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마지막 하루...  날이 밝았다.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전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느긋하게 1층 로비에 내려가 아침을 먹고 ... 짐을 방에 둔 채 자전거에 핸들바백과 리어패니어 하나만 달고  하릴없이 다카마쓰 시내로 나섰다.  출근 시간이 지나 시내는 한적했다. 태양은 뜨거웠고 바람은 소슬했다. 목적지 없이 시내를 배회하다가, 아케이드 안에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에 들어가 어슬렁거리며 구경을 했다. 마쓰야마에 비하면 상품 구색도 활기도 떨어져 보였다. 도시 규모가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나오시마(直島)를 떠올렸다. 일본에 2년 가량 파견 나가있던 사무실 후배가 내 여행계획을 전해 듣고는, 그 섬에 가 보라고 했었다.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여유가 생기니 기다렸다는 듯 그 섬이 떠올랐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망가지고 나니, 네비게이션도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무작정 부두에 나가보았다. 일본에 도착하던 첫날 밤... 들뜬 마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객 터미널은 부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개가 있었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터미널에 가 보았다. 나오시마(直島) 가 안내판에 있기는 한데... 요일마다 있다 없다 하는지... 오늘은 가는 배 편이 없는 요일이었다. 

역시 인연이 없는 모양이군... 체념하고 있는데... 

 

여행자들로 보이는 백인들 여럿이 승합차에 내려 왼쪽 건물 터미널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나도 따라가보았다.  



반대편 터미널에는 나오시마행 배가 있었다. 한 시간 쯤 뒤, 12시에 떠나는 배가 있었다.   

배표를 끊었다. 자전거를 싣기 위해서는 따로 50엔을 더 내야 했다.  

 

첫날 장을 보았던 역 앞에 있는 A마트에서 도시락과 음료수를 사와 부두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하루에 보통 80km, 어떤 날은 100km 이상...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고, 어떤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대관령 같은 고개를 몇 개씩 넘던 그런 여행은 이제 끝났다.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의 심정이 이럴까... 느긋한 마음으로 바닷가에 않아 한가로운 점심을 먹었다. 

 

잠시 후 배가 출항했다. 자전거는 배 밑바닥 화물칸에 결속을 해 놓게 돼 있었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면서 시코쿠 섬의 산들이 실루엣으로 떠올랐다. 저 능선 어딘가를 헤매고 다니던 순간들이 벌써부터 그립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이제 또 다른 산맥들이 펼쳐져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매표소에 "나오시마는 6월 13일까지 휴일" 이라고... 안내 돼 있었다. 섬이 휴일이라니 무슨 말일까. 

나오시마는 원래 구리 제련소와 염전만 있다가 공장들이 떠나면서 황폐해진 섬이었는데, 안도 다다오 같은 예술가들이 참여해 섬 전체를 예술적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지추(地中)미술관, 호텔과 미술관 등이 함께 있는 베넷세하우스, 우리나라 출신의 미술가인 이우환 미술관 마을 안에 있는 집들을 설치미술 작품으로 되살린 '이에() 프로젝트, 안도뮤지엄 ... 등 섬 전체에 볼 만한 미술관과 야외 설치 미술품들이 많았다. 



부두에 놓여있는 야요이 쿠사마의 호박 ...이 섬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섬에 도착한 뒤 나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가운데, 터미널에서 나눠주는 간략한 약도만 들고... 섬의 지형이 어떤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네비게이션도 망가진 상태라 막막한 가운데 패달을 밟기 시작했다. 완만한 언덕길이 있었지만 짐도 싣지 않은 가벼운 자전거로 넘기에는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나오시마는...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가기보다... 자전거로 돌아보기에 적합한 규모의 아름다운 섬이었다. 




지추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그리고 호텔과 전시장이 함께 있는 베넷세하우스 등 대부분의 미술관은 모두 휴관이었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정비를 하는 기간인 모양이었다. 섬이 휴일이라던 말은 이런 의미였구나...   

 


그러나 야외에 설치된  낯익은 미술품들은 미술관 휴관과 무관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베네세하우스 마당에 설치된 니키 드 생팔의 조각들도 ... 

휴관중인 미술관들에 입장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야요이 쿠사마도... 니키 드 생팔도 정신병을 앓으며 환상의 세계를 작품으로 구현했다고 한다. 

정민교수의 책 제목에 썼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던 말... 



우리가 제도교육을 받으면서 끝없이 스스로를 강박해온 것은... '정상(正常)'에서 벗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동네마다 정신을 놓아버린 이들이 있었고...그들은 초점이 나간 눈으로 하루종일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거나 ... 몸은 우리 곁에 있어도 어딘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무엇이 그들을 이 세계도 저 세계 아닌 상태에서 떠돌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이 온통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 것도 아닌 척 살아가는 일이 ... 과연 정상인지... 규범적인 인간, 어지간한 고통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 


어쩐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넥타이 매고 출퇴근 하는 삶... 

가계부를 쓰고 적금을 붓고 집을 늘려가며 새끼들과 볶고 지지며 사는 삶도 숭고하지만 

미치지 않으며 도달할 수 없는 그 경지가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2,30대를  사는 동안 나는...  미치지도(及) 미치지 못하지도 못하면서 

우왕좌왕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고등학교 문예반시절... 가을마다 하던 문학의 밤에서 2년 선배가 쓴 싯구 가운데... ' 사랑이여... 취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그대' 하던 감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문학소년들 다운 감상이었다. 우리는 정작 문학에 몰두하기보다 그런 말의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토요일마다 하던 '합평'을 마치곤 학교앞 중국집에 몰려가 마실 줄도 모르는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그런 식의 또래들의 일탈, 공모자 의식으로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던 그 무렵의 중압감으로부터 탈출을 꾀했던 것 같다.  



휴관 중인 미술관들이 있는 섬의 왼쪽 해안 언덕을 넘어서면... 부두의 반대편에 있는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집 앞에 화분을 내 놓고 장식을 한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섬이 관광지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독주택이 남아 있는 서울 거리.. 특히 우리동네 부암동에도 ... 이런 광경이 많다. 그런데, 대개는 고무 함지에 배추나 고추 같은 작물들을 심어 놓은 경우가 많았다. 


100여 호는 넘을 것을 걷은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다. 섬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이름도 모토마찌(本町)다.  

마을에는 카페도 식당도...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일한 상점인 생협 모토무라점도 있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생협법에 의해 '비조합원 이용금지' 규정이 있는데...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도 더 유명무실한 것 같았다. 일반 상점과 무슨 차별성이 있는 모를 대규모 수퍼마켓에 뜻밖에 생협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비조합원은 물론이고 나같은 외국인들도 아무 제한없이 무슨 물건이든 살 수 있었다.   


쉴 겸 차가운 커피를 시켜 마시고 기념품을 몇 개 샀다. 안도 미술품들을 일상용품으로 만든 것들... 작은 새를 날렵하게 만든 레터나이프는 늘 고마운 J형에게 주려고 샀다. 가족들에게 줄 엽서 몇 장과  귀이개 같은 소품들... 



마을 속 집들을 설치 미술품으로 만들어둔 '집(이에 家)프로젝트'는 볼 수 있다고 해 티켓을 샀다. (1000엔).  

마을 안에 있는 집 대여섯 개를 볼 수 있는 티켓... 









낡은 집을 개조한 일종의 이 미술관은... 뭐랄까... 그 필연성을 충분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실내에서 촬영도 금지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어떤 카페는 50년대에 지은 낡은 집을 지붕골조가 다 드러나게 뜯어내고 군데군데 시멘트블록을 그대로 노출하고 바닥에도 투명한 에폭시만 발라 놓은 것을 인테리어라고 해놓았는데... 묘하게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집도 그랬다. 1층과 2층이 이어지게 뚫려있는 거실에 난데없이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이 들어서 있는데... 이층 전시실에 올라가면 자유의 여신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마침 그 방에 들어설 때... 데이트중인 일본 젊은이들이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을 보면서... '소프토 아이스크림인가?' 하면서 킥킥대고 있었다. 



'어둠속의 대화'...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인연으로 잠시 만나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후배가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티켓을 보내준 적이 있다. 

신촌에 있는 빌딩 안, 캄캄한 어둠 속에서 40분 남짓 낯선 체험을 해본 적이 있다. 빛이 완전히 밀폐된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음성이나 음향 효과에만 의존해 물을 건너고 바람 부는 들판은 지나 시끌벅적한 장터를 지나고 카페를 방문하는 식의 경험...  



그러다 보니 문득 오감 가운데 유독 우뚝한 감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각이 ...

과연 다른 감각, 촉각이나 후각, 미각과 청각에 비해 과연 그런가?  회의감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 가운데 한 곳도 그런 경험을 해보게 하는 곳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10여 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싶은 기분으로 앉아 있다 나오니 




토담 모퉁이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모두가 새로웠다. 

당연한 듯 누리며 느끼는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 


어쩌면 여행 자체가 그런 게 아닐까. 

또 어떤 집에는... 거실 전체가 수조였고... 작은 불빛들을 띄워 놓았다. 

 

마을 가운데 있는 안도 뮤지엄은 따로 입장권을 사야 했다.(500엔)   



노출콘크리로 지어놓은 미니멀한 건물을 둘러보는 것이 무슨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마을 가운데 있는 어떤 집 앞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게... 성경 구절을 써붙여 놓았다. 


사실 그 무렵 불화하고 있는 큰 딸 아이에게도 내게도 그 말이 중요한 말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원하는 사람이다"  집 화장실에 아내는 한 동안 세네카가 했다는 이 말을 붙여두었다.  


이제 나오시마를 떠날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과 다시 한번 와보고 싶은 섬이다. 다카마쓰에 숙소를 정하고 부둣가에서 배를 타고 나오시마로 건너와  너댓시간 걸어서 섬을 관광해도 좋고...섬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좋을 것 같다. 


다카마쓰로 나갈 시간이 다 돼 천천히 자전거를 몰고 부둣가로 나왔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눈 인사만하고 마주쳤던 자전거 여행자가 부두가에 앉아 빵에 잼을 발라 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 당신 본 적 있다. 아시지리곶 콘고후쿠지(金剛頂寺) 올라가선 언덕길에서 우리 마주쳤었다.'


그는 정말이냐며... 무척 반가워 하면서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아이치 현(愛知県)에 산다는 오가사와라는 일본 전국을 자전거로 일주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 그런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내게는 이미 카메라 배터리도 방전되고 스마트폰은 망가져 있었다. 함께 찍은 사진은 그가 훗날 메일로 보내준 것이다. 


오후 5시경(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배를 타고 시코쿠섬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가량 배를 타고 왔더니 퇴근 무렵이라 활력이 넘쳤다. 회사원들과 학생들 자전거의 물결 물결...  

이제부터는 남은 사진도 없다. 


호텔로 돌아와 맡겨둔 자전거 박스를 찾아 분해와 포장을 시작했다. 

한 달 동안이나 별것 아닌 자전거 박스를 보관했다가 내어 주는 그 친절함이라니... 


순서대로 바퀴와 핸들을 풀고...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끝내 패달 하나를 분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분리할 때 너무 간단히 분해가 되었기 때문에 방심했었는데...여행 도중에 깨진 패달을 마쓰야마에서 새로 교체하면서 무엇인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사는 풀릴 생각을 안 했다.  두 시간 이상을 허비했지만 끝내 분해를 하지 못하고 결국 박스 한쪽에 구멍을 뚫고 비죽 튀어나오게 한 상태에서 테이프로 마감을 해야 했다.땀을 비 오듯 흘려야 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마지막 고빗사위를 넘게 될 줄이야...   


저녁 시간을 또 놓쳤다. 식당에 가서 조금 비싼 밥을 호사스럽게 먹으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또다시 할인점에서 들러 도시락을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때웠다. 


달리 무엇을 하게에도 어정쩡한 시간이고, 스마트폰도 망가진 상태라 기록을 하기도 어려웠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어제 사다둔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했다.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일본에 오던 날 꽤 비싼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고 온 게 기억이나 공항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직원들에게 바퀴차를 빌려 길 건너 공항버스 정류소까지 짐을 실어다 놓고 반납을 했다.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현지 직원이... 손에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짐은 한 개 뿐인데 핸들바 백과 작은 패이어 등을 들고 타려는 나를 제지했다. 알겠다며... 랙팩을 벌려 작은 짐들을 우겨 넣어 부치겠다고... 

이런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결국 작은 패니어 하나와 핸들바백 두 개를 들고 탈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말을 쓰는 승무원이 나의 여행을 짐작하고 하는 말인지...얼굴이 까맣게 탄 나를 향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이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날 밤 가족들과의 재회는 눈물겨웠다. 

또 언젠가 길 떠날 꿈을 꾸면서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23 - 1번 료젠지 앞 게스트하우스~ 다카마쓰 토요코인호텔 


주행거리 94.8km 

새벽 네 시쯤 누군가 살그머니 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갔다. 나도 잠이 깼다. 

부스럭거리며 투숙객들을 깨우기 싫어 누운 채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 시경  일어나 홀로 아침을 먹었다. 새벽에 빠져나간 이를 빼고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 사 온 두부와...여행을 마칠 때까지도 조금 남아있던 북어로 국을 끓여  밥 한 술 말아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오는 북엇국... 스무살 때 자취 시작하는 내게 어머니가 전수해준 다섯 가지 국 레시피 가운데 하나였다. "물에 불린 북어를 물기를 꼭 짜고 참기름에 달달 복다가 찬물을 부으면 뽀얀 국물이 우러나온다... " 가난한 자취생을 연명시킨 고마운 국이다. 국을 끓일 때마다 어머니가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설거지를 끝낸 무렵에야 한둘씩 잠에서 깨어 떠날 채비를 했다. 


후지산 인근에서 왔다는 가와베 군  출발.



나가노에서 온  다카하시군. 자전거 순례를 마쳐간다고.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현. 4년 전 북알프스, 가미고지(上高地)로 야리가다케 등반을 하러 간 적이 있어 어쩐지 이 친구가 더 친근하게 여겨졌다.  



길을 떠나는 몇을 빼고는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때문인지 대개들  늦잠을 잤다. 


순례길에서 몇 차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던 사토미 아다찌도 자고 있는 것 같아 인사도 못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왔다. 



1번 사찰... 료젠지에 가서 코오보 대사께 이제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대사님을 알게 돼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조금 감회가 복잡해져 자판기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잠시 앉아있었다. 


오카야마에서 왔다는  아오이가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절로 올라온다. 이 생활자전거로 일본을 일주하고 있다는 친구다.  간밤에 게스트하우스 주인 양반이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를 잘한 짓이라고 연설할 때 '듣기 싫은 사람도 있으니 그쯤하고 그만하라'고 제지하던 의협심 있는 여성이다.  


'일본 일주중 잘 곳을 찾고 있어요'  자전거에 써붙인 글 귀.  대단한 친구다. 



그에게서, 간밤에 유쾌하지 않았던 대화에 대해 일본사람을 대표해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느껴졌다. 나는 무슨 새삼스러운 일을 겪은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 덤덤하게 인사를 했다.

 



오히려 아오미의 자전거에 붙어 있는 '곰 출현 주의' 스티커가 재미있다고 했더니...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 붙인 것이라며... 그곳에는 정말 곰이 나타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ㅋ  

이 스티커는 곰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냐고... 



다카마쓰로 바로 돌아 가기는 아쉬워... 도쿠시마 시내쪽으로  달려보았다. 



료젠지에서 도쿠시마 중앙공원까지... 직선거리 10.3km. 일관되게 다음 절과 휴양지를 향해 달기관차처럼 달려왔는데 갑자기 목적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도쿠시마 역과 중앙공원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썼다. 열 장 한 묶음을 샀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문득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무렵 나와 불화하고 있던 대학 1학년생 큰 딸아이가 제일 생각이 많이 났다. 

대학입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딸 아이는 술에 취해 자정 넘어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몇달씩 불화가 이어지곤 했다.


첫딸을 낳고 얼마나 대견하고 이쁘던지 품에 안고 물고빨며 키우던 기억에 나는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아이는 이미 성인이 돼 있었다. 

   



나에 비해 아내는 관대했다.나를 향해 '당신 대학 1학년때를 떠올려보라'고 충고하곤 했다. 


아와오도리(阿波踊り) 회관에 들러볼까 싶었지만 마음이 어쩐지 초조하기도해 그냥 다카마쓰로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매년 8월 15일에 도쿠시마에서 열린다는 세계 최대의 댄스페스티벌 아와오도리 마츠리, 언젠가 한 번 와 보고 싶다.

 


도쿠시마 시내를 배회하다보니 드물게 가톨릭교회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한가해 보였다. 게시판에는 영어회화 강좌 등을 안내하는 게시물들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신구교를 합쳐도 기독교 신도는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체인구 1억2천 8백만 중 가톨릭 95만 개신교 43만?)


간밤에... 그 무례하던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한두 일본 젊은이들이 '왜 한국에는 기독교신자가 많은가? ' 질문했었다. 내게도 궁금한 부분이다.  '교육과 의료...등  선교사들이 조선에 근대를 전파했다. 아마도 그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대답은 그정도였다. 


렇다 해도, 온 세계를 선교할 것처럼 의욕이 넘치는 한국의 기독교.는 정말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일본이 조선에 수도와 전기를 놓아주고 교육도 시켰다." 간밤에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내뱉던 무례한 말들이 생각나 달리면서 불쑥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들을 탓해 무엇하랴. 한국의 유수의 학자들이나 보수적인 언론들조차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들고 나오면서 스스로 교과서마저 거꾸로 고치고 있잖은가. 


자꾸 그  생각이 떠올라...좀 더 모질게 대꾸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되기도 하고... 마음이 들끓었다. 근 한 달 가까이  절마다 들러 향을 사르며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未觸法)......"  반야심경을 독경하던 고요한 마음이 일순간 휘저어진 느낌... TT 


내 마음이 산란한 것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과오를 직시할 용기도 없는 일본에... 과연 희망이 있나? 싶었다. 


아니다.이번 여행 길에서 만났던선량한 이웃들. 그리고 이전에 만나오던 일본 그린코프 생협같은 곳들의 건강한 시민들.그런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비뚤어진 국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이웃나라 건강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끼리 마음을 모아야 한다.  

 

시내 관광에는 흥미를 잃고 다카마쓰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 12시반. 점심시간이 되었다. 기타(북)도쿠시마 맥도날드점. 구경도 할 겸 충전도 할 겸 들어가 보았다. 아르바이트생 모집 전단을 보니 시급이 시간 당 800엔이란다. 

 

 

빅맥지수로 각국의 구매력과 물가수준을 비교한다던데, 한국과 일본의 빅맥가격은 3600 원 정도로 비슷한 반면 시간당 임금은 한국 5000원, 일본 8천원. 

흔히 일본에 대해 나라는 부유하고 국민은 가난하다며 일본의 비싼물가와 생활비를  지적하지만 한국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서 경험한 식료품 가격 등은 일본이 더 저럼했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서민들의 처지는 쓸쓸하지만 우리도 이제 별반 다를 게 없고,  밥이나 빵 같은 식료품의 가격은 낮고 질은 한국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첫날 도쿠시마쪽으로 올 때 이용한 해안 도로가 아니라 질러가는 길인 것 같아... 42번 도로로 산을 넘어보기로 했다.



고행을 자처한 것이다. 오늘은 오늘의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는... 피학습성이 몸에 배기라도 했단 말인가? 



산길이 시작되는 초입. 낯선 풍경의 미치노에키가 있다. 도이치촌. 1차대전 당시 이 인근에 독일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독일군이 왜 여기까지 와서 수용되었을까 ? 

 


독일풍의 아이스크림과 기념품 등을 파는 ... 휴게소인데... 통행이 뜸하다보니... 손님도 나 혼자뿐이었다. 


오후 2시 고개 정상에 도착. 또 다시 산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산 아래 길 가에서 도시락으로 싸가지고 온 주먹밥을 먹었다. 이제 ... 취사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142번 도로로 산을 넘어 만나는 11번 국도 ... 뙤약볕에 하얗게 달궈져 있었다.  이번 순례에서 가장 자주 만나던 섬 일주 도로 같은 간선도로다. 


오후 4시... 다카마쓰까지는 아직도 40여 킬로미터가 남아 있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원래 내일 하루만 예약했으나 방이 있으면 오늘도 묵고싶다고... 다행이 방이 있다고 했다.   



히가시가와시를 지나 편의점에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볕이 너무 뜨거워 건물 뒤 그늘에 가서 쪼그려 앉아 먹으며 잠시 더위를 식혔다. 또 얼마쯤 달리다 비타민 음료를 마셨다. 7월말 서울을 방불케 하는 불볕더위다. 


드디어 우동의 고장 사누끼시. 이제 다카마쓰시가 멀지 않았다. 



해질녘 드디오 다카마쓰가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캠핑장을 못 찾고 잘 곳이 없어헤매이던 요시마와  어듬이 내린 거리에서 처량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철교도 보였다. 



호텔도 예약했겠다 이제 바쁠 게 없다. 어딘가로 꼭 가야하는 약속이나 쫓기는 일도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달렸다. 

하교길에서 흰 안전모를 쓰고 해맑은 표정으로 거리를 달리는 남여 중고생들. 귀여운 녀석들. 


