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13일 

 

 

 

구도의 길

 

수운 선생이 21세에 구도를 시작하고 처음  시도한 방법은 사색이었습니다. 퇴계의 학문적 맥을 잇고 있던 부친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 사이 문중 사람들의 비난을 피해 용담을 떠나 울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을 챙기기 위해 여섯 마지기 땅을 저당잡혀 용광업인 철점(鐵店)을 경영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두 해만에  망해 땅도 날려 버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다 쓰러져가는 초가라도 남아 았던 고향 용담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의 비참한 심경이 용담가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용담에 돌아온 10월부터 자와 호 이름도 바꾸고 본격적인 구도에 들어갑L다. 인생에서 좌절할 만한 상태인데도 수운 선생의 구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수운 선생의 구도는 우리 전통의 기도방법으로.바뀝니다.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인 울묘천서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수운 선생 집의 종이었다가 선생이 득도한 후 입적된 양딸의 중언에 의하면, 새 버선을 신고 나갔다 돌아올 때면 버선코가 뭉그러질 정도로 하늘을 보고 젊을 했다고 합니다.(소춘 김기전 선생과의 1928년 대담에서)

 

신비체험

 

그러던 음력 4월 5일 조카 생일잔치에 갔다 몸이 이상해 집으로 돌아온 직후,수운선생은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몸이 떨리면서 마음이 섬칫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소리의 주인공을 수운선생은 처음에는 '상제'라고 표현했습니다. 엄격한 계울의 신, 강한 절대자 이미지였습니다. 그 하늘님이 “지금까지 나는 애를 썼는데, 실체로 이룬 것이 없다가( 勞而無功) 너를 만나 성공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옵시 두려워하다 무서움을 떨치고 그리스도교로 사람들을 가르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라 영부와 주문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부( 靈符)와 주문(呪文)을 내렸습니다.  영부의 모양은 태극이고, 그 형상은 궁궁이었습니다.  ( 受我 比符 濟人疾病, 基形은 太極이요 又形은 弓弓이다) 

 

수운 선생은직접 이 영부를 불태워 마셔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검은 얼굴이 희어지고 몸도 굵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써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효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효형이 없었습니다. 그 효험은 전적으로 그 영부를 받는 사랑의 정성과 공경에 달렸던 것입니다. (주문예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러한 수운 선생의 종교체험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우선 병든 세상을 구제하고 싶어하던 수운 선생의 문제의식이 체험을 통해 일시에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은 한울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맞물린 것이었습니다: 수운 선생에게는 수행과 하늘의 계시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이 상황에 대해 '받아냈다' '얻었다"닦아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수운 선생은 '깨달았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채험을 세상에 펼쳐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나타내고 환희감, 충만감으로 홀러넘치게 됩니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귀미산수 좋은 풍경 아무리 좋다 해도 내 아니면 이러하며, 아나면 이런 산수 아동방 있을소냐. 나도 또한 신선이라 비상천 한다 해도 이내 선경 귀미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

 

 

득도 후의 새로운 세계

 

가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6개월 전 둘어 가던 용담의 씀쓸한 풍경은 어느새 신선의 세상으로 바뀝니다. 실제로 자연환경이 변한 것이 아니라 수운 선생의 눈, 구미용담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세상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 개벽의 출발은 역시 관점의 전환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하는 틀의 전환은 인간관, 우주관, 세계관의 전환으로도 드러납니다. 그것은 수운 선생의 신 관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수운 선생이 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는 대략 15. 16가지' 신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대략' 네 가지 정도 특징이 드러 납니다. 

 

수운선생의 '신'의 네 가지 특징

 

먼저 '유일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 유일한 하나가 바로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도교에서도 '대우추, 대생명체'라고 합니다. 실제 생명체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세포도, 한 개인도, 지구라는 체계도 태양계도 다른 생명체나 자신보다 더 큰 생명체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즉, 세상에는 온천지 생명체계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운 선생은 하늘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감성의 세계와 초감성의 세계를 나누고 이 세상, 저 세상을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수운 선생은 이 세상, 저 세상을 나누는 관념은 허무지설이라고 비판하며, 천지생명과 나는 둘이 아니며 하나라며 신의 유일성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신은 인격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과 나와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내재성(內在)입니다. 여기서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 주문에 나오는 시천주의 의미를 잘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수운 선생은 하늘님을 잘 모시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천주의 시는 장소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생님 어디다 모셨느냐?" “돌아가신 아버님을 선산에 모셨다”는 말처럼 모심은 봉양의 의미가 아니라 장소의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한자어를 공동으로 쓰는 동아시아 삼국의 언어에서도 한국 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네 몸에 모셨으니"란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합니다. 이중세계를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재성은 어찌보면 필연적입니다. 생명의 씨가 내 안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늘님이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시간성입니다. 시간성은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생명에는 씨가 있고 '자기조직력'이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이 자기조적력을 통해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날 표영삼 선생님의 말씀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사실 수운의 신 관념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정해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 신 관녕을 통해 동학의 인간관, 우주관, 세계관을 유추해야 하는데 그 점은 다음 시간을 기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짧게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습니다. 

표영삼 선생께, 동학의 사상을 어떻게 실천해 오셨느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겸손하게, 목숨 걸고 사회변혁을 실천했어야 하는데, 실제 그렇지 못했다고 답하셨고, 방정환 선생님과 같이 어린이운동에 앞장섰던 소춘 김기전 선생님 일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도 하늘님을 모셨으니 함부로 치지 말라'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 하기 위해 김기전 선생은 자식들에게도 늘 경어를 쓰셨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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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06년,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 표영삼선생을 모시고 몇 차례 동학강좌, 답사를 진행했다. 비교적 소상하게 강의를 채록하고, 동영상도 편집해 모심과살림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두었었는데, 후임자들이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유실돼 안타까웠다.  

