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넘게 끌어온 재판, 세번째 재판부가 바뀌고 오늘도 공판이 있었다.

법원 가기 전에 함께 일하는 후배 김이 전에 이탈리아에 갔을 때 사다놓고 쓰지않던 것이라며 이케아 스탠드를 준다.

밤에 집에 와 조립해 점등하니 그 실용적이면서도 단정한 디자인이 여간 마음에 들지않는다. 불빛 아래서 책을 읽다가 전화기를 들고 몇자 적는다.

2008년 촛불집회 막바지 . 이명박정부는 두 번이나 국민에게 사과하고도 미국산 소고기를 세계에서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수입하기로 했다. 한살림도 범국민대책위 참여단체였고  내가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청와대인근에서 열리는 항의 기자회견에 참여 하러 가던 길에 경찰 수천명이 시민들을 무차별 연행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12살 초등학생과 여든살 노인, 참여연대 후배들이 연행되는 광경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도 경찰들에게 불법연행한 시민들을 석방하라고 항의했고 나 역시 연행돼 이십년만에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찜통 더위에  이틀을 자고 나왔다. 그날 수십명이 연행됐고 내가 끌려간 구로경찰서에도 열명 넘게 갇혔다. 그 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었는데, 말썽이 날 것 같으니 경찰들이 이 학생은 바로 석방시켰다.

이 대단치도 않은 지난 일을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다.

검찰은 연행된 우리에게 일반교통방해라는 죄목으로 일괄 벌금 백만원을 내라고  약식명령을 내렸다. 그 중 세 명이 이것ㅇ 부당하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나와 나보다 몇살 아래 선량한 사업가 이모씨 그리고 성대생 조모군. 민변의 이광철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해주었다. 이 간단한 재판이 이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난데없이 공범이 된 우리 세 사람은 몇달에 한 번 씩 법정에서 만나면 반가웠다. 특히 대학생 조군은 나를 잘 따랐다. 우리 사무실 근처로 찾아와 밥도 함께 먹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지레 생각했는데 그를 보며 나의 섣부른 속단을 반성했다. 그는 부모님께 꾸중을 들어가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맑시즘, 포스트 맑시즘, 정치경제학, 자본론도 을 읽고 있다고 했다... 쌍용차 사태를 보면서 노동자들을 돕고싶어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해 나는 조금 놀라고 감동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이후로 그는 재판에 나오지 않았다. 나도 그가 걱정돼 몇번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충격적인 소식을 판사가 전해준다. 그 학생 작년 구월에 사망한 거 몰랐어요?

온 종일 그 말이 던진 충격 때문에 정신이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자꾸 일어나는 것일까.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두리반에 전기가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퇴근하고 가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삼복 염천에...
선풍기마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인근 지하철공사장 현장소장의 배려로 전기를 끌어다 조명을 밝히고 선풍기를 돌려왔는데
시행사에서 지하철공사를 하는 회사에 압력을 넣어 전기가 끊여졌다고...
성의있는 협상도 단 한 차례 하지 않고...
뒷구멍으로 몰래 전기를 끊는 수작이나 벌이는
재개발 시행사 GS건설과 그 앞잡이들 남전개발에게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가게에 대한 강제 철거가 시작됐고...
이내 유채림형과 졸리나 형수는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이 싸움에 처음부터 비관적이었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불타죽은 지 1년이 다 돼가는 시점이었다.


은근히 두리반의 형과 형수가 고단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
이런  패배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들이는 품에 비해 뭘 얻을 수 있겠냐. 이 정부 아래서...  
용산에서 사람을 여섯이나 죽이고도 사과도 대꾸도 안하는 놈들이다.  이런 생각들...

그러나  이것은 옆에서 관전하는 평론가들이나 할 법한 말들이었다.
형과 형수에게 그 가게는 삶의 모든 것, 젊은 날 10년을 바쳐 이룬 재산의 모두였다.
물러나려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유채림형의 표현대로 이 팍팍한 사막을 건너는데 꼭 필요한
그들 가족의작지만 소중한우물이었다.
 
