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고개에서 일단 성벽은 끊긴다. 길을 건너 다시 들머리를 찾아야 한다.
삼선교,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들던 추억의 나폴레옹제과가 서있던 개천은 뜯겨 복원됐다. 나폴레옹제과는 성북동 입구로 옮겨가 있다. .  

하천복개가 박정희시대의 트렌드였다면, 뜯어서 인테리어 하듯이 꾸미는 게 이명박시대의 흐름인 모양이다. 어릴 때 늘 보던 낡은 주상복합아파트들이 사라지고 나니 개방감에 시원하기는 하다.


혜화문 맞는편 혜화성당 뒷담 쪽으로 성벽주변으로 나무 계단과 데크공사를 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조만간 고개에서 바로 성벽으로 길이 이어질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은 하천변에서 이 들머리를 찾아 성벽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냥 삼선교 달동네 뒤에 성벽으로 남아있을 때에야 누가 일부러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비교적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성벽이 남아있다. 멀리 인수봉까지 북한산 전경을 볼 수 있다. 

 삼선교 고개 위, 아마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동네겠지만.... 아직 옛 동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담배를 팔던 구멍가게였을 텐데, 행복은 무엇일까. 상호였을까. 행복상회. 이미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난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꼭 저렇게 생긴 담배가게로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60원짜리 신탄진 담배나 아침 찬으로 쓸 콩나물을 사러...

영화 '행복'을 떠올렸다. 도시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부나비처럼 살던 황정민이 병에 걸려 산속 요양원에 들어가... 약한 몸때문에 원래 그곳에서 살던 무공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지극정성으로 남자를 간호하고 둘은 살림을 차린다. 꿈같은 행복은 잠시. 남자는 권태에 빠져 도시를 기웃거린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는 말...
신문에 난 기사에 노후자금이 적어도 6억원은 필요하다는 내용을 보면서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여자는 '오늘처럼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도대체 6억원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넌 세상을 몰라' 남자는 물정모르는 여자에게 권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여자를 버려둔 채 다시 도시로 간다. 당연히 건강은 나빠진다. 그렇다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왔지만 여자는 이미 죽었다. 찰나같은 순간을... 우리는 끝없이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 누구나 제 깜냥껏 '행복'을 위해 삻의 순간마다 결단을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신문기자들이 자료를 조사해서 쓴 노후의 '행복'에 필요한 6억원...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 한달 생활비, 차량유지비, 외식비, 치료비 등등 예견할 수 있는 비용을 다 돈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텐데... 그렇다고 행복이 오나? 어차피 마음에 달렸다. 석가모니가 '룸비니 설산을 두 배로 늘려 황금으로 바꾼들 단 한 사람의 욕망도 채울 수 없다'고 했다던 말.... 달래 깨달은 이 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오른다. 모든 사람들이 굴러떨어진 시프스의 산으로 통나무를 굴리면서 행복을 찾겠다고...

낙산 위에서 성벽 사이로 암문이 있다. 그곳을 통과하면 동숭동 윗쪽의 낙산공원이다.

낙산에서 좌우로 내려다보이는 창신동과 동숭동의 낡은 집들이 언제까지 남게 될지 모르겠다. 재개발을 하면 똑같은 성냥갑 아파트를 쌓는 것 말고...대안은 없을까. 옥인동 일대를 아파트가 아닌 방식으로 개발하려고 했다던 건축가 김원씨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과연 시장이 이것을 용납할까.

동숭동 창신동에도 꼭대기, 성벽을 따라 아직 이렇게 낡은 동네들이 남아있다. 적산가옥들 같기도 하고 전쟁뒤에 급하게 지은 블록건물들 같기도 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호랑이만한 고양이가 골목을 .... 떡하니 지키고 있다.

창신동과 동숭동 사이로 가르마처럼 나 있는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동대문으로 내려서게 된다. 이대부속병원이 있던 자리는 뒤로 물려 건물을 새로 짓는 것 같았다. 공간을 확보해 성벽을 끼고 성벽공원 조성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대문로터리, 창신동 입구에 있는 노점... 고구마와 양파와 감자... 동대문 주변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이 남루하고, 복닥거린다. 그것이 생명력이기도 할 것이다.

동대문, 이스턴 호텔 앞으로 해서 청계천을 건너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청계천의 개발방식에 도달한 것이 딱 우리 시대의 수준 아니었을까. 그것을 치적으로 삼아 대통령을 뽑고... 그 대가로 지난 3년 동안 온 국민이 겪고 있는 이 불안과 고통... 불평등과 불합리, 민주주의의 후퇴를 생각하면... 매년 수천억원을 들여 이 가설무대같은 인공구조물을 유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불합리...를 선택하고 감당하고 있는 것이 딱 우리 사회가 도달해 있는 합리성의 수준이었다는 생각.

요즘은 뜸한데... 곤지암 살 때 큰 딸내미는 초등 6학년 때 이미 동대문까지 진출했던 것 같다.
곤지암 산골에 살던 아이에게 이 거대한 옷가게들이 어떤 멀미를 주었을지 ...