2008년 표영삼선생님도 돌아가셨다. '죽어서 저 세상에 가는 게 아니'라던 생전의 말씀처럼, 일체의 장례절차도 없이 서울 의대 해부학연구실에 시신기증 신청만 단행한(연로하여 실제로 기증되지는 않았다) 그분의 마지막도 극적이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선생의 강의록을 당시 홈페이지를 캡쳐해 노트에 붙여 보관하던 분(한살림연수원 박혜영팀장)을 만나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차례로 한 편씩 이 블로그에라도 되살려볼 생각이다.   

2004년 10월 강의는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진행했다. 저녁을 급히 먹고 7시부터 2시간 남짓 강의를 하신 뒤 선생님은 양평군 용문면의 댁까지 가셔야 했기에 당시 경기도 광주에 살던 내가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곤 했다.  

1. 2004년 10월 6일 

 

 

선생님의  강의는 흔히들 수운 선생이 신비체험을 한 1860년 4월 5일을 동학의 창도일로 여기는 통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은 신비체험일일 뿐이고, 실제 ‘동학'이라는 말을 쓴 것은 1862년 남원 교룡산성 아래 은덕암에서 지은 동학론에서였습니다. 이 동학론은 나중에 논학문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또한 서학의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학을 만들었다, 유불선 삼교를 종합하여 동학을 창도했다는 이야기도 일본인들이 동학을 폄하하려고 만든 관렴이라는지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용달유사에 나오는 "12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수운 선생의 시대인식에 이르러 표영삼 선생의 강의는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수운 선생은 나라 곳곳을 둘러보며 부패한 조선이 무너지고 있고, 또한 1844년 아편전쟁 전후 중국도 이미 기울어졌으며, 아편을 파는 것이 금지되자 군함을 앞세워 중국을 침탈한 서양도 썩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병들었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방향을 '다시 개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개벽은 연다는 의미입니다. 주역에 나오는 천지개벽은 천지가 처음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운 선생이 말한 '다시 개벽'은 새로 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환경의 개벽이라기보다 “개벽후 5만년”이라는 표현을 짚어볼 때, 인간의 문화체제, 삶의 틀이 성립된 지 5만 년이 되었는데, 그것이 병들어 회볶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벽 후 오만 년에 십이제국이 병들었으니 다시 개벽, 즉 우리 삶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들은 일정한 습속, 관습, 그리고 규범의 틀, 먹고 사는 경제 배분의 들, 또 하나는 시대마다 다른 표현의 틀, 그리고 생각하는 틀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틀이 서로 맞물려 교호작용하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수운 선생은 그중에서도 생각하는 틀, 시점(視點)을 바꾸어야 다시 개벽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수운 선생이 말한 도(道)는 생각의 틀을 이루는 싹, 씨앗 삶의 들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길. 신념체계를 의미합니다.

 

동학이라는 개념도 짚어보았습니다. 수운 선생이 “도는 비록 천도지만,학은 동학"이라고 한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은 현대적인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다, 실천한다. (인품이) 풍긴다는 의미로 수행체계, 수행의 틀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하는 신앙이나 기복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 한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동학 한다, 수행한다, 동학은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수운 선생은 이 '학'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1863년 4월 제자 강수가 찾아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물으니 , 성(誠), 경(敬), 신(信)을 제시했다고 나옵니다.그런데 1879년 발간된 동학 최초의 교단서인 <최선생문집 도원기서>에는 신(信),  경(敬), 성(誠)이라 하여 순서를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선신후성 (先信後誠)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수덕문>에 신(信)과 성(誠)이  의 의미를 우리가 아는 믿음, 정성과는 다르게 해석 합니다. 즉, 파자하여 사람 인(人)에 말씀 언(言), 즉 사람의 말에는 옳은 말이 있고 그른 말이 있는데,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거듭거듭 생각해서 잘 판단해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그리고 성 자도 파자하여 이룰 성(成)에 말씀 언(言).즉 뜻있는 말을 이루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여기에서 볼 때, 수운이 말한 동학은 하나의 수행체계였으며 '생각의 틀'을 바꾸고 그 뜻을 곰곰이 새겨 실천한다”는 의 미였습니다. 같은 의미로 13자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의 지(知)에 대한 수운 선생의 해석, 즉 그 도를 알아 그 앓을 실천하라( (知其道而受其知也) )는 해석을 볼 때도 생각을 몸에 배게 하는 수행이 동학의 핵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좁은 민족적 생각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또는 세계의 평화를 염두에 두는 쪽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고, 생각의 차원을 높여 그것을 몸에 배게 닦아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표영삼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수운 선생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 표 선생님을 붙들고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동학 한다”와 “동학 믿는다”를 분리하지 말고 하나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수운 선생이 기독교의 성서를 보았을까라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에 대해 짚어보시는 표 선생님의 열린 사고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성으로서 여성을 공경하는 것을 몸소 실천해 가기 위해 가사를 분담하여 선생님께서 스스로 밥을 짓고 계시며 사모님은 빨래, 청소를 하신다는 말씀은 참석자들을 경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모님께 경어로 존대하는데까지는몇 년이 걸렸다고 하시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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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던 산행

대개는 상처를 안고 떠나곤 한다.
참기 힘든 분노의 마음.

06:49 동서울발 버스를 타고 인제 원통을 거쳐
08:50 백담사입구 도착 .백담순두부에서 아침을 먹었다. 봉은사 신도들의 봉정암 단체 순례 때문에 셔틀버스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려 10:30에야 탑승.
백담사 1050. 영시암1130.