공교롭게도... 다카마스 시내로 들어올 때 핸들바에 결착해둔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액정 디스플레이가 깨지고 전원도 나가버렸다.호텔예약도 했고, 길도 아는 곳이라 별 타격은 없겠지만 GPS, 사진과 글 저장매체 ...그리고 집으로 연락하는 통신수단... 전적으로 의존하던 스마트폰이 그렇게되고나니 허전했다. 

 

밤 일곱 시가 다 돼 호텔에 도착했다. 낯 익은 주차관리 아저씨와 프론트의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역시 '헨로사마'에게는 할인을 해준다고. 이틀 연속 청소없이 방을 이용하는 그린프로그램까지 포함해 4500엔.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뒤... 거리로 나와 아케드 상가를 구경했다. 맛있는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을까 하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기도 어쩐지 ... 그러고 싶지 않고...  자전거를 세워두기 마땅치 않았다. 



할인마트 마루나가에서 이틀 동안 마시겠다는 포부로 6개들이 맥주와 반액할인하는 초밥 도시락, 귤 등을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몸이 며칠 동안 햇볕에 달궈진 몸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내일... 시코쿠에서의 마지막 하루...  느긋하게 빈 자전거로 관광을 할 생각이다.  













































22- 6/11 다카마스 토요코인호텔~도쿠시마 1번 료젠지 앞 게스트하우스

운행거리 88.68km



오늘이 순례 마지막이 될까? ... 

 

역시나 새벽에 잠이 깼다.  여섯 시까지 침대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 7시에 로비에 내려가 밥을 먹고 올라왔다. 짐을 다시 꾸리고 자전거에 패니어를 장착하고 8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 



출근길 시내를 거쳐 야시마(屋島)로... 


편의점에 들러 순례 기간 내내 거의 매일 아침 한 통씩 마신 500 ml 카페오레를 오늘도 마셨다. 쏟는 땀이 엄청난 때문인지...  작지 않은 이 음료 한 통을 단숨에 마시는 일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20일 넘는 기간 동안 내내 잘 먹고 소화도 잘 되고 속도 편했다.


어제 저녁에 이미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기에 더 이상 경로를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곧장 시내를 가로질러 야시마에 들어가... 가타모토(潟元)역에서 멀지 않은 등산로 들머리로 직진... 어젯밤...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근길 주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릿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야시마지(屋島寺)는 섬의 산마루에 있다. 한 정거정을 더 가면 고토덴야시마(琴電屋島)역 앞에 자동차도로(屋島ドライブウェイ)를 오르는 버스(100엔)도 있지만, 다카마쓰 시내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등산로 들머리를 찾아갔다.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뒤 산 비탈 주택가 골목길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핸들바백만 메고 가볍게 산길을 올랐다. 



참배 때문인지, 건강을 위한 아침 산책인지...  산을 오르는 주민들이 많았다. 대개 주부들이나 은퇴한 노인들이다. 

더러 젊은 순례자들도 눈에 띄었다. 남산이나 북악산처럼... 시내를 조망하면서 느긋하게 오르는 도시의 산이었다. 만약 다카마쓰로 그저 관광을 온다면, 다카마쓰역에서 야시마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한 시간에 한 대 다닌다는 버스를 타고 이 절에 오르면 ...산정에 있다는 전망대에서 세토내해를 조망하면 되겠다. 



당나라의 이름난 스님이었다는 간징(鑑真)화상이 754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규모도 크고 ... 분위기도 차분하다.  



 어지간히 빨리 산을 오르는 ...나를 추월해 번개처럼 달려 올라와  참배를 하고 말을 걸 짬도 안 주고 역시 산을 달려 내려가던 젊은 헨로.... 





어제 저녁...   서서히 어둠이 짙어가던 늦은 저녁... 조금은 막막한 심정으로 야시마 섬을 한 바퀴 돌 때...  섬의 중턱으로 나 있는 도로를 횡단해 이어져 있던 도보 순례길...   



야시마지에서 이렇게 85번 야쿠리지(八栗寺)로 도보 순례길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야쿠리지까지는 걸어서 6.3km


10시30분 야시마지 참배를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로에서 아다찌 상과 다시 마주쳤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사흘 만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나는 내려가면서, 산길을 올라오는 아다찌 상을  그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한 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 순례자들이 입고 다니는 하쿠이(白衣)를 입고 거침없이 산길을 올라오는 모습이 놀랍기까지 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달리던 해안의 11번 국도며 징징거리며 올랐던 수많은 고갯길들을 ... 저 어린 여자가 고스란히 자전거를 타고 거쳐왔을 게 아닌가...  



"아다찌 상,  반가워요. 괜찮으세요? " 

"김상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다시 만나면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 ? " 

"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 세 곳의 기념품이에요."  


아다찌는 매고 다니던  힙색에서 나무로 된 작은 기념품을 꺼내 내게 주었다. 


오헨로상들이 순례에 나서기 전에 교토에 있는 도지(東寺) 등  대표적인 사찰 세 곳에 들러 순례자들의 필수품인 금강장과 삿갓과 작은 가방( 頭陀袋 ずだぶくろ)을 미리 장만하는 모양이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이 작은 기념품을 받고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다찌, 나는 아무 것도 줄 게 없네요. 어쩌죠. " 

"아, 괜찮아요."   


그는 오늘,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 순례를 마친 마치면 오후 서너 시경일 텐데.. 그 뒤에 1번 료젠지까지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 비로소 오늘 순례가 끝나는구나...' 

나는 아다찌의 말을 듣고서야 순례가 오늘 중으로 끝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순례를 하는 도중에 뒤늦게 알았지만,  순례자들은 88번 사찰까지 순례를 마친 뒤 다시 1번 료젠지에 가서 코오보 대사께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고 보고를 하고... 거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도쿠시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카야마에 있는 고야산까지 가서 참배를 함으로써 비로소 순례가 마무리되는 완전히 '결원(結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  


"글쎄,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해 놓은 건 없어요." 

"그래요? 저는 오늘 료젠지까지 갈 예정입니다. 절 앞에... 순례 시작할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원하시면 거기서 묵으셔도 될 겁니다. " 

" 그래요? 만약 저도 료젠지에 가게 되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을까요?" 

" 오헨로상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니 아마도 괜찮을 거예요." 



고야산까지 갔다 오는 것은 사흘 뒤인 14일 오전에 예약해둔 귀국 일정 때문에도 안 되고... 그렇다면 이 순례의 출발점이었던 료젠지에는 가야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귀국하는 날은 아침일찍 공항에 가기 바쁠 테고... 오늘을 빼면 이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료젠지에서 오늘 하루를 자더라도... 다음 날은 다카마쓰까지 80km 가량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귀국 전까지 단 하루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일단, 사찰 순례를 마무리 하자... 


아다찌 상과 또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산길을 내려와  자전거를 세워둔 지점으로 돌아왔다. 경사가 급해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마을쪽으로 50m쯤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아다찌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아다찌는  도쿄에서는 도둑 때문에 자전거를 길에 세워둘 수 없는데 시코쿠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고...  일본도 대도시에서는 자전거 도난이 흔한 모양이다. 



시내 주택가인데도 저수지가 있다. 인근에 농경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84번 야시마지에서 85번 사찰 야쿠리지(八栗寺)까지는  5.5km. 11번국도를 따라 시내를 달리다가 전차 야쿠리(八栗)역 인근에서 야쿠리지 표지판을 보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가면 된다. 



야쿠리지는 산 중턱에 있지만... 



언덕을 조금 오른 뒤에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된다.  케이블카 코겐잔(五劍山)역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것을 타고 올라가기로...  


11시 45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  85번 야쿠리지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케이블카라고 하는 공중에 매달려 가는 운송 수단을 일본에서는 로프웨이라고 하고... 



급경사면에 굵은 쇠줄을 감으며 올라가게 되어 있는 기차를 가리켜 케이블카라고 ... 



야쿠리지(八栗寺).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이곳에 밤 여덟 알을 묻어두고 무사귀환을 기원한 뒤 떠났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하늘에서 자오곤겐(蔵王權現)이  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내려오며... 이 땅이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고했다고...  코오보 대사가  그 칼들을  다섯 개의 산봉우리 묻었는데, 다섯 개 중 산봉우리 한 개는 3백년 전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   




동일본 부흥기원... 아마도 후쿠시마가 있는 동북지방의 복구를 염원하는 포스터인 것 같다...



후쿠시마는 이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파괴된 핵발전소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방사성물질을...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미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성물질이 체르노빌 사고 때의 열 배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핵폐기물은 보관하는 것 말고는 근원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없는 상태로... 핵발전을 지속하는 것... 그 자체가 인류의 비극적 전망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천재지변이든 전쟁과 같은 재난이든 사고나 고장이든... 핵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 일 것이다.  발생 시점이 문제일 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일본의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다행히 날이 맑다. 하늘도 파랗고.



도보 순례자들은 곧장 산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12시 15분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



야쿠리지 역 앞에서 86번 시도지(志度寺)까지는 8km. 오르막 없는 평탄한 시내 도로를 달리게 된다. 야쿠리지에 올라가 참배를 하고 내려오면서, 아다찌 상과 또 마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순례의  마지막 순간은 고요하게 마무리 하고 싶었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일지라도... 마주치고 인사하고 그런 일들이 조금 성가시기도 하고 

아다찌상에게도 일생에 ... 몇 번 없을 큰 프로젝트일 시코쿠 순례가 

우연히 자꾸 마주치는 외국인 아저씨 때문에 산란스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싶었다. 


마침 점심 시간도 되었다. 절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케이블카 역 앞에 있는 우동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조금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했다. 


길을 찾는 면이나 도로 주행능력 면에서... 아다치는 남자인 나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우월한 것 같았다. 며칠 전 처음 만난 날... '당신 운동선수였냐? ' 이렇게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다시 시내를 달린다. 


그런데, 86번 시도지(志度寺)를 앞둔 지점에서 건널목에 앞서가고 있던 아다찌 상과 다시 만났다. 이 여자는 점심 밥도 안 먹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야시마지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했을지도 모르겠다.  



86번 시도지(志度寺)


먼 옛날, 당나라로 시집 갔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中臣鎌足 614~669)의 딸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공양물로 삼아 여러 보물들을 오빠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에게 보냈는데, 사도만에서 폭풍을 만나 보물들 가운데 구슬 하나를 바닷 속 용왕에게 빼았기고 말았다. 


후히토는 이 구슬을 찾으러 바닷가에 있는 이 마을에 왔다가 이곳에 사는 해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낳은 사람이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 뒤에 해녀는 남편의 신분을 알게 된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해녀는 남편에게 아들 후사사키를 정식으로 후지와라 집안에 들여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신의 몸에 밧줄을 감고 그 구슬을 찾으러 용궁으로 들어갔다. 이를 알아차린 후히토가 급이 밧줄을 건져올렸으나 이미 해녀의 몸은 용신에게 물어뜯긴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의 구분 없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런가 보다... 자신의 몸이 물어 뜯기는 한이 있어도  자식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보내놓으면 그것으로 보람을 삼는...   


나는 본당에 들러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나와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아다찌는 본당을 거쳐 대사당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87번 나가오지(長尾寺)까지는 곧장 북쪽으로 뻗은 3번 국도를 따라 섬의 내륙쪽으로 7.3km 가량 달리면 되었다.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밀밭이 있길래 일부러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도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모를 심는지는 모르겠다. 


단 두 개의 절만 남았다. 절까지 가는 동안 오렌지타운이라는 전원주택단지 같은 곳이 있었다. 


도로 한 곳도 허투로 방치되어 있지 않고 잘 관리되고 있는 사회. 공중 예절을 잘 지키며, 이방인들에게도 친절한 주민들. 외견상 일본은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맑고 쾌활한 모습...방과 후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노는 아이들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스치듯 얼핏 보기에...  어른들은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였고 지쳐 보였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한국과 일본은 농업이 신통치 않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농업을 포기하고 제조업과 수출에 기대 경제를 급격히 발전시킨 방식에서 한국에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핵발전을 기반으로 자국 농업을 팽개치고 무역에 의지해 경제 규모를 부풀려 가는 방식이 ...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허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일 만큼이나 허망한 일이 아닐까. 



오후 2시 반, 87번 나가오지(長尾寺)에 도착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텅 빈 드넓은 사찰 경내... 그리고 순례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어떤... 홀가분한 심정, 그리고 아쉬움 ...  



쇼토쿠 태자가 절을 열었다는 설도 있지만,  덴표(天平)11년 쿄키보살(行基菩薩)이 열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쿄키보살이 땅을 걷고 있을 때  한 버드나무에 신령스러움을 느껴 그 나무에 관세음 보살상을 새겨 이 절에 본존으로 안치하고 법상종(法相宗)을 창건했고,  그 후,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떠나기 전에 이 절을 찾아 연초 7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 풍습이 현재까지 계승 돼 매년 정월 칠일,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코오보 대사는 다시 이 지역을 찾아와 불교의 밀교 경전인《대일경(大日經(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을 돌 하나에 한 자씩 새겨 공양탑을 세우고 법상종에서 진언종으로 개종 했다고 한다. 


*《대일경》은 7세기 중엽 서부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고 선무외(善無畏: 637~735)의 한역과 

9세기 초 인도 승려 시렌드라 보디와 티베트의 번역관 페르체크가 공역한 티베트어 역본이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천황이 귀의 한 사원이지만, 전국시대에 전쟁에 휩싸여  본당을 빼고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가 에도시대에 번주  마쓰다이라가 중창하고 이때 다시 천태종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만 남았다. 마지막 22km... 계속 오르막이다.  도중에 있다는 헨로교류살롱까지는 5Km 남짓, 거기서부터 오쿠보지까지는 또 다시 15Km 남짓... 역시나 계속 산을 올라야 한다. 


나가오지를 빠져나오는데 ... 아다찌가 막 도착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86번 시도지에서 87번 나가오지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나는 GPS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평속 30km 가까이... 빠르게 달려왔는데... 그는 내가 본당에 참배하고 납경을 받는 정도의 짧은 시차를 두고 절에 도착한 것이다. 역시 대단하다. 



이제 선거가 임박했을 것이다. 시코쿠를 도는 동안 선거 포스터를 계속 보아왔다. 

역시나 자민당의 구호는 '성장' 이다. '희망과 성장' 


경제규모로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에서도 보수 여당의 구호는 역시나 성장이다. 일본 경제가 더 성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될까... 만약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믾다면 그것은 경제 때문인가...  



사민당이나 일본 공산당의 구호는 이에 비해 탈핵이나 평화 같은 것이었다.  일본도 우리도 경제성장이나 부의 집적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음의 평화는 돈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세대처럼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인류는 전 세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없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 수출액은 1966년 1억달러... 기억 속에도 우리가 겪은 유년시절은 세계 최빈국의 수준이었다. 1970년대 1천불소득 100억수출을... 초등학생들도 노래가사처럼 외고 다녔다. 2013년 한국의 1인당 연간 소득은 2만4천 달러에 가깝다고 한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예가 드물고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조금은 으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자살률, 이혼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살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제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일... 이웃과 함께 사는 일에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르막을 2,3 km 가량 올라간 지점에... 큰 인공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마에야마 오헨로교류살롱 (前山おへんろ交流サロン)과  나가오 미찌노에키 (道の駅ながお)가 있었다. 

오헨로 교류살롱은...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센터, 자료관 역사관 같은 곳이었다. 



섬 전체를 모형을 만들어 놓고 88개 사찰을 표시해둔 모형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저 험준한 산과 계곡을... 패달을 밟으며...때로 비에 젖어 밤길을 달리며... 지나왔구나... 




고승들의 유적들도 전시 돼 있고...



절들마다 전해오는 전설도 ... 아이들을 위해 쉽게 만화로도 설명해 놓았다. 



30분 가량 구경을 마치고...나와 맞은 편에 있는 미찌노에키에 들러 음료수를 사 마셨다. 

이제 산길을 15km 꾸준히 올라가는 수밖에... 외줄기 3번 도로를 따라 꾸준히 오르다가... 한 차례 377번 국도로 좌회전 해서 5km 남짓 달리면 88번 사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도보 순례자들이 걷는 길과 자전거가 가는 길은 간간이 만나기는 하겠지만... 길이 겹치지 않는다. 자전거 순례자를 위한 안내 스티커는 좀처럼 보지 못했는데...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외줄기 도로에서 막판에 발견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 외진 산길... 아다찌는 앞서 갔는지 뒤쳐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절을 1km 앞둔 지점에서 자전거 끌고  걸어 올라가고 있는 아다찌와 또 만났다. 나는 기어를 기어를 최대한 낮추고 신음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가며 그를 추월하며 손을 흘들어 인사를 했다. 그는 '어라' 하고 잠깐 놀라는 소리를 냈다. 



오후 4시 40분 드디어 결원(結願)의 성지...  88번 오쿠보지(大窪寺)에 도착했다. 


해발 782m  도봉산 정상 정도의 높이... 산중이라 해가 더 빨리 져  산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본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미즈야에서 역시나... 죄업의 근원이라는 손과 입을 헹구고...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 

가자! 가자! 저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저 온전한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반야심경은 한 번에 독송 하기에도 적당히 짧으면서도 불교의 핵심이 다 추려져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다. 

한 자 한 획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는 완벽한 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현실에 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저 높은 경지로 가자는 이 마지막 진언이 특히 가슴을 치곤 했다.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 이 말을 되뇌일 때면 살면서 겪게 되는 째째하고 비루한 일들쯤 아무 것도 아닌 듯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 막막한 저녁시간에 나는 틈틈이 반야심경을 베껴 쓰면서 절망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곤했었다. 그 뒤로도 살아오는 동안 틈틈이 ... 그랬다.  



납경소 앞에는 순례를 마친 이들이 코오보 대사의 분신처럼 순례길 내내 함께 걸어온 금강장(즈에)을 봉납하게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문예반 지도교사며 시인이던 국어 선생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은 수업에 들어와 한 마디도 안 하고 오늘은 '묵언의 날' 이라고...칠판에 쓴 뒤 한 시간 내내 판서만 하다가 나가시는가 하면... 하루는  학과 진도와는 무관하게...  반야심경을 한 줄 한 줄 써주시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본래 수업시간에 다른 책 읽기가 특기였던 나로서는... 어느 수업보다도 그 시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 생전에 틈틈이 독송하시던 반야심경이 그런 의미였구나...싶기도 했고 말이다. 




경내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불길을 보존해 놓은  곳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본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라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염원도 클 것이다. 진보적인 야당들이 평화헌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불 앞에서 동전을 보시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두 번 다시... 지구 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핵폭탄을 투하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본당 참배를 마칠 즈음 아다찌가 도착했다. 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김상 잠시 뒤에 참배 마친 뒤에 함께 사진 찍어요."   



나는 22일만에... 그는 나보다 오륙일 정도 더 달렸다고 했으니 거의 한 달만에... 순례를 마친 것이다. 

"아디찌 상 축하해요. 당신 참 대단해요. 깜짝 놀랐어요." 


그는 료젠지로 가겠냐고... 다시 내게 물었다. 이미 시간이 다섯 시가 넘었다. GPS 상으로는 40km 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지금부터 달려도 도착할 수 있겠나?" 

"내리막길이니까...  빨리 달리면 ..." 



젊은 여자가 순례를 마친 일이 일본인 순례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남자 순례자가 좀처럼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아다찌를 따라다니면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대화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출발이 20여 분 늦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이 될 일본의 산골 마을을 지나치며 ... 30km 정도 빠른 속도로 줄곧 달렸다. 



산을 내려가면 도쿠시마 시가 나올 것이다.  내가 주춤 주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만큼 경사가 가팔랐지만, 앞서 달리는 아다찌는 무서운 속도로 내리막길을 달렸다. 덕분에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다. 



도중에 아다찌가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예약을 해주었다. 


산을 다 내려온 다음에야...사진을 찍을 여유가 생겼다.





도중에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투숙객들이 할인점 마루나카로 마중을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라는 젊은 친구(이름도 잊었다)와 젊은 여자 두 사람... 이들 모두 새로 순례를 떠날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다치는 출발 전에 도쿄에서 와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고 했다.  


장을 보길래... 저녁을 같이 지어먹는가보다...싶었는데... 각자 먹을 것을 고르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식료품은 일본이 훨씬 싼 것 같았다.  



사진 속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조금씩 대화를 이어갈 수록...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어쩐지 나를 빈정거리는 느낌도 들고... 비열하게 비웃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얘가 왜 이러지? '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게스트 하우스는 료젠지 정문 앞에서 길 건너 곧장 뻗은 골목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장을 보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저녁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마당도 있고.. 거실과 방이 서너 개 가량 있는 꽤 넓은 집이었다. 우타쬬에 있던 우탄구라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규모나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지... 젊은이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이 게스트 하우스는 게으른 대학생들이 단체로 자취를 하는 집 만큼이나 어수선하고 황량했다.  우탄구라의 두 부부가 정성껏 가꿔놓은 집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숙박비는 2천엔. 침낭을 소지하고 있어 침구(시트와 담요)를 쓰지 않으면 2백엔 할인해서 1800엔이라고 했다. 

식탁에 있는 밥솥에서 밥은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밥이 떨어지면 자유롭게 쌀 포대에서 쌀을 덜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차례를 기다려 샤워를 하고... 장 봐온 반찬거리들로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사 가지고 온 캔맥주도  가볍게 마셨다. 함께 마실 줄 알고 여섯 개 들이를 사왔는데 각자 자기 것을 마시는 눈치라 두 캔만 마시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기부했다.


