1989년에는 천안문사태도 터졌던 것 같다.  

모택동이 얼마나 비정하게 권력을 추구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혁명에 참여했던 자신의 부모님들이 겪은 고난을 통해 묘사한 [대륙의 딸/장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무려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도
그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정말 그랬을까?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그러나 아무튼... [대장정]에 묘사된 마오쩌뚱은 무슨 완전한 인격의 화신이다. 그런 점은 재미가 없다. 
반면, [대륙의 딸]에서는...혁명의 동지인 자신의 부모님들께 죽음같은 고난을 강요한 모택동은 악의 화신이다. 이 점도 아쉽다.

모택동이 이끄는 인민혁명군에 열광해 혁명에 합류한 대열이 결국 중국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은데... 과연 악의 화신이기만 한 인간이 그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공포로 억압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일만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지도자가 되는 일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대장정에도 묘사돼 있지만, 모택동의 처는 대장정 중에 아이를 셋이나 낳아 마을에 버려두고 가야하는 ... 눈물겨운 일들도 겪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모택동이 지도력을 획득하는 것은  전투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입증하고 이를 배경으로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작가들은 인간에게 어떤 전형성을 부여하고 싶어한다. 선악이 분명할 때 극적인 대립구도가 분명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없거나... 갈등을 대충하는 전형적인 인물을 묘사한 소설이나... 인물평을 하는 이들의 말에는 ... 감동이 없다. 누구라서 고뇌와 갈등이 없겠는가... 하물며 설치류 동물에 비유되는 지금의 대통령마저도 ...

아무튼, 소설속에 나오는 주은래나 주덕, 팽덕회, 등소평 등...
생각해보니...얼마전까지 중국의 최고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무장투쟁과 대장정을 거친 이들 아닌가. 우리 사회의 세도가들이 하나같이 일제시대 친일파들의 자손인 점을 떠올리면... 이 건 참... 참담하다...  교과서를 뜯어고쳐가면서 일제 때문에 우리나라가 근대화 됐다는 식으로 씨부리는 이들이 왜 나왔겠는가...

현실이 고되거나 사람들과 비루한 일들로 말싸움이나 해대고 있는 스스로를 내려다보는 순간이면 ...늘, 10년 여 전에  한번 가보았던 안나푸르나나 히말라야를 꿈꾸곤 했는데, 책을 읽고는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다. 쓰촨이나 귀주 운남성... 인민해방군이 고난의 대장정을 했다는 그 험준한 산세와 협곡이 있다는 그곳들을 느릿느릿 오랫동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 언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당분간은 점심시간에 남산이나 자주 걸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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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야기》는 2011년 여름, ‘원자력’과 ‘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 악몽이 잊혀지지도 않았는데, 일본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해 몹시 뒤숭숭합니다. 여전히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고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언론보도는 잠잠하고, 불안감은 수면 아래서 나날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이, 더 빨리 일하라고 채근은 사방에 난무합니다. 지리산생태영성학교 이병철 선생은 “세상을 망친 재난의 근원에 ‘무엇인가 해 내겠다’는 강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재난 연속의 시대를 돌아보고 숨을 돌리자고, 이번 호 특집은 ‘원자력, 쉼표가 필요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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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호 맛보기

이철수․새김 오늘도 굉장히 덥구나
식담 여름철 부엌 어미에게 여백을 주는 냉국과 비빔밥 글 문성희
제철살림 농부는 못자리를 살림꾼은 장 가르기를
- 여름 ․ 간장 된장 가르기 글 장영란
땅땅거리며 살다 살기는 좀 재미있게 살아!
- 경북 의성군 쌍호리 농부 김정상 씨 글 김성희
이 사람의 살림살이 온 천지가 먹을거리,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 효소와 장아찌로 자투리 음식 살려내는 김갑남 씨 글 우미숙
길을 묻다·길을 가다 미움보다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 968번째 수요시위에서 만난 길원옥 할머니 글 김선미