수렴동 1155
봉정암 1400 20
소청 14 45 1500
소청봉 1515
희운각 1550
양폭 1635
비선대 1745
소공원 1820








2019년 5월, 연휴를 맞아 국토종주를 결심하고 떠났지만, 

도중에 친구 아버님 부고를 받고 대구에서 돌아와야 했다. 

 

지난 2013년 시코쿠섬 88개 사찰 순례 이후 처음 떠난 장거리 라이딩. 

방치돼 있던 자전거를 다시 정비하고 늘어진 근육을 깨우고

무엇인가,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듯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 여행이었다. 

 

- 5월 3일~ 5월 5일 13:00 

- 서울 세검정~충주 앙성 능암온천(1박)~ 상주 자전거민박(2박)~ 대구 강정보, 대구서부고속터미널  

- 주행거리 약 400 Km

 

5월 3일 아침 7시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출발해 야심차게 부암동 고개를 넘어 청운동으로 내달리던 중 

뒷바퀴 흙받이가 덜렁거리면서 뒷바퀴를 간섭해 주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출발선에서 넘어진 꼴이라 사기가 꺾였다.

겨우 달릴 수 있게 지탱하고 용산 바이클리로. 

개점시간이 11시라고 돼 있어 옆에 있는 노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출발이 늦어진 일도 자전거 트러블이 조기에 드러난 일도 다 무엇인가 뜻이 있으려니... 

 

다행히 10시경 출근하시는 트랄라님을 만났다. 문제가 된 흙받이뿐만 아니라 

스포크 장력까지 꼼꼼하게 손 봐주셨다. 늘 그렇듯이 정말 감사합니다.TT  

 

트랄라님이 일일이 나사를 풀고 제 자리에 끼우며 조이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 없었나? 비로소 돌아보게 되었다. 

싯포스트에 달린 백에 멀티공구가 들어있었지만 ... 그만큼 나는 자전거와 멀어져 있었다. 

오전 11시. 출발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내심 첫날 목표로 한 충주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  

자전거 타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 
양수리까지는 가벼운 하이킹을 하듯 달렸다. 

 

오후 1시 양수리에 도착, 점심을 먹고 출발. 

양수리에서 양평이 그리 먼지도 잘 몰랐다. 수 많은 터널을 지나고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양평 미술관 인증센터 오후 2시30분 도착. 

 

아이들 어릴 때 10년 동안 양평 인근에서 살았기에 옛 생각이 많이 났다. 

서른 중반에, 도시를 벗어나 무엇인가 우리 방식으로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기르겠다고 겁없이 

시골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기질적인 문제인지, 그 무렵 일요일 저녁이면 어떤 우울감이 밀려들곤 하던 기억. 

무엇인가 왁자하고 떠들썩한 도시의 삶으로 부터 유폐된 기분.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양평에서 이포로 가는 길은 더 없이 아름답다. 

 

이포보 인증센터 오후 3시 30분. 

아무래도 충주나 수안보까지 가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주 인근에 강에서 퍼올린 모래들. 이른바 4대강 사업의 흔적이다. 

역사가 평가하겠지. 이 무모한 국토 개조 사업에 대해. 

강원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천보 오후 5시. 이제 어디서 숙박을 할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해가 지면서 조금씩 초조해지긴 했지만 해질녘 남한강은 고적하고 아름다웠다. 

트랄라님이 떠나는 내게 톡으로 국토를 천천히 감상하라시던 말씀...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우리 국토에 대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만이 아니라 이름난 관광지만이 아니라

우리 국토도 무척 아름답구나...


첫날 샤오미스마트폰에 나타난 주행거리 156km. 

능암온천 주변 무인텔에서 잤다. 

식당에 물어보니 새로 문 연 무인텔이 깨끗할 것이라고 해서... 

그러나 자전거여행자가 혼자 자기에는 비쌌고(5만원)

 

축협 고기매장에서 고기를 사서 인근식당에 가 

이른바 상차림비(4천원)를 받고 구워먹는 시스템인데 음식은 형편없고 

1인이 가도 2인분 차림비가 기본이며, 된장찌개 공깃밥 각각 다 돈을 계산하게 돼 있어 

나올때 보니 형편없는 식사에 고깃값을 포함해 거의 5만원 지불한 한 꼴이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의 무인텔도 편안치 않았다. 

아침 7시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 차가운 공기. 풀잎에 맺힌 이슬. 

청량했다. 간밤의 어수선한 잠자리를 충분히 위로해주는 아침 라이딩. 

그런데 같은 충주라고 해도 앙성에서 충주, 충주에서 수안보가 이리 멀 줄이야
탄금대 인증센터 오전 8시 30분 

 


수안보에서 올갱이 해장국을 먹고 11시 15분 다시 출발. 

이후로 줄곧 오르막 구간이 시작되면서  

국토종주 구간의 상징적인 고난구간 소조령과 이화령을 넘었다. 


소조령 11시45분. 


이화령 정상까지 5.2km 업힐. 

자! 가보자. 


한 발 한 발이 고통스러웠지만 숙명처럼 견디며 페달을 밟아가니 고갯마루에 도달했다.

사는 일도 그렇겠지.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꾸준하게 ...

이화령 도착12:40 
까막득하게 이화령 터널을 통과하는 차들이 내려다 보였다.

한 시간 남짓 거친 숨을토하며 패달을 밟아 

업힐 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13:05 다시 출발. 


고갯마루를 지나면 경상북도 문경이다. 백두대간을 넘은 것이다. 

 


보상처럼 주어진 내리막길을 달려 

순식간에 문경을 통과하고 불정역 인증센터 14:20 

 


오후로 접어들며 볕이 뜨거워졌다.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 


문경을 지날무렵, 아들 3형제가 모두 미국에 체류중인 고등학교 동창 아버님 부음을 받았다. 