나같이 말이나 보태는 놈들이 비관적인데 비해 ...
젊은이들은 달랐다. 홍대근처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
개인적으로 각성한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두리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살림이야기에 삽화를 그려준 소복이님이 철거깡패들이 쳐놓고 간 바리케이트에 그림을 그려놓고 가셨다. 두리반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힘은 끝내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고 ... 씌여있다.  


용산의 철거민들이  내몰리다 끝내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불타죽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에 기가 막히고 참혹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두리반마저 그렇게 방치할 수 없다며... 몰려왔다.

처음에는 보통의 이웃들이 지나가는 길에
호박즙이나 빵과 떡 같은 음식을 들고 찾아왔다.
곧이어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젊은 활력이 두리반을 7개월째 유지하고 있다.

매일저녁 철거된 칼국수집에서는 독립가수들의 콘서트가, 또  영화제가 열린다.
마포구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성미산 마을의 주민들이 함께 한다.
두리반은 이제 더 이상 유채림 형과 안졸리나 형수만의, 외롭게 고립된 섬이 아니다.  

어젯밤에도 환경단체 사람들이 태양열발전기와 자전거발전기를 가지고와 설치해주었고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기타반주에 맞춰 춤이라도 추듯이 발전기를 돌렸다. 또 단전에 맞서
시민 모금으로 작은 전기촛불로 두리반을 뒤덮는 퍼포먼스가 준비되고 있었다.

유채림 형이 건물 옥상에서 불빛 휘황한 홍대입구쪽을 바라보고 있다. 밤마다 홍대주변에는 클럽 등 밤문화를 즐기려 장안의 젊은이들이 떼로 몰려든다. 변두리에 사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무슨 촌놈 서울 나들이 한 것만큼이나 어리둥절하고 낯선 풍경이 많다.

자본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자생적인 생기와 발랄한 창조성이 두리반에 넘친다.
이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http://cafe.daum.net/duriban/9LvY/30?docid=1K90q|9LvY|30|20100720001259&q=%B5%CE%B8%AE%B9%DD&srchid=CCB1K90q|9LvY|30|2010072000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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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시리에서 한라봉 농사를 짓는 산악인 김승민씨 부부가 모처럼 육지 나들이를 와 집에 들렀다.
작은 병에 든 '말기름'과 자기 집에 있던 동백나무로 깎은 작은 솟대를 선물로 준다. 우리가 마음쓰는 것에 비하면 이들의 마음이 너무 정성스럽고 늘 과분하다.

말기름? 낯설어 하니까... 아토피성피부염, 여드름, 가려움증 등등... 피부트러블에 효과가 높다고...한다.



가시리 식당의 그 고소하고도 담백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순대국밥'을 가족들과 다시 가서 먹어보고 싶다.
지난 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 때 가서 혼자 꾸역꾸역 먹자니...
자꾸 눈물이 나던 기억이 난다.

2005년에,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아름다운재단 소식지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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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제주도에서 만난 김승민씨. 가족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살았는지 물으니, 자신은 ‘입도조(入島祖)의 35대손’이라고 했다.

몇 대 째 살고 있는 그의 집은 본디 띠로 엮었던 지붕만 양철로 바꾸었을 뿐 섬의 여느 집들처럼 현무암으로 벽과 기둥을 쌓은 돌집이었다.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나고 자라 늙어 죽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집이 튼튼하다고 자랑했다.

마당가에는 레몬밤, 애플민트, 라벤더 같은 수십 종의 허브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뒤란으로 돌아들어가니 귤밭이 몇 백 평 펼쳐져 있었다. 한쪽으로 참다래 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넝쿨을 뻗어 올리고 있었고 그 그늘 아래 놓인 개집에는 주인을 닮아 순진하고 무구한 눈매의 리트리버 두 마리가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찾아들어 턱을 괴고 잠이 들곤 했다.