사진 속에 있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갸냘픈 여성들도 다음날 자전거 순례를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아다찌와 달리 자전거도 기어도 제대로 없는 생활자전거인데다  매사가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이들도 조금씩 단련이 되어 가리라... 


후지산 인근에서 왔다는 가와베 군, 나가노에서 왔다는  다카하시는 자전거 순례를 거의 끝 마쳐간다고  했다. 오카야마 아오이... 등 


이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젊은이들은 대개 여행 경험담을 나누며 순례를 마친 사람과 ㅅ작하는 사람들이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데... 


주인장은 나를 의식한 때문인지... 계속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런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어느 정도 상대의 의중을 읽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외교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이니까 서로를 잘 이해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식으로... 


그런데 그 자는 끝나 속내를 드러내고 계속 도발을 했다. 


유튜브에서 나찌나 군국주의 일제 시대를 연상케 하는...  일본 사람의 웅변조 연설을 틀어주면서 보라고 했다. '제군들... ' 하면서 악을 쓰는 영상 속의 사내는 대화혼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다. 도쿄대 강당에서 운동권 학생들과 혼자 맞서 토론을하고, 자기 집 테라스에서 군중들을 향해 대중연설을 한 뒤  할복 자살을 한 미시마 유키오를 연상케 하는 그런 광적인 분위기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는 마침 한국인 잘 만났다는 식으로 내게 말을 툭 던졌다. 

"뭐가  달랐냐? " 

"일본은 조선에 학교를 세워 교육도 시키고, 철도나 전기도 부설해 주었다. 조선을 도왔다. " 

"...?! ...  일본 학교에서는 역사를 그렇게 가르치냐?  일본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조선에 학교도 전기도 철도도 없었을 것 같냐? "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 사람 수십 만 명을 죽이고 전쟁과 징용에 끌고 갔고, 수십 년 동안 식량과 자원을 수탈했다. 독일이 과거를 참회하고 철저히 청산하는데 비해 일본은 자신들이 한 일을 인정도 못하는 것 같다."     


일본 친구들이 오히려 주인장에게 '듣기 싫은 사람들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요구 했다. 주인장의 극단적인 의견 피력도... 다른 투숙객들이 주인장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것도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흔히 봐 오던 이본인들의 태도와는 달라 의아했다. 


그냥 짐을 꾸려서 그 집을 나올까 하다가... 그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그냥 꾹 참고 자기로 했다.  


나는 평소에... 국가나 민족을 강조하는 데 반발심 마저 가지고 있다. 월드컵 응원의 광기도 거북하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소통하는데  국적이나 피부색,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그 신념이 시험 받을 기회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국가를 강조하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을 혐오도 하고 차별도 하고  침략도 하고 수탈도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전쟁과 비극의 씨앗이었고 말이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두 나라의 시민들이 서로를 적대시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지막 날 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맛 보았다.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 조금만 자제력을 잃었다면 개처럼 끌고 나가 그 놈을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무슨 소용이랴... 이 자들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면... 

그것이 일본 소시민들의 수준이고 하나의 흐름이라면...  한일 관계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떠들썩한 그 방을 빠져나와 침실로 쓰는 다다미방에 와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일본 총선은 어쩐지 해보나 마나일 것 같았다. 핵발전소 폭발까지 일어나 침체될 대로 침체된 일본은... 이렇게 또다시 밖으로 원인을 돌리면서 여론을 전환하려고 하는구나... 


날이 밝으면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여행의 마무리가 이렇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던 바였다. 유감스럽게 ... 



음료수 600(4회)  점심 우동 450엔  간식 500엔  납경 450엔 , 게스트하우스1800엔   저녁 아침 먹을거리 장본 것 2000엔  

*  자전거 순례를 다년온 지 일년이 다 돼 가도록 기록을 마치지 못했다.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기록은 무엇을 위해 왜 해야 하나 하는 회의도 있었다. ... 이렇게 ... 게으름을 피우던 중 ,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졌다.  차마 무슨 이야기를 태연하게 쓰기가 어려웠다. 

이런 세상을 우리 세대가 만들었구나... 개인에 따라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회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방조를 하거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고 생명이고 인권이고 뭐고... 

오로지 돈과 출세, 경쟁과 이익만을 위해 안면몰수... 맹목으로 질주하는 이런 사회를 만들고 ... 그 천진한 아이들을 몰살시키는 일에 부역을 했구나 적어도 방조는 했구나 하는 심정에 참담했다. 


또 다시 새벽마다 잠이 깨는 일들이 되풀이 됐다. 이 기록도 더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4년 5월 25일) 



# 21:  6/10 월  우탄구라ㅡ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운행 81.81km

역시나, 간밤에 과음을 했다. 그러나 다섯 시 경 어김없이 잠이 깼다. 날이 완전히 개어 있었다. 



지난 밤 안수창 씨 식당 '낙원'에서 이리에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사모님이 차린 8가지 반찬의 황송한 아침상을... 받았다.   순례자들의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신다고 ... 이렇게 덕을 쌓고 계시는구나... 


순례자들을 자기 집에 재우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간식을 내밀거나 ... 오히려 오셋타이라며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돈을 손에 쥐어주고 가는... 이런 수많은 주민들이 시코쿠를 시코쿠로 만들었으리라...  


쌀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다 먹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보고 사모님께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두 덩어리 주먹밥까지... 

점심은 이것으로 해결하면 걱정이 없겠다... 싶었는데... TT 



두 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탄구라 홈페이지도 숙박하고 간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신다고... 



6시45분  또 다시 출발... 옷도  빨아서 말렸고 날도 개었고 몸도 개운해졌다. 오늘 하루 또 달려보자... 


우탄구라에서 79번 사찰  텐노지(天皇寺)까지는  7.4 km.  철길을 따라 평탄한 도로를 달리게 되어 있다. 등교와 출근으로 부산한 시내를 나만 독특한 복장으로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 시간 가량 달려 절에 도착했다. 절 입구에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있었다. 보통 신사 앞에 서 있는 이 문은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처럼 돼 있다. 성황당에 쳐 있는 금줄이나 솟대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에 세워놓는... 



전설에 따르면, 12대 천황의 아들들인 사루레오가 부하들과 괴물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오히려 잡아먹혔는데, 요코나미묘진(横潮明神) 이라는 신이 이 부근에 있다는 야소바의 영천(八十場の霊泉) 의 샘물을 먹여 모두 살려냈다고 한다... 


이후에 코우보 대사가 이 곳을 찾아왔을 때, 샘을 지키던 산신이 대사께 귀의하고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1156년 내전에서 패한 스토쿠 천황이 이곳으로 쫓겨와 죽었는데, 장례절차를 중앙정부에 상의하는 동안 천황의 시신을 야소바의 샘물에 담궈두었더니 고스란히 보존되었다고...  이 절이  텐노지,  천황사가 된 것은  이런 유래라고...  



참배를 하고 나오니  엊그제 71번  이야다니지(弥谷寺)지 앞에서 만났던 순례자와 다시 마주쳤다. 간단히 목례로 아는 체를 했다. 걷거나 자전거로, 또는 승용차나, 단체 관광버스로... 드물게는 택시를 대절해서 이렇게 순례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비루한 일상을 떠나 불경을 독송하며 탈속한 가치를 떠올리며 걷는 일... 일상에서 쌓아가고 있는 업을 벗어나려는 마음,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돌이켜보면 내게는, 산길을 걷는 일이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북한산이 그랬고... 안산이나 안양 인근에 살던 고단한 시절에는 안양에 있는 수리산과 관악산... 그리고 해마다 서너 번 지리산과 설악산...을 찾아가 걷다보면 옥죄여오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산길을 걷다보면 살아갈 힘이 다시 고이는 것 같았다. 


양배추 수확철인 모양이다. 마사토 같은 사질토양과 비닐멀칭이 없어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농업이 날로 어려워지는 현실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식량자급률도 25%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8시10분 ... 다시 텐노지에서 출발. 80번 고쿠분지(國分寺)까지는 7. 3 km 가량 도로를 따라 달리게 되어 있다. (돌아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차라리 79번- 81번-82번-80번 순으로 가는 것이 길도 편하고 거리도 단축된다고... 도보여행자는 물론 자전거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문제는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와  82번 네고로지(根香寺)다. 지도와 가이드북을 보면 두 절 모두 고쿠분지가 등지고 있는 두 산 봉우리 시로미네산(白峯)과 오히라(大平)산 위에 있다. 두 산은 능선이 이어져 있었다. 고쿠분지에서 산을  올려다보면서 시계방향으로 되돌아 가야 오르막 들머리를 만나게게 되어 있었다.  


미리 지형을 살피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 일정을 앞두게 되면 ... 여전히 전날부터 마음 무거웠다. 스스로 시작한 순례가 여전히 남이 채운 족쇄처럼 버거운 것이다. 



9시,  80번 고쿠분지(國分寺)에 도착했다. 


고쿠분지라는 절 이름이 여러 곳인 이유는, 741년 쇼무천황이 정국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절들이 모두 같은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국사당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남산 식물원으로 오르는 길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돌계단을 볼 때마다 ... 그것이 일제가 남기고 간 유적이라는데 생각이 미처 늘 마음 불편했다. 나라 굿을 하던 국사당을 인왕 선바위로 쫓아내고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천대 받는 실정인데...적어도 일본에서는 신도가 이 나라 최대의 종교가 되어 일상속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 생각해볼 대목이다. 신내림굿을 하는 무당들뿐만 아니라, 마을마다 모시던 성황당이나 집집마다의 터주, 조왕신 등 다양한 전통신앙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근대의 깃발 아래 '미신'으로 몰려 일거에 청산된 일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일본사람으로 자라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스스로 투철했던 박정희에게... 우리 전통은 일본 전통과 달라 청산되어야 할 야만으로 치부된 것이었는지...  



고쿠분지는 이름이나 유래에 걸맞게 무척 넓고 크고 고색창연한 절이었다. 


납경을 받으며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길이 없겠는지 물어보았으나 도리없이 산 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오던 방향을 거슬러 바닷가쪽으로 돌아가서 산을 올라야 한다고...  


도보순례자라면 고쿠분지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81번 시로미네지로  곧장 올라가면  되겠지만 자건거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달려보자...  일단, 81번 시로미네지까지는 14km 가량이다.  마지막 6km는 쉼 없는 오르막이다. 



긴장한 마음을 자전거도 알아차렸는지... 오르막길에 어프로우치 하기도 전에... 도중에 체인이 빠졌다. 비닐 같은 게 감겼던 모양인데,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꽤 애를 먹었다... 패니어를 모두 떼어내고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40분은 족히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짐을 다시 챙기며 살펴보니 분명히 아침에 우탄구라에서 받았던 주먹밥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수창씨가 준 열라면과 삼육두유만...  짐을 꾸리고 인사를 하면서 옆에다 놓고 떠나온 모양이었다. 점심을 어쩔 것인가... 시골길이라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대책없이 오르막이 시작됐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면서... 멀리 세토대교가 내려다보였다. 



12시 경,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에  도착했다. 해발 337m 라고 하는데... 해안선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꽤 까마득하게 올라온 느낌이었다. 




이 곳에서 뜻밖에도 요코미네지 오르던 산길에서  만나 내게 청정()이라는 나무 기념패를 준 분을 다시 만났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나오다보니... 그는 절 입구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도보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나...물으니,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시내 구간은 전철로 이동했다고... 



실례가 안 되면 이름을 여쭤봐도 되냐고... 하니까... '아무 아무개(와다시노 나마에와 고노 요노 ... 나이)' 정도로만 알아두시라고...?  아... 그러시냐고... ^ ^;



납경소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는 디자인도 카피도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취가 시코쿠의 길이 되었습니다.'  루쉰이 했다는 말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아서 ... 길도 처음에는 없었지만... 누군가 많은 사람이 걸어가자 그것이 길이 되었다...' 던 말처럼... 

시코쿠가 시코쿠가 된 것은... 천 년 넘게, 저마다 절박한 사연을 안고 걸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 때문이겠지... 



'청정 아무아무개' 선생은 내게, 이 절의 산문은 다른 절들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고려양식이라 한다. 솟을 대문처럼... 생긴 이 절의 산문이 어쩐지 정겹게 여겨졌다. 



이 절은  오전에 들렀던 텐노지와 연관된 곳이었다. 텐노지에서 죽은 비운의 스토쿠 천황을 장사 지내고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청정 선생'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하는데... 자판기 음료수말고는 먹을 게 없었다. 아침에 흘리고 온 주먹밥이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오히라 산을 향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 보니... 산정 가까운 곳에 온천 휴양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따..땅... 따 ...땅... 



분명히 총소리였다. 사방에 군부대가 있는 우리나라에서야 익숙할 법 하지만... 여기서는 웬 총소리일까... ... 정말 총소리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을 올랐다. 



정말로... 산 위에는 자위대 훈련장이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총성은 계속 온 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군대에서 매일 저녁마다 총을 꺼내 분해하고 기름걸레로 닦고 심심찮게 실탄 사격도 해야 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총이나 총알은 단단한 금속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응축된 살기가 늘 섬칫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겠다는 응축된 의지... 총은 그런 것이었다. 가장 지능이 뛰어나다는 인간만이 총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높은 지능이 우주를 관장하는 힘이나 생명의 본성과는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일본 땅에서도 이런 총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가는 곳마다 심심찮게... 일본의 군사력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일본 헌법 9조를 지키자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구호를 마주하던 것과... '강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아베 자민당의 선거포스터가 겹쳐 보이던 것도 이런 일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말이 자위대지... 사실상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엄청난 플라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이미 2차 대전 당시에 항공모함을 만들고 운영했으며, 인공위성을 스스로 발사하고 있다. 언제든 중국과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군사대국이 될 게 분명하다. 19세기말처럼 ... 한반도의 운명은 또다시 격랑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올라가다 지치면 내려서 끌고... 조금 완만해지면 다시 타고... 시로미네산과 이어진 오히라 산정까지 ...  해발 500미터가 넘었다. 정상 부근에 있는 갈림길에서  82번 네고로지(根香寺)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꼬박 그 높이만큼 다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다. 



오후 1시반...  82번 네고로지(根香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에 가기 전에 초가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고, 832년 치쇼(智證)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천수관음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나무 뿌리로 조각한 본존불이 오래토록 향기 내뿜었다는데서 근향'(根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 


절은 산중이라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인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양쪽으로 회랑이 가운데 정원을 감싸고 둘러 있다. 


회랑 안에는 신도들이 봉헌했다는 3만 개에 달하는 관음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본당까지 이어진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오면... 잘 가꾸어진 중정이 있었다. 



나이든 어머니와 딸... 침묵하며 기도하는 신도들도 꽤 많았다. 



사탕 몇 알과 자판기 음료수 말고는 한 나절 동안 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아침에 산길로 접어든 뒤로는 식당도 만날 수 없었다. 너댓 시간 줄곧 오르막을 오르느라...체력도 고갈돼 가고 있었다.  




다시  그러나 다음 절로 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시 고갯마루에 있는 갈림길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는 다카마쓰(高松) 시내인 것 같았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그 지점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서 온 것이다. 스쳐온 일들이 떠올라 왠지 감회가 복잡했다.  


꽤 긴 거리를 다운힐... 

산을 내려오니 기온도 높고, 공기도 달라졌다.다시 햇살 따가운 한 여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80번대를 넘어섰다.  남아 있는 절이라고 해야 83번부터 88번까지 여섯 개... 



산 아래 마을들은 저수지를 끼고 있었다. 논농사 때문일 것이다. 또다시 11번 국도를 만나고... 동쪽으로 달리다가 83번 이치노미야지  (一宮寺)를 향해 달렸다. 



오후 3시쯤 길가에 있는 중국집(중화소바)집이 있어 늦은 점심을 먹어야 겠다 싶어 들렀더니... 오후 5시까지는 준비 시간이라 밥을 줄 수 없다고...TT  ... 아, 그렇겠지... 그게 정상이겠지... 


점심도 못 먹고 허둥대며 산 아래 마을을 헤맨 게 조금 처량하기도 했다. 


도중에 패밀리마트가 있어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사서... 안에서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TT 문밖 주차장에 예전에 야마시타상이 그랬던 것처럼... 선 채로 컵라면과 주먹밥을 먹었다. 우탄구라에서 두 분이 챙겨준 주먹밥을 잘 간직하고 왔다면 훨씬 여유가 있었을 텐데... 




운행중에 스마트폰에 GPS 앱 로커스프로(Locus pro)를 줄곧 사용했다. 목표지점을 설정하면 방향과 남은 거리를 오프라인 지도상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 없이 여행하는 동안 큰 도움을 받았다.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지고 간 카메라 배터리가 빨리 방전돼 핸드폰 사진을 찍으라 핸들에서 탈부착을 하는 일이 힘들었다. 이 때문에 '고질라포드'로 감고 다녔는데... 두 번 떨어트려 스마트폰 꼴이 말이 아니다. 



아이들 등교시간에 80번 고쿠분지에 들렀는데... 벌써 하교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산을 헤매고 다니 것이다. 밥도 굶은 채... 



일본 아이들이 우리나라 아이들보다는 나아 보였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모습...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겠으나 ...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자정 무렵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나라 같은 곳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4시20분 ... 다카마쓰 외곽에 있는 83번 사찰 이치노미야(一宮寺)에  도착했다. 이치노미야(一宮)라는 명칭은 1679년부터 이 일대 신사들의 중심 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불교 사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이 절에 모셔ㅗ놓은 약사여래의 대좌 아래에는 지옥으로 빠지는 구멍이 있어, 죄가 있는 사람이 머리를 넣으면 빠지지 않는다는 ...  



이미 오후 4시가 넘었으므로...  다음 절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싶어... 절 앞에 앉아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캠프장 두 곳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몇 번 찾아갔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나름 미리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다. 



GPS 포인트를 입력해온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미네야마(峰山) 공원 캠프장 등 두 곳 에 전화 했으나  모두 다 안 된다고... 한 곳은 낮 동안만 개장을 하는 공원이라서... 한 곳은 다음 날인 화요일이 휴일이라서...  안된다고...  도시에 오니 여지가 없다...  캠핑장이 두 곳이나 있어 별 걱정 안 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GPS 포인트에 표시된 캠핑 표시는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젠콘야도 리스트에 나와 있는 '슬로우라이프'라는 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이치노미야지에서 북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곳이라고 했는데... 500엔에 숙박이 가능한 곳이라고...  전화를 걸 때 이미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슬로우라이프는 옆에 붙어 있는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전화를 받는 이에게 슬로라이프냐고 ...하니까... 전화를 몇 번 연결한 뒤에야...담당자인 것 같은 남자가 받았다.  조금 사무적으로 ...숙박은 가능하지만, 6시까지 체크인 해야 한다고...  그런데, 찾아가는 도중에 길을 헤매다 여섯 시가 넘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며 여섯 시까지 체크인 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고... 전화를 끊었다. 단지 오분 지난 시점이었다. 규정이나 그런 것은 알겠는데... 조금 야속했다. 



더 이상 운행을 계속하기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는 이치노미야지에서 다카마쓰시를  북쪽으로 대각선  가로지른 지점... 야시마라는 섬의 산 위에 있었다. 인근까지 가서... 섬이니까 바닷가에 야영 가능한 해수욕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야시마지 인근에 있는 여관이라도 찾아보자... 는 심정으로  일단 달려보았다. 



퇴근시간  다카마쓰시내에는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바쁘게 밀려 다니고 있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툭 떨어진 사람처럼...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란 나는... 어둠이 내린 거리를 묵묵히 달렸다.  


결국 야시마를 한 바퀴 다 돌고도 마땅히 잘 곳을 찾지못했다. 산 위에 있는 야시마로 오르는 들머리에 작은 여관이 있었지만 불도 꺼 놓았고... 어쩐지 기분도 가라앉아 들어가 흥정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7시가 넘어서... 일본에 도착한 첫날 묵었던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토요코인 호텔에 전화를 했다. 방이 있다고... 오라고... 


호텔을 예약 해 놓고 나니... 몸은 지쳤지만 다시 시내를 향해 돌아가는 마음은 조금 느긋해졌다. 어쩔 수 없이 이제 분주하고... 어떤 여유도 없어 보이는 도시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드물게 교통사고 현장도 목격했다.  



여덟 시가 다 돼  한 접시에 99엔이라고 선전하는 그 회전 초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호텔 프론트의 담당 직원은 마침 첫날 만났던 사람이었고 나를 알아보았다. 순례가 어땠냐고... 자전거 박스는 잘 보관해두었다고...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주니 어쩐지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렇게 긴 하루가 또 저물었다. 내일이면 절 순례는 모두 마치게 될 것 같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20-6/9 일 간온지시(観音寺市)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 78번 고쇼지(郷照寺) 인근 우단구라 

운행 41.39 46.45



4시쯤 잠에서 깼다. 신문배달부인지...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며 새벽 공원의 적막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4시반 경부터 산책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녀노소가 따로없다. 어떤 가족은 다섯 시도 되기 전에 어린 자녀들까지 다 함께 해변 산책에 나섰다. 



어린 시절...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  우리에게도 이런 아침 문화가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동이 틀 무렵 아버지와 정릉 약수터에 다녀오다 보면 맞은 편 안암동쪽 개운산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던 광경...  

아이들 유년시절, 곤지암 산 속에 작은 집을 짓고 살던 때,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기 전까지... 개를 데리고 달리기를 하고 마당 텃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장작을 패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다 보면 창밖에 새들이 지저귀던 ... 그런 아침... 


