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1~5. 모두 다섯권이다.

일본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차에 이 만화를 보게 됐다. 더러는 내가 지나쳤던 도쿠사와 산장 같은 곳도 만화에 등장한다. 만화라고는하지만,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원래 유메마쿠라바쿠 원작소설을 만화로 극화한 것이라고 한다.

만화는 다니구치지로라는 만화가의 작품이다. 이 만화로 2005년 앙굴렘국제만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장비와 복장에 대한 묘사가 너무사 사실적이어서, 나는 이 만화가가 틀림없이 산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니라면 전문 산악인 누군가가 치밀하게 감수를 했을 것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책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알피니즘은, 식민지시대에 일본을 통해 이식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니, 몇년 전에, 이제는 고인이 된 고미영씨가 겨울철에 후지산을 오르며 겨울 후지산은 히말라야 못지않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일본에는 만년설이 있고 또 설악산이나 지리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험난하고 큰 산들이 있다. 해발 2000미터 넘는 산이 하나도 없는 남한의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와 알프스에서 고난이도의 등반을 해온 것을 보면,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이 나라 사람들에게 뭔가 독특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튼, 이 만화의 주인공은 하부조지라는 일본 산악인이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큰 아버지 집에서 외롭게 자란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맹목으로 산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하나도 서운할 게 없다. 오로지 그의 목적은 남들이 못한 등반을 해내는 것... 그는 누구도 못 간 길을, 누구보다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방식으로 오르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 극단에 에베레스트남서벽을 겨울에 단독등반하는 일이 있다.

박영석 등반대가 우리나라의 천재적인 젊은 알파니스트들을 희생시키면서 세번 째인가에야 겨우 올랐던 벽이다.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곤란한 지경을 확대하는 이 '머메리즘'은 현대 알피니즘의 정수일 텐데, 이런 면에서 하부조지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일상의 상식이나 사람들과의 원만한 타협 따위 다 무시하고 그는 오로지 더 힘든 산행을 추구한다. 가난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한 성격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은 따라갈 수 없는 무모한 도전정신 때문에 그는 혼자가 되고 혼자만의 산행을 추구한다. 그런 그를 부채질 하는 라이벌이 존재한다.하부조지와는 달리 경쾌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환영받고, 어떤 면에서는 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클라이머 하세 츠네오. 이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알프스의 노스페이스와 K2를 더 곤란한 방식으로 혼자서 기를 쓰고 오른다.
 
남들이 이미 올라버린 곳, 남들이 이미 성공한 일을 되풀이 하는 일은 쓰레기같은 일이라고 하부조지는 말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맬러리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고  했다지만, 자기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는 존재하는 한 오를 수밖에 없다고 ... 살아있는한 영원히 현역 클라이머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죽어야만 그의 도전이 멈출 수밖에 없는 ... 그는 그런 운명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결국은 히말라야는 삼킨다. 그러나... 단순히 원정에 실패하는 과정이 아니다. 힐러리보다 훨씬 먼저 1928년(?) 베레스트 정상 가까이 다다랐던 멜러리의 이야기, 그가 지녔을 카메라를 매개로  이들의 이야기와 소설적인 구조로 얽혀 있다.
그리고... 제 목숨도 돌보지 않고 앞만보고 달려가는 그런 사내들과 쓸쓸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공기속으로' 이후에 가장 재미있게 - - ;: 읽은 산악 문예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은데... 내 또래 친구들에게 만화책 읽어보라고 말하면 반응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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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시리에서 한라봉 농사를 짓는 산악인 김승민씨 부부가 모처럼 육지 나들이를 와 집에 들렀다.
작은 병에 든 '말기름'과 자기 집에 있던 동백나무로 깎은 작은 솟대를 선물로 준다. 우리가 마음쓰는 것에 비하면 이들의 마음이 너무 정성스럽고 늘 과분하다.

말기름? 낯설어 하니까... 아토피성피부염, 여드름, 가려움증 등등... 피부트러블에 효과가 높다고...한다.



가시리 식당의 그 고소하고도 담백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순대국밥'을 가족들과 다시 가서 먹어보고 싶다.
지난 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 때 가서 혼자 꾸역꾸역 먹자니...
자꾸 눈물이 나던 기억이 난다.

2005년에,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아름다운재단 소식지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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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제주도에서 만난 김승민씨. 가족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살았는지 물으니, 자신은 ‘입도조(入島祖)의 35대손’이라고 했다.

몇 대 째 살고 있는 그의 집은 본디 띠로 엮었던 지붕만 양철로 바꾸었을 뿐 섬의 여느 집들처럼 현무암으로 벽과 기둥을 쌓은 돌집이었다.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나고 자라 늙어 죽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집이 튼튼하다고 자랑했다.