서른 서넛이 된 그는 딱 한번 섬을 떠나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의 군대생활과 제대 후 서울에 뿌리내려볼까 하고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조립판매 회사에서 일년 남짓 신산스런 객지 생활을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 적 말고는 섬을 떠날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방 창틀 너머로 바라보이던 한라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한라산 기슭 중산간지대,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은 대궁을 태우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 너머로 아스라이, 도저히 현실의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던 그 산에 꼭 한 번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이학 년 때 그는 기어이 표선면에 있는 집을 떠나 무작정 걷고 또 걸어서 등산로가 있는 성판악까지 도달한 후 죽을 고생을 하며 백록담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이백 번도 넘게 한라산에 올랐고 지금은 적십자 산악구조대원이기도 하다.

폭설로 한길 넘게 눈이 쌓인 한 겨울이나, 섬이 떠내려갈 듯 폭우가 쏟아질 때도 구조 호출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등산장비를 챙겨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라산에 오른다. 그의 아버지, 형제들이 졸업한 초등학교는 이제 더는 학생을 받을 수 없어 문을 닫았고 제주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어 있었다.

그도 열심히 초를 문질러 윤을 냈었다는 복도 한 쪽에는 그 학교를 거쳐 간 거의 모든 졸업생들의 단체사진이 전시돼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십 명씩 졸업생을 배출하던 그 학교도 육지의 여느 시골 학교들처럼 쇠락의 길을 걷다 문을 닫고 지금은 인근에 있던 서너 개 학교가 하나로 합쳤지만 학생이 없어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고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늘 살아온 그의 돌집 얘기를 듣고 실제로 그 마당을 거닐면서 나는 과연 태어나서 몇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녔는지 헤아려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여겨왔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번번이 집을 옮기게 만든 것들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휘어잡고 뒤흔든 보다 근원적인 힘들이었다.
집은 가족이 깃드는 형식이다. 도시 사람에게는 조금 의미가 덜하겠지만, 어떤 집에 사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크고 넓은가, 얼마나 비싼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떤 연유로 그가 이사를 다녔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도 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데 적잖은 단서가 되기는 하겠다.

고향에 뿌리 내리고 이웃들과 함께 선량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왕에 뿌리 뽑힌 삶일지라도 집을 팔아서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올려서 되 팔 수 있을까 따위만으로 가족들의 삶터를 결정한다면 스스로의 존엄성을 자발적으로 모독해도 보통 심하게 모독 하는 게 아니잖은가.

(콩반쪽 05년 10월)

벌써 몇 주가 흘렀다.  
주말에 전북 장수 장계면에서 열린 전희식 선생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책 제목은 [엄마하고 나하고]다.



노회찬 대표가  와있다. 두 사람은 인천에서 노동운동할 때의 동지였다고 한다.
전희식 선생은 인터뷰에서, 그 무렵 비합법 조직을 꾸릴 때... 모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국전쟁 전후에 악몽들을 떠올리며 공포에 전율하셨다고... 그 때 어머니의 정신에 충격이 있었을 것이라고...그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것 같다.

치매걸린 어머니를, 온몸으로 ...
그래, 그냥 말이나 관념,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똥오줌을 받아내면서, 또 온전치 못한 뇌의 기능 때문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그 어머니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고, 의당 그래야 하지만 누구도 못하고 있는 일을... 그는 했다.
심지어는 치매걸린 어머니가 가잔다고 대책도 없이 트럭을 타고 서울까지 다녀가기도 하면서...

나는 행사내내, 그 위대한 정신, 언행이 일치하는 그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할만큼 아픈 마음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말이다.