지난 30년 새 국민소득이 세 배로 늘었다지만... 소득과 행복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아침밥상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눈길 마주치며 밥을 함께 먹는 일...  왜, 언제부터 불가능해졌을까... 중고생 자녀들을 자졍무렵까지 학원으로 독서실로 내모는 우리 세대는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그랬던 것 일까  ... 



허준호 감독의 영화 <행복> 에서 ... 

지리산 기슭의 요양원을 나와 감나무가 있는 작은 집을 얻어 ... 단지 함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영수와  은희. 영수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도시의 삶을 기웃거리게 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권태로워한다. 그러면서 은희에게 '신문에 노후 자금으로 4억 7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며... 우리는 뭘 준비하고 있느냐고... 푸념한다. 은희는 그런 영수를 잠시, 암담한 절망이 어린 눈으로 쳐다본 뒤 ... 오늘 잘 살고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무엇을 위해 왜 4억7천만 원이 필요하냐고...  말한다. 영수는 네가 뭘 아느냐고, 네가 밥을 천천히 먹는 모습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아느냐고... 은희는 영수가 떠나갈 것으 예감한다. 그리고 절망감에 ... 자결이라도 하려는 듯 불치병을 앓는 몸이면서 심장이 터질 지경으로 도로위를 달리다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절망 앞에 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해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의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책없이 오늘을 탕진하자는 말이 아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를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태도는 옳은가. 지금 이 순간, 여기. 곁에 있는 사람들...  영화는 행복을 이것들 말고 어디서 행복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질문하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 이국의 해변에 앉아, 조금은 쓸쓸한 기분으로 어린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진행될 여정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온종일 달려가 저녁무렵 도달할 지점쯤에 마땅한 캠핑장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지니고 있는 돈도 이제 2만엔도 채 남지 않아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침은 미니스톱에 가서 도시락(398엔)과 커피(150엔)로 해결했다.  매번 가이드북을 꺼내 확인하는 일이 번거로워  오늘 달릴 부분을 복사(55엔)해 형광펜(88엔)으로 루트를 마킹해두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핸들바백 위 지도케이스에 넣어두고 달리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작업인데, 편의점에 복사기가 있으니 새로운 욕망이 싹트고 소비가 발생하는 것이다... 대개의 소비가 그런 게 아닐까... 


밥을 먹는 동안 핸드폰도 충전 하고... 



아침 7시... 다시 출발. 도시명 자체가 불성 가득한 간온지시(観音寺市) 역시, 조용하고 차분한 시가지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70번 모토야마지 (本山寺) 까지는 5.7km가량  평탄한 도로를 달리면 된다.  



아니, 너희들 일요일 아침부터 어딜 단체로 가는 거냐? 핼맷까지  제대로 갖춰쓰고 ...  



역시 야당들의 선거 이슈는 ... '평화헌법수호'다. 일본 공산당은 원자력발전 중단을 좀 더 강하게 요구하는 것 같고...  




'강한 나라보다 편안한 사회' ... 폐허가 된 후쿠시마 원전을 배경으로 군말없이 써 놓은 한 마디가 울림을 준다. 잘 만든 포스터라고 여겨졌다 


이에 비해 자민당은... '강한 일본'을 복구하자'고 외친다.  '부국강병'은 국가권력이 흔히 제시하는 슬로건인데...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도 행복해지는가? 하는 질문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나라도... 개인도...어떻게 하면 '강'해지는 것일까...  국가의 무력을 강화하고, 개인이 완력을 기르고 재산과 권력을 쌓으면?   핵심은 '멘탈'일 텐데... 일본이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고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서조차... 인정도 반성도 못하는 , 그 나약한 정신(자신의 과오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 것인다)...  일본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선거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는 거리를 지나며...  쓸데 없이 남의 나라 걱정까지 하면서 채 일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거리를 달려... 모토야마지에 도착했다. 


70번 사찰 모토야마지(本山寺) 



16세기에 시코쿠 섬을 평정했다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때문에 섬 안의 모든 절들이 불타고 무너졌는데 이 절은 보존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절에 몰려들자 절에 모셔둔 아미타여래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6.25 전쟁 때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가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것이라며 불태우려 찾아갔을 때, 주지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도 함께 태우라고 해서 소실을 면했다는 이야기... 를 떠올리게 한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서려니 본당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  기도를 마치고는 법당 주변을 정돈하고 보살핀 뒤...  




절 앞 벤치에 앉아 가족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고 있는 내게 다가와... 오셋타이라며... 작은 꾸러미를 안기고 

표표히 멀어진다... 달콤한 젤리와 비스킷과 사탕 몇 알...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누려고 이렇게 준비해 다니시는 모양이다.  일본에는 재가불자들 가운데 죽고난 뒤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오는 분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71번 사찰  이야다니지(弥谷寺)지까지는 11번 국도를 따라 비교적 순탄한 길을 따라 12.4km 가량 달리면 된다.  코오보 대사의 고향인 젠츠지시 (善通寺市)로 넘어가는 고개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 마을을 지나 산 등성이를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이 벅차기는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아 견딜만 하다. 


이 지역은... 독특하게도 곳곳에 곳곳에 이런 저수지가 많았다.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진 탓인듯... 



이야다니지 인근에는 유명한 온천 파크(후레아이파크 미노 ふれあいパークみの)가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같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다.  



온천파크 주차장 맞은 편 절로 오르는 길 옆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곳 주차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올라야 한다. 




우리 산과는 수종도 풀도 조금씩 달라 어딘지 서먹한 일본의 산길...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이끼도 많다. 


절로 오르는 산길 옆으로 설악산 비선 가는 길처럼 상점들도 몇 개 있고... 



108계단도 올라야 한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모든 감각과 의식에서 받아들이고 피어나는 자극과 판단과 호오의 감정들로부터 108번뇌가 빚어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 ...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몸은 번뇌에 사로잡힌 채 쩔쩔매면서 삶을 밀고 가고 있는...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나즈막히 읊조리다보면 당장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나를 이 여행으로 떠민 현실의 고통... 그리고 사별의 슬픔들도,  이렇게 일상을 빠져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니 마음이 진정되는 면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눈물 세상을 견디며 걸어가는 게 우리들 삶 아닐까... 그런 우리와 ... 나에 대해 연민이 들기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담대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아래 저자거리들이 저 멀리 아스라히 내려다보일 만큼 산을 올라와 있다. 




코우보 대사가 나고 자란 동네가 인근인지라... 이 절에는 '사자의 돌집'이라고 불리는 이 동굴에도 그 분이 수행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본당은 신을 벗고 마룻바닥 안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순례를 하는 이 분은 일행이  본당에 다녀올 때까지 계단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멈춘 채 독송을 하며 무엇인가 간절히 기원 하고 있다. 


만약, 중병에 걸려 생을 정리하는 순간이 와서... 이렇게 영과 육을 함께 정돈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 어쩌면 삶이 좀 더 완결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절에서 내려온 시간은 11시. 점심을 먹기도 그냥 달려가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온천에 들러 쉬기로 했다. 



간밤에 야영을 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휴일이라 가족나들이를 나선 이들을 바라보자니  무슨 고행을 하듯이 내처 달리기만 할 게 무엇이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온천파크는 제법 규모가 큰 휴양시설이었다. 깨끗한 온천욕장은 물론이고 편히 누울 수 있는 안마기가 있는 수면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아이들을 위한 오락실과 기념품 상점까지... 



느긋하게 온천욕(온천파크 입장료 1520엔) 을 하고 밥(돈가스 840엔)도 먹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일본 사람들은 몇 번씩 온천욕장을 들락거리고 낮잠도 자고 식당에서 맥주도 마셔가며 휴일을 온종일 이곳에서 보내며 쉬는 것 같았다.  


온천욕장의 규모나 시설은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대중 사우나나 찜질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청결도나 정돈 상태는 많이 달랐다. 욕조 안에 들어갈 때 얼마나 깨끗이 몸을 닦고 들어가는지... 냉온욕을 번갈아 하는 이들도 매번 어김없이 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샤워기로 씻은 뒤에 냉탕에 들어가는 ...식의  결벽증에 가까운 공중 에티켓... 우리가 배울 부분이라고 여겨졌다. 

오후 1시.  다시 출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뉴스가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이제 환전해온 돈도 채 2만엔이  남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러나 씻고 쉬었더니 몸은 가뿐해졌다.  그긋하게 내리막길을 달려내려온 뒤 젠쓰지시(善通寺市) 방향으로 좌회전해 11번 국도를 만난 뒤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오후 1시 30분.  72번 사찰  만다라지(曼荼羅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일본발음도 그대로 만다라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오보 대사가 가지고온 만다라를 안치한 뒤에 절 이름이 만다라지(寺)가 되었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찰은 한산했다. 하늘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생각은 조금씩 복잡해진다. '오늘은 어디서 묵을 것인가'... 그런 나를 스스로 지켜보는 일도 또 하나의 수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길에서만 그런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살기보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일...  


73번 슈샤카지(出釈迦寺)는 만다라지 위쪽 산 위로 500미터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지도상의 거리 500미터를 보면서 마음을 놓고 올라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인근 묘원에... 마침 장례를 치르러 온 가족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몇년 새 장례를 줄줄이 치러야 했던 나로서는 그런 가족들의 표정과 모습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절에에도... 코오보 대사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그가 7살 때 이 절 뒤에 있는 벼랑에서 '불도에 입문해 대중을 구원하고 싶다.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석가여래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주오.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목숨을 부처님께 바친다'고 말하고 몸을 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이 때 연꽃 위에 앉은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선녀가 어린 코오보 대사를 받아 안았다고...'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어머니와 작은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초여름에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정릉에 있는 국민대학교와 북악터널 사이에서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숲속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해 서울로 올라온 뒤 늘 형편이 쪼들려 사는 데 여유가 없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어머니와 함께 깨끗한 신록의 숲으로 소풍을 갔다.  작은 개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십여 미터는 족히 되는 가느다란 폭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서 나무 그늘에 자리를 폈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도 먹고  어머니와 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 나는 숲속으로 혼자 돌아다니다가 ...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 없지만...  그 폭포위에서 미끄러져 자칫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다행히 돌출한 홀드를 붙잡고 매달려있다가 간신히 기어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머릿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스쳐갔다. 그날 일을  함께 갔던 어머니와 누이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나는 ...줄곧 그 생각 뿐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코오보 대사가 7살 때 벼랑에서 몸을 던진 일이... 전설 그대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합리와 이성'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강한 나 같은 자는 ...  아마도 내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그런 류의 일들을... 기록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점점 완결된 신화로...거듭나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는 식이다.

서른이 넘어 그 숲에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등골이 오싹하던 그 찰나의 기억... 내게 엄청난 일들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면서 스쳐가던 조금은 쓸쓸하고 체념에 젖었던 그 독특한 감정들... 그리고 그 아름답던 신록의 숲...  


다시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1996년엔가 어느 토요일...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서 경기도 고양시 화정에 살던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국민대학교 옆 등산로에서 시작해 형제봉을 거쳐 산성리로 하산하는 루트로 등산을 할 겸...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숲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크고 작은 암자들까지 조악한 시멘트포장을 해 찻길들이 내면서 숲도 만싱창이가 돼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74번 사찰 고야마지(甲山寺) 


73번 슈샤카지로 부터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리막이기도 하고 멀지 않은 길이라 편하게 도달했다. 



고야마지 인근이 코오보 대사의 출생지라고 한다. 어린시절의 대사가 뛰놀던 곳이 이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제로 절 마당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한가롭게 거닐고 있어 여염집 같은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오후 2시 50분. 진언종의 총본산이라는 젠츠지(善通寺)에 도착했다. 75번사찰이다. 이렇게 큰 절인줄 모르고 도착했다가 ... 무슨 잔칫날 같은 분위기에 어리둥절 했다. 



별 정보가 없었는데, 젠츠지는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에 있는 곤고부사(金剛峯寺), 교토 토후쿠지(東福寺)와 함께 3대 사찰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젠츠지는 보통 큰 사찰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만한 잉어들이 헤엄치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큰 사찰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회장을 따라 가람들이 배치돼 있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규모가 상당했다. 




기념품상점에서 나와 아내, 두 딸의 띠 별로 ... 한 마리씩... 용과 닭과 개와 쥐를 샀다...  띠별 기질 같은 게 정말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기질이 은근히 띠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절 마당에는 아예 농기구와 모종, 분재를 파는 장터가 열려 있었고... 



무대에서는 가라데 시범과 공연도 벌어지는 등... 무슨 어린이날의 대공원을 방불케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구경도 하고... 절 앞 유서깊어 보이는 가게에서 전통 전병도 사 먹고... 잠시 즐기다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다시 길을 재촉... 


다시 달려보자... 설마 시내에서 또다시 산길로 이어져 있지는 않겠지...하면서  헨로 스티커를 따라 가보기로 ... 



76 곤죠지 (金倉寺)


코오보 대사의 조카인 치쇼우 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이 절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쇼류우지를 본떠 절의 가람을 정비했다고 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해 오버재킷을 꺼내 뒤집어 썼다. 마음은 더욱 위축됐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반야심경 독경도 어쩐지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 

 


비가 쏟아진다.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호텔이나 민박에 대한 정보도 없고 인근에는 야영장도 없다.  이 빗속에서 오늘밤 어디에 이 한 몸 누일 것인가.  







77번 도류지(道隆寺)는 거의 바닷가에  다다른 지점에 있었다.  

GPS는 바닷가 철길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78번 고쇼지까지 간 뒤 시내에서 호텔을 찾아가 잠을 자야 겠다 싶었다. 




마루가메시 (丸亀市) 시내를 지나면서 은행이 나올 때마다 현금 인출을 시도해보았다. 2만엔쯤 더 인출을 해두어야 안심이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현금인출은 모두 실패. 편의점에 들러 비도 피할 겸 커피 한 잔을 사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일본 ATM 가운데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한국과 체인이 이어져 있어 우리나라 비자나 마스터카드 가맹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단, 휴일에는 안 되고 평일도 오후 두 시까지만 가능하다고... 


78번 고쇼지(郷照寺)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다섯시... 이제 순례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오늘 호텔에서 자고 이삼 일 더 버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 순례자들이 지니고 다니던 무료숙소 정보를 보았다. 

78번 고쇼지 산문앞에서 동쪽으로 200미터를 가면 우탄구라라는 젠콘야도가 있다고...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동쪽을 향해 우호전 한 뒤 고지식할 정도로 200미터를  세며 걸어간 뒤 곁에 있는 집을 살펴보았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5시 20분.  작은 글씨로 '우탄구라'라고 씌여있는 집이 정말 있었다.  이리에 무네노리, 이리에 노리코 두분이 운영하는 젠콘야도다. 우탄구라는 이 동네 이름인 우타즈 초 (宇多津町) 를 스페인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더러 전해 듣기는 했지만 혼자 자전거로 이동하며 주로 야영장을 이용해온 나로서는 20일만에 젠콘야도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쓰미마센...' 하고 불러 보았다.  



인자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나와서 ... 응대를 해주신다. 우탄구라의 안주인 노리코 상이시다. '자전거 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입니다.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만, 오늘 일박 할 수 있을까요?' ' 지금 몇시 인가요? 아, 다섯시가 넘었군요. 네 가능합니다. ' 하면서 본체를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간 뒤 별체로 안내해 주셨다. 그날 이 집에 묵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갈한 다다미 방과  정겨운 정원. 처마밑에 있는세탁기와 건조대. 오래 떠돌다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푸근한 마음이 되었다. 노리코 상은 화장실과 욕실, 세탁기 등 사용법을 일러주고 모기향까지... 피워주었다. 1박에 천엔...이고 아침은 여섯시부터 ... 저녁은 미안하지만 나가서 먹고 와야 한다....고. 순례길에 있는 민박집들이 대개 1박2식에 6천5백엔을 받는 것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다. 


감지덕지... 짐을 풀고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다 돌려서 널어 놓고는 갑자기천당에라도 떨어진 기분이 되어 느긋한 기분으로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외출했다 돌아온 이리에 선생이 내 자전거가 복잡해 보였는지 집에 있는 가정용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라고... 하셨다. 조용한 마을길을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자니 이리에 상이 따라오며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에 가보겠어요? 조금 비싸지만 서비스가 좋으니까... ' 이렇게 안내를 자처하신다. 


낙원(樂園). 제법 규모가 큰 고깃집이었다. 안수창이라는 동포가 주인이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호방한 말과 행동... 오랜만에 정말 한국사람을 만난 것이다.  주문을 하려고 하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내가 알아서 줄 테니...'...  그는  이리에 선생에게도 가지말고 앉으라고 하더니... 숯불구이, 철판구이, 갈비탕, 불고기를 골고루 내 왔다. 김치와 마늘도 썰어도 ...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다. 



끝없이 나오는 생맥주 때문에 나도 이리에 상도 과음을 했다. 이리에 선생은 본의 아니게 술자리가 시작되니까...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노리코 상이 도중에 와서 남편에게  2만엔을 남편에게 찔러주고 가신다. 당연히 내가 밥과 술을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에 상은 오사카 미쯔비시에서 40년 근무하고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우단구라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운영한 3년 동안  1700명 가량의 순례자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꽤 자주 온다고... 


자신도 순례를 14번 했고, 아내도 4번 순례를 했으며,  순례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센다츠(先達 )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은퇴 후에 이런 삶... 멋지다. 


안수창씨는 자신을 재일동포 3세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살길이 막막해 고향인 경남 함안을 떠나 일본으로 온 뒤, 돌아가지 못했다고... 자신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은, 그나마 '조선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아... 그래요. 나도 얼마 전 우리학교라는 영화를 봤어요'



안수창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를 어리게 보고...'여자 친구 있어요?' 했다가... 큰 딸이 대학생이라고 답을 하니까...몇 살인데 대학생 딸이 있냐고... 동갑인 걸 알고느 내게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는 이국 땅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온 일들, 남과 북으로 찢긴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 성장기에 겪은 필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해 짧게 말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성장한 부모님이 1945년에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면 ...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같은 것뿐 아니라 ... 민족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점에서도... 우리는 말이 잘 통했다. 


밤 11시가 넘어선 뒤에는 셋 다 만취한 뒤... 안수창 친구는 우리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태극기를 사이에 두고 박지성과 북한의 국가대표 안영학의 유니폼이 양옆에 걸려 있었다.  그가 일본의 이 외진 시골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아온 일이 어떤 일이었을지... 새삼 가슴이 아파왔다.  '어떤 일본 사람은 막 욕을 하기도 해요. 일본 땅에서 왜 조선사람 티를 내냐고' 



그는 내게, 한 달 가까이 이국 땅에서 자전거 순례를 하는 일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허락해준 네 부인이 더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아내와 아들을 불러다 인사를 시키고... 여행중에 먹으라며... 우리나라 라면과 두유를 선물로 안겼다. 결국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자정이 넘어 우타쬬의 거리를 달려 우단구라로 돌아왔다. 이리에 상은 그간 이 집을 거쳐간 한국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준다며 방명록을 펼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려고 했다... 


' 너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지금 자지 않으면 안 돼요.' 


심야에 소란을 떠는 우리를 향해 자다 깬 노리코 상이 나지막하게 제지를 했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19-6/8 토 시코쿠주오시 비지니스호텔~간온지시(観音寺市)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운행 67.53  도보 4  로프웨이


5시쯤 잠에서 깼다. 간밤에 과음을 했지만 눈은 어김없이 새벽에 떠졌다. 아침밥이 없는 호텔이라 로비에 내려가  카레맛  컵라면을 사다 며칠 가지고 다닌 삶은계란, 그제 저녁에 삶아 둔 감자와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맛을 느낄 수 없느 메마른 식사지만 낮 동안 흘린 땀을 미리 넣어둔다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창 밖으로 시코쿠주오시 항구가 내다보였다. 




짐을 꾸려 7시 30분쯤 호텔을 나섰다. 패니어 4개와 핸들바백, 랙팩까지...가방 여섯개를 들고 내려가 매달고 ... 이런 과정이 여전히 버겁다.   


시코쿠중앙이라는 지명은 섬의 북쪽 해변의 가운데 쯤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왼쪽에 치우쳐 있는 마쓰야마(松山市)와 오른쪽에 있는 다카마쓰(高松市) 사이 세토내해(瀬戸内海) 해안의 중간 지점쯤에 있는 도시이니 말이다. 



왁자한 활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단정하게 정돈된, 고층건물도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소도시.  낡고 휑하게 빈 곳이 많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그런 느낌. 사람들이 분주하고 오가고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넘쳐났을 어느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지역이 쇠락하고 있는 것은, 어쩔 도리 없는 흐름인가? 싶어 마음이 허전했다. 


자전거순례의 출발지점이던 다카마쓰가 이제 멀지 않았다. 섬을 거의 한 바퀴 다 돈 것이다. 


훼밀리마트에서 우유 (110엔), 동네빵집서 빵 (450엔)을 사서 우유는 마시고 빵을 패니어에 넣고 길을 나섰다. 65번 산가쿠지(三角寺)까지 GPS 상으로는 불과 8km 남짓, 물론 중간에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나타나 있지만 고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아 크게 고통스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길을 나섰다. 



