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벗, 이내창 의문의 죽음 20년 한 시도 그릇 잊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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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이내창이 죽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와 함께 학교에 다니던 나와 친구들은 이제 40대 후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형이 되었다. 그 사이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그도 살아 있었다면 우리처럼 머리에 흰머리가 희끗해지고 배도 조금 나온 그런 아저씨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은 광화문 뒷골목의 막걸리집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날을 추억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가 꿈꾸던 것처럼 세상과 삶을 반영한 건강한 작품을 생산하는 조각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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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만 스물 일곱의 나이로 낯선 지역, 거문도에 끌려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달변의 웅변가도 아니고, 비장한 표정의 학생운동지도자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한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의 친구였다.  더러 무섭고 힘든 일이 많았던 학생운동조직에서도 늘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겸손하고 자상한... 당시로서는 독특한 리더십을 가진 총학생회장이었다.

이내창을 기억하는 동문 선후배들은 그의 20주기를 맞아, 8월 12일 오후 3시, 장충동에 있는 만해NGO센터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사건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른 나라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토론회와 이내창 20주기를 기회로 박창수, 최우혁 등 권위주의 통치시절에 자행된 대표적인 의문사사건의 유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 담아 자료집 [죽음, 진상규명 20년 그리고 국가기구 조사, 10년]을 발간해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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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을 가진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정부가 나서서 의문사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한 일이 되었다. 유가족들은 늙어가고 있고, 사회적 관심은 희박해져가고 있다.

과거사를 명확하게 밝히고 적절한 청산 절차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역사로부터 철저히 학습을 했다면, 용산철거민을 무참히 죽음으로 몰고가거나 해고에 항의하며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향해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식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절차를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는 권력의 횡횡포는 또다시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내창 열사 추모사헙회는 토론회를 열고 자료집을 발간하는 일이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사를 정리하는 일이 과거에 집착하는 일이 아니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미래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보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년 전, 우리의 벗 이내창은 어떻게 죽어갔는가.

1989년 8월 15일, 이내창은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엎드린채 죽어서 발견되었다. 여름날이었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쌀쌀한 날이었고 외딴 섬의 해수욕장에는 야영객이 몇 있었지만 한산했했다. 당시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4학년이었고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이었지만 늘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다니던 그는 선후배들 사이에 가장 신망이 두터웠고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해 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인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 등이 그린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을 돌며 전국에서 전시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른바 '홍성담 차일환 간첩사건'을 조작한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자금을 댄 경위 등을 수사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 해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하는 전대협 대표로 정해지기 전에 사진학과 4학년 모 학생을 북한에 파견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청은 그 첩보를 입수하고 중앙대학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내창은 죽기 전날인 8월 14일 오전 학교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남녀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과 무엇인가를 심각하고 논의하던 모습이 학교 앞 수퍼 주인 등에게 목격되었다. 그 뒤로 그의 학교와 안성 시내를 세 번이나 오가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저녁에 수원에 있던 서울 농대로 가서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회의(수대협)에 참석해 8월 15일 수원역광장에서 열기로 한 '민족해방절행사' 준비 등을 논의했다. 대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하던 회의는 매월 한 차례 이상 진행됐으며 회의가 끝나면 수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술도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이내창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이들과 헤어졌다.

그 다음날인 8울 15일 이내창의 행적이 확인 된 것은 아침 8시, 여수 여객터미널 승선신고서를 통해서다. 그의 필체로 나중에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진 도 모씨와 그의 남자친구라는 백 모씨 등 두 사람 등 세 사람의 이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신영훼리호라는 여객선은 12시 30분 거문도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는 그가 줄곧 주변의 서너 명의 사내들에게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 마자 도주를 했고, 선착장 인근의 남 모씨 집에 뛰어들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방 있습니까?' 외치면서 신을 신은 채 마루에 뛰어올랐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쫒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섬은 닫힌 공간이었고 달아날 곳은 없었다.

약  두 시간쯤 뒤인 오후 2시20분, 그는 희망식당에서 혼자 볶음밥을 먹었고, 오후 3시 삼호다방에서 당시 다방 종업원이던 최 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울 말을 쓰는 '머리끝이 곱슬한 단발형, 왼쪽 눈에 움품 패인 듯한 자국이 있고 빨강 꽃무늬 상의와 실밥이 풀어진 7부 청바지에 망사로 된 샌들을 신고 있던' 안기부 직원 도 모씨와 마주 앉아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방 밖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사내가 다방 안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방을 나온 이들은 유림해수욕장이 있는 서도로 건너가기 위해 뱃사공 이모씨가 운행하는 나룻배에 승선했다. 서도로 건너간 후의 저녁 6시30분경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이내창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머리와 얼굴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부검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이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채 바다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웃옷은 벗겨진 채 발견되지 않았고 늘 입고 다니던 두터운 양복바지에 캐주얼 가죽신발을 신은 채였다. 시신 바로 옆에서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와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해들은 유가족들과 학생들은 바로 거문도와 여수로 내려가 목격자들을 찾아내고 앞에 밝히 내용들을 녹취할 수 있었다.  이내창의 시신은 얼굴과 머리에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 가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당시 안기부와 공안당국이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이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어떤 공작에 의해 거문도까지 유인되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안기부 직원이 이내창과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내창이 죽은 8월 15일은 북한을 방문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내창의 동문들은 국가기관에 의해 이내창이 유인 당해 살해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노태우정권은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간첩조작 사건이나 조직사건을 터뜨리며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키곤 했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의문사 유가족 등 민족민주운동 유가족협의회의 유가족들은 무려 422일 동안이나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며 과거사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기 약 5년간 이내창 사건 등 의문사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이내창 사건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조사결과는 사건 직후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사실들 중 일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시 안기부였던 국정원 관련 자료에 조사, 국정원이 학생운동조직에 대해 진행했던 내사 자료, 국정원이 운영했던 학생운동 조직 내의 프락치들에 대한 내용 등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들에 대한 조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이어 출범한 '진살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진정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전혀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며, 왜 조사를 하지 않느냐는 문의에 대해 이렇다할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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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의 어머니는 사건이 난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15년 넘게 병상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 재작년 끝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큰형 이래석은 이제 일흔살의 노인이 되었다. 다른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들 역시 거리에서 20여년을 싸우는 동안 이제 대개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예전에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주요인사들조차 '의문사 사건은 조사할 만큼 했기 때문에 더 조사할 게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내창이 살해 당한 당시나 일반 공무원들과 별반 다릇 것 없는 과거사 위원회가 무성의한 조사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우리는 국가기구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의 햇살이 비출 때 음지에 숨겨져 있던 진상이 언젠가는 밝혀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최종길 교수 사건이 그랬듯이 말이다. 영원히 감추어 둘 수 있는 진실은 없다는 것을,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가해자들은 무겁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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