어머니는 지난 1월 중순, 밀양집에 혼자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그날 새벽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새벽에 잠이 깼다. 나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던 아내와 둘째딸도 모두 그랬다. 새벽 두 시 40분 경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녀가신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70여일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다지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줄 뻔히 알면서도 '잔소리'를 하시면 툴툴대기 일쑤였다. '엄마 나도 이제 어른이에요.' 하고 말이다.
정작 그 인간이 어른스러운지,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있는지는
자신을 어른이라고 강변하면서가 아니라... 전희식 선생처럼 행동으로 그리고 꾸준하고 일관된 인격으로 증명하는 것인데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께 늘 죄송한 마음이 있어 출근길에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했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잠을 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는 출근하는 아침 일곱시 전후,  해도 뜨기 전일 때가 많았다. '어쩐 일이고' '그냥 요' '출근하나' '네' '그래 단디 하고 살아라' '알았어요. 별 일 없죠?' 이 정도가 다였다.

어머니 돌아가시 두어  달 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현저하게 어머니 기력이 쇠약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예기치못한 이별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마지막 한 달 우리집에 와서 머물다 가셨다. 그러다가 부산에 가셨다가 다시 밀양으로 가신 뒤 불과 열흘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참담하고 부끄러운 죄인의 심정이 된다.

요즘도 어머니의 부재가 믿어지지 않는다. 전화를 하면 그 목소리 그대로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실 것만 같다. 49재가 끝나기 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차마 딸들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엊그제는 술에 취해 한바라를 붙들고 펑펑 울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그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날 수 없다.

어머니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를 나처럼 이해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아프고 힘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신 적이 많았다.

안성이나 안산의 내 자취방에서... 공장에 다니는 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함께 지내신 적도 있고, 형들에게 서운한 이야기를 내게 하소연 하신 일도 많았다.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지만, 내가 느끼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지옥의 유황불 속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 자식들은 하나같이 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바빴다. 자식을 위해 뭘 해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돌아가셨다. 한 순간도 느긋한 휴식이 없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담가 걸레를 빨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못난 자식들만이 ... 어머니의 성격을 탓했다. 어머니의 친구들, 이웃들 모두가
어머니를 두고 '저런 사람이 없었니더' 하면서 통곡을 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담백한 성격.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보내겠다고 여든이 넘은 노구에 수십킬로에 달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끌고 서울까지 올라와야 마음이 편했던... 사람.

나는 그런 부모일 수 있는가. 나는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어떤 자식이었나.
이런 자책이 가슴을 칠 때면  여전히 눈물이 나곤한다.

이런 이야기들조차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깊은 애도가 어쩌면 아내와 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 더 슬퍼 할 생각이다. 충분히 슬퍼하지 않은 이별은 어떤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지 않던가.  

이 때문에... 전희식 선생의 그 책은 한 장 한 장
자탄의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전희식선생처럼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자식이었다.

1992년,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추운 겨울인데도 불을 때지 않고 내 자취방에 기거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면회를 오셨다. 술 한 방울도 입에 못대는 분이 진로에서 나오는 싸구려 포도주를 사다 마셔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셨다. 이 때문인지... 작년까지도 텔레비전에 집회관련 뉴스만 나오면 내게 전화를 하시곤 했다. '지금 뭐 하냐 너는 저기 끼어 있는 게 아니제? ' 하면서 내 안부를 확인 해야만 안심을 하시곤 했다.

그런데, 나는 전희식 선생처럼은 아니라도 무엇으로 속죄를 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못한 것이 도대체 누구 탓이란 말인가. 스스로가 용서가 잘 안 된다.
그리고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하다.

왜 어머니와 창졸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하면 그렇다.
 

1년만에 용산 희생자들의 장례가 치러졌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알려준 그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뒤
계절이 네번 바뀌어 또다시 매서운 겨울이 왔다.
용산에서 매일 저녁 미사가 치러지는 동안 발 뻗고 편히 자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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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결식이 치러지는 서울역광장. 쌓인 눈들 너머로 만장들 ...
그 너머로 YTN 빌딩에 나붙은 '글로벌리더 G20 코리아'
국민을 때려죽이고 사과조차 하지않는 야만을 어떤 이들은 '글로벌리더코리아'라고 말한다.  