공사중인 동대문운동장 있던 자리를 지난다. 동대문운동장도 흉물스러웠지만 새로 들어선다는 거대 구조물 역시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읽은 어떤 자료에선가... 좌청룡 우백호, 풍수지리에 따라 인왕산과 낙산이 좌우로 뻗어나가는데,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조금 기가 약해 지금의 서울 운동장 자리에 흙을 쌓아 기운을 보(輔)했다는 이야기.

어쨌거나 동대문운동장은 잠실이 생기기 전에 '서울운동장'이었다. 초등학교때 황금사자기 결승전을 보러 야구장에 간 적도 있었다.



광희문에서 다시 성벽의 흔적이 나타난다. 한 일,이백미터쯤 성벽을 복원해두었지만 이내 장충동 주택가로 성벽을 파묻혀버린다.

골목사이로 언뜻언뜻 성벽의 흔적을 만날 수 있지만 대개 개인주택의 축대로 쓰이고 있다.

장충동 고개위에서 다시 성벽이 나타난다. 신라호텔 담장으로 남산까지 성벽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에 성벽에 붙여서 산책로를 조성한 것 같다. 도보환경이 비교적 좋다.




간혹 성벽의 축조양식을 비교할 수 있는 이런 구간들이 나타난다. 제일 작은 돌들은 태조때 쌓은 것이라고 하고 조금 큰 것은 중종때, 제일 큰 돌들은 숙종때 양식이라고 한다. 돌틈을 자세히 보면 조그만 돌들을 끼워 맞춰 정교하게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수십년에 걸쳐 민초들을 동원한 어마어마한 국책사업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수고로 쌓은 성벽에서 과연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었나? 문외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병자혼란때도 인조는 청나라가 처들어온다는 소식에 잽싸게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체제에 돌입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이 견고한 돌성이 무슨 억제선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북한산성도 마찬가지였다고 알고 있다. 일부러 찾아가기에도 아슬아슬한 만경대나 원효봉에까지 산성을 쌓았는데, 과연 그 수고에 상응하는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성벽은, 애먼 백성들 '쎄빠지게' 고생 시키고 고작 집권세력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한 정도의 역할을 하게 한 게 아닐까. 아니면 그 엄청난 공사기간 동안 뒷돈 챙긴 집권세력들의 자금조달 사업이었던가 말이다.

신라호텔 뒷담을 지나면 장충동 한남동에서 장충동으로 넘어오는 고개 위에서 일단 길은 끝났다. 골프연습장 뒤로 길을 만들고 있던데 앞으로는 계속 이어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자유센터 마당으로 나와 도로를 횡단해 국립극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리도 좀 아파서 국립극장 1층에 있는 까페에서 커피와 스콘을 먹으며 다리쉼도 할겸 쉬었다.

국립극장에서 석호정 위로 난 산책로로 팔각정쪽으로 올라갔다. 남산에 있는 성벽들은 다른 곳과 달리 벽돌로 쌓은 것 같은데, 원래 그런 것인지 복원할 때 임의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국민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동네 아이들을 선동해서 돈암동서부터 걸어서 남산까지 간 적이 있다. 동네에서는 아이들 다 사라졌다고 난리가 나고, 남산 놀이터 미로에서 신나게 치기장난을 하다가 광화문, 창경원을 거쳐 다시 걸어서 돌아와보니... 동네 분위기가 싸늘했다. 걱정시켰다고 큰 형에게 많이 맞았다. 그게 때릴 일인가... 싶기는 한데,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대여섯 살 때부터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서 낯선 동네로 참 많이 '모험'을 떠났던 것 같다. 그 버릇은 지금도 남아서 낯선 동네에 가면 꼭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봐야 직성이 풀린다.


서울이 아름답다고.. 재희형과 걸으면서도 이야기 했다. 정도전 같은 조선 건국 당시의 엘리트들이 이 땅에 그렸을 미래의 꿈... 얼마나 가슴 벅차 했을까... 하는 생각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특히 성북구쪽으로는 다닥다닥 재개발이랍시고 산들을 가리는 아파트들이 낡은 동네를 밀어내고 산들을 가리며 들어서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타워크레인들이 그런 일들을 하고 이다는 것... 



남산 식물원쪽으로 내려서서 백범광장으로 내려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연평도 포격전 소식을 전해준다. '정말?' 충격과 두려움. 사람들이 듣고 있는 뉴스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대피소로 피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느 나라 얘긴가요? ' 했더니 '연평도예요' 한다.

기어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당장에 성곽종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인가... 일단은 포격적 이후 소강상태라고 하니... 더 큰 일이야 벌어지겠나... 하면서 어차피 집으로 향한 길이니 걸어서 성곽을 따라 가기로 한다.

불 탄 남대문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놓았는데, 성벽에 쌓은 돌들이 안으로는 뾰족하게 치아처럼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대문옆 상공회의소 담장을 따라 성벽의 흔적을 복원해 놓았다. 그러나 유리로 처발라놓은 상공회의소 건물이 어쩐지 촌스러워보인다. 삼성본관 뒷담을 따라 서소문까지 성벽이 조금 흔적 남아있다.