특집● 원자력

빛그림 이야기 흔들리는 대지, 불안한 미래 사진 조성수
고삐 풀린 욕망이 예고한 파국, 후쿠시마 글 황도근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불편한 일상 - 일본에서 보는 후쿠시마 사고 글 박희숙
방사능 물질, 무해한 노출 기준은 없다 글 임종한

특집 ●● 쉼표가 필요해

여는 글 섣불리 뭘 하겠다는 욕심이 외려 세상 망친다 글 이병철
종교와 쉼 하느님도 숨을 돌리셨대요 글 박총
자연 속 쉼● 차도 전기도 없는 히말라야를 걷노라면 글 김홍성
자연 속 쉼●● 억지로 일하지 않으면 일과 쉼이 따로 없네 글 안혜령
몸 쉼 단식,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 최민희
나의 쉼 나에게 쉼표가 되는 … 글 강형국 외
소복이 지금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림 소복이

살림, 살림

살림이 만난 고집쟁이 동네만 고집하는 동네 청년
- 희망동네 유호근 사무국장 글 김세진
시골살림 길잡이 ②먹고살기 내 앞가림 잘하면 세상평화 절로 온다 글 전희식
살림이 눈여겨본 이 물건 짜야만 소금? 아니, 소금은 달다 글 김준
교육살림 그가 선생이 되면 글 남호섭
아이살림 태어나고, 낳는 일에서부터 행복해지자 글 신순화
몸살림 자기를 용서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글 권복기
말글살림 ③ 한두 방울 톡 비꽃 떨어지면 비설거지해야
- 날씨에 대한 섬세한 우리말 글 박남일
살림이 들은 음악 전쟁의 고통이 피어올린 두 장의 음반
- 헨릭 고레츠키 교향곡 제3번 <슬픔의 노래>
- 펭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 글 최시우
살림의 책 목축시대 이후 인류는 문명의 노예가 되었다
- 톰 하트만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글 최성각
《살림이야기》가 밑줄 그은 책 《울기엔 좀 애매한》외
새로 나온 책 《돼지가 있는 교실》외
살림의 현장 ●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 평화의 섬을 전쟁터로 글 이기철
살림의 현장 ●● 파키스탄 - 농민들께 염소를 마을에는 상수도를
살림의 현장 ●●● 잠비아 은테베학교 아이들의 꿈은 다섯 가지뿐입니다
살림의 눈 이들 말고 그 누가 글.사진 김성희
《살림이야기》함께 읽기 ‘깨 털릴까’ 두려웠던 ‘호모쿵푸스’와의 대면

《살림이야기》는
- 한살림에서 말하는 살림의 지혜와 따뜻한 이야기가 샘솟는 생활 문화지 입니다.
- 1년에 4회 발간되는 계간지로서 이번 13호는 2011년 "여름 호”입니다.
- 2011년 “여름”호에서는 원전사고로 인한 뒤숭숭한 시대, ‘원자도 쉬게 하고 우리도 쉬자’는 의미로 원자력과 쉼을 특집으로 다줬습니다.
- 판매 수익금은 한살림 농업기금 등 공익적 목적으로 이용됩니다.

《살림이야기》가 2011년 여름 호부터 가격을 인상합니다.

제작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가격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비용이 아깝지 않도록 알찬 책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정기구독을 하고 계신 분들은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 정기구독,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1년 4권×6,500원 = 26,000원→23,000원 (10%↓+수첩 )
2년 8권×6,500원 = 52,000원→44,000원 (15%↓+수첩 +《살림이야기》 한 호 연장)
3년 12권×6,500원 = 78,000원→62,000원 (20%↓+수첩 +《살림이야기》 두 호 연장)

입금 계좌 : 우리은행 1005-701-727851 예금주 : 윤형근 (도서출판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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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상식사전] 이용대 저/해냄출판사/    .