유년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공유한 친구.

 

자전거로 출발하던 아침에, 아버님이 위독하신 것 같아 급히 

뉴욕에서 티켓을 끊었다고 전갈이 왔었고, 며칠은 버텨주실 것 같아 

종주 마치고 서울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바 있었다. 

발인 전에 서울로 돌아가 함께 장례를 치러야 겠다. 

 

부음을 받은 뒤로는 자전거 주행에 마음이 집중되지도 않았다. 

다음날 오후 대구까지 가서 상경하면 친구가 도착할 시간까지 빈소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종주는 중단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상풍교에서 상주보까지 하도 고난의 오르막이 있다고 해서

상풍교를 건너 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는 자전거 도로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상주보 도착 17:30. 

 

 

둘쨋날 달린 거리 약 140km

 

탄금대 인증센터부터 홍보물이 붙어있던 '상주자전거민박'에 전화해서 숙소를 예약했다.

자전거길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트럭으로 픽업을 하러 오고, 저녁과 아침 식사도 만족스러웠다. 

 

 

여섯 명씩 이층침대 한 방에 자는 도미토리형 숙소는 숙박비(2식 포함 3만원)를 생각하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두 분이 하도 코를 심하게 곯아 잠을 설쳤다. 고된 일정을 소화한 이들의 단잠이다. 

잠이 깰 따마다 거실에 나갔다가 마당에 나갔다 하면서 밤을 보냈다. 

다시 묵게 된다면 귀마개를 준비해야 겠다. 

아침 7시 민박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는 역시 상쾌하다. 

대구 강정보까지 100km 남짓이라고 하니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오후 4시 버스를 예약하고 


유장한 낙동강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낙단보를 지나고 구미보를 지나. 

 

구미에서 한 차례 길을 잃고 시내로 한 시간간 가까이 헤맨 끝에

 다시 강변길을 찾아 나온 뒤. 

 

 

이팝나무, 언뜻 보기에 라벤더인가 착각하게 되는 보라색 갈퀴나물꽃이 지천인 

강변길을 달려... 


낙동강 하구둑까지 남은 거리 275km 

예정대로라면 1박 2일을 더 달려 완주를 했을 테지만... 

버스 시간을 감안하며 천천히 달렸다. 

어린이날이기도 한 일요일, 대구에서 출발했지 싶은 라이더들이 많았다. 


12:00  성주대교 공사현장 아래 

트럭 노점에서 3천원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13:10  잠정 중단지점으로 잡은 강정고령보... 도착. 

쉴 때마다 마주쳤던 종주자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셋째날 상주 자건거민박~ 강정보  85km

나는 왼쪽으로 금호강 자전거길로 꺾어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지방국도로 접어든 듯

풍경도 달리는 이들도 분위기가 다르다. 



금호강을 끼고 20km 남짓 달려 

염색공단 인근에서 자전거길읏 벗어나 

14:40  서대구고속터미널 도착 

15:20  프리미엄고속버스가 있다 해 표를 바꾸고 탑승 

  

짧았던 2박 2.5일의 자전거 여행은 이렇게 마쳤다. 

작은 언덕을 오를 때에도 나의 엔진은 허덕거렸다. 다시 근육을 당기고 

더 자주 달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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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말 필리핀 네그로스섬에 다녀왔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던 사탕수수밭. 작물이 들어찬 들판을 보면서 어쩐지 사막처럼 갈증이 느껴져 목이 탔다.  


한살림이 민중교역 마스코바도설탕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필리핀 네그로스섬 농민 생산자들과 교류가 시작되었다. 

'민중교역'에 대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던 게 2008년이고, 설탕 취급이 결정된 것은 2016년. 무려 8년 동안 논의가 길어졌다.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한 수입물품을 취급하지 않는 원칙을 쉽게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대.  


네그로스 섬은 필리핀에서 4번째 큰 섬이다. 

면적은 강원도 정도의 넓이(강원도 : 16,873.51㎢ 네그로스 : 13,309.60), 인구는 440만명이라 한다.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닐라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섬의 주도랄 수 있는 바콜로드 공항까지 또 날아가야 했다. 

아침 8시에 인천공항을 떠나 마닐라에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때가 다 돼 바콜로드시에 도착했다. 





일본의 운동가들이 개척한 필리핀 민중교역에 대해, 부끄럽게도 필리핀에 가게 되고나서야 비로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중교역의 필리핀쪽 파트너들인 ATPI(필리핀공정무역Inc), ATPF(필리핀공정무역재단) 건물도 바콜로드 시내에 있었다.  




이 섬에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된 것은 1850년대 영국의 상인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필리핀은 이미 1565년부터 1898년까지 무려 333년 동안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우리나라에ㅅ는 선조가 즉위하던 해부터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들어선 해까지의 기간이다. 

그 뒤로도 1902년부터 미국의 식민통치가 1946년까지 44년동안 이어졌다. 


일제 통치 36년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언어와 의식은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다. 

여기 비하면 필리핀의 주민들이 감당해야 했을 고통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네그로스섬 전체를 뒤덮고 있던 사탕수수밭 역시 서구 제국주의가 원료 산지로 필리핀을 재편한 결과다.  

이러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왜 필리핀이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땅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사탕수수 재배가 확대된 것은 단순히 달콤한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이후 대량 생산된 설탕은 노동자들에게 열량으로 제공돼 산업혁명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열량으로 연소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와 남미와 필리피 등 적도 인근 기후 조건이 맞는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해 설탕을 조달하고 이는 유럽 등에서 사작된 대공장 노동자들의 열량으로 소비되게 함으로써 저임금 착취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고된 노동현장에서 설탕덩어리 일회용 스틱 커피가 열량을 보충하는 것도 비슷한 일이지 싶다. 