부산 둘째형이 다니던 배재고등학교 자리다.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 형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서너 살밖에 안 됐던 것 같다. 제일 활달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형인데... 지금 너무 많이 편찮으시다. 배재학교 터를 지나면서 형을 떠올렸다. 매일 반야심경을 사경하고 있다.쾌유를 빌면서...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서대문 근처로 해서 경교장, 기상청쪽으로 길을 찾아가면 성벽 흔적을 볼 수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배재고등학교 있던 정동으로 해서 정동교회를 거쳐 이화여고 담장을 따라 경희궁까지 걸었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감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광화문 연가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이 길을 걸어서...


전쟁걱정을 하며 경희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이 연결돼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없었다. 다시 정문으로 나와 성곡미술관 앞으로 해서,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광화문 오피스텔들 사이로 해서... 사직공원까지 걸었다.


인왕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나도 마음이 바빠졌고 형도 급격히 기력이 떨어져 보였다. 간식이라도 준비해서 오를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둠에 휩싸여가면서 연평도 포격전 소식에 짙어가는 어둠과 떨어지는 기온에...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해졌다.


쉬엄쉬엄 걷기는 했지만, 연속으로 17km를 오르락내리락 걸었으니 무리가 올 만도 했다. 내내 쾌활했는데, 인왕산에서는 '옷을 너무 덥게 입고 왔다.' ' 이걸 하루에 다 하는 놈이 어딨냐.' '너는 하여튼 이게 문제야' 투덜투덜...
 

출발지점인 창의문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여섯시 반... 아침 10시30분에 떠났으니 꼭 여덟시간 걸렸다. 중간에 점심먹고 쉬고 경치 좋은 데서는 꼭 앉아서 재희형 담배 피우는 것 기다리고, 또 국립극장에서 커피마시면서 노닥거리고... 그런 것까지 합치면 걷는데만은 다섯시간쯤 소요되지 않았을까...

여섯시 반... 플래카드는 안 들었지만, 마중나온 아내와 셋이서 자하손만두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집 '드롭' 옆 '리틀프레스'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일정을 마무리 했다.

경치가 아름답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오르락내리락 운동도 되고...또 역사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고, 나같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어린시절의 추억까지 되살리게 되는 좋은 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잘 걷는 이들에게는 하루에 다 걷기에 뭐 그다지 무리한 길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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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마감 때문에 주말 동안 머리가 너무 아팠다. 큰 맘 먹고 어제(11월 23일 화요일) 하루 휴가를 냈다. 내처 잠만 잘까  하다가 오래 걷기로 했다. 어디로? 늘 그러듯이 북한산? 아니 아예 서울 성곽을 일주해보자... 싶었다. 재희형도 함께 가시겠다고... 해 오전 10시 창의문 앞 커피집 에스프레소에서 만났다.
'무보급 무산소 연속등반'입니다. 농담으로 킬킬 대다  커피 한 잔 마시고 10시 30분 경 출발 .




에스프레소 뒤에 창의문이 숨어 있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인왕스카이웨이가 개통되던 무렵.  그 길이 뚤리면서 창의문은 창의롭지 못하게 축대 밑에 옹색하게 낑기고 말았다.  

창의문에서 떠나 창의문으로 돌아오는 성곽 일주길은 17km. 한 시간에 4km가량 걷는다 생각하면 너댓시간 정도 소요되겠지만, 중간에 밥 먹고 차 마시고 쉬는 시간 포함하면 8시간 가량 예상하고 떠났다

북악산은 노무현 정권때에야 개방됐다. 권위주의 통치시절에야 어디 청와대 근처로 오고싶기나 했겠나. 그 서늘한 공기 때문에 말이다.  아다시피 북악산에는 오후 3시 이전까지만 입산이 가능하다. 신분증이 있어야 하고, 신고서 같은 걸 쓴 뒤 패찰을 목에 걸어야만 된다.

성곽 종주는 일단 창의문에서 출발해 북악산에서 혜화동 방향으로 으로 해서 낙산, 남산을 넘은 뒤 인왕산을 넘어 창의문까지 돌아오는 길로 잡았다. 반대로 하면 오후에 북악산 입산이 통제되니까...마음이 바빠질 수 있다. 북악산 입산 신고소에서 반대편 청운공원쪽 능선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입산 한 뒤 성벽을 두어장 찍었는데, 경비병들이 사진을 보자더니 다 지우란다.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웠다. 그런데, 그 뒤로는 위축이 돼 사진 찍을 맛이 안났다.  

북악산 정상, 백악산(白岳山 해발342미터) 에서 북한산 쪽을 바라본 광경. 여기서는 촬영이 허용된다.


반대로 남쪽 시내를 바라본 광경... 멀리 남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백운봉 아래 청운대를 지나면 잠시 성벽밖으로 길이 나있다. 이 길을 내려선 뒤 곡창터인가를 지나 조금 더 능선길을 걸으면 숙정문에 닿는다.