11번 국도는 시내에서 바이패스 구간이라 나란히 뻗은 도로를 따라... 3~4 km 가량 달리다 산가쿠지가 있는 산쪽으로 우회전해 오르막을 오르면 되겠지... 방심한 채 달렸지만...오르는 길머리를 못 찾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헤매야 했다.  길을 두 번 물어보고도 ... 적잖이 헤맸다. 


해가 떠오르면서 기온도 오르고... 고도가 높아지며 호흡도 가빠졌다. 출발부터 헤맨 탓인지, 간밤에 맥주를 과음한 때문인지 맥도 빠졌다. 지도상으로는... 다음 사찰인 66번 운펜지(雲辺寺)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내려와 해안을 따라 뻗어있는 11번 국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자전거를 가지고 올라갈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이렇게 오늘도 오늘의 땀을 흘리는구나. 결국 산카쿠지 입구까지 오르지 못하고 500미터쯤 남겨둔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걸어서 올라야 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걷다보면 격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평화를 찾고 기분동 생각도 전혀 달라진다. 마치 딴 세상으로 갑자기 이동하기라도 한 것 같다. 


9시. 산카쿠지 앞에 도착했다. 산카쿠지(三角寺)... 북한산의 또 다른 이름인 삼각산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세 봉우리가 모여있는 모양 때문에 생겼다던데 ... 이 절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료에 보면, 이곳에서 코우보 대사는 21일 동안 삼각형 '호마단'을  세우고 수행한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호마(護摩, homa) '는  바라문교에서 전래된, 제물을 불에 던져 타오르는 화염이  하늘의 여러 신들의 입에 도달하고, 그 신은 이것으로 힘을 얻어 마귀를 항복시키고 사람들에게 복을 준다고 여기는 종교의식이라고 한다. 



어떤 무서운 요괴들이 있었기에... 21일이나 불길에 제물을 던지면서 '호마'를 해야 했을까... 


그러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꽃들을 잘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정원과 



본당에... 부처님 대신 모셔 놓은 것 같은 단정한 꽃꽂이...   배경에 창호지 바른 장식없는 문들만 놓여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안목으로 여겨졌다. 적막한 산사에 만나는 이 도저한 미의식이라니...  감동했다.


설악산 백담계곡을 통해 봉정암에 올랐다 소청이나 중청 산장에서 자는 일이 내게는 '병원'의 하나다. 지리산 능선을 며칠이고 걷는 일이 그렇듯이 ... 


알려진 것처럼 봉정암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다. 그런 연유겠지만 봉정암 본당에는 부처님을 모셔놓지 않았다. 빈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뒤 벽은 유리창으로 뚫려 있는데... 어느 가을엔가 본당 들렀더니 텅 빈 그 자리에 절정의 설악산 단풍이 불타고 있었다. 탄식이 나올 수밖에 ... 



봉정암 본당 위쪽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사리탑이 있다. 설악산 서북능선과 용아장성 사이 허공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 사리탑 역시... 조상들의 미의식에 감탄하게 만든다. 까마득한 허공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단정한 사리탑. 먼 배경에 있는 산들은 계절마다 신록으로, 짙은 초록으로, 불타는 단풍으로, 그리고 야생의 설경으로... 시시각각 놀랍다. 


산카쿠지의 정원과 본당에 놓여있는 꽃꽃이 화병 하나가 그런 생각을 되살려 주었다. 


오래된 나무와 나리꽃 같은 초여름 꽃들이 조화를 이룬 다사로운 정원에서... 잠시 앉아 한숨 돌렸다.  


산카쿠지에서 내려와 다시 자전거 있는 곳까지 내려온 뒤 시내를 거쳐 당분간은 11번 국도를 따라 해안을 달렸다. 대형 트레일러와 트럭들이 질주하는 도로변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이 여간 조마조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전거도로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 자전거길이 없는 구간에서는 꼼짝없이 차들을 의식하며 도로변을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 스쳐가는 대형 차량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틀 전에 마쓰야마를 떠나 해안길 달리면서 보았던  새카맣게 그을린 자전거 여행자를 휴게소(미치노에키)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채 휴게소(道の駅とよはま) 벤치에 앉아  혼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면서 멍하니 먼 바다를 향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일본 일주라도 하는 것인지... 그의 얼굴과 팔다리는 완전 새카맣게 그을러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시코쿠일주뿐만 아니라 일본일주를 하는 이들을 꽤 여럿 만났다. 남한땅( 99,720㎢)보다 네 배 가량 넓고(37만 7835㎢)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다를 건너기도 해야 하니 일본일주는 몇 달 걸리는 대장정일 것이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더니 내게 일본사람처럼 생겼다고... 가끔 그런 소리를 듣곤 했다. 


로드 자전거를 탄 또 한 사내가 우리 곁에 와서 인사를 했다. 주말이라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로드 사이클 사내는 나에게 우동 많이 먹었느냐며...이부근부터 시작되는 가가와현(香川県)을 일본에서는 '우동현'이라고  한다며 킥킥 웃었다. 일본에 그리 여러 번 와본 건 아니지만... 이 동네에는 실제로 라멘집보다 우동집이 많았다.   



해안으로 뻗어 있는 11번 국도를 따라 미노우라(箕浦)역까지 달린  뒤 우회전해서  241번도로와  8번도로 내륙으로 들어가  로프웨이 산로쿠(山麓)역까지 올라가는 일도 조금 힘겨웠다.  




세토내해에 면한 이곳에 웬 군사시설 유적인가  싶었는데,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군대를 증강하면서 이 인근에 포대가 들어섰던 흔적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정릉 인근 북한산 자락에는 '토치카'라고 부르던 구조물이  많았다. 우리는 그것이 참담한 전쟁을 겪은 지 몇년 안 된 서울의 흔적이라고 실감하지 못하고, 주로 담력 시험을 하거나 전쟁놀이를 할 때 실감나는 놀이터로 쓰곤 할 뿐이었다.  


 볼거리도 없는 오르막이 완만하게... 그러나 충분히 지치게 할 정도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오르다보니 민가는 거의 보이지 않고 개 훈련소나  애완동물 묘지 같은 곳들만... 보였다. 사람들끼리는 점점 더 외로워지고, 대신 동물들과 정서적인 유대를 느끼는 일이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한 해 애완동물 시장이 60조원에 달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일본의 이 외진 시골도 그렇고...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어릴 때 집에서 키우던 개와 각별한 정을 나눴었고 서울로 이사오기 전, 경기도 광주의 산속에 사는 동안에도 '강'이라는 골든리트리버와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 온 뒤로는 집안에 애완동물을 들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가끔 졸라도 꽤 단호하게 거절했다. 실내에 갇혀있는 동물도 그 공간에서 함께 숨쉬는 사람도 ... 그건 아니다 싶었기 때문에... 



드디어 로프웨이 운펜지 산로쿠역에 도착했다. 로프웨이를 타고 88개 사찰 가운데 최고지점(해발 1000미터)에 오르게 돼 있다고 해 평지에서 오를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오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운임은 왕복 2천엔. 역시 버스만큼 크다. 자전거는 가지고 올라갈  필요가 없으니... 주차장에 세워두고 



66번 사찰 운펜지(雲辺寺)로 오른다.   





시계에있는 고도계가 거의 정확하게 고도를 가리킨다.  



역에서 절로 가는 완만한 오르막 능선이 가가와현과 도쿠시마현의 경계다. 



운펜지로  진입로에는 오백 나한상이 늘어서 있다.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오백나한들의 다양한 형태와 표정... 



산문도 절도 다시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높은 곳에 있지만 로프웨이를 타고 오르기 때문에 한가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드문드문 있을 뿐 산중 고찰의 정취는 느끼기 어려웠다.  



그런데, 당시의 내 기분과 몸의 상태 때문이었나... 절 곳곳에... 큰 소리 내지 마시오 ...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 만지지 마지소 등등 가는 곳마다  금지...  금지...  금지...  기분이 상했다. 스스로의 인격이 무시 당한 느낌. 

아이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시와 금지가 많을 수록 아이는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고와 행동이 수동적으로 ... 움츠러들지 않을까. 



10여 분 로프웨이를 타야 하므로... 내려오는 동안 바지를 좀 더 야무지게 꿰맸다. 

산에서 내려와 역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점심을 사 먹을까하다가 그냥  남겨둔 계란과 감자 단팥빵을 먹기로 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올라올 때와는 다른 쪽, 하강하다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길로 내려가다가 작은 공원  휴식소에서 점심을 먹고 15분쯤 벤치에 누워서 잠을 잤다.


주차장에서 본 자전거가 획 내리막길을 스쳐 지나간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길을 다시 길을 나섰다. 3 킬로미터쯤 앞에 횡단보도에서 앞서가던  그 친구를 만났다.  오후 2시반 경이었다. 






마레 나가 쓰요우 상은  야마구치 현에서 온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가 신고 있는 발토시를 보니 얼핏 60번 요코미네지 본당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던 그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통성명을 하고 나서  67번 다이코지(大興寺)까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다. 로프웨이 산로쿠역에서부터 다이코지까지는 10.3km 다.




간온지지시(観音寺市) 평평한 들판 위에 드문드문 집들이 흩어져 있어 여간 한가로운 느낌이 아니다. 토요일이라 더 여유롭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야마구치 현은 큐슈 바로 위... 시코쿠섬과 마주하고 있는 지점에 있다고... 그는 지도를 펼쳐 설명해주었다. 그가 타고 있는 자전거는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생활자전거였다. 여행 초기에 만났던 야마시타상이 타던 바로 그 자전거. 



그는 내게... 자기 자전거로는 순례를 계속하기 어려워 오늘 집으로 돌아간 뒤, 며칠 뒤부터 자전거 대신 스쿠터로 남은 순례를 마저 하겠다고 했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잠시 묵상하는 식으로 순례를 마치는 나에 비해 그는 '매뉴얼'에 나온 대로 본당과 대사장을 돌며 합장하고 기도하고... 꽤 시간이 걸렸다. 그가 이 모든 의식을 마칠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려주었다. 그는 자판기에서 자판기에서 생수를 두 개를 사서 내게도 하나를 권했다. 또 절 앞 뙤약볕에 앉아 염불 외며 탁발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도 찬 물을 한 통 건네주었다. 


20대 초반의 이 젊은이가 하는 하는 행동거지와 사려 깊은 말들이 얼마나 속 깊어 보이던지...  



68번 간온지(観音寺),  69번 진네인(神恵院)은 간온지시 해안가에 함께 있다. 다이코지에서 10.6km ...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꽤 오랫동안  달려야 했다. 


도시의 이름 때문인지... 차분한 거리 분위기 때문인지... 달리는 것만으로도 어떤 불성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간온지(観音寺), 진네인(神恵院) 2개의 영장(霊場)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특이했다.  여전히 숙제를 해치우듯이 사찰 하나하나를 순례하고 있던 내게 한 번에 두 개의 영장을 참배하게 된 것이 반갑기도 했다. 



두 사찰이 함께 있게 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당시 신사와 절을 분리하는 정책에 따라 고토히키하치만구(琴弾八幡宮)의 아미타여래를 진네인(神恵院)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저녁 다섯 시. 이제 납경 시간도 끝나고... 탐방객과 순례자들도 절을 빠져 나가는 시간. 



나 역시 오늘의 순례를 마쳐야겠다.  마레나가 쓰요우... 이 친구는 내게 오늘 밤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어보더니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에 몇 가지 정보를 찾아준다. 자신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부두에 가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순례자들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오래된 사찰이 있고 그 앞에 묘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이어진 마을.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이겠지... 최근에 접한 어떤 외신에서는 인간이 죽어서 소멸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고... 종교인이 아니라 외국의 어떤 과학자가 그런 발표를 했다고...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마레나가 쓰요우 상이 내게 조심하라고... 건강하라고 몇 번씩 당부를 하고 떠나간 뒤...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 조금 외롭기도 하고...  그리고... 날이 저물고 있었다. 


잘 곳을 찾아... 순례자들의 족보에 나와 있는 대로 절 뒤 산 위에 올라가 보았다. 산 뒤편 바닷가 공원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고... 수도가 있는 화장실도 있었다. 자자면 못 잘 것은 없겠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아직 관광객들이  너무 많았다. 밤이 되면 산속에 혼자 남아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 ... 꺼림칙하기도 했다. 



다시 산을 내려와... 뒤편 바닷가로 가보았다.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공원 숲 속에 있는 화장실 인근 솔밭에 텐트를 치기로 작정했다. 다만, 아직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니 밤이 어두워진 뒤 조용히... 몇 시간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텐트를 걷으면 되겠다 싶었다. 


해변 공원에는 모래로 만들어 놓은 '관영통보(寬永通寶)'라는 거대한 옛 동전 모양이 있었다. 1633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이것을 보면 무병장수 할 뿐만 아니라 금전 운 또한 좋아진다고 여겨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절 뒤에 있는 전망대도 어쩌면 이것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 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오주시처럼 조용하고 오래된 건물들도 많았다. 상점들은 폐업을 했는지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고 군데군데 문 연 가게들이 있었다. 활력이 떨어져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미니스톱.



 다른 편의점들과 다른 점은 우리나라처럼 가게 안에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커피를 시켜 마시면서, 핸드폰도 충전을 시켰다. 



편의점 옆 테이블에는 여고생들이 앉아서 즐겁게 한참 떠들고 웃다가 떠났다. 서울에 있는 우리 딸들이 떠올랐다. 저맘때 친구들은 어쩌면 가족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지 모른다. 내게도 그랬다. 외롭고 고단한 사연을 친구들과 나누며 의지하며... 그렇게 그 시절을 건너왔었지...



시내에 큰 서점도 있고.. 저녁을 지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중화소바'라고 쓰여있는 국수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중국식 라멘과 유부초밥 세 개... 740엔... 맛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헨로인 걸 알아보고 얼음물도 한 전 더 주고... 사진 속에 있는 악세사리도 선물이라며 주었다. 



해가 완전히 진 다음에... 해변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사람들이 오고 갔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한동안 쉬었다. 저녁도 먹었겠다. 이제 느긋하게 쉴 일만 남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이삼여 명 ...남여 고등학생들이 교복에 자전거를 끌고... 바닷가에 나타나... 불꽃놀이를 했다. 불꽃들이 펑펑 튀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환호성... 나는 어둠속에 정물처럼 앉아  그런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아까 봐둔 솔숲으로 와서... 이를 닦고 ... 조용히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간온지시 해변공원에서 또 하룻밤을 자게 된 것이다.  


지출  4080엔  : 아침 컵라면 200, 빵집 450, 우유 110, 신카쿠지 납경 300, 로프웨이 2000, 자판기음료 150, 중국집 국수와 유부초밥 740, 미니스톱커피 150  


18일 - 6/7 금 이마바리 해변공원- 시코쿠주오시 비지니스호텥 


운행 85.52 km


아무도 없는 빈 바닷가... 적막감 때문인지... 새벽 세 시도 안 돼 잠에서 깨었다. 약간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화장실에  다녀온 뒤 ... 조금 더 자야겠다 싶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더 자지 못하고 4시 반에 일어났다. 텐트 지퍼를 열고 짐을 정리하고 조금 더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동 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무척 더울 것 같다. 


어제 저녁에 삶아둔 감자와



저녁에 먹다 남겨 둔 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주먹밥을 만들어 남은 감자, 빵과 함께 도시락으로 싸두고    

저녁 삶아 둔 감자 몇 알, 식빵도 굽고,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세토내해 (瀬戸内海)가 혼슈와 시코쿠 사이 호수처럼 닫힌 바다라 일출을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어딘들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랴. 



어김없이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역시나 외딴 바닷가인데도 산책을 나온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나는 이미 짐을 다 꾸려놓고 양치질까지  마쳤기에..  내가 이곳에서 야영을 했으리라고... 눈치 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휴지 한 장 흘린 게 없으니 무슨 폐가 될 일도 없었을 테고... 


6시 반 일단 출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  



한 동안 한적한 해변을 달리다가 다시 196번 도로쪽으로 나와 합류하게 되어 있다. 


해안과 나란히 진행하는 196번 도로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10km 가량 달리다가...  

도요(東予)항 부근에서 내륙쪽으로 우회전해서 마주 보이는 거대한 산군을 향해 달려가면서...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번 요코미네지(橫峰寺)는 해발 745미터지점에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자저거를 어느 지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지... 그것도 가늠이 안 되었다. 어차피 산 위에 있는 요코미네지에 가기 전에 그 길목에 일는 61번 고온지(香園寺)에 들러 가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기에... 먼저 그곳에 들러 납경소에서 길을 묻기로 했다. 



해안에서 48번 도로로 2km 가량 달려가다가 다시 좌회전 해서 전형적인 농촌마을 들판을 달렸다. 6월... 양파 수확할 즈음이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시기가 비슷했다. 예전에 경북 의성에 있는 쌍호 마을에 갔을 때 그분들도 6월 첫 주에는 양파를 캐내고 그 곳에 다시 모를 낸다고 했다.  경북 의성의 '양파'나 시코쿠의 '다마네기'나 그것을 길러내는 자연의 힘은 똑 같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정직한 땀...   


국경을 긋고 나와 남을 구분하고 ... 미워하고 ... 그것은 사람의 일.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질문하는 제자 수보리를 향해 ... '모든 상을 가진 것이 다 허망하니 만약 상을 가진 모든 것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면 여래를 보게 될 것(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아침 8시 반,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주부들이 한가롭게 집안을 청소하며 아침드라마라도 볼 시간...  제61번 고온지(香園寺)는 마을 한쪽에 있었다.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낯설었다. 무슨 강당 같은 건물 안에 본당이 있었다.

 


법당에 강당처럼 접이식 의자들이 설치 돼 있었다. 본존불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엄지를 감싸고 있는 '대일여래' 불이었다. 다니면서 읽게 되고 다시 유심히 생각하게 된 점인데... 밀교인 진언종에서는 이 대일여래가 가장 중요한 부처이며 우리에게는 비로자나불로 익숙하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는 몰랐던 점이 또 하나 있다. 대일여래... 태양처럼 온 세상에 불법을 비추는 부처님의 이름에서 곳곳에 '다이니치지(대일사)'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단순히 일본의 국수적인 사고에서 온 것으로 착각했던 점...  

 


이 부처님이 두 손을 하나로 모아 엄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중생과 부처, 깨달은 경지와 미혹한 경지가 본디 하나라는 점을 이르는 것이라던데... 쉬운 경지가 아니다. 그러나 새겨 읽다 보면, 적금을 부어서 차를 사고 집을 사는 일처럼... 당대에 덕을 쌓아 당장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의 성취가 있어야 것처럼 조바심을 내는...  나 같은 자들의 천박함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절이 이렇게 거대한 현대식 건물로 '부흥'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코보대사가 이 근방에서 괴로워 하는 임산부를 보고는 향을 피워 기도를 올리자 아이를 순산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탓에 아이를 무사히 낳기 원하는 이들이 시주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건물이 오히려 섭섭하고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남의 위압적인 대형교회들을 보면서... 어쩐지 이곳에 예수가 깃들기 어렵겠다 싶은 것처럼 말이다.  



종교가 세속을 뺨치는 일이 흔하다. 종교가 무슨 재테크도 아니고 자식 일류대학 합격이나 집값 오르게 해달라거나 사업이 '대박나게' 해달라는 정도에서 종교의 효용을 찾는 일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 그렇게 불려나와 있는 부처님과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참배를 하고 납경소에 갔더니 뜻밖에도 머리를 파랗게 깎은 젊은 비구니 스님이 앉아 있다. 60번 요코미네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찾아왔다며 자전거를 타고 60번 사찰 요코미네지 가려면 어떤 길을 택해야 좋을지 물어보았다.





 11번 도로에서 좌회전 해서 3.5km 가량 달려간 뒤 이와네(石根)우체국 근방에서 훼밀리마트를 보고 좌회전 한 뒤  ... 


 

산을 향해 난 147도로로 ...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서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고... TT 


147번 도로... 처음에는 산을 올라가는 기분도 들지 않을 만큼 완만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은 저 산을 향해 올라가게 돼 있다.경사가 고되지만, 차도 없고 날씨도 맑았다. 이 아침에 이 토록 고요한 풍경을 느릿느릿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콧노래마저 부르면서... 잠시 행복했다. 그러나 점점 ...

 


산길이 가팔라지고 ... 중턱에 커피를 볶아서 판다는 커피숍도 있었지만, 휴가철이나 휴일에나 여느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맛있는 커피 한 잔을 몸 안의 세포들이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할 수 없이 물통에 남아 있는 물과, 도시락으로 싸온 빵을 간식으로 먹고... 다시 기운을 내 등산 시작. 


 

10시 30분... 자전거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해발 330미터 지점(길이 끝난다)에 있는 휴식소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 이 지점에 약수터가 있다.  



왕복 4.4km라고 하니 걸을 만 한 거리다. 수통에 물을 담고 ...핸들바백만 어깨에 걸친 채 ... 

 

등산 시작...




 
'악로 통행주의' 표지판, 그리고 산 사태로 무너지 흔적까지... 조금 긴장하게 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험로(險路) 라고 했을 텐데... 싶었다. 악(惡)은 아무래도 상태의 좋고 나쁨보다는 선(善)의 반대 의미가 강한 게 아닌지...  


 

적막한 산길을 걸어올라 간다. 마치 지리산의 백무동 같은 들머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숲 그늘이 짙고 곧게 뻗은 삼나무들이 빽빽한 숲을이루고 있다. 다만, 참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우거진... 내게 익숙한 우리 산들과는 사뭇 다른 식생들...