김성희  계간살림이야기 편집장/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 24기


배낭, 버너, 코펠, 아이젠, 자일. 아마 이 순서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산과 관련해 연상되는 단어를 말하라고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릴 단어들 말이다. 그 어휘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이들이 어떻게 우리의 언어개념으로 자리 잡았는지, 어원이 무엇이고 어떤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담겨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전문 산악인들 가운데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로 나온 <등산상식사전>이 반가운 이유는 이러한 현실 때문이다. 물론 1970년대 김원모씨가 엮은 <산악소사전>(한국산악회), 1990년 김성진씨 편저의 <등산용어수첩>(진선출판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나온 사전들이 어휘, 개념설명 중심이라 무엇인지 아쉬웠던데 비해 새로 나온 <등산상식사전>은 어휘설명에서 출발하지만  따라 읽다보면 어느덧 등반 역시 하나의 인문적 교양으로 설명되어야 할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천만 명 이상이 취미로 등산을 꼽는가하면 등산관련 산업규모가 1조원을 훨씬 넘어선다고 한다. ‘14좌 완등’에 매스컴이 열을 올리고 휴일이면 대도시 근교 산에 인파가 행진한다. 의미 있는 해외원정 역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우리 산악계는 시장이 번성하고 행위가 무성한데 비해 문화와 이론적 토대는 허약한 느낌이다. 대형서점의 서가를 뒤져도 우리 산악인들의 손으로 쓰여진 매뉴얼과 이론서들도 턱없이 부족하다. <등산상식사전>은 이러한 공복감을 채워주기에 손색이 없다. 이 책은 등산장비, 등반기술, 역사, 사건, 인물 등 필수적인 700여 개의 어휘와 개념을 100여 개의 일러스트와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배낭이라는 말이 등에 매는 주머니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함께 쓰이는 룩색, 색, 팩, 니쿠사쿠, 등이 각각 영어의 룩색rucksack, 팩pack, 독일어 룩자크rucksack 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일제치하에 도입된 우리 근대 알피니즘의 잔영이 지금까지도 어떻게 스며있는지도 말이다. 본래의 어휘가 다른 의미로 굳어진 코펠이나 버너 역시 다르지 않다. ‘낙짜’니 ‘낙비’니 하는 산악인들 사이에 습관적으로 유전되어 온 이 비틀린 국적불명의 산악용어들을 돌아보며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등산상식사전>의 저자인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교장은  나이로만 보자면 70대 중반, 현역에서 은퇴할 시기를 훨씬 넘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장 활력에 넘치는 현역 클라이머다. 지난여름에도 그는 알프스의 돌로미테를 등반했다고 한다. 또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등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등반과 교육에 힘쓸 뿐 아니라 꾸준히 역저들을 펴내며 등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사회역사적 배경 속에서 의미규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끝없이 자극과 가르침을 주는 ‘젊은 산악인’이다.

“젊다는 것이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말의 예로 이보다 적합한 경우가 또 있을까. <등산상식사전> 뿐만 아니라 요 근래 출간 된 <등산교실>, <알피니즘의 역사> 역시 모두 그의 손으로 쓰인 역작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한 사람의 집념과 수고에 우리 산악계가 무척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과 산]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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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행사관계로 주차하고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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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에 아이폰으로 찍어 상태가 영...

장마가 끝났다고 한다. 8월중순까지 폭염이 시작되겠지. 중부 이북에는지난 주말(17일) 온종일 내린 것말고는 장마답지않았다. 비오는 날 집 앞의 홍제천과 세검정은 조금 볼만하다. 북한산에서 쏟아져내린 개울물이 금방 불어나 세찬 물살을 이룬다. 예전에는 더 했던 모양이다. 정약용도 비오는 날이면 일부러 성을 빠져나와 그 풍경을 감상했던 모양이다.