숙정문을 지나면 이내 통제소를 벗어나게 된다. 담 너머로 성북동이 내려다보인다.

삼청각과 성북동 고급주택가. 청와대 뒷산 통제구역을 벗어나면 성벽도 공기도 훨씬 자유롭게 느껴진다. 성벽에 붙어있는 이끼와 담쟁이덩굴까지도...


아마도 군인들이 관리했다면...
담장에 기생하는 풀과 나무들도 모두 '작업'을 해 제거하기 십상일 것이다.

성북동 경신고등학교로 내려서는 길...꽃보다 고운 단풍.  아직 가을이 남아있다.


성북동에 내려서서 온 길을 뒤돌아보며 찍은 사진. 만약 종주가 아니라 북악산만 걷는다면 경신고등학교와 서울과학고(예전 우리 고등학교때는 보성고등학교가 있었다.) 사이, 이곳 들머리를 기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성북동 성벽 인근에는 내가 알기로도 꽤 알려진 칼국수집이 네 집이나 있다. 대부분 사골국물에 손국수를 끓여내고, 문어나 생선전을 별식으로 내는데... 그 중 세 곳을 가보았다. 성곽종주길에는 굳이 가본 적 없던 '우리밀국시'에 갔는데... 결과는 조금 실망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4곳 중에 4등에 해당한다고 ...


경신고 담밑에... 있는 최순우 옛집.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 보존한 옛집 뒷마당. 이 넓지 않은 공간을 이토록 아취가 있는 곳으로 가꿀줄 아는... 그 마음이라니... 갈 길이 바빴지만 잠시 앉아 마음을 쉬다.


경신고등학교와 마주보고 있는 홍대사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3년 내 교실 창너머로 이 학교를 내다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어린시절 우리의 영웅,차범근의 출신학교이기도 한  경신고는 무지막지하게도 서울성곽을 깔아뭉개고 그 위로 학교 담장이 들어서 있다. 언젠가 되돌려지겠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요즘의 경신고등학교 학생들도 담을 넘어 다니는 모양이다. '학생들 담을 넘어 다니지 말 것' 단정한 행서체의 판자 알림판이 눈길을 끈다. 학교에 붙인 것일까 주민들이 그랬을까. 담을 넘어다닐만큼 개구진 아이들에게 이 알림판이 어떤 효용이 있을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고나 할까.


경신고등학교를 빠져나오면 서울 성곽은 간간히 빌라 축대와 교회 축대로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그리고 혜화동 고개에 있는 혜화문에 가까워지면 담장이 온전히 드러난다.

내고향은... 돈암동이다. 성문밖 동네였다. 어릴 때 전차종점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있다. 주소도 동소문동 2가... 이렇게 시작됐다. 혜화문은 동대문 옆, 시외와 연결되던 동소문이었다. 어릴 때는 문을 본 적 없는데... 아마도 2000년 전후에 복원되지 않았을까... (기록을 찾아보니 1994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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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합리, 10년동안 산 그 집에 아내와 다녀왔다. 강변역까지 택시를 타고 가 1113-1번 버스를 기다리려니,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 밤11시 20분 막차 시간에 맞추려고 안국동 사무실서 거의 매일 10시반에 뛰어나오던 일들이 떠올랐다. 2000년 초에 그나마 참여연대가 주 5일제를 앞서 도입했기에... 주말이면 밭을 갈고 풀을 뜯는 새 지친 몸과 마음이 되살아나곤 했다.

주말 행락 차량이 고속도로를 꽉 메우는데 비해 버스는 한산했다. 버스를 타고 시외로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제 노인들이나 이주노동자들,그리고 어린 친구들 말고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 없다. 신도시에서 도심으로 출퇴근 하는 버스를 제외하면 대개 그렇다. 그러니 버스 노선이나 배차간격을 늘리는 등 성의있는 대접을 기대하기 어렵다. 꼭 차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두 번 험한 대접을 받다보면 에잇 더러워서 차 사고말지 ...하게 되고....  

우리가 떠나 온 뒤로 삼합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 주인인 수연씨는 장인어른과 함께 한 동안 쉴 새없이 집 공사를 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쓰던 마당 가 큰 방은 앞으로 더 확장 되고 서쪽으로 큰 창이 하나 더 생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이 목공실이 있는 별채다. 직업 목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책상 겸용으로 쓸 원목 테이블을 갖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와서 만들어 가라며 초대를 해주었다.