조사를 한 이들 가운데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작년 용산에 투입됐다 사망한 경찰 특공대 김남훈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말했다.
그 역시 옥탑방에 살던 가난한 이였다고 한다.  

재벌들의 이익추구를 위해 영세 세입자들을 공격하는 '전쟁'에 가난뱅이가 용병으로
투입된 꼴이다. 그는 무리한 진압명령에 내몰려 남일당 옥상에서 함께 죽었다.  




죽은 사람은 여섯 명인데 늘 다섯 분에 대해서만 애도를 하게 되는 것이 마음 불편했는데
노회찬대표가 그 마음을 잘 표현해줬다. 돌아가신 용산의 다섯 열사께... 이제 저승길에서 그를 만나면 잘 위로해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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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을 하다 홍대앞 두리반 형수님을 만났다. 홍대앞 칼국수집을 운영하며 가족들과 단란하게 사는 것만이 희망이었던 이 이를 거리의 투사로 내몬 재개발의 야만...
소설가 유채림 형의 아내인 이 이는 전 재산 1억원을 권리금으로 내고 칼국수와 만두를 파는 두리반을 운영해왔지만... 동교동 로터리 일대에 공항전철역이 생기고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이사비용 300만원만 줄테니 나가라며...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기를 들어내고 가게를 철거하자.
홀로 가게터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돈이 사람을 짓누르고 인간이 스스로 인긴이기를 포기한... 이 야만의 시대를...
와이티엔 건물에 내붙은 플래카드는 '글로벌리더코리아'라고 써 놓았다.






그리운 벗, 이내창 의문의 죽음 20년 한 시도 그릇 잊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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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이내창이 죽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와 함께 학교에 다니던 나와 친구들은 이제 40대 후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형이 되었다. 그 사이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그도 살아 있었다면 우리처럼 머리에 흰머리가 희끗해지고 배도 조금 나온 그런 아저씨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은 광화문 뒷골목의 막걸리집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날을 추억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가 꿈꾸던 것처럼 세상과 삶을 반영한 건강한 작품을 생산하는 조각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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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만 스물 일곱의 나이로 낯선 지역, 거문도에 끌려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달변의 웅변가도 아니고, 비장한 표정의 학생운동지도자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한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의 친구였다.  더러 무섭고 힘든 일이 많았던 학생운동조직에서도 늘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겸손하고 자상한... 당시로서는 독특한 리더십을 가진 총학생회장이었다.

이내창을 기억하는 동문 선후배들은 그의 20주기를 맞아, 8월 12일 오후 3시, 장충동에 있는 만해NGO센터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사건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른 나라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토론회와 이내창 20주기를 기회로 박창수, 최우혁 등 권위주의 통치시절에 자행된 대표적인 의문사사건의 유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 담아 자료집 [죽음, 진상규명 20년 그리고 국가기구 조사, 10년]을 발간해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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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을 가진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정부가 나서서 의문사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한 일이 되었다. 유가족들은 늙어가고 있고, 사회적 관심은 희박해져가고 있다.

과거사를 명확하게 밝히고 적절한 청산 절차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역사로부터 철저히 학습을 했다면, 용산철거민을 무참히 죽음으로 몰고가거나 해고에 항의하며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향해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식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절차를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는 권력의 횡횡포는 또다시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내창 열사 추모사헙회는 토론회를 열고 자료집을 발간하는 일이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사를 정리하는 일이 과거에 집착하는 일이 아니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미래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보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년 전, 우리의 벗 이내창은 어떻게 죽어갔는가.