 

 

누군가 달아 놓았을... '인생 즉 헨로'   

그렇구나... 사는 일... 끊임없이 내면에 물음을 던지며 걷는 일이로구나. 공감하면서 고사리가 무성한 축축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적막하고 고요했다. 고독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지점에선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메아리라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 수풀 속에서 불쑥 회색 전통 전통 의상을 입은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순례자 한 분이 불쑥 고개를 든다. 나도 그도 서로 놀란 것이다.   



도요타시에서 왔다는 그는 먹물 염색을 한 전통복장에 적잖은 세월이 느껴지는 삿갓, 금강장을 짚고 있어 만만찮은  경륜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잠깐 동안 앉아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는 자신의 배낭에 매달려 있던 작은 나무조각을 기념품이라며 내게 주었다. 자신이 직접 붓글씨로 썼다는 청정(淸靜) 두 글자... 이것 역시 상당한 미의식이 느껴지는 소품이었다.  


11: 30... 드디어 해발 745미터 산중에 있는 60번 요코미네지(橫峰寺)에 도착했다. 가파르긴 했지만 숲 속으로 난 무난한 등산로였기에 걷기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이시즈치산(石鎚山 1982m) 중턱이다. 일본에 오기 전에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여유가 된다면 산 아래 짐을 두고 이 산을 등정해볼까 생각 했었다. 그러나... 막상 산 아래 도달해 보니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단은 순례라도 무사히 마치자...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독경을 하고...  



오사메후다에 한 마디 적어서 넣고...  




납경소에 들렀다. 눈이 커다란 젊은 스님이 걸어서 왔는지 물었다. 자전거로 순례중이고 산 아래부터는 걸어왔다고... 대답하니 호오 그래요? 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요코미네지 위쪽에 코보대사의 수행처였다는 호시가모리가 있다는 것도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가게 된다면 이시즈치산정도 ...호시가모리에도 올라가고 싶다. 

 

11:50  하산 시작.

 

큰 근심거리였던 요코미네지에 올랐다가 하산 하는 길... 마음이 가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여전히 마음 속에 사찰순례를 마치 숙제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아무리 산 마루에 있는 절이라고 해도 ... 스스로 마음을 내고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무슨 업무 스트레스처럼 여기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 시인의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 시가 떠올랐다. 1980년대에 만인보를 쓰실 때는 도무지 장황해서 이게 무슨 시란 말인가 싶은 때도 있었는데 ... 젊은 시절 선승이었던 그답게 무슨 게송 같은 충격을 주던 그 구절.  


지ㄱ


시코쿠를 떠올리고 떠나올 때의 내 심정은 ... 참담하고 슬픔에 겨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이나... 쇠락해가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해...느끼는 비애감?... 인생의 한 고빗사위를 올라가는 중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삿된 욕망을 좇아본 적도 없는데... 삶은 늘 고달프고 정열을 바쳐온 일들은 점점 가망이 없어져 보였다. 세상이 이 점점 더 불의하고 불평등하며 위태로워 지고 있다는 생각도 ...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짐승의 지경에서 꾸준히 나아가 '세계인권선언' 수준에 도달하고... 근로기준법을 제정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는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고 실현되는 것이다. 자신의 배가 고프더라도 곁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제 것을 덜어주는 것...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회...  


그런데 그 뒤로는 어땠나...  지금은 어떤가...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삶이 허망해진 느낌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유년기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지... 무엇인가를 성취할 때마다,  내심 내가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니까... 갑자기 내 안에 세워 놓은 있던 깃발 하나가 툭 꺾인 기분이 들었다. 


오후 한 시.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 올라가기 시작한 그 지점까지 하산. 정자도 한 채 있고 약수터도 화장실도 있기 때문에 자전거나 도보 순례자들에게 좋은 숙영지가 될 것 같다. 단,  먹을거리와 침낭을 갖췄을 때 ... 말이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오전 내 혀를 빼 물고 올라오던 길을 불과 1,20분만에 휘파람 불면서 하강했다. 

 

오후 2시 20분.  62번호쥬지(寶壽寺)에 도착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들렀던  제61번 고온지(香園寺)에서 11번 도로를 따라 3.2km 쯤 동쪽으로...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본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휘장으로 둘러 놓아 접근이 어려웠다. 햇볕은 살갗을 태울 만큼 뜨거웠다. 기온은 34도 쯤 되는 것 같았다. 이 절에서 늘씬한 로드바이크를 탄 사내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내가 미처 알아듣지 못해 그냥 어색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나의 반응이 실망스러웠는지 그는 뭔가 조금 기분 나빠하는 표정으로 스쳐지나갔다. 내가 일본어가 서툴러 상대방의 기분이나 의도를 충분히 배려해주지 못했다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63번 기치죠지(吉祥寺)는 호쥬지에서 불과 1.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1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만날 수 있었다.  



호쥬지에서 만난  로드바이크 사내는 여기서도 함께 참배를 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아내인듯한 여자가 꽤 비싸 보이는 렉서스를 절 앞에 대 놓고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 절까지는 자전거로 달려가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줄곧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음 절에서는 앞바퀴를 분리해 뒷 트렁크에 싣고는 승용차를 타고 가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남편의 자전거 순례를 아내가 이런 식으로 뒷바라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치죠지((吉祥寺)는 우리 발음대로 읽으면 '길상사'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떠올랐다. 그 동네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길상사가 '대원각'이라는 요리집일 때, 삼청동 큰 집에 살던 문예반 동기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해 따라가고 있었는데... 불쑥 들어가더니 거기서 갈비탕을 사준 적이 있다. 고등학생의 씀씀이도, 서울 복판에 그토록 자연이 고스란히 간직된 요리집이 있다는 점도 내게는 다 놀랍기만 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그 요리집 주인이 법정스님에게 그곳을 통째 시주해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다는 뉴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억만금일지라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을 줄 아는 경지... 


금강경에서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갠지즈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보화를 시주하고... 갠지즈강의 모래만큼 많은 갠지즈강들의 강변에 있는 모래만큼 많은 보화를 시주하는 것의 복덕이 크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깨닫고 잘 지닌 채 타인들에게 전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던 말씀이 떠올랐다.  


64번 마에가미지(前神寺)도 3.2km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1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잠시 우회전한 지점에 있었다.  




마에가미지(前神寺) 참배를 마친 시간은 오후 2시 40분 경이었다. 숙소를 찾아가기도 어중간한 시간이고... 다음 절... 



65번 산카쿠지(三角寺)까지는 48.5 km.  꽤 먼길을 달려가야 한다. 빠듯한 시간이다.  열심히 달리면 두 시간이면 가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착각이었다. 


지도상으로도 시코쿠 섬의 북쪽 해안에서 길쭉한 한 면을 다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 먼 길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몸은 지쳐 있었다. 



11번 국도를 따라 평탄한 길이라 일단은 줄곧 시속 30km 내외를 유지하며 달렸다.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조금씩 페이스가 떨어졌다. 


꼬마들이  학교 파할 시간이었다. 11번 도로는 새로 낸 자동차길이라 ... 

이면에 오래된 옛길들이 거의 나란히 뻗어있었다. 사람들 얼굴만 보아도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일부러 11번 도로를 버리고 옛길로 달렸다. 


해가 뜨거웠다. 하천은 말라붙은 채 강바닥이 태양에 달궈져... 사막 같은 모습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도중에 규동 체인점이 있어 몸도 식힐 겸 ...들어갔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몸도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식권발매기에서 옵션을 선택해 식권을 뽑아 주문을 하게 돼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사막 같은 길을 한참 달렸다. 두어 시간 달린 뒤에... 너무 지쳤지만 국도 변에는 마땅히 앉아 쉴 만한 그늘도  드물었다. 시코쿠주오시(四国中央市)에 거의 도달한 지점에 완만하지만 꽤 긴 고개가 있었다. 내려서 끌고 가자니 더 지칠 것 같아서 기를 쓰고... 패달을 밟으며 올라갔다. 이미 다섯 반이 넘어 있었다.  


언덕 마루에 다다를 무렵... 앞서 가는 자전거 순례자를 만났다. 뒤에서 볼 때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여자였다. 




그는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라... ' 복장을 보고 같은 순례자인 것을 확인하고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는 근 30분 이상 언덕길을 걸어내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다찌 사토미 상은 '도쿄에 사는 20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 딸도 스무 살이라고 ... 하니까...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도대체 몇 살인데 딸이 스무 살이냐고... 꽤 많다고...ㅎㅎ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했느냐? 고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렇다고... 출발한 지 24일 째라고... '왜 순례를 하고 있나요? ' '작년에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면서 순례하고 있어요.' '와... 대단하네요. 할아버지가 제일 중요한 분이었군요. 부모님이 아니고? ' ' 부모님은 이혼해서 함께 살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요.'  


기억을 되살려보니... 26번 곤고후쿠지에서였나... 택시 기사가 '예쁜 여자가 혼자 자전거로 순례를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하던 ... 말이 생각났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와이온나'가 바로 아다찌 상인 모양이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어디서 잘 계획이냐고 물으니 자신은 시코쿠주오시에 있는 1박에 5천엔짜리 비지니스 호텔을 예약해두었다고... 나는 그때까지 잘 곳이 막연했다. 내가 미처 잘 곳을 정해놓지 못했다고 하자 사토미는 자기 전화기로 인터넷에 접속해 일본 여행 숙박 예약 사이트인 자란넷(www.jalan.net) 을 통해  시코쿠 주요시 이오미시마역 인근1박 3,600엔 짜리 리브마크스 호텔을 찾아서 예약까지 해주었다. 


 

잠자리문제까지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내가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지만, 그는 내게 손님이니 자신이 저녁을 사는 게 맞다고 했다. 역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엄청난 안주를 시켜서 맥주를 무척 많이 마셨다. 가게 주인부부도 합세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자카야 안 주인은 한국 드라마 매니아였다. 내게 수많은 드라마 이야기를 했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일본사람들가운데는 드믈게... 핸드폰도 삼성 갤노트2를 쓰고 있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묵언수행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낯설 이국의 거리를 그저 달리고 달려왔는데, 떠들썩한 술자리에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 일이 낯설고도 즐거웠다.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고... 결국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반씩 '분빠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11시가 다 돼 술자리가 파했다. '김상 내일 몇 시에 출발 하세요?' '보통 7시쯤 떠납니다.' '아, 저는 8시쯤 출발했요.' '네... 힘 내세요.' ' 아마도 또 만나게 될 거예요. 가는 길이 같으니'  이렇게 아다찌 상과 헤어졌다. 


길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나는 되도록 혼자서 호젓하게 달리고 싶었다.  그 점은 ...  비상한 기획으로 귀한 시간을 내 순례를 하고 있을 아다찌 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을 모으고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무엇인가 정신을 고양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3600엔짜리 비지니스호텔은... 토요코인에 비해 떨어질 게 없었다. 다만, 아침밥이 없었다. 대신 로비에 컵라면 자판기가 놓여있었다. 




숙박 3600엔, 규동 500엔, 납경 2회 600 


16-6/6 목 마쓰야마유스호텔~이마바리시(今治市) 사쿠라이해변만남의 광장(桜井海浜ふれあい広場)
운행 79.81 km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에 넘치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느낌. '모두는 개인을 위해, 개인은 모두를 위해' ..... 

이  낯 익은 낭만적인 구호... 



화장실에도 지구를 위해 고지함율 100% 의 재생지를 쓰고 있으니 아껴 써 달라는 당부... 일하고 있는 한살림에서 ... 가능한 모든 홍보물을 재생지로 만들려고 노력고 있는 입장에서... 절로 미소가 머금어질 수밖에... 



만화책과 핸드폰 충전기, 무선공유기, 피싸가 있는 1층 로비 ... 


저녁이면 식당에 둘러앉아 '마지꾸' 공연을 하면서 남녀노소 어울려 킬킬 대는 곳... 


아침 7시 1층 식당에서 전날 예약(550엔)해둔 아침을 먹었다. 비지니스 호텔들처럼 부페식으로 차려둔 음식들은 만족스러웠다. 현미밥에 햄과 샐러드와 채소 미소 된장국을 다 먹고... 옆에 있는 빵도 몇 조각 잼을 발라 든든히 먹고, 커피까지... 


온종일 땀을 흘리며 달리다 보면, 내 몸이 자동차와 다를 게 없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탄수화을 소화시켜 녹말을 포도당으로 분해해 에너지원으로  태우면서 달리고 달린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   그리고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들이 절반 정도의 의식을 지배한다면, 온종일 뭘 먹을까, 어디 가서 잘까 이런 생각도 절반... 아니 절반 이상인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단순해지는구나... 단순해지기 위해 떠나왔구나... 


집을 꾸려 여덟 시가 다 돼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하루 동안 후방으로 휴가를 나왔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는 병사만큼이나 마음이 비장해졌다.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던  마쓰야마 시내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해두고 싶었다.  



52번 다이산지(太山寺)로 가려면 출근길 시민들과 뒤섞여  해안쪽으로 달려야 했다. 컨테이너 차량들과 부두가 창고와 산업시설들...을 지나친 뒤 다시 북쪽으로... 도고온천 근방에 있는 마쓰야마유스호스텔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헤매느라 오전 9시쯤 절에 도착했다. 본당까지는 일주 문에서 500 미터 가량 산을 올라가야 한다. 신음소리를 내며 오르막을  오르는 내게 승용차로 순례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서울서 왔다니까 깜짝 놀란다. 예의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하느냐고... 



1305년 마쓰야마의 성주인 고노(河野)가 기증했다는 다이산지의 본당은 일본 국보라고 한다. 


53번 엔묘지 (円明寺)는 다이산지에서 불과 3Km도 안 되는 지점, 시내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이한 건 없었는데, 이 절에는 1924년에 순례를 하던 미국사람 스타르가 발견했다는 가장 오래된 동판 오사메후다(納札)가 유물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오사메후다는 순례도중에 알게 되었는데...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주소, 기원하는 바를 적어 본당과 대사당 앞에 있는 함에 넣은 것으로 순례자들끼리는 이것을 명함처럼 주고받기도  했다.   


엔묘지를 참배하고 나니 9시 30분. 당분간 해안선을 따라 이마바리시(今治市)까지 줄곧 달려야 한다. 54번 엔메이지(延命寺)까지의 거리는 36km다. 


엔묘지에서 나와 건널목 사진을 찍으려 돌아섰더니 옆집 할머니가 나와서 엔메이지 가는 쪽은 이쪽이 아니고 저리로 교각을 지나서 곧장 가라고 말을 한다.  주춤하는 나를 지켜봤던 모양이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가는지... 재잘대며 곁을 스쳐갔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노란 모자다... 시인성 높은 모자로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이겠지... 귀여운 녀석들...ㅎㅎ 



내를 벗어나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커피우유와 단팥빵 (252엔)을 사서 우유는 마시고 빵은 핸들바백에 넣고 출발... 

이제 시내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지도에서 보듯이 줄곧 해안을 달리게 돼 있다.  시코쿠 지도를 보면 좌우로 조금 길게 뻗어 있고 북쪽 바다를 향해 양 끝에 뿔 두 개가 혼슈 쪽으로 솟아 있는데, 오늘은 왼쪽 뿔을 돌면서 196번 국도(이마바리가도)를 따라 해안을 돌아야 한다. 지도를 보면서 가늠하기로는 이마바리시에 있는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뿔의 오른쪽 사면에 있는 바닷가 사쿠라이 해변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태평양에 면해 있는 남쪽 바다와 달리 이쪽, 세토내해는  파도도 거의 없다. 바다다운 호방한 느낌도 없다. 게다가 바이패스로 자동차 전용도로가 분리된 곳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뒤에서 달려오는 트레일러들을 의식하면서 긴장한 채 달려야 하는 구간이었다. 



보행자나 자전거를 위한 도로가 구분이 돼 있지만 하수관로가 밑에 깔려 있거나 요철이 심해 자전거로 달리기는 상당히 불편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그냥 자동차 도로로 빠르게 달리다가... 엄청난 속도로 추월하는 트레일러들에 한번씩 휘청하고 나면... 급격히 위축돼 다시 자전거 도로로 피해 들어가는 일이 반복 됐다. 


또 이용자가 많지 않은 해안 길이이라 갈대와 풀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곳들도 있었다. 괜찮겠지 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가다가 풀들에 부딪쳐 단차가 있는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다.   



더러는 호조(北条)같은 작은 마을들을 관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오전 내 인가가 없는 해안길들을 달려야 했다. 


마쓰야마시와 이마바리시 중간 지점 쯤에 있는 가자하야노사토후와리(風早の郷 風和里)  미찌노에키 . 


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널찍한 휴게공간... 한 동안 쉬었다.  


처마 밑에 제비들이 많아서 한참 구경했다.  우리 생전에 서울 인근에도 제비가 돌아오는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휴게소에서  로드 자전거를 타고 들렀다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가끔 만나던 도보 순례자들을 해안길에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줄곧 시속 30km 가량을 유지하면서 빠르게 달리는데도 다소 지치는 길이었다. 구름에 가려 해가 '쨍하게' 비치지 않으면서도 뭉근하게 달아오른 날씨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다. 


김동리는 '역마'라는 소설에서 화개장터 인근 섬진강 길을 묘사하면서 아무리 걸어도 '길멀미'가 나지 않는 길이라고 했었다. 쌍계사 쪽으로 지리산에 갈 때마다 그 구절이 떠오르곤 했다. 어쩌면 그리도 적확하게 묘사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마바리가도를 달리는 나는 길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바다쪽에서는 상쾌한 바람 한 자락 불어오지 않았다. 파도도 치지 않는 숨죽인 바다... 





시외로 드라이브를 나왔다가 해안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해적우동... 시간이 맞았다면 일부러라도 들러보고 싶은 바닷가 우동집... 


12시30분 ... 길가에 있는 라면집 '돈돈라멘'을 보고 무조건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립기도 했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기가 미안해 주방과 마주 보고 앉는 바에 않아 라면을 먹었다. 덕분에 라면을 어떻게 조리하는지 고스란히 지켜보았는데... 비닐 봉투에 든 공장 양산 생면을 뜯어서 거름망에 담은 뒤에 가스렌지 위에 올려둔 커다란 국물 솥에 몇 차례 토렴을 하고 돼지 뼈를 우려냈을 국물을 부은 뒤 양파와 숙주 같은 채소들을 한 줌 올려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라면은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500엔) 


 인근에서 계속 엷은 연두색 유니폼 입은 사람들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근처에 있는 태양석유  직원들이었다. 식당 손님들도 대개 그들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온 직원들은 라면집에성 만화책을 보면서 라면을 먹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후다닥 회사로 돌아갔다.  



라면집을 나와 정유탑에서 불을 뿜고 있는 태양석유를  지난 뒤에도 한동안 달렸다. 


이마바리시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호시노우라 해변공원. GPS에 캠핑장으로 표시된 곳이었지만, 공원 관리사무소는 비어있었고...샤워를 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텐트를 치더라도 국도변이라 편한 잠을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급수대가 있긴 했지만...아무래도 야영을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굳이 잠을 자자면 안 될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인근에 혼슈의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까지 연결하는 니시세토자동차도로(세토우치 시마나미카이도)가 있다고 했다.  세토나이카이의 섬을 9개의 다리로 연결하는 약 60km 달하는 자동차 도로고, 다리들에는 자전거ㆍ보행자 전용도로도 있다고 하지만... 감히 넘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나쳐야 했다. 



길 건너편에 에이코프(A Coop) 대형 매장이 보여, 일부러 들러보기로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한살림은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린코프 생협이나, 도쿄를 중심으로 주로 관동지방에서 활동하는 생활클럽 생협과 오랫동안 교류를 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생협의 역사가 20년 쯤 앞서고, 규모도 훨씬 크다. 그 가운데 앞 서 말한 두 생협은 반전평화, 주민자치, 복지 등에서 대단히 진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생협들은 시민네트워크('네또')라는 준 정당적인 조직까지 결성하고(일본도 생협법에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시민후보를 지방자치단체 등에 출마시켜 단체장이나 시의원들을 상당 수 의회에 진출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조합원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분들이고, 이들은 받는 월급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원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네또'에 내놓고 있으며, 개인의 경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협이 내세우는 식량자급, 반전, 반핵 평화, 주민 복지 등을 위해 시 예산을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2번까지만 출마가 허용되고, 그 뒤에는 후배 활동가에게 출마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우리나라 생협운동은 한살림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생협들에 비해 유기농, 친환경물품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하다. 다만, 일본의 고베 시 같은 곳은 전 주민의 80% 조합원일 정도로 대중적인 기반이 훨씬 넓어, 일반 시장에서도 생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린코프나 생활클럽 같은 생협들은 운동성도 강하지만 다른 생협들은 또 그런 경향들이 강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값 싼 중국식재료를 수입해다가 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 생협들도 있다고 ... 





그러나 어쨌든, 반갑기도 해서 생협매장을 둘러보려고 자전거를 세워 놓고 매장으로 걸어가는데...  육십 세쯤 돼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전해준다. 도로에서 달리는 걸 보고 따라온 것 같았다. 여전히 오셋타이를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몇 번 거절했더니 ' 실례인 줄 알지만 이걸 받아 주세요.  주스라도 마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다시피 한다. ..또 거절 못했다. 