길이 2미터가 넘는 소나무를 구해놓았다고... 분당의 한 부잣집 마당에 서있던 1억5천만원짜리 정원수였다고 한다. 죽어넘어진 것을 제재소에서 사서 켜다 놓았다고. 마당에서 이 나무는 그 정도 값어치를 했었는지 모르지만, 죽어 버려진 것을 우리는 이렇게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내게 1억5천만원짜리 정원수를 사다 심을 여력과 의향은 없지만, 근육의 힘으로 이 나무의 속살을 갈아 평생 손때를 묻혀가며 애장할 마음은 있다. 어쩐지 1억5천만원 정도를 그냥 선물로 받거나 주운 것 같은 기분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수연씨가 시범을 보이면 내가 따라 하는식으로... 자르고, 갈아내고 다듬어서 이 황송한 소나무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철공소에 가서 어울리는 금속 받침을 만들어 그 위에 얹어... 평생 내 테이블로 쓸 생각이다. 길이가 충분하니까 한쪽에 엠프와 턴테이블을 올리고 아래 스피커를 넣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을 생각이다.

서울에서는 옆집에 이사온 사람들과 눈인사만 할 뿐 집 안에 들이고 밥 한끼 함께 먹지 못하는데...  어찌보면 그저 집을 사고 판 사이일 뿐이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에게 과분한 선물을 주었다. 마당의 데크 위에서 다 함께 둘러앉아 점심을 먹다보니 마치 예전에 내가 주인 일 때 이들을 손님으로 맞은 시절로 되돌아 간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부엌 문틀에 아이들 키를 표시해둔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옆 면에는 새로 이집에서 자라고 있는 수연씨네 규진, 규리, 규희의 키가 표시되고 있었다. 이 녀석들도 우리 아이들처럼 삼합리에서 본 별빛과 노을을 평생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바라는 삼합리에 간다니까 따라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애써 싫다고 했다. 아직 충분히 ... 그 집과 자신이 분리된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세검정 새집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비교적 건강하게 잘 ... 자라고 있다.




마당에 핀 국화나, 집 옆에 울처럼 둘러있는 낙엽송 숲만 보아도  서울에서의 우리 삶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되새겨졌다.



[등산상식사전] 이용대 저/해냄출판사/    .

김성희  계간살림이야기 편집장/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 24기


배낭, 버너, 코펠, 아이젠, 자일. 아마 이 순서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산과 관련해 연상되는 단어를 말하라고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릴 단어들 말이다. 그 어휘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이들이 어떻게 우리의 언어개념으로 자리 잡았는지, 어원이 무엇이고 어떤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담겨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전문 산악인들 가운데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로 나온 <등산상식사전>이 반가운 이유는 이러한 현실 때문이다. 물론 1970년대 김원모씨가 엮은 <산악소사전>(한국산악회), 1990년 김성진씨 편저의 <등산용어수첩>(진선출판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나온 사전들이 어휘, 개념설명 중심이라 무엇인지 아쉬웠던데 비해 새로 나온 <등산상식사전>은 어휘설명에서 출발하지만  따라 읽다보면 어느덧 등반 역시 하나의 인문적 교양으로 설명되어야 할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천만 명 이상이 취미로 등산을 꼽는가하면 등산관련 산업규모가 1조원을 훨씬 넘어선다고 한다. ‘14좌 완등’에 매스컴이 열을 올리고 휴일이면 대도시 근교 산에 인파가 행진한다. 의미 있는 해외원정 역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우리 산악계는 시장이 번성하고 행위가 무성한데 비해 문화와 이론적 토대는 허약한 느낌이다. 대형서점의 서가를 뒤져도 우리 산악인들의 손으로 쓰여진 매뉴얼과 이론서들도 턱없이 부족하다. <등산상식사전>은 이러한 공복감을 채워주기에 손색이 없다. 이 책은 등산장비, 등반기술, 역사, 사건, 인물 등 필수적인 700여 개의 어휘와 개념을 100여 개의 일러스트와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배낭이라는 말이 등에 매는 주머니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함께 쓰이는 룩색, 색, 팩, 니쿠사쿠, 등이 각각 영어의 룩색rucksack, 팩pack, 독일어 룩자크rucksack 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일제치하에 도입된 우리 근대 알피니즘의 잔영이 지금까지도 어떻게 스며있는지도 말이다. 본래의 어휘가 다른 의미로 굳어진 코펠이나 버너 역시 다르지 않다. ‘낙짜’니 ‘낙비’니 하는 산악인들 사이에 습관적으로 유전되어 온 이 비틀린 국적불명의 산악용어들을 돌아보며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등산상식사전>의 저자인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교장은  나이로만 보자면 70대 중반, 현역에서 은퇴할 시기를 훨씬 넘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장 활력에 넘치는 현역 클라이머다. 지난여름에도 그는 알프스의 돌로미테를 등반했다고 한다. 또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등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등반과 교육에 힘쓸 뿐 아니라 꾸준히 역저들을 펴내며 등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사회역사적 배경 속에서 의미규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끝없이 자극과 가르침을 주는 ‘젊은 산악인’이다.

“젊다는 것이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말의 예로 이보다 적합한 경우가 또 있을까. <등산상식사전> 뿐만 아니라 요 근래 출간 된 <등산교실>, <알피니즘의 역사> 역시 모두 그의 손으로 쓰인 역작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한 사람의 집념과 수고에 우리 산악계가 무척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과 산]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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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다섯 시 경 집을 나서  산에 올랐다.
시골 살 때는 날마다 해가 어떻게 길어지고 짧아지는지,
또 시시각각 노을이 지는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늘 예민하게 느끼며 살았는데...