한살림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유니프왁(UNIFWAC) 공동체 마을 뒤 숲에 있는 농업용수 탱크. 코카콜라 재단에서 후원했다고 했다. 


한살림이 농업정책에서 각국 각지의 기후풍토에 맞는 농업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수출하는 곳도 수입하는 곳도 생태순환’ 원리에 맞게 먹을거리를 자급하자는 것이 우선이고 

불가피한 경우만 교역을 하자는 이유 때문이다. 수입에만 의존하면서 식량 자급기반이 무너진 것도 문제지만 

자급은 뒷전이고 팔기 위한 농업 일색으로 농업이 일그러진 현실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시장의 가격 논리에 따라 국가간 먹을거리 이동이 많아질수록 탄소 발생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먼 거리 이동과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먹을거리에 대한 유전자조작이나 약품처리 등도 늘어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를 조장하는 것은 물론 거대 식량 자본이다


과거에 무력으로 식민지를 침탈하던 제국주의와 오늘날의 이들은 얼마나 다를까.


농업과 자국 먹을거리 생산을 무역에만 의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교역이 헝클어지면서 발생한 1990년대 북한과 쿠바의 기아사태, 2008년 무렵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했을 때 필리핀 등에서 벌어졌던 식량파동에서 목격한 바 있다.  



한살림은 2016년부터 네그로스섬에서 생산되는 '마크코바도' 설탕을 민중교역을 통해 수입하고 있다. 

두레생협, 행복중심생협, 대학생협들과 함께 민중교역 법인 PTCOOP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수입하는 설탕 1kg 당 100원을 기금으로 적립해 (예를 들면 공급량 100,000kg x 100원 = 10,000,000) 이를  현지 농민들의 식량 자급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활용하고 있다. 




가네시게(KANESHIGE) 농장일본 운동가들의 자취


바콜로드 시내에 있는 ATPI 건물 4층 강당 벽면 '가네시게홀'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1980년대 중반, 온통 사탕수수 일색인 이 섬에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2%도 안 되는 설탕 아시엔다(hacienda- 수탈한 토지를 소수에 나눠 줘 발생한 대지주 농장)경지면적의 67% 소유하고 있던 상태에서 국제 설탕가격이 폭락하자 농장주들이 사탕수수 수확을 포기하고 방치하면서 농장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니세프 등에서 기아 상태에 빠진 14만 아동들을 지원해달라고 호소 하면서 그린코프생협 등이 조직한 ‘일본 네그로스 캠페인위원회’(JCNC: Japan Committee for Negros Campaign) 는 긴급하게 바나나를 수입하는 등 섬 주민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조금을 보내주는 방식으로는 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설탕노조 위원장은 '우리는 굶주리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 이라고  



연수 일정의 마지막날인 121일 가네시게(KANESHIGE) 농장을 방문했다


가네시게씨는 일본 그린코프의 초창기 전무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네그로스섬을 덮친 살탕파동당시 아이들이 굶어죽기까지 하는 비참한 상황을 겪던 네그로스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섬을 처음 방문하고, 1994년에 섬에 이주해 와 그린코프 등 일본 생협들과 시민사회의 참여 속에 부지를 1995년 이 농장부지를 매입한 뒤 유기비료 생산 시설과 교육과정 등을 준비하다가 1996년 지병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 뒤 이 농장에 뿌려졌다고 했다농장의 치타씨는 가네시게씨가 농장에 우리들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 했다


가네시게 농장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유기농업을 가르치고, 이들이 마을로 돌아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농장운영 경비는 팔시스템등 일본 생협들의 기금에 의지하고 있다고 했다.



농장의 가자 큰 특징은 BMW 농법이었다. 가축의 분뇨(糞尿)를 화강암과 현무암 등 자연석과, 부엽토 등으로 처리해 박테리아(Bacteria), 미네랄(Mineral)로 활성화시킨 물(Water) 변환시켜 가축의 음용수 등으로 활용하고 이 과정에서 침저된 오니 등은 유기질 퇴비로 경작지에 활용하는 생태적인 순환농법인 셈이다


몇 년 전 한살림을 방문했던 야스다 시게루 고베대 명예교수께서 BMW의 원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구상의 미네랄이라는 것들은 결국 우주 대폭발의 시기에 별들에서 떨여져 나온 것들이고 이들의 에너지와 미생물의 힘으로 축분들을 정화시키는 원리에 대해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할 뿐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갈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다. 다만, 밤 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몸이 이어져 있다는 낭만적인 상상이 미소를 머금게 할 뿐이다.

 


가네시게 농장의 돈사에 우리 일행은 별다른 소독도 없이 들어가 갓 태어난 새끼돼지들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BMW를 음용한 덕에 돼지들이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돈사 안에는 역한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돈사 앞에는 오니를 가라 앉히고 바이오 가스를 생산하는 탱그 앞으로 단계적으로 오수를 정화 하는 세 칸의 수조들가 이어져 있었고, 수조 안에는 화강암과 현무암 등 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자연암석들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암석의 미네랄 성분과 부엽토 등의 미생물들이 걸러낸 물은 실제로 최종단계에서는 사람이 마셔도 아무 탈이 없는 물로 걸러진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의 운동가들이 초석을 놓아 이미 진행되고 있는 민중연대, 민중교역의 현장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이미 30년 전부터 땀흘리며 민중연대의 씨앗을 뿌려온 일본 운동가들의 자취를 만났다








우리가 방문했던 얼터트레이드 3층 교육장에는 

가네시게 씨를 기리며 ‘KANESHIGE HALL’로 이라는 명패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마음으로 잠시 헌화하면서 묵상을 올렸다



소위 '86'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또래들의 집단 에너지는 한 때 대단했다.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활동가들이 1만 명 가량 되었다고도 하고 지금도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장을 지키고 있지만 


대부분은 운동의 전망을 포기한 채 각자 도생의 길을 가야만 했다. 운동의 지도부를 자임했던 이들은 대중운동 현장을 이탈한 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앞다투어 정치판으로 몰려가 오늘날의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뜨거웠던 80년대의 그 에너지가 왜 이토록 쉽사리 조로와 쇠락의 길을 가야 했을까. 