1989년 8월 15일, 이내창은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엎드린채 죽어서 발견되었다. 여름날이었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쌀쌀한 날이었고 외딴 섬의 해수욕장에는 야영객이 몇 있었지만 한산했했다. 당시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4학년이었고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이었지만 늘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다니던 그는 선후배들 사이에 가장 신망이 두터웠고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해 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인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 등이 그린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을 돌며 전국에서 전시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른바 '홍성담 차일환 간첩사건'을 조작한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자금을 댄 경위 등을 수사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해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하는 전대협 대표로 정해지기 전에 사진학과 4학년 모 학생을 북한에 파견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청은 그 첩보를 입수하고 중앙대학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내창은 죽기 전날인 8월 14일 오전 학교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남녀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과 무엇인가를 심각하고 논의하던 모습이 학교 앞 수퍼 주인 등에게 목격되었다. 그 뒤로 그의 학교와 안성 시내를 세 번이나 오가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저녁에 수원에 있던 서울 농대로 가서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회의(수대협)에 참석해 8월 15일 수원역광장에서 열기로 한 '민족해방절행사' 준비 등을 논의했다. 대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하던 회의는 매월 한 차례 이상 진행됐으며 회의가 끝나면 수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술도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이내창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이들과 헤어졌다.

그 다음날인 8울 15일 이내창의 행적이 확인 된 것은 아침 8시, 여수 여객터미널 승선신고서를 통해서다. 그의 필체로 나중에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진 도 모씨와 그의 남자친구라는 백 모씨 등 두 사람 등 세 사람의 이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신영훼리호라는 여객선은 12시 30분 거문도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는 그가 줄곧 주변의 서너 명의 사내들에게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 마자 도주를 했고, 선착장 인근의 남 모씨 집에 뛰어들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방 있습니까?' 외치면서 신을 신은 채 마루에 뛰어올랐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쫒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섬은 닫힌 공간이었고 달아날 곳은 없었다.

약  두 시간쯤 뒤인 오후 2시20분, 그는 희망식당에서 혼자 볶음밥을 먹었고, 오후 3시 삼호다방에서 당시 다방 종업원이던 최 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울 말을 쓰는 '머리끝이 곱슬한 단발형, 왼쪽 눈에 움품 패인 듯한 자국이 있고 빨강 꽃무늬 상의와 실밥이 풀어진 7부 청바지에 망사로 된 샌들을 신고 있던' 안기부 직원 도 모씨와 마주 앉아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방 밖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사내가 다방 안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방을 나온 이들은 유림해수욕장이 있는 서도로 건너가기 위해 뱃사공 이모씨가 운행하는 나룻배에 승선했다. 서도로 건너간 후의 저녁 6시30분경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이내창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머리와 얼굴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부검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이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채 바다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웃옷은 벗겨진 채 발견되지 않았고 늘 입고 다니던 두터운 양복바지에 캐주얼 가죽신발을 신은 채였다. 시신 바로 옆에서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와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해들은 유가족들과 학생들은 바로 거문도와 여수로 내려가 목격자들을 찾아내고 앞에 밝히 내용들을 녹취할 수 있었다.  이내창의 시신은 얼굴과 머리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 가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당시 안기부와 공안당국이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이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어떤 공작에 의해 거문도까지 유인되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안기부 직원이 이내창과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내창이 죽은 8월 15일은 북한을 방문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내창의 동문들은 국가기관에 의해 이내창이 유인 당해 살해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노태우정권은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간첩조작 사건이나 조직사건을 터뜨리며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키곤 했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의문사 유가족 등 민족민주운동 유가족협의회의 유가족들은 무려 422일 동안이나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며 과거사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기 약 5년간 이내창 사건 등 의문사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이내창 사건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조사결과는 사건 직후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사실들 중 일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시 안기부였던 국정원 관련 자료에 조사, 국정원이 학생운동조직에 대해 진행했던 내사 자료, 국정원이 운영했던 학생운동 조직 내의 프락치들에 대한 내용 등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들에 대한 조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이어 출범한 '진살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진정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전혀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며, 왜 조사를 하지 않느냐는 문의에 대해 이렇다할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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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의 어머니는 사건이 난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15년 넘게 병상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 재작년 끝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큰형 이래석은 이제 일흔살의 노인이 되었다. 다른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들 역시 거리에서 20여년을 싸우는 동안 이제 대개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예전에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주요인사들조차 '의문사 사건은 조사할 만큼 했기 때문에 더 조사할 게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내창이 살해 당한 당시나 일반 공무원들과 별반 다릇 것 없는 과거사 위원회가 무성의한 조사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우리는 국가기구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의 햇살이 비출 때 음지에 숨겨져 있던 진상이 언젠가는 밝혀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최종길 교수 사건이 그랬듯이 말이다. 영원히 감추어 둘 수 있는 진실은 없다는 것을,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가해자들은 무겁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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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일, 무위당 선생님 15주기 행사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 무위당선생이 26살 때 스스로 설립한 원주 대성학교 교정에서 교훈'참되자'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은 '좁쌀만인계')

