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가시리에서 한라봉 농사를 짓는 산악인 김승민씨 부부가 모처럼 육지 나들이를 와 집에 들렀다.
작은 병에 든 '말기름'과 자기 집에 있던 동백나무로 깎은 작은 솟대를 선물로 준다. 우리가 마음쓰는 것에 비하면 이들의 마음이 너무 정성스럽고 늘 과분하다.

말기름? 낯설어 하니까... 아토피성피부염, 여드름, 가려움증 등등... 피부트러블에 효과가 높다고...한다.



가시리 식당의 그 고소하고도 담백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순대국밥'을 가족들과 다시 가서 먹어보고 싶다.
지난 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 때 가서 혼자 꾸역꾸역 먹자니...
자꾸 눈물이 나던 기억이 난다.

2005년에,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아름다운재단 소식지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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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제주도에서 만난 김승민씨. 가족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살았는지 물으니, 자신은 ‘입도조(入島祖)의 35대손’이라고 했다.

몇 대 째 살고 있는 그의 집은 본디 띠로 엮었던 지붕만 양철로 바꾸었을 뿐 섬의 여느 집들처럼 현무암으로 벽과 기둥을 쌓은 돌집이었다.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나고 자라 늙어 죽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집이 튼튼하다고 자랑했다.

마당가에는 레몬밤, 애플민트, 라벤더 같은 수십 종의 허브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뒤란으로 돌아들어가니 귤밭이 몇 백 평 펼쳐져 있었다. 한쪽으로 참다래 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넝쿨을 뻗어 올리고 있었고 그 그늘 아래 놓인 개집에는 주인을 닮아 순진하고 무구한 눈매의 리트리버 두 마리가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찾아들어 턱을 괴고 잠이 들곤 했다.

서른 서넛이 된 그는 딱 한번 섬을 떠나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의 군대생활과 제대 후 서울에 뿌리내려볼까 하고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조립판매 회사에서 일년 남짓 신산스런 객지 생활을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 적 말고는 섬을 떠날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방 창틀 너머로 바라보이던 한라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한라산 기슭 중산간지대,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은 대궁을 태우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 너머로 아스라이, 도저히 현실의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던 그 산에 꼭 한 번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이학 년 때 그는 기어이 표선면에 있는 집을 떠나 무작정 걷고 또 걸어서 등산로가 있는 성판악까지 도달한 후 죽을 고생을 하며 백록담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이백 번도 넘게 한라산에 올랐고 지금은 적십자 산악구조대원이기도 하다.

폭설로 한길 넘게 눈이 쌓인 한 겨울이나, 섬이 떠내려갈 듯 폭우가 쏟아질 때도 구조 호출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등산장비를 챙겨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라산에 오른다. 그의 아버지, 형제들이 졸업한 초등학교는 이제 더는 학생을 받을 수 없어 문을 닫았고 제주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어 있었다.

그도 열심히 초를 문질러 윤을 냈었다는 복도 한 쪽에는 그 학교를 거쳐 간 거의 모든 졸업생들의 단체사진이 전시돼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십 명씩 졸업생을 배출하던 그 학교도 육지의 여느 시골 학교들처럼 쇠락의 길을 걷다 문을 닫고 지금은 인근에 있던 서너 개 학교가 하나로 합쳤지만 학생이 없어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고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늘 살아온 그의 돌집 얘기를 듣고 실제로 그 마당을 거닐면서 나는 과연 태어나서 몇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녔는지 헤아려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여겨왔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번번이 집을 옮기게 만든 것들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휘어잡고 뒤흔든 보다 근원적인 힘들이었다.
집은 가족이 깃드는 형식이다. 도시 사람에게는 조금 의미가 덜하겠지만, 어떤 집에 사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크고 넓은가, 얼마나 비싼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떤 연유로 그가 이사를 다녔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도 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데 적잖은 단서가 되기는 하겠다.

고향에 뿌리 내리고 이웃들과 함께 선량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왕에 뿌리 뽑힌 삶일지라도 집을 팔아서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올려서 되 팔 수 있을까 따위만으로 가족들의 삶터를 결정한다면 스스로의 존엄성을 자발적으로 모독해도 보통 심하게 모독 하는 게 아니잖은가.

(콩반쪽 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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