비오는 날 물 구경을 하러 갈 수 있는 마음.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볼 줄 아는 여유... 이것을 잃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 잃는 일은 없으리.  
-----------------------------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하지 않고,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어도 성중(城中)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신해년(1791) 여름의 일이다. 나는 한혜보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 집에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하였다. 먹장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마른 우레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술병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만약 내켜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벌주 열 병을 한차례 갖추어 내는 걸세!”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창의문을 나섰다. 비가 벌써 몇 방울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옷자락이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니 겁이 나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자!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술과 안주를 내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물도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까 심화오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져 벼렸다. 처음에 화오는 청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터였다. 여러 사람이 함께 골리며 조롱하다가 더불어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홍약여와 이휘조 윤무구 등이다.

                                                                               <遊洗劍亭記)>,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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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1~5. 모두 다섯권이다.

일본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차에 이 만화를 보게 됐다. 더러는 내가 지나쳤던 도쿠사와 산장 같은 곳도 만화에 등장한다. 만화라고는하지만,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원래 유메마쿠라바쿠 원작소설을 만화로 극화한 것이라고 한다.

만화는 다니구치지로라는 만화가의 작품이다. 이 만화로 2005년 앙굴렘국제만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장비와 복장에 대한 묘사가 너무사 사실적이어서, 나는 이 만화가가 틀림없이 산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니라면 전문 산악인 누군가가 치밀하게 감수를 했을 것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책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알피니즘은, 식민지시대에 일본을 통해 이식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니, 몇년 전에, 이제는 고인이 된 고미영씨가 겨울철에 후지산을 오르며 겨울 후지산은 히말라야 못지않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일본에는 만년설이 있고 또 설악산이나 지리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험난하고 큰 산들이 있다. 해발 2000미터 넘는 산이 하나도 없는 남한의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와 알프스에서 고난이도의 등반을 해온 것을 보면,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이 나라 사람들에게 뭔가 독특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튼, 이 만화의 주인공은 하부조지라는 일본 산악인이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큰 아버지 집에서 외롭게 자란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맹목으로 산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하나도 서운할 게 없다. 오로지 그의 목적은 남들이 못한 등반을 해내는 것... 그는 누구도 못 간 길을, 누구보다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방식으로 오르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 극단에 에베레스트남서벽을 겨울에 단독등반하는 일이 있다.

박영석 등반대가 우리나라의 천재적인 젊은 알파니스트들을 희생시키면서 세번 째인가에야 겨우 올랐던 벽이다.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곤란한 지경을 확대하는 이 '머메리즘'은 현대 알피니즘의 정수일 텐데, 이런 면에서 하부조지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일상의 상식이나 사람들과의 원만한 타협 따위 다 무시하고 그는 오로지 더 힘든 산행을 추구한다. 가난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한 성격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은 따라갈 수 없는 무모한 도전정신 때문에 그는 혼자가 되고 혼자만의 산행을 추구한다. 그런 그를 부채질 하는 라이벌이 존재한다.하부조지와는 달리 경쾌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환영받고, 어떤 면에서는 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클라이머 하세 츠네오. 이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알프스의 노스페이스와 K2를 더 곤란한 방식으로 혼자서 기를 쓰고 오른다.
 
남들이 이미 올라버린 곳, 남들이 이미 성공한 일을 되풀이 하는 일은 쓰레기같은 일이라고 하부조지는 말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맬러리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고  했다지만, 자기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는 존재하는 한 오를 수밖에 없다고 ... 살아있는한 영원히 현역 클라이머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죽어야만 그의 도전이 멈출 수밖에 없는 ... 그는 그런 운명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결국은 히말라야는 삼킨다. 그러나... 단순히 원정에 실패하는 과정이 아니다. 힐러리보다 훨씬 먼저 1928년(?) 베레스트 정상 가까이 다다랐던 멜러리의 이야기, 그가 지녔을 카메라를 매개로  이들의 이야기와 소설적인 구조로 얽혀 있다.
그리고... 제 목숨도 돌보지 않고 앞만보고 달려가는 그런 사내들과 쓸쓸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공기속으로' 이후에 가장 재미있게 - - ;: 읽은 산악 문예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은데... 내 또래 친구들에게 만화책 읽어보라고 말하면 반응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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