서울로 이사한 뒤로는 무심해진 채... 계절이 바뀌고 또 해가 그토록 짧아졌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여섯 시 지나자 숲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주말 내 몸살을 앓았을 그 산길을 발자국소리마저 죽이고 걸었다.

어둠에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둠에 휩싸인 비봉에 앉아... 
사람들의 욕망이 들끓고 있을 저자를 내려다본다.


추석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난 모양이다. 거의 달이 다 차 올랐다.
추석 때 설악산 가서 다친 무릎은 이제 많이 나았다고 ... 믿고 싶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일요일 새벽녘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에 잠이 깨 거실에 나가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딸이 우리 결혼 17 주년을 축하한다며... 친구네집으로 몰래 배송받은 액자에 사진들을 넣어 진열해놓았다.

어젯밤 아내와 밤 산책 나간 새 한바라가 평창동까지 달려가 사다 놓은 케이크까지.



아이들 어린시절 매일 감격해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이 다시 식탁 옆 벽에 진열되었다.

힘 내야겠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한겨레신문에 물가폭등시대에도 불구하고 한살림은 변동없는 가격에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consumer/441856.html

실제로 시중에서 배추 한 포기가 1만5천원 넘게 팔린다는 뉴스가 나올 때도 한살림은 예전과 다름없이 1770원에 물품을 공급했고, 수급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품절돼 공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한살림 물품가격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를 소개하는 기사는 반갑지만, 자칫 한살림에 가면 싼값에 유기농채소를 살 수 있다는 식으로만 비쳐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여겨진다.

수요와 공급이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니... 하는 말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시장경제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말이다. 한살림은  싼값과 높은 이윤 추구라는 시장의 일반적인 논리와는 다른 대안적 질서를 추구하면서 출발한 운동조직이다. 적정한 가격.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양심적으로 짓는 유기농 농부들이... 그러한 방식의 농사를 지속할 수 있는 적정한 가격... 이 한살림 세상의 '값'에 대한 논리라면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살림의 초창기 농부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화학비료와 농약 치는 일을 거부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고 한다. 지난 여름에 취재하러 갔던 경북 상주의 최병수 생산자 같은 분은 몇년 동안 돈을 받고 팔 만한 사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무 맛도 없고 쪼그라들어 형편없는 그 사과를 '즙이라도 내 먹을겠다' 며 반 강제로 수매해준 ... 한살림의 초창기 소비자들의... 응원 덕분에 그런 방식의 농업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그의 아내는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원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와야 했다고 한다. 농약을 친 관행적인 상주포도가 시장에서 높은 값에 팔릴 때도 그들은 유혹을 뿌리치면서 온 가족이 고난을 견뎠다.

우리나라에 지금과 같은 방식의 생활협조합운동이 확산된 데에는..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초창기의 운동가들, 고난을 견딘 생산자들과 그들을 응원하며 인내한 소비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고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요즘은 일부 생협들 가운데도 자기들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농부들을 쥐어짜는가하면, 외국에서 수입유기농산무을 사대기 바쁜 곳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 자본의 논리에 포박돼 왜 이 땅에서 유기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태동됐고, 무엇을 향해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망각한 까닭일 것이다. 

이번 일로 한살림이 '너무 비싼 물품을 판다'는 근거없는 오해는 많이 불식될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자칫, 한살림에 가면 값싼 유기농 채소가 있다...는 식으로 가격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일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한살림의 작동원리와 역사를 망각한 채, 거칠게 등락하는 시장상황에 따라 몰려왔다가 시장 가격이 떨어지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소비자가 늘어난다면... 신뢰에 기반해 어렵게 생명농업의 기반을 다져온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다.



 



지난 해부터 김선미가 땀흘린 결과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나왔다.
이번에는 우리가 먹는 밥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죽음의 밥상'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의 논리가 우리의의 관계를 파괴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의 논리가 밥상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자본의 논리를 뛰어넘어 생산자와 소비자, 도시와 농촌의 신뢰관계를 복원하고, 아니 그보다도 먼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복원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서로를 위하는 대안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한살림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한살림은 1986년 그런 생각으로 출발했다.

▲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도시의 소비자들과 힘모아 유기농 배추농사를 짓는 해남의 참솔공동체 농부들.  

김선미는 한살림을 통해 생산자 농민들의 진정어린 노력을 이해하게 되었고 감동했다.
또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생산지에서 보내오는 생명의 먹을거리로 밥상을 차린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기도 하고 신념이기도 할 것이다.