생협매장은 우리나라의 한살림 매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일반 마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저가의 중국산 생활용품까지 파는 백엔숍 (세리아) 마저 있었다. 한쪽에  접골원,  카페인 듯한 마마스키친 등까지...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수제 도시락과 주먹밥(오니기리) 정도가 남 달라보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 였다. 


이곳에서 오니기리 쵸코칩쿠기,  우유, 어느 절엔서가 풀어 놓고 잃어버린 반다나(등산용 스카프), 아이이스 크림 등을 쇼핑했다.(모두 750엔) 




곧 이마바리(今治) 시내로 접어들었다. 


 54번 엔메이지(延命寺).   오후 2시에 도착했다. 시내에 있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멀리 달려온 게 감격스러워 오늘의 납경을 이 절에서 받았다. 



 여기도 드넓은 묘지를 끼고 있었다. 



인간이 불안하고 나약하다 보니 종교가 필요하겠지... 불안의 근원에는 사멸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 아예 죽음 뒤에 펼쳐질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종교적 신념에 기대 불안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리라... 





나 역시, 우리 세대 많은 이들처럼 20대에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물질이며, 정신의 작용마저도 물질의 반응이라는 설명이... 어떤 면에서는 위안을 주기도 했다. 죽어서 물과 바람과 흙이 된다는 것,  ... 관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나 잠깐 남을 뿐 ...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믿음... 


그 믿음이 튼튼할 때는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오로지 이성적 합리와 양심에 따라 걸어가면 되었다. 설령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을 조금 앞당길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세계도 인간도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닫게 됐다. 영혼의 문제나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이나 권위에 대해... 느끼고 깨닫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생명( 이 역시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과 의지에 닿아 있는 부분이겠지만) 은 '물질의 합법칙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라는 점도... 믿게 되었다. 



세계를 물질로만 보는 관점... 그런 신념이 세계를 망가뜨려온 게 근대의 역사가 아닐까. 이성에 대한 오만한 신념. 문명이나, 산업... 이것이 이제 인간의 생존 자체를 극한까지 위협 하고 있잖은가...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성물질들...  


이마바리시 역시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예의 시내 한 복판에는 언덕 위에 오래된 성이 있었다. 골목을 달리고, 물길을 건너면서 시내를 헤매다 보니 절이 나타났다.   



55번 난코오보오(南光坊). 오후 2시 50분에 도착했다. 88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 사(寺)자가 아니라 동네 방(坊)자가 붙은 절이다. 절 자체 휑 하고 별 게 없는데 산문은 도로변에 거대하게 서 있었다. 이곳에도 예의 바로 옆에 더 큰 규모의 신사가 있었다. 



두어 시간 내로 56번 다이산지(泰山寺)부터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해변 캠프장에 도달할 수 있을지...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적하지만 잘 정비된 시내. 차량 통행에 비해 도로가 과한 게 아닐까 싶은 길을 3km 가량... 다시 내륙쪽으로  달려 

56번 다이산지(泰山寺)에 도착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절이었다. 전설에는 인근에 있는 하천이 해마다 범람하자, 코보대사가 주민들을 지도해 제방을 쌓아 치수 했다는 ... 



그 때문인지... 다이산지는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57번 에이후쿠지(栄福寺)는 고속도로(196번도로 바이패스) 너머에 있었다.

하교길의 학생들이 얼마나 티 없어 보이던지... 그렇다고 믿자... 그렇겠지... 비록 내면이 들끓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들 만큼 괴롭지는 않겠지... 


하나같이 삭발한 머리에 흰색 헬멧을 쓰고 예외 없이 자전거다... 교복이겠지만 흰색셔츠와 감색 바지...  



시의 외곽, 논들이 한가롭게 펼쳐져 있는 시골 동네... 



 별 다른 표지도 없이 있어 하마터면 절을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아니, 들머리를 지나쳐 200미터쯤 지나친 뒤 혹시 지나친 이 가게가  절 앞 기념품 가게 아닐까 싶어 되돌아와 절을 찾았다. 

오후 4시.   에이후쿠지(栄福寺) 참배를 마쳤다. 


모내기 마친 지 얼마 안 지난 어린 모들이 심어진 논들이 펼쳐진 들판 위에 살짝 올라 앉은 어

대절 버스를 타고온 단체 순례자들이 오늘의 마지막 절에 들렀다는 듯... 한가로운 표정으로 본당에서 내려서고들 있었다. 




58번 센유지(仙遊寺)... 그토록 높은 산 위에 있는지 몰랐다. 


완만한 언덕 위로 뻗어 있는 길을 느릿느릿 조금 한가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고도가 장난이 아니다. 시내가 온통 내려다 보이는 산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생협매장에서 사 둔 주먹밥을 먹으며 기운을 내지 않았다면... 다리가 후들거려 애를 먹을 뻔 했다. 



예상치 못한 고도. 절은 가히  선유 할 만 한 높이에 있었다.  결국 인왕문 못 미친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서 올라야 했다. 


온천도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잘 되어 있고... 내려다보는 경치도 그만이라... 그냥 하룻밤 여기서 자고 갈까...




 망설이다가 ... 내려가서 자전거 끌고 올라올 일도 암담하고 예정에 없던 숙박도 내키지 않아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규모도 크고 건물들도 물론, 세로 지은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본당은 제법 연륜이 느껴졌다. 



공수도 강습도 한다는 안내도 있고... 규모가 상당한 절이다. 


지친 때문인지...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왔다.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느닷없는 ...  


혼자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갑자기 급습을 당한 듯,  밀려 든 회의감을 주머니속에 든 조약돌처럼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혼자 이렇게 침묵하는 순간을 느끼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을 자유. 얼마나 갈망했던 순간인가. 


게다가 부모님을 깊이 만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베풀어 주는 과분한 사랑이 당연한 듯 받았고,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나의 내면은 조금 복잡해졌다. 삼국지류나 채근담 같은 책을 자주 읽던그 무렵의 나는, 스스로 갑자기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 대해 '나는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었으니 나 스스로 아버지의 역할을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암시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미 우리가 낳은 딸들이 내가 아버지를 여읜 나이보다 더 자랐다. 나의 아버지보다,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에 더 많은 생각이 머무는 때가 되었다. 과연 나는 딸들에게 어떤 아비일까. 사실은 대학 1학년이 된 큰 딸 아이와는 떠나오던 무렵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빴다.  갈등의 원인은 다양했다. 자정까지로 정해 놓은 귀가 시간, 아무리 입시지옥에서 풀려난 1학년이라고 해도 책 한 줄 안 읽는 것 같은 실망스런 학습 태도... 이런 말을 안 해도 얼굴에 쓰여있기 마련이라...딸은 되도록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오후 5시가 다 돼 간다. 다시 이마바리 시내로 내려가야 한다.


이곳도 분위기가 조금 독특하다. 시내로 내려오면서 만나게 되는 일본의 조용한 소읍의 풍경.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찌 키우고 있나... 자정이 되어야 학원에서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나라의 중고등 학생들을 시코쿠에서 떠올리자니... 무슨 괴기스러운 부조리극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산을 내려서자마자  다섯 시 시보가 울려 퍼졌다. 베르너의 '들장미'. '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 중학교 음악시간에 친구들과 미소를 교환하며 합창을 하던 음악시간이 생각났다. 

해 질녘, 귀가를 재촉하듯 울려 퍼지는 시보까지... 마음은 더욱 애수에 젖어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는 9.3km 가량 떨어져 있었다. 센유지에서 산 중턱까지 내려와 우측으로 산간 도로를 한동안 달리다가 좌회전해서 해안 쪽으로 한참을 달려 내려가야 했다. 이미 납경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지나 있었다. 동네 수퍼에 저녁장을 보러 온 주부들이 분주한 시간이었다. 



시 외곽에 있는 고쿠분지.  이미 불 꺼진 향로에 향 세 촉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하루 동안의 순례는 또 마무리 되었다. 온종일 침묵 하는 가운데에도 마음 속에 무수히 피어나고 사라진 수많은 번민과 회억들...  그리고 오전에 ... 굳이 달리는 자전거를 쫒아 와 생협매장 앞에서 천원짜리를 쥐어주고 가던 그 할머니... 


오후 5시 50분.  잠자리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다. GPS가 가리키는 해변 캠핑장까지는 5.6km. 시내를 벗어나자 도무지  상점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먹을거리도 없이 야영장에 가서 처량한 밤을 보내야 하나? 이 난감한 상황을 어째야 하나 갈등하는 순간에 작은 시골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할아버지가 나오신다.그 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다.  이곳에도 소포장 쌀은 없었다. 사정해서 쌀 1kg을 샀다.  감자1kg 바나나 한 송이까지(모두 752엔)  쌀을 사고 나니까 마음이 느긋해졌다. 이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시외의 인적 드문 도로를 달렸다. 



차도 사람도 전혀 없는 무섭도록 조용한 시골길을 한 동안 달려 바닷가에 도착했다. '사쿠라이 해변 만남의 광장'이라는데... 개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종료나무가 길게 뻗어있고 제법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하지만,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은 곳들이 그렇듯이...뭔가 퇴락하고 서글픈 분위기... 


조금 무섭기까지 한 바닷가였다. 


물을 길을 수 있는 음수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을 뿐  쓸쓸하다. 물과 화장실이 있으니 잠은 잘 수 있겠다.  화장실은 낡기는 했어도 깨끗이 청소 돼 있었다. 역시나 이곳도 '깨끗한 공중화장실은 지자체의 자존심' 인 모양이다. 

어디에 텐트를 칠까... 쳐도 되나... 조금 주저됐지만 ...달리 대안도 없었다. 



시멘트로 지어놓은 배 모양의 어린이 놀이기구가 있길래 이 안에 텐트를 쳤다. 바람을 막아주었고,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세 칸 있어 걸터앉아 밥을 먹기도 좋았다.  


내일 가야 하는  60 번 절 요코미네지(横峰寺)는 지도상으로 보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산 위에 있다. 해발 696미터... 또 북한산 높이에 가까운 산을 올라야 한다. 어떻게 갈 것인지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한 채... 밤을 맞았다.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조금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잠을 청했다. 가끔씩 퉁퉁퉁...고깃배들이  엔진을 울리리면서 잠을 깨웠다.  조금은 서글픈 밤이었다. 


15-6/5 수 구마코겐(久万高原) 미미도(御三戸)캠프장- 마쓰야마(松山)시 유스호스텔

 운행60.60km




역시나 다섯 시도 되기 전에 잠이 깼다. 잠시 후면 또 사람들이 산책을 나오겠지...  텐트 지퍼를 열고 누운 채 강변 풍경을 감상했다. 해가 뜨기도 전... 강변에는 말할 수 없이 청량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산 그림자마저도 물에 잠겨 젖어있는 것 같은... 산정 고원의 적막한 새벽이었다.   


친구들과 스무 살 전후에 떼로 몰려 다니며 함께 자는 일이 많았다. 주로 서울 장위동에 몰려있던 친구들 두세 명의 집으로 예닐곱 명이 함께 몰려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자취를 해야 했던 나와 ... 의정부에 살던 친구, 서울로 유학 와 있던 친구들이 섞여 있었던 탓에... 그 시절, 친구들은 만나면 헤어지지 못하고 2박 3일이고 3박 4일이고... 떼로 몰려다니곤 했다.  특히 방학 때... 






어느날, 친구 M의 아버님이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얼굴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으로 들어와 일장 훈시를 하셨다. 밤새 떠들다 아침 녘에야 잠들고 정오가 다 돼야 일어나곤 하던 우리들이 한심하셨는지... " 우리 젊을 땐 말이다 새벽에 산에 올라가 몸도 마음도 단련하고 그랬지... 새벽 산에는 서기가 서려 있거든. ... "  아버님의 취중 말투와 '새벽 서기'라는 말에서 어떤 과장된 느낌을 받은 때문인지 친구들은 속으로 쿡쿡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내게는 그 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스무 살 그 시절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 80년대초... 불의한 권력에 억눌린 현실에 대해... 툭 하면 밤새 모여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우리들의 익숙한 화제 속에 툭 던진 그 낯선 말씀이 내게는 한 줄기 청량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 새벽 숲에는 '서기'가 있지... 할 수만 있다면 그 새벽에 그 방을 빠져나와 혼자 산길을 걷고 싶어졌다.  


며칠 전  슈퍼에서 사두었던 덕용 포장 일본 라면을... 끓이고, 저녁에 지어둔 밥을 말아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렸다. 내딴에는 부지런을 떨었는데... 예상대로 여섯 시부터 주민들이 산책을 나왔다. 사람들 나다니기 전에 식기며 구차한 살림을 다 정리해야 겠다는 강박이 ... 있었던 것 같다. 


짐을 모두 꾸린 뒤 7시 30분에 다시 길을 나섰다. 흔적도 없이 텐트를 걷고... 다시 도로 위로 올라가 45번 사찰 이와야지(岩屋寺)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가는 차량 한 대 없는 한적한 산골이다. 



맑은 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8km쯤... 달린다. 강원도의 어디쯤이라고 해도 어색할 게 없는 풍경이다. 



잠시 속도계가 말썽을 부렸다. 작동이 안 되길래... 이렇게 저렇게 만져도 보았다. 이때까지 표시된 누적 주행거리 1424km 처음에 100km 가량이 포맷된 적이 있으니 이미 1500여 km를 달려온 것이다.  속도계가 구동되지 않은 것은 앞바퀴축에 매달린 센서가 흘러내려 회전을 해도 스포크에 달린 센서와 신호를 주고받지 못한 때문이었다.  




8시15분 이와야지(岩屋寺)에 도착했다. 깊은 산속... 이른 아침이라 참배객도 거의 없었다. 





깍아지른 바위 산에 안겨있는 고풍스런 절이었다. 


일주 문 앞에서 본당까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길가에 죄대 남무대성부동명왕(南無大聖不動明王)이라는 휘장이 늘어서 있었다. 귀의(歸依) 한다는 나무(南無)나 대성(大聖)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는데... 부동명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코보대사를 그렇게도 부르는 것인가? 짐작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내 짐작과는 달리.. 부동명왕은  산스크리트어(Sanskrit) 아차라나트(아차라-움직이지 않는, 나트-수호자)를 번역한 말로, 주로 밀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오대 명왕 가운데 핵심이며, 그 기원은 힌두교의 시바신이라고 한다.  




코보대사가 부동명왕을 조각해 이 절의 배경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에 넣어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는 북한산의 인수봉 같은 그런 단단한 느낌이 아니라 진안에 있는 마이산처럼... 콘크리를 부어놓은 것 같은 그런 바위였다. 



부동명왕...아차라나트는 대개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올가미 같은 것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 우리는  갈망한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한 시도 평탄하지 않다. 대개 그렇다. 지나간 일들 후회한들 무엇하리... 그러나 ... 그러나... 회한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나... 나는 왜 조금 더 따뜻한 아들이 되지 못했나... 그런 후회... 



산중의 절에는 도보순례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절에서 일하는 보살님인지...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 질 자국이 아직 사람들 발자국에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침 산사. 



코보대사가 직접 판 굴이 있고 그 안에 신령스러운 물이 솟아나고 있다더니... 이것인지... 그렇다면 이끼를 뒤집어 쓴 이 작은 동굴의 역사는 몇년이나 될까...   




길가에 달려있는 '대화혼(大和魂), 힘내세요! ' ... 일본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한국사람들에게는 불편한 말이다. 대화 (大和)는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배달(밝달)'처럼... 일본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한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무천황이 대화지방에 나라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태백산 신시(神市) 처럼 말이다. 


아시아를 세계 전체로 인식했던 시대,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곳에서 유래한 문물을 재(才), 이와 대립 되는 일본특유의 정신과 방법을 화(和)라고 ... 외래문물을 취하되 자기 정신과 가치관을 중심에 두자는 생각에서 일본은  화혼한재(和魂漢才), 근대에 와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슬로건처럼 내세웠다. 우리가 외세에 의해 나를 개방하면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을 내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일본민족의 혼을 강조하는 것이 이웃나라들에게 섬뜩하게 느껴지는가... 과거에 그들이 야마토고코로(大和心)를 부르짖으며 저지른 침략전쟁 때문에 그렇다. 그런 침략과 학살의 만행을 독일처럼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가운데 2차대전 당시에 국가적 슬로건으로 주창되던 이 말을 강조하기 때문에... 과거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나라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고요한 마음으로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향을 사른 뒤 산길을 내려오던 마음은 대화혼을 보고 그만 복장해지고 말았다.  산 아래 정류장 앞에 있는 가게에 들러 빵 한 봉지와 레몬음료를 사서... 휴식소에 앉아 잠시 쉬었다. 



또 다시 산을 넘어가야 할 게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12번 국도를 따라 계속 북상하다가... 결국 어제 들렀던 44번 다이호지(大宝寺)가 있던 마을까지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길이 깨끗하고 마을이 조용한 것은 좋았지만... 이 길도 만만치 않았다. 고개 하나를 넘기 전에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던 아저씨와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자신은 작년에 오토바이로 순례를 한 적이 있었다고... 순례자들가운데는... 이렇게 반복해서 계속 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누군가 방명록에... '시코쿠 병원에 입원했다'고 썼던 말이 떠올랐다. 일상을 견디다 겨우 짬을 내 이렇게 자신의 내면과, 또 이들의 신앙 중심에 있는 코보 대사와 대화하면서 수십일을 걷는 일... 그것이 왜 병원이 아니겠는가... 



구마코겐 마을(久万高原町)에 다시 돌아왔다. 어제 저녁에 다급하게 잠자리를 찾아 달리던 순간이 떠올라 웃음이 머금어졌다. 마을에 편의점 같은 것은 없는 줄 알았는데 북쪽 끝에 편의점이 있었다. 화장실도 쓸 겸 들러서 늘 사서 마시던 500밀리리터 카페오래를 사서 가게 앞에서 마시고 있자니...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단정한 표정의 아저씨가... 가게 안에서 오차 한 병과 주먹밥 한 덩이를 사가지고 나오면서...내게 500엔짜리 동전을 오셋타이라며 ... 건네주었다. 


아마도... 사 가지고 나오던 오차와 주먹밥이 자신의 점심인 모양인데... 자신을 위해서는 300엔도 안 쓰면서 순례자에게 500엔짜리 동전을 기부하다니... 어쩐지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10시 40분 다시 출발...33번 국도로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열심히 밟으며 오르기 시작... 이 갈림길은 33번 도로의 바이패스구간과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직전에 농수로로 맑은 물이 쏟아지고 있길래...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발을 씻었다. 발을 깨끗이 씻기만 해도 피로감이 가신다.  



점점 태양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내릴까 걱정... 해가 뜨거워지면 뜨거워진다고 걱정... 이러니 부동명왕이 번뇌에 시달리는 인간들을 건져야 겠다고 올가미를 들고 서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ㅎ  


결심을 크게 하고 오른 때문인지... 큰 고통 없이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미사카 고개(三坂峠, 해발 720미터) ... 자동차들은 아래쪽에 새로 뚫은 터널로 바이패스가 나 있어 통행자가 거의 없다. 


고개마루는 휘어져 있어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나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푸파 푸파..' 무슨 짐승의 신음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자전거를 탄 사람이 막 등정을 하고 있었다. 늘씬한 로드바이크였다. 그는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그 대로 고갯마루를 지나쳐 달려갔다. 까마득하게... 산 아래로 마쓰야마 시내와 그 너머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도시가 펼쳐져 있구나. 이제 도시로 내려가는구나... 

그러나 자동차와 분리돼 있던 도로가 이내 합류하면서 당분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화물차들 옆으로 겁에 질린 채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와야 했다. 그런 길은 고개를 절반쯤 내려와 가파른 길의 경사를 눅느라 도로가 완전히 360도 회저을 한 뒤에... 샛길이 갈라질 때까지 지속됐다. 



 지역 어린이들이 그린 자연보호 포스터가 길가에 전시돼 있었다.  



다소 경사가 가파른 구간도 있었지만 33번 도로와 헤어진 뒤로는 다시 평화로운 숲길이 산골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기온은 실감할 수 있게 빠르게 올라갔다. 갑자기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뀐 것처럼 ...  기온도 식물들도 달라졌다. 



 마쓰야마에 들어온 모양이다. 무언가 한 과정이 마무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불과 45개 절을 돌았을 뿐인데도 그랬다. 섬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제 네 개 사면 가운데 세 개 해안을 모두 돌았다...이제부터는 북쪽 해안을 따라 일본에 처음 도착했던 다카마쓰를 거쳐 88번 사찰까지... 가면 이 여행은 마무리된다. 


마쓰야마 시(松山)는 에히메현의 현도라고 했다. 큰 도시다. 나쓰메소세키의 소설 도련님(봇짱)의 무대도 이곳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때만 해도 시코쿠는 외딴  오지로 묘사된다. 도쿄에서 마쓰야마에 있는 시골 학교로 전근 온 주인공이 좌충우돌 더러 교활하고 속된 주변 인물들과 맞서고 부딪치면서 겪는 일들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읽어본 그 소설은 사실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읽게 되던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 '데이만' 같은 성장소설 같기도 했지만... 이 소설들에 비하면 봇짱에 담긴 메시지는 번역 때문인지 어색하기도 하고 뭔가 충분히 감정이입이 안 됐다. 