가네시게농장에서 씁쓸한 우리 현실에 겹쳐 

새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혁명'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 덕에 올해 첫 자전거를 탔다. 작년에 잠시 아팠던 이후로 자전거 탈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바이클리 뚜르드월드에서  이날 인천 공항 앞 모도 등 섬 3곳에서 번개 라이딩를 한다 했지만 하루에 100km는 거뜬히 달리는 그분들 따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대신 양수리 정도를 생각하다가 이왕이면 건강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k도 방문하고 살던 동네도 돌아보자싶어 곤지암까지 가보기로 했다.

집에서 이매역까지 44km. 시내를 거쳐 청개천를 따라 곧장 달리다가 마장동에서 천변 자전거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영동대교 자전거 길을 몰라 몇번 건너본 적 있는 잠실철교에서 도강. 다시 탄천 합류지점으로 돌아와 이매역까지...

양평까지 곧장 한강을 따라 달려가 강하리를 거쳐 산북면쪽으로 갈까했으나 점심 먹고 떠난 길이라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겨울답지않게 푸근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답지 않다'는 것은 어쩐지 불안하다. 연말에 갔던 지리산에도 산록에만 눈과 얼음이 있을뿐 겨울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리산의 상징인 구상나무 절반이 기후변화(온난화) 때문에 고사했다는 소식도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경강선... 서울에서 강릉까지 철길을 잇겠다는 뜻이겠지?  1998년 곤지암에 작은 집을 짓고 이사하던 무렵부터 경강선철도나 성남 장호원간 자동차 전용도로 얘기가 있었는데... 근 30년이 지나 철도가 개통됐다. 도로는 여전히 일부 구간만 개통되고 공사중이다.

이매역에서 곤지암까지 전철 4정거장. 불과 15분밖에 안 걸린 것 같다. 전철역 주변은 여전히 황량하지만 빠르게 변해갈 것이다.

곤지암부터 k의 집이 있는 잣나무골까지... 양평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탔다. 편도 9km 왕복 18km 가량. 2차선 도로...갓길도 거의 없는 불안한 길이다. 간혹 자전거길 구획이 있지만 한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흙과 먼지가 쌓여있어 바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잣나무골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k는 다행히 지난 여름에 비해 차츰 회복중인 것 같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충무로에 있던 다니던 신문에서 곤지암 유사리까지 1박2일에 걸쳐 걸어서 퇴근을 할 정도로 건강하던 그가...불의의 일격을 받고 힘겹게 회복하고 있다.


램프를 못챙겨 떠난 길이라.길이 어두워질 것 같아 불안했다. 간단히 인사만 하고 전철역으로 나오려고 하니 만선리에서 하천변으로 길이 있으니 차들을 피해 가라고 알려준다. 이 동네에서 10년을 살았지만 가본 적 없는 길. 민가도 없는 야생의 들판이 곤지암천변으로 남아있었다. 어둠이 짙어가는 그 들판을 패달을 밟으며 달리자니 어쩐지 마음이 더 황량하고 어두웠다.

곤지암에 도착에 다시경간선을 타고 판교까지.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고 양재까지... 양재에서 다시 3호선으로 경복궁역까지...왔을 때는 이미 저녁 7시반이 넘어있었다.

곤지암에 집을 지어 이사한 게 1998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 직후였다. 가진 건 없어도 세상 두려운 게 없던 때였다. 그때에 비하면 ....

정신없이 살다보니 세월이 훌쩍 지났다. 코흘리개 딸들이 여전히 학생이지만 성인이 된 것 말고는 무엇을 했나...싶은 회억이 밀려왔다. 



강남역에 갔다가 귀가하기 전에 알라딘 중고책방에 들어가보았다. 

<이노우에야스시 여행기>라는 책이 눈에 띄어 선 채 넘겨보다가 주말동안 읽어볼까 하고 사가지고 왔다. 

마침 같은 작가의 <빙벽>이 거실 책꽂이에 있어 다시 들춰보았다.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줄거리도 생소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다. 

진선출판사에서 포켓판, 4천원짜리 책인데... 책꽂이에서 배어나온 송진이 비닐껍질에 눌어붙어 있었다. 

1996년 코오롱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본격 등반을 해보고 싶어하던 90년대 말쯤 영풍이나 교보문고에서 산 것 같다.  

당시에는 대형서점에 제법 '산악도서' 서가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여러 취미코너에 합병돼 쪼그라들었지만...  



30대 그 무렵 <빙벽>을 읽으면서 열광하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산사나이들의 낭만도 그렇지만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한 유부녀(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것 이상은 아닌) 를 향한 두 순진한 산악인의 몰입에도 꽤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서 꽤 존경받는다는 이 작가의 내면도 소설의 줄거리도 엉성하고 어설프기만하다. 

이해가 되는 점은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58년인가... 그 무렵이다. 신소설만큼이나 옛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여전히 하녀가 등장하고 여성들은 남편이나 오빠의 그늘에서 자라는 존재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가 소설의 핵심인물이다. 

여자는 아름답다고 묘사된 것 말고는 도대체 왜...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지 이해할 수도 없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 높은 인격에 대한 이성적인 대응만은 아닐지라도...