▲ 우리 잡곡은 시장가격만 따진다면 이미 이 땅에서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한살림 잡곡의 상징적인 생산지 괴산의 경동호 생산자  

"무엇을 먹는가... 가 바로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한다" 이 말에 언뜻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먹는 쌀과 밀, 고기와 채소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길러진 것인지 ...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을 기울인다면, 나의 '먹는 행위'는 우리가 의도하든 그렇지않든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와 우리 자손들,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안녕에 직결된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올해는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시중의 식재료들이 벌써부터 가격이 폭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하면 거의 95%이상의 먹을 거리를 해외에서 사다먹는다. 그들 대부분은 거대 식량메이저들이 가장 싼값에 기르거나 사들여서 최대한 이윤을 많이 남기는 방식으로 파는 상품들이다. 먹는 사람의 건강이나 행복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 아이들의 절반 가까이가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다. 신혼부부들이 아이를 갖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태어난 아이들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일이 쉽지않다.

'살림의 밥상'은 17년차 주부인 김선미가 ... 밥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온 일들과 조금이라도 안전하고 건강한 ... 밥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면서 공부한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쌀, 과 밀 옥수수 등 작물에 대해 읽다보면 우리 쌀의 운명을 걱정하게 되고, 대부분 유전자조작작물인 수입옥수수나 식용유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으로 건강한 곡물을 기르고 있는 한살림의 유기농 농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이들의 생각을 적은 내용들도 있다.

고기, 육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고기 1kg을 생산하는데는 12kg 이상의 곡물사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인류가 지금처럼 고기를 많이 먹는 한 지구 생태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서구인들처럼 중국과 인도 사람들이 육류섭취를 늘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대개의 공장형 축산을 통해 생산된 고기들은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로 범벅된 것들이며 이들은 우리 몸안에 축적돼 생체리듬을 교란한다.

먹을거리가 이래서서는 안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국에서 대안적인 생태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한살림의 농부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농업과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한... 밥에 대한 공부 결과가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 서평 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0815.html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소개기사 http://blog.naver.com/khhan21/110094208529

귀성 행렬에 뒤섞여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날들이 행복이었음을... 세월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추석 전날 수원 처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라와... 우리만의 방식으로 부모님을 추모하며 넷이서 명절 아침밥을 먹었다. 울적한 마음에, 설악산에 가 오래 걷자는 생각에 밤 9시30분 고속버스로 속초에 갔다. 명절날 저녁 고속버스도 하행선 고속도로도 텅텅 비었다. 평창휴게소도 을씨년스럽도록 휑했다. 폭우가 쏟아지더니 그새 겨울이 왔나 싶도록 기온도 낮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방향으로 곧장 200미터쯤 걸어가면 바다가 조망되는 '해수찜질방'이 있다. 작년에도 그곳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당연히 푹 잘 수 없었고 토막토막 자다깨다 하면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산 아래서 밥을 먹어두자는 생각에 찜질방 인근 식당에서 대구매운탕을 시켜 먹었다. 후춧가루 냄새와 조미료를 빼면 생선은 왜 넣었나 싶도록 아쉬운 조반이었다. 설악동 가는 7번버스는 찜질방 맞은편에 있다.



혼자 걸으니 자주 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긴 했다. 식당이나 설악동에서 괜히 어정거리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비선대에서 10시경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됐다. 석주길, 천화대 리지에 붙어있는 산악인들이 많았다. 


아이폰으로 직찍...

도중에 확인한 페이스북에 내 프로필사진을 보고 인삿말을 남긴 정왕룡형이...
학교다닐 때 꽤 준수했던 얼굴이 이렇게 삭았냐고 ...이런...ㅎㅎ

햇반이 같이 포장돼 있는 오뚜기소고기국밥,라면과 빵, 아침에 마시겠다는 생각에 작은 포도주스도 한통 찜질방 근처 편의점에서 사갔다. 마등령에서 12시쯤 빵을 먹고, 공룡능선이 끝나는 지점인 희운각3시쯤 라면을 끓어먹었다. 4시부터 소청봉을 향해 올라가 5시쯤 소청봉에 도착했다. 

희운각에서는 1993년 신혼여행때 아내와 대청봉 대피소(중청산장이 생기기 전)에 가 자겠다고 오르다 당귀차를 사 마신 일이 있다. 그 향기가 지금도 생생한데, 훗날 안나푸르나 산길의 롯지에서 때 낀 주전자로 데워 설탕을 듬뿍 넣어주던 밀크티도 정겹지만... 편의점 진열대에서 플라스틱통에 든 음료수를 사 마시는 일은 참 싫다.

희운각도 양폭산장도 수렴동 산장도 이제는 방부목으로 다시 지었다. 허름했지만 정취가 넘치던 옛 산장들이 안목 있는 작가들의 산수화 같았다면 되똑하게 다시 태어난 수입 방부목 산장들은 어쩐지 싸구려 공산품 같아 아쉽다.



희운각 산장 옆 헬기장은 공룡능선과 천화대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같다. 풍경을 보자고 올라갔더니 5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주머니가 혼자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풍경을 보다가 ... 올라오는 내게, '아, 멋져요.'  탄식을 하며 스스럼없이 말을 한다. 누군들 설악의 그 풍경 앞에서 그런 탄식이 나오지 않으랴...