그 즈음 주말마다 비가 내렸고 그날도 원주 가는 길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모내기철이라 달게 느껴지는 비였다. 무위당 선생님 추모행가 열리는 5월에 원주에 오기 시작 한 지 5년쯤 되었다.

나는 선생님 살아계실 때 직접 뵐 기회가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기록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읽은 것도 20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엷고 어느 모로 보나 얼띠기만 한 내가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게 어쭙잖게 여겨져 약간 망설여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원주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그 독특한 호방함,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분위기가 늘 좋았다.
토요일 오후 상지대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이미 4월에 광주에서 무위당선생 서화전이 열린 탓인지, 조금 조촐하게 진행된 느낌이었다.

'생명운동 활성화'를 위한 대화마당에서 마리학교 교장을 지낸 황선진 선생과 한살림강릉의 김대진 상무가 발제를 했다.  황선진 선생은 무위당 선생이 '운동한다'고 내걸고 사시지 않은 것처럼 생명평화 뒤에 굳이 운동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며 생명평화운동은 독자적으로 대안적인 가치와 체계를 지향하되 기존의 체계를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대진 상무는 생평평화운동이 먼 훗날 생명평화세상이 온 뒤에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서 행복한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토론에 나선 이들 가운데는 이혜숙 전 부산생협 이사장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생협 활동을 하면서 어느 순간, 스스로 '개인 앞에 조직을 앞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던 말, 그리고 일본에 가서 만난 생협의 노 활동가에게 조직활동을 오랜 동안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나 질문을 하니까 대답은 안 하면서 자꾸 '호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던지…' 이런 말만 되풀이 하더라는 말.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떤 당위로 개인을 억누르는 운동이나 조직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오래 가더라도 사회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들은 또다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원주로 내려가던 그날 아침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 황망하고 어수선한 심정이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갑자기 수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퇴행적인 분위기가 역력하다. 정보기관이 전횡을 일삼고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갇히는 그런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자 하는 개인의 소망은 적어도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이 무사할 때나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박한 일상의 평화를 뿌리째 뒤흔드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무사함에 대해조차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다음 날, 구룡사 가는 길에 있는 소초면 장일순 선생 묘소에서 진행된 추모행사에서는 원주출신의 국악인 정유숙 선생이 단가 사철가와 춘향가 가운데 춘향이 옥에 갇힌 대목을 불렀다.
 


"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노대통령의 죽음을 보면서 누군들 삶이 속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랴. 신록 짙어가는 무위당 선생 묘소에서 듣는 단가는 빈 가슴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원주에서 돌아온 지 꽤 시간 흘렀다. 세상은 예전처럼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 무위당 선생의 말씀을 다시 찾아 읽어본다.

단체마다 시국선언을 하고 그 때문에 처벌을 받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무위당 선생은 유신반대 투쟁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힐 때 가만히 직장에 다니는 일이 죄 짓는 일 같다고 말하는 제자에게 ‘죄는 무슨 죄 월급 타면 감옥에 간 사람 옥바라지 좀 하면 되지 않겠어? 일선이 있으면 후방이 있는 법인데 후방 없는 일선이 있는가? 자네는 후방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새롭게 읽힌다.