무슨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한 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1980년대의 우리들은 아니 나는, '사랑'마저도 '이성적 결단'이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물론, 사람이, 또 사랑이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 이성과 합리를 아예 부정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다울 수 있나.   

우연적인 행위의 연속, 불가지론적인 사건들의중첩? 인생을 이렇게 치부해버리면 삶은 더 부질없어진다.  


2010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이어 사별하면서 몸과 마음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던 무렵 일본 나고야에 있는 북알프스 야리가다케에 올라본 적이 있어 

책에 나오는 카미고지上高地, 가라사와, 갓파바시, 요코오,  도쿠사와, 묘진, 호타카 같은 지명들이 낯익었다. 

소설은 줄곧,산에 가기 위해 일상을 견디는 우오즈와 고사카...두 젊은 산악인의 사랑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대학산악부 동문이며 겨울철 오호다카 동벽을 초등하기 위해 설을 앞두고 휴가를 내 북알프스에 간다. 

고사카는 야시로 미나코라는 젊은 유부녀를 사랑하지만 둘 사이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미나코는 한 번 고사카와 잠자리를 가진 일에 대해 자책하면서 거리를 둔다. 

결국 고사카는 당시 신개발품인 나일론 자일이 끊어지면서 겨울산에서 죽는다. 작가는 이들 산악인들이 '다다미에 누워서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내들이라고 묘사했다.  

고사카의 어머니도 '아들은 하고 싶은 등산을 하다 산에서 죽었으니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한다. 

산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일상을 벗어나 있는 공간이다.많은 산악인들이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산에서 충족시키려고 한다. 산악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우오즈는 슬리핑백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쭈욱 펴고 눈을 감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댔다.우오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기로 들면 생각할 일은 많았다. ... 그러나 우오즈는 언제나 그렇듯이, 산에 있을 때는 되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 위해 산에 온 것은 아니니까. '   


아무튼, 이노우에 야스시의 '빙벽'은 까맣게 잊고있던 산악문고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등산에 대한 간단치 않은 물음과 대답은 오히려 역시 평화출판사의 등산문고판으로 간행된 라인홀트 메스너의  <도전>에 잘 표현돼 있었다. 

들춰보니 이 책은 1994년에 간행됐고 원로 산악인 김성진씨가 번역했다고 표기돼 있다.


' 곰곰이 생각하면 등산가인 우리도 그 희피족과 닮은 게 아닌가. 우리도 등산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일종의 구제를 바라는 게 아닌가.  ... 결국 따지고 보면 숨막히는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산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산은 스포츠다.(그것 이상은 아니다) ... 산행이 끝나면 정신이 더 맑아졌다느니 인간적으로 가치를 더 갖게 되었다는 등,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큰 착각이며 자기 기만인 것이다. '  


이런 등산서적들이 꾸준히 발행되던 1970,80년대에 비하면 등산은 훨씬 더 대중화 되었다. 더 맛있는 음주를 즐기거나, 비만과 혈압 같은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처럼 훨씬 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야유회를 가듯이 산에 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아졌다. 

산행이 무슨 구도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과거처럼 무슨 특별한 사람들의 독특한 행위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고산등반이나 거벽 초등과 같은 도전을 이어가는 등산행위에는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한계를 확장해보고 싶은, 

인간들의어떤 욕망이 반영돼 있다. 

굳이 힘든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등 따숩고 배부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어떤 욕망을 해소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8천미터 고산들을 단독으로, 무산소 등정하는가 하면 연이어 두 개 봉을 오르고, 인류 최초로 8천미터 이상 14좌를 등반하며 인간의 한계를 탁월하게 확장시킨 라인홀트 메스너는 예의 <도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돌아오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는데, 그것이 등산가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었다. 그런 위인들이 어떻게 등산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위험한 등반에서 겨우 살아온 뒤에도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정신의 근육이 우리와는 다른 경지일 것이다. 

모처럼...종이 책을 읽었다. 

우울감 때문에 달리기도 쉬고 있던 탓에 늘어진 근육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그 지점. 그 곳에 삶을 밀고가는 어떤 힘이 있는 게 아닐까.   

 

나, 다니엘블레이크 

2016. 12. 18 아트하우스 모모 

무기력하게 늙어가고 있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푸념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서 혼자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에 전개되는 영국의 현실이 한국과 다를 게 없는데,  예전처럼 분노도 저항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속 현실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고 부조리한 상황들이다. 끝없이 규정과 원칙을 내세우는 관료들. 이미 우편으로 송달된 통지서에 대해 항의를 하자, 규정이 정한 절차는 먼저 전화로 통지를 받고 의료지원금 신청을 하게돼 있으니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항고하라는 대답을 영혼없는 자동응답기처럼,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분이 안 가도록 끝없이 되풀이 하는 요령부득의 관리자들... 

다니엘 블레이크가 처한 난처한 처지보다 영혼이 증발한 것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이웃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도 '공포'일 것이다. '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이웃에게 조그만 관용도 베풀 수 없게 그들을 몰아갔을 것이다.  

20년 전에 본 '브레스드오프', '트레인스포팅', '빌리엘리엇' 같은 영국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영국이 그런 모양이다. 사람을 더 싸게 부리려는 자본의 탐욕이 인간을 구차하게 연명하는 그런 존재로 만들었다. 쌍용차 노조를 파괴하고 집단 해고를 강행해 20여 명을 자살로 내몰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역꾸역 굴러가고 있는 우리사회처럼...  

영화에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하시킨 영국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한 때는 윤택한 선진국 국민들이던 그들은 이제 일상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아사 직전에 식료품 구호소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따고 맨손으로 음식을 삼켜야 할 만큼, 사람들의 자존감은 완전히 짓밟혀 있다. 