소청봉에서 중고생, 초등학교 2학년 막내아들까지, 4남매가 있길래 대견해서 말을 걸었더니, 경기도 광주에서 왔다고... 고향사람 만난 것처럼반가워서 한참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은 절대로 산으로 따라나설 것 같지 않은 두 딸을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길을 떠났으니 당연히 산장 예약은 하지 못했다. 사가지고 간 팩소주 두 개를 마시고  산장 로비에서 9시경 사진 속에 나온 이들처럼 침낭속에 들어가 잤다. 피곤해 푹 자면 좋았을 텐데 역시나 한 시간 간격으로 잠이 깼다. 새벽에 산장 밖에 나가 불빛 휘황한 속초시내와 밤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별들이 초롱했고 언뜻 중청봉 뒤로 꼬리를 남기고 스러지는 유성.


이날 새벽 대청봉의 기온이 영상 1도까지 내려갔다. 주목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앉았다. 날이 맑아 일출도 깨끗했다.   


해가 떠올랐지만 보름달은 여전히 중청봉 뒤에 남아있다. 한 하늘에 해와 달이 설악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 떠 있었다. 임금들 뒤에 세워두는 병풍 속 일월도처럼...

사실은 이번 산행도 '자학'적으로 오래 길게... 걸을 작정이었다. 중청에서 12선녀탕까지 서북주능선을 다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청을 떠난지 1시간도 안 돼 왼쪽 무릎에 통증이 왔다. 인대가 끊어진 게 아닐까 싶도록 날카롭고 지속적인 통증 때문에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이미 서북주능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도리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바위길이 견뎌야 했다.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만 불길한 생각에 여간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간 무리한 산행을 많이 한 탓에 연골이 상한 건 아닐까. 이제 산행은 끝인가, 산에 못 다니는 나는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알파인스틱에 의지해 절뚝 거리며 걷고 있으니 산 꽤나 다녔다는 지나가는 이들이 너도나도 자기도 겪어본 일이며 뜸을 뜨거나 해서 자가 치료를 했다는 말들에 충고에 조언에 ... 그걸 듣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7킬로미터 남짓 걸어 한계령 휴게소로 내려가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오색으로 가 그린야드 호텔에서 온천욕을 했다. 가족들이 함께 온 이들을 보니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났다. 가끔은 그냥 쉬러 다니는 여행도 같이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동안 하도 야영장으로만 끌고 다녀서 아이들이 여행을 기피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경복궁역 앞에 있는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는 쓱 만져보더니 별일 아니라고, 소염제 먹고 사나흘 쉬면 괜찮아질 테니 당분간 운동을 삼가하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침 운동도 삼가하고 근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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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추석연휴가 곧 시작된다. 토요일 오전에 시외버스타고 괴산에 다녀왔다. 솔뫼에 귀농해 있는 후배 장성백, 최현주부부도 만나고, 박재일 회장님 묘소도 가보고 싶었다. 작년에 동서울 터미널서 증평 가던 버스에 너댓 명 타고 가던 게 생각나 오늘도 그럴까 싶었는데, 열댓 명은 족히 버스에 탔다.
 증평을 거쳐 괴산까지 가는 버스였다. 버스요금 1만200원, 소요시간 1시간50분. 생각보다 멀지않다.

▲ 괴산터미널 시간표

괴산서는 충주, 청주 그리고 이천을 거쳐 수원가는 버스 등이 이다. 청주, 서울 가는 버스가 제일 많다.
서울까지 편도 1만원, 왕복 2만원...소요시간, 편의성을 따져보면... 기대보다는 비싼 것 같다.  '차 사고 말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괴산 터미널 건너편 골목 안에 한살림매장이 문을 열었다. 운영이 되겠나? 많이 걱정들 했는데... 와글와글... 물건이 동나는 일이 잦을만큼 잘 된다고 한다. 그날도 물품 보충하러 김관식 사무국장이 충주에 다녀오셨다고... 지난 한 달 남짓동안 이 매장을 통해 신규회원도 150명이나 늘었다고 한다.

솔뫼에 가서는 사진을 찍은 게 없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는 카메라질 하는 게 꺼려진다.

회장님 묘소에 가보았다.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묘 앞에는 작은 항아리에 구절초 같은작은 국화들이 생생하게 꽂혀 있다. 나중에 김관식 국장께 들으니 따님들이 거의 매주 찾아오고 있다고...

아내와 절을 하고, 돋아난 잡초들을 잠시 뽑고... 앉아서 잠시 건너편 용산을 바라보았다. 조희부 선생, 이남선 이사와 함께 회장님 모시 그 땅을 처음 보러 갔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못내 아쉬움이 남는 그 뒤의 일들... 

오후 5시55분차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현주는 우리가 자고 갈 줄 알고 녹두지짐에 막걸리 마실 기대를 했었다고... 우리도 아쉬웠지만 집에 두고 온 딸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마을에 잘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아 적이 안심이 되었다. 집도 농지도 마련하고 그들이 꿈꾸듯이... 사람들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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