마쓰야마시에는 46번 루리지(浄瑠璃寺) 47번 야사카지 (八坂寺) 48번 사이린지 (西林寺), 49번 죠도지(浄土寺), 50번 한타지(繁多寺), 51번 이시테지(石手寺)그리고 53번 엔묘지( 円明寺)까지 무려 8개의 절이 시내에 흩어져 있다. 시내에는 무슨 산이나 험한 고개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첫날 도쿠시마에서 10개의 절을 순례한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다 돌 수도 있겠구나...  어리석게도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치 군사작전을 해치우는 사람처럼... 어느 순간엔가 빨리 숙제를 해치워야 한다는 식으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뭔가 그간의 보상 받아야 한다는 심리, 힘든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이나 전장에서 돌아온 상이군경들이 일반인들을 향해 치기 어리게 패악을 부리는 것과 같은.. 그런 심리도 있었다.  


46번 죠루리지(浄瑠璃寺)에 도착한것은 12시 20분 경이었다. 절은 산에서 내려와 시가지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절의 이름은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약사여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절에는천연기념물 1000년도 더 되었다는 고목이 있었다. 





47번 야사카지 (八坂寺)는 죠루리지에서 1km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12시50분. 골목을 따라 달리다 보니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어떤 면에서는 도회지가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이제 한동안 도심 속의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겠지,  고적한 산정 마을들과는 영영 이별인가...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순간을 더 누릴 것을... 그 서늘한 산중에서 늘 잠자리 걱정을 하며 종종걸음을 치던 게 떠올랐다. 


야사카지(八坂寺) 라는 이름은 여덟 개의 경사지를 개간해서 절을 앉힌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절은 신도와 불교가 융합된 절이라 해서 오래도록 번성했는데 여러 번 불타고 다시 세우는 과정을 거쳐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일본은 1868년 국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을 발표하고, 시코쿠 지역에서도 불교배척 운동이 벌어져 1875년까지 수많은 불교 사찰이 불타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런 여파가 미쳤던 모양이다. 어쩐지 ... 그 동안 88개 사찰 주변에는 더 큰 규모의 신사들이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48번 사이린지(西林寺) 까지는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완만하게 내려가며 주택가 골목길을 달렸다. 오랜만에 핸로미찌스티커를 따라 달렸다.  



 절에 도착한 것은 1시 20분 경이었다.  시내에 들어와 약간 들뜨기도 했고... 뭔가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아야 겠다는 심정에서 제대로 된 밥을  사먹어야 겠다 싶었다. 



 사이린지는 주택가에 있었다. 그러나 산문은 고풍스러웠다. 산문 안에는 예의 손과 입을 씻는 미즈야가 있고... 




본당과 대사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사이린지 본당에 모신 부처님은 참배객들이 볼 수 없게 감춰져 있고 뒤로 돌아앉아 있는 탓에 본당 뒤쪽으로 돌아가서 참배를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주로 원만한 가족관계를 기원하며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당을 만나면 점심도 먹고 충전도 해야지... 생각하면서...이 즈음에는 반야심경 독경도 조금 건성으로 한 감이 있다.  

49번 조도지(浄土寺)까지는 제법 큰 도로를 따라 시내를 질주해야 했다.

이렇게 도로에 차가 많은 것도 사람과 집들이 많은 것도 어색했다. 그런데 마땅한 식당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조도지를 향해 달릴 때까지만 해도 시내에 있는 모든 절을 53번까지 다 순례하고 어디 바닷가 야영장을 찾아가거나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진도가 빨라지니까... 쉴 틈을 내지 못한 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차량과 사람들에 뒤섞여 골목을 돌아들면 불과 2~3 km 이내에 다음 절이 나왔다. 



50번 한타지(繁多寺).  아직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이미 오후 2시반이 넘어 있었다. 배가 고프니까 슬슬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나빠지고 있었다. 







51번 이시테지(石手寺) 국보급 문화재가 많은 큰 절이다. 절로 향하는 길목에 회랑처럼 양 옆으로 수공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시테지의 본당은 국보라고 했다. 이 절은 규모가 크고 방문객이 넘쳐났는데... 인근에 '도고온천'이 있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다고 한다. 도고온천은 일본 3대 온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수백 년 전통이 있어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데, 주변에 유서깊은 절도 있는 것이다. 



그저 평등이라고 굵은 붓으로 써놓았을 뿐인데...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차별이 없는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던 스무 살 무렵에...  '교육과 의료'를 사회가 책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고 노력하면 누구나 공부 할 수 있는 사회, 아픈 사람이 돈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는 사회... 그 정도의 복지가 보장된 사회...

그런데, 1980년대에 비해서도... 교육과 의료의 불평등은 더 심해진 것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식들은 모두 비정규직노동자가 되고 못 배운 부모의 자식들에게 대학진학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라면... 과연 희망이 있나?    


 


 근사한 밥을 사먹겠다던 결심은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고 절 앞에 있는우동(580엔)을 사먹었다.  우동가닥을 빨아올리며 가이드북을 살펴보니 가까이에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이 있었다. 엊그제 길에서 만난 핸로상이 마쓰야마에 가서 유스호스텔을 이용할 수 있으면 해보라던 말이 생각났다. 지체없이 전화를 걸었다. 남자분이 반갑게 전화를 받더니 지금 당장와도 체크인 할 수 있다고 했다. 거의 오후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더 이상 달려서 뭐하나... 오늘은 그만 쉬자 ... 마쓰야마에 와서 내처 달리기만  해서야... 

시내에서 느릿느릿 관광이나 하자... 뒤늦게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스호스텔은 도고온천 인근 언덕 위에 있었다. 지도에 애매하게 표시돼 또 한 번 온천병원 옆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행착오를 겪은 뒤 반대편으로 돌아가다가 겁이나 이발소에 물어본 뒤 진입로를 찾았다.  땀을 흘리며 숙박신청서를 쓰고 있자니 여자 분이 차가운 음료를 주면서 마시라고 권했다. 


방은 세 사람이 함께 쓰게 돼 있었다. 일박에 2100엔. 내일 아침식사를 원하면 500엔을 더 내고 예약을 하라고... 와이파이, 세탁기와 샤워실 등 여행자 편의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다. 


보조배터리 등을 충전시켜놓고 패니어 한 개만 달고 시내로 달려나왔다. 온천을 먼저 할까 하다가 밤 11시까지 입욕이 가능하다니 우선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무작정 중심가로 ... 


며칠 전에 패달 한 쪽이 깨진 것이 있어 시내에서 만난 자전거숍에 들어가 적당해 보이는 패달을 골랐다. 양쪽 3천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별로 비싼 게 아니다 싶었지만 .. 숙박비를 2천100엔 지불한 처지에... 황송하다 싶었다. 


바퀴며, 스포크며 곳곳의 볼트들도 꼼꼼하게 점검하는 데 여간 열심이 아니다. 3천엔이 비싸다 싶다가 이런 수고를 마다 않는데... 생각하니 괜찮다 싶었다. 






에히메현 현청 앞에 있는 겐죠마에 역 인근... 다카마쓰 성 아래 공원. 퇴근 무렵 한가롭게 산책을 하거나 친구들끼리 어울려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 속에 나도 끼어들어 느릿느릿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거렸다. 

  

건널목에 우루르 몰려있다 신호가 바뀌자 물결처럼 길을 건너는 사람들도... 화려한 간판과 밀집한 상가도 모두가 낯설고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도쿠시마를 떠난 뒤로 이렇게 번화한 도시를 만난 것이 처음인 셈이다. 벌써 2주 더 더 지났다. 


미쓰코시 백화점이 보이길래 호기심에 구경삼아 들어가 보았다. 밀물처럼 백화점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자전거들을 따라가보고 싶었다. 



과연... 지하 1층은 자전거 전용 주차장이었다. 오르막에는 중앙에 자전거만 끌어올리는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돼 있고... 



2시간까지는 무료인 자동 주차시설... 까지 과연 자전거의 나라답다. 부럽다. 명동 롯데백화점에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뒷 편 주차장 빈 공간에 어정쩡하게 자전거를 세워 놓고 무슨 금지된 일탈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어색하게 매장에 올라가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쓰코시 백화점에 '주차'를  해 놓고 백화점을 한 바퀴 구경하고... 백화점 앞에 아케이드에서  조금 이른 저녁으로 우나기동(680엔)을 사 먹고...  아만다 커피숍에 앉아  아이스라떼와 초코크림 케이크 (530엔)까지...  

도시에는 달콤한 소비와 지출이 있구나..   





비슷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다 ... 풀려난 주인공이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자신이 풀려난 일을 실감하던 모습을 묘사한 게 떠올랐다.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는 달콤한 쾌락을 위해 먹지 허기를 채우는 음식은 아니니... 그 묘사가 어찌나 실감 나던지...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가... 다시 도고온천과 유스호스텔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마쓰야마는 일부러 나쓰메소세키의 도련님을 관광상품화하려고... 그 무렵에나 다녔을 법한 증기 전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전차도 귀엽기는 마찬가지다... 노면 전차가 딸랑딸랑 아날로그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풍경...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전차들과 뒤섞여 물결을 이루고 달려가는 자전거로 퇴근하던 수많은 직장인들 ...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도 등장하는 낯익은 온천 앞에서 기념 사진도 한 장. 도고온천은 고베의 아리마온센 등과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라고 한다.  




자전거도 한 장..



온천은...  커다란 돌 욕조가 있는 욕탕이 두 개... 있는 게 인상적일 뿐 간결하고 소박했다. 몇 번 가 본 일본의 대중탕들이 욕조 안에 있는 물을 얼마나 깨끗이 관리하는지는... 이미 여러 번 봐 왔다. 공중도덕이라면 금메달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어릴 때 보던 서울의 목욕탕의 탈의실과 욕조가 왜 그렇게 생겼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머잖아 아내와 관광을 온다면 마쓰야마에서 하룻밤 자고... 전차로  오즈까지 가서 그곳에서도 하룻 밤을 묵어야지 싶었다. 딸들이 따라올지는 모르겠다. 


온천욕을 마치고 나오니 날이 저물었다. 더 없이 느긋한 기분으로  온천 옆에 있는 카페에서 기린 생맥주 한 잔을 또 천천히 마셨다.  까페 앞 광장 쪽에는 예의 '도련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인형으로 진열돼 있었다. 고집스럽던 봇짱(도련님)도...교활한 교감 선생도... ㅎㅎ 



편의점에서 500씨씨 캔맥주를 하나(260엔) 더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도쿄에서 관광차 혼자 왔다는 37살 오오츠카상 이 옆 침대에 짐을 풀고 있었다. 휴가를 내서 일부러 관광을 왔다고... 


와이파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휴게실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는데 아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주인 아저씨가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와서 '마지꾸'를 보러 오라고...했다. '마지꾸? 그게 뭔가요? ' '너 마지꾸가 뭔지 모르냐?' '글쎄요...' 



마지꾸...  아하 매직? 투숙객 가운데 한 사람이 풍선아트와 함께 간단한 마지꾸 공연을 한 동안 했다. 호텔이나 민박집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무엇인가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물씬한 그런 곳이었다. 


지출: 이와야지 앞 가게에서 빵 (230엔)  자판기 비타민음료(120엔)  다이호지 앞 마을 서클케이 커피우유 (105엔) 

점심우동 550엔 마쓰야마 유스호스텔 2600엔(내일 아침500엔 포함), 자저거 패들(3000엔) 카페에서 음료수와 간식560  저녁우나기동 (680엔) 온천(600엔) 생맥주(400엔) 캔맥주 (260엔) 

세탁 (400엔) 


오즈유스호스텔-  구마코겐 미미도(御三戸)캠프장 

주행거리 69.71km 


고향집에서 자기라도 한 듯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창밖에 그림 같은 강변 풍경이 펼쳐져 있고 산책을 하는 주민들,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두세 량 짜리 작은 전차가 철교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대리석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준비돼 있는 인스턴트 커피와 녹차 ..


여섯시에 일어나 저녁에 사 둔 도시락을 먹고 빵을 구워 잼을 발라 도시락을 쌌다.



아랫 층 레이코상 부부가 깰까 싶어 발 소리 죽여 걸어다녀도 마룻바닥은 계속 삐그덕 거렸다. 


짐을 꾸려서 마당으로 나와  지하 빨래 건조장에 널어 둔 텐트를 걷었다. 잘 말라 있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짐을 다 꾸리고 난 뒤에도 인기척이 없어...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아까마츠 레이코 상이 마당으로 나왔다. 



방문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며 내 사진을 찍고...나도 기념으로 당신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까... 화장을 안 한 상태이니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찍어 달라고...  식수를 받아야 겠다고 하니까...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받아도 된다고... 일본 수도물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실제로 소독약 냄새도 없고 생수와 무슨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도물을 받아서 마시고 다녔지만 전혀 트러블이 없었다. 


7시 반 출발.  잊을 수 없는 오즈시여 안녕 .



단정한 마을과 거리...그리고 사람들. 



이 아름다운 도시에 언제 다시 찾아와 볼 수 있을까... 자전거를 타고 올 일이 또 있을까. 




여기도 외곽에는 여지없이 대형 쇼핑센터들... 잠시 꿈을 꾸고 현실세계로 소환 당한 느낌이랄까... 소박한 자급도시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현실로...   


로손에서 카페오레(110엔)를 마시고  56번 국도로로 17km쯤 달린 뒤...  내륙 쪽으로 뻗은 379번 도로 갈림길에 있는.. 우치코(内子) 미치노에키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 가늠할 수 없는 산길이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미찌노에키 (道の駅)는 주요 도로변에 있는 휴게소들인데, 나그네들에게는 반가운 장소다. 노숙을 하며 순례를 하는 도보, 자전거 순례자들도 주로 이곳에 잠자리를  정한다. 화장실이 개방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실 물과 화장실, 그리고 피를 피할 지붕만 있다면 사실 극단적인 곤란은 피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지차제에서 운영하는 것인지...  대개는 지역 농산물 판매장이 중심에 있다. 특이하게도 마늘이 있어 두 통(160엔), 그리고 홋카이도 산이라는 우유 (90엔)를 샀다. 일본사람들이 '닌니쿠'라고 부르는 마늘을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마늘이야말로... 한국음식은 마늘이 들어간 음식... 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생마늘을 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무엇인가 억눌린 것이 있던 일본에서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실감하셔야 했던 것인지 아버지는 날 마늘을 좋아하셨다.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군대에 갈 무렵부터는 나도 그렇게 됐다.  대량급식 찐 밥에 물려 입맛을 잃을 때는 취사병 후배들에게 마늘 한두 쪽을 얻어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좋았다. 


첫날 다이소에서 산 붓을 꺼내 자전거를 털고...  산을 향해 뻗은 379번 도로로...  




당분간은 개울을 따라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날도 맑고 평화롭다. 



개울에는 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투망질을 하는 아저씨는 뭐 하나 급할 게 없어 보인다.  



적막감마저 느껴지는 길을 달린다.  차르르... 체인 돌아가는 소리마저 선명하다. 


11시 시골마을 길가에 있는 휴식소에서 간식을 먹고 있자니. 도로 순례자  하야시 미츠오 씨가 도착한다. 도쿄 옆에 있는 요코하마에 산다고... 자기 딸이 서울대학교에 유학해 박사 학위를 했다고... 간밤에 어디서 잤냐고 하길래... 오즈시에 있는 유스호스텔이라고 하니까... 교도칸 유스호스텔...자신도 안다고...   자신은 줄곧 노숙을 하면서  순례중이라고... 전에 자전거로 순례한 적도 있다고 했다. 




마쓰야마(松山)시에도 유스호스텔이 있으니 만나게 되면 이용해보라고... 


379번 도로에서 다시 42번 도로로 우회전하는 지점에 작은 휴식소가 있다. 순례자들이 많이 쉬었다 가는 곳인지... 그런데 한쪽 구석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있다. 



아침에 싸 가지고 온 도시락 먹고 12:40 출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부터 해발 600미터 고개를 공사장 트럭들을 피해 꾹 참고 고개를 올라야 했다.  


해발 570m 시모사카바 (下坂場峠)고개 그야말로... 산판길에 나무를 실어 내리자고 뚫어 놓은 고개인 것 같았다. 고갯길 공사를 하는지 육중한 덤프 트럭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르내리는 것 말고는 지나다니는 차들도 없었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44번 다이호지(大寶寺)를 만나게 되는 것인가? ... GPS에 나타나는 지도상으로는 조금 미심쩍다... 고개를 내려간들 바로 절이 있는 게 아니라 다시 뭔가 산이 가로 놓여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불안한 마음으로 어쨌든 다운힐...  


외진 시골에서는  빈집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만나는 게 이제 낯설지도 않다. 작은 마을에서 지도는 또 다시 산 하나를 넘어가도록 가리키고 있다. 마침 도보 순례자가 앞서 가고 있어 ... 물어보니 자전거가 가기 어렵겠다고 했다. 

가이드북에는 도로 표시가 돼 있다. 비포장이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우편배달부에게 물어보니 조금 멀고 도로가 험하기는 하지만 다이호지까지 갈 수는 있다고...  용기를 얻어 다시 오르기 시작... 


길이 험해 패달을 밟아봐야 헛돌기만 했다. 끌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토기타고개 해발 770m ... 좀 전에 오른 시모사카바 고개보다도 더 높았다.  이젠 정말 고개를 내려가기만 하면 되겠지... 안일한 생각이었다. ... 내리막길에서 안내 책자를 꺼내보기 귀찮아... 내처 타고 달리다가 길을 잘못들고 말았다. 



저류조로 만들어 놓은 호수로 보이는... 이곳에서 길은 끊겨 있었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고개 정상 부분까지... 올라 왼쪽으로 꺾어지는 갈림길을 찾았다. 



하루도 곱게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TT 



드디어 쿠마코겐(久万高原町) 마을에 도착했다. 넘어 온 산을 돌아보니 까마득하게 높았다.  44번 다이호지(大寶寺)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편의점도 없는  산속 마을. 놀라운 것은 토키타 고개 입구에서 만났던 도보 순례자가 이미 절에 도착해 있었다. 비포장 산길을 넘는 데는 자전거가 교통수단이 아니라 짐일 뿐이라는 것을...실감했다. 


 44번 다이호지(大寶寺)는 701년... 백제에서 온 스님이 12면 관음보살상을 산중에 묻어둔 것이 발견돼 그것을 모시고 세운 절이라고 한다. 역사에는 백제가 533년 성왕 때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돼 있다.



백제에서 건너 간 불교는 코보대사로부터 비롯된 밀교와는 다른 불교였을 것이다. 코보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간 것은 804년... 이 다이호지에 관음보살상을 전해주었다는 백제 스님의 전설보다 백년 쯤 뒤의 일이다. 



해가 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GPS에 표시된 캠핑장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캠핑장인가요?" "캠핑장은 아닌데요..." 이게 무슨 소린가... 급 당황하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반, 못 알아듣는 말 반... 힘겨운 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캠프장은 아니지만 캠프는 할 수 있다. 여기 텐트는 없다. 캠핑을 하기에는 너무 춥다. 내게 텐트와 슬리핑백이 있으니 문제 없어요.  잠시 기다려봐라. 지금 있는 데가 어디냐. 다이호지 앞입니다. 10분 뒤에 다시 전화해라... 


이 산골마을에 무슨 숙박업소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로서는 초조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허락을 받다. 일박에 얼마인가요?  무료다. 아.. 그래요? 

그런데  먹을 게 없었다. 캠핑장까지는 직선거리 8.5 km. 이미 다섯 시 시보가 울렸다. 절에서 내려와 좌회전을 한 뒤 다시33번 도로로 좌회전해 강변을 따라 7km쯤 달렸다. 다행히 고개 같은 것은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미가와 미치노에키도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한 번 좌회전해서 212번 도로로 꺾어진 뒤 캠핑장 바로 위에 도달했다. 바로 위라고 표현한 것은 도라 아래 강변에 캠핑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가 있어 들러보았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사보기로 했다. 정어리 통조림과 꼬막 같은 조개 통조림. 계란 한 줄 (열 개). 작은 참기름 한 병(작은 건 이 것밖에 없었다) 식빵 하나. 아사히 맥주 작은캔하나,  닭고기 200g (전부 1500엔) 

 

별 기대 안 하고 강변으로 내려섰는데... 뜻밖에 범상치 않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마코겐 久万高原町 미미도(御三戸)캠프장, 캠핑장이라기보다... 강변 유원지 정도라고 해야 맞겠다. 전화로 캠핑을 허락해준 곳은  캠핑장 바로 위에 있는 동사무소였다. 





저녁 5시 50분... 일단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무사히 잠자리에 도달했다고...  인적 드문 산을 두 개나 넘어와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다.  텐트를 설치하고... 팩을 박을 수 없어 돌들을 주워다 플라이를 당겨 놓고... 



밥을 짓고... 마늘을 볶다가 닭도 함께 볶은 뒤.양파 고추장을 넣고 끓이다. 라면 사리를 넣어서 잡탕 전골을 끓였다.



 맥주도 곁들여서...  한 끼를 해결하고 나니 추위가 몰려왔다.


캠핑장 위쪽에 허름한 화장실이 있었다. 수도도 있어 식수는 거기서 받았다.  

강변에 어둠이 밀려왔다. 물은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히 흘러갔다. 

이를 닦고  강변에 내려가 수건을 적셔 몸을 대충 닦았다. 

'저문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려고 했는데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그럴 수 없었다.  밤 10시 경 잠들었다. 


지출 카페오레 110엔, 미치노에키 250엔(우유 마늘 양파) 가게 15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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