심장 혈관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젊은 시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제법 비싸게 사들였을 중고가구들을 내다팔면서 안간힘을 쓴다. 의료연금 신청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와 이웃들이 사는 서민주택은 낡고 초라한 부엌가구, 칠이 벗겨지고 못이 삐져나온 계단... 영국의 서민들도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웃과 정을 나누고  염치와 예의를 알던 일상... 사람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던 그 일상을 집어삼킨 것은 데처 수상이 앞장섰던 신자유주의 광풍일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제어되지 않는 자본의 식욕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더 싸게 노동력을 팔다 용도폐기 되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한 때 그 사회의 자부심이었을 '사회안전망'도 앙상하게 골격만 남았다.

의사는 다니엘의 심장 혈관이 노동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지만 의료지원금을 신청은 기각된다. 판정 관리가 매뉴얼에 따라 던지는 바보같은 질문들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고 꼬박꼬박 질문을 던진 것이 그런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굴종하지 않고 질문하는 자에게는 사회는 가차없이 응징한다. 자존심을 세우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하노라..." 스무 설 적에 고민 없이 목청껏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굴욕을 감수하며 연명해야 하는가... 마음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연필세대라고 말하는 다이엘 블레이크는 의료연금 기각에 대해 재심청구를 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컴퓨터로만 접수하게 돼 있다. 써본 적 없는 인터넷에 매달려 끙끙대거나, 두 시간씩 대기 해야만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 ARS같은 절차 때문에 심장병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는다. 객석에서 지켜보다가 우리들이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관리들은 시종일관 매뉴얼이 정한대로만 대답을 한다. 이미 대회는 없다. 사람과 ARS의 차이도 무의미하다. 그들 역시 이미 외주화된 관리업체의 비정규직일 것이다. 그들도 속으로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없지는 않겠지...  그렇게 믿고싶다. 그러나 자동반복 테이프처럼 규정을 반복해 외울 뿐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내담자들에게는 낮은 평점을 매기는 식으로 '체제'에 부역을 하면서 말이다.   

연신 한숨이 내 쉬면서 끙끙 앓으며 영화를 보았다. 

옆 좌석의 젊은이들은 내내 흐느끼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메마른 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다들 눈물세상을 고단하게 헤쳐가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영상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돼 눈물을 쏟고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오' 이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다니엘블레이크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고 사람답게 처신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서기에 현실은 거대한 파도처럼 도저하다.


켄 로치 감독은 1936년생이라고 한다. 여든 살... 지레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답게... 그래 ... 

사람다운 자존감을 버린다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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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휴가를 내고 설악에 다녀왔다. 풀어놓을 데 없는 체증같은 것 ... 산을 걷는 수밖에...
6시40분발 버스... 이 차는 홍천 인제 원통을 거쳐 간다.

 9시20분경 백담사입구 도착

마을 입구에 '갓시래기국밥'이라고 참하게 간판를 단 식당에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이런 속담처럼 기장밥에 뜨거운시래기국.. 미리 내 준 소국차도 눈과 코와 입이 다 즐겁다.

10시반 백담사 도착. 가울 상춘객이 많아 셔틀버스 주차장에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셔틀버스에 흔들리며 백담사계곡에 접어들면서부터... 가슴이 뚫린다.

11시반 영시암

백담사 입구부터는 이 시기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수채화같은 풍경...

11시50분 수렴동도착.
백담사부터 수렴동은 경사로가 아니고 풍경이 아름다워 가볍게 느껴지지만... 꼬박 한 시간 반 가까이 걸어야 하는 길이다.
간단히 요기하고12시20분 출발

백담사 오르는 길에 가로누워있는 거목... 장구한 세월 살아온 나무가 쓰러져 있는 자체도 눈길 머물게 하지만... 머리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써 놓은 이 글귀는 내게  주는 잠언이나 은유로 읽힌다. 그래 숙이면 피할 수 있겠지...

수렴동에서 구곡담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꼬박 된비탈이다. 설악에 왔다는 시람도 깊어진다.

2시 봉정암 도착. 늦은 출발에 둘러오는 버스를 타 일정이 촉박하다. 지난 여름 호되게 아픈 뒤로 처음 나선 등산길이라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었다.
길손들에게 보시하는 된장국에 밥 말아 먹고 시주를 하고...적멸보궁에 올라가 삼배. 그리고 기원.

 2시반 봉정암 출발

이제부터는 인적이 정말 드물다. 간혹 오르는 이들도 중청이나 소청산장에서 잘 사람들뿐이다.

3시 소청산장 도착.

내설악 능선들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소청산장 새로지은 뒤로 한번도 자본 적이 없다. 겨울에 꼭 한번 와보고싶다. 시린겨울바람 명징한 별빛을 꼭 보고야말리라.

소청봉 3시15분 도착.슥 일별하고 이내 희운각을 향해 하산... 이러다 해지기 전에 하산 못 할까 싶어 마음이 초조하다.
4시 희운각

1993년 신혼여행때 아내와 오르던 길이다. 그때에 비하면 참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마음은 더 가난한가. 우리집 큰스님( ?)가르침처럼 범사에 감사할 만도 한데...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도...

4시50분 양폭산장도착.

6시 비선대도착..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헤드램프를 꺼내고 앉아서 다리쉼을 한 뒤 느긋하게 하산..

7시 설악동소공원 ...택시를 타고 일단 터미널로... 7시40분차 이후로는 9시에나 티켓이 남아있다. 급히 김밥 한줄 먹고... 상경.
일상으로 복귀... 설악이나 지리산처럼 마음 속에 그리운 것이 있어야 한다.그 힘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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