어쩌면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좀 더 쉬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분노와 굴욕을 견디면서 심지를 세우고 삶을 꾸려가며 스스로의 생각대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되게 하는 일에 비하면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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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때문에 울었다.


서울 광장에서 그가 대선때 불렀다는 상록수 가운데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하는 대목이 울려퍼질 때,
그의 실패가 우리 모두의 실패인 것 같이 여겨져 눈물이 났다.
또한 그가 즐겨 불렀다는 해바라기의 노래 가운데,
' 우리 살아가는 동안 할 일이 꼭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이 구절에서도 역시 감정이입을 되어 누선을 자극했다. 살아가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그가 바람부는 벌판에서 외롭게
세상에 홀로인듯 걸어갔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장례가 끝났다.
불교의 생사관에 따르면 그는 49일동안 중음신으로 구천을 떠돌다가
49제를 치른 뒤 영원히 저승으로 떠날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의 죽음 앞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에 대한 항의였지,
세상에서 죽어없어지라는 저주는 아니었는데,
그는 벼랑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그의 절망이 그토록 컸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열광하고 환호했으나 이내 실망했다. 
 때문에 권력의 속성이란 이런 것인가...절망했고
그를 욕하며 버렸다.
그의 주변에 있는 참모들, 386세대들의 허물이 들려올 때마다
'그럼 그렇지 권력지향의 네 놈들이 하는 짓이...' 이렇게 혐오했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은...
도대체 왜, 후보시절의 그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의 그가 그토록 달라져야 했는가.. 였다.
사실은 우리가 그를 버린 게 아니라
그가 우리를 버렸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표현 아닐까... 왜 그래야 했을까.
명분없는 침략전쟁인 이라크 파병이나...
농민들을 때려죽이면서까지 일방적으로 추진한 한미FTA...
대추리 미군기지이전 문제를 보면서...우리는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욕했다.
그는 대통령이었고, 국군 통수권자였으며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좌에 있었고
우리는 무기력한 개인이었고 시민이었다. 그래서 그를 원망했고, 마음에서 그를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임기 말년에 혼자가 되었다.
그가 미국과 FTA를 추진한다고해서 조중동이 그를 지원할 리 만무했다.
시민사회는 당연히 그와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명석하고 논리적이며 정의롭까지 했던 그가...
도대체 왜 그런 길을 갔는지
나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된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본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 같다.
그가 시민사회를 배신하며 추구한 정책들은 하나같이 미국과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는 온전한 자주독립국가가 아닌 게 분명하다.

미국이 멱살을 틀어쥐고 '자주? 너 죽을래?' 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당장의 국익과 무관하게 이라크에 파병해야 하고,
광우병 걸린 미국소고기도 수입해야 되고, 미국과 국토가 연결된 캐나다 멕시코처럼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도 체결해야 하는 게
우리나라인 모양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지지세력과 등을 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그는 혼자 외톨이가 됐기에, 이명박 하이에나 일당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물어뜯겼다.
시민사회가 그를 굳건히 지지했던들...그렇게 함부로 물어뜯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에 종속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된 때문이 아닐까.

노무현같이 자존심과 자의식 강한 인간이 남한의 대통령이 되는 순간
죽음은 예견된 게 아니었을까...

서울광장 영결식때 이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났다.
서러운나라의 서러운 대통령이 죽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니까...
나도 모르게 비질비질 눈물이 스며나왔다.
게다가 이제 이 미친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전쟁마저 불사할 태세다.

정말 두렵다.
달아날 곳도 없게 섬처럼 갇힌 이 나라에서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우리가 새끼들이나 제대로 건사할 수 있을까...

당장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뭔가 해야 한다.
초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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