마당가에는 레몬밤, 애플민트, 라벤더 같은 수십 종의 허브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뒤란으로 돌아들어가니 귤밭이 몇 백 평 펼쳐져 있었다. 한쪽으로 참다래 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넝쿨을 뻗어 올리고 있었고 그 그늘 아래 놓인 개집에는 주인을 닮아 순진하고 무구한 눈매의 리트리버 두 마리가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찾아들어 턱을 괴고 잠이 들곤 했다.

서른 서넛이 된 그는 딱 한번 섬을 떠나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의 군대생활과 제대 후 서울에 뿌리내려볼까 하고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조립판매 회사에서 일년 남짓 신산스런 객지 생활을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 적 말고는 섬을 떠날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방 창틀 너머로 바라보이던 한라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한라산 기슭 중산간지대,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은 대궁을 태우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 너머로 아스라이, 도저히 현실의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던 그 산에 꼭 한 번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이학 년 때 그는 기어이 표선면에 있는 집을 떠나 무작정 걷고 또 걸어서 등산로가 있는 성판악까지 도달한 후 죽을 고생을 하며 백록담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이백 번도 넘게 한라산에 올랐고 지금은 적십자 산악구조대원이기도 하다.

폭설로 한길 넘게 눈이 쌓인 한 겨울이나, 섬이 떠내려갈 듯 폭우가 쏟아질 때도 구조 호출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등산장비를 챙겨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라산에 오른다. 그의 아버지, 형제들이 졸업한 초등학교는 이제 더는 학생을 받을 수 없어 문을 닫았고 제주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어 있었다.

그도 열심히 초를 문질러 윤을 냈었다는 복도 한 쪽에는 그 학교를 거쳐 간 거의 모든 졸업생들의 단체사진이 전시돼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십 명씩 졸업생을 배출하던 그 학교도 육지의 여느 시골 학교들처럼 쇠락의 길을 걷다 문을 닫고 지금은 인근에 있던 서너 개 학교가 하나로 합쳤지만 학생이 없어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고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늘 살아온 그의 돌집 얘기를 듣고 실제로 그 마당을 거닐면서 나는 과연 태어나서 몇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녔는지 헤아려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여겨왔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번번이 집을 옮기게 만든 것들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휘어잡고 뒤흔든 보다 근원적인 힘들이었다.
집은 가족이 깃드는 형식이다. 도시 사람에게는 조금 의미가 덜하겠지만, 어떤 집에 사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크고 넓은가, 얼마나 비싼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떤 연유로 그가 이사를 다녔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도 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데 적잖은 단서가 되기는 하겠다.

고향에 뿌리 내리고 이웃들과 함께 선량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왕에 뿌리 뽑힌 삶일지라도 집을 팔아서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올려서 되 팔 수 있을까 따위만으로 가족들의 삶터를 결정한다면 스스로의 존엄성을 자발적으로 모독해도 보통 심하게 모독 하는 게 아니잖은가.

(콩반쪽 05년 10월)

"역사는 인간이란 이성적 동물이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도, 때로는 엄청난 희생을 바쳐서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기어이 현실화해온 처절한 과정 그것이라 할 수 있다."  ?


복잡한 심경을 접어버리자... 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강만길 교수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살 수 있었다. 출근길 오가는 짧은 시간 전철 안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 틈틈이 읽다보니 600페이지가 넘기는 하지만, 근 일주일이나 걸렸다.

아이폰 덕분에 밑줄 그을 부분이 나오면 그대로 메모할 수 있었다. 점점 손글씨 쓸 일이 줄어든다.

[역사가의 시간]은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이다.  우리세대는 강만길 교수가 강의한 고대에 다니지 않았더라도 그가 쓰고 창비에서 펴낸 근대사와 현대사를 통해 중고등학교때 대충 지나친 역사 공부를 다시 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가 1980년대에 무슨 대단한 운동가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학자로서 자기 양심을 거스르지 않았을 따름인데... 그 이유만으로 대학에서 해직되고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거나 남산의 안기부에 끌려가야 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평화로운 시기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에는 궂이 양심을 드러낼 일은 없다. 고단한 시기에,  남에게 자기 생각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요구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자기원칙을 지키는 일.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양심은 개인에게 때로 위험과 희생을 요구한다.  

친일파들에게도 '민족에 해악을 끼쳐야겠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자기 삶에 달콤한 겄을 따라가다보니, 자기 이익만을 좇아 처신하다보니 결국 이웃을 사지로 몰아넣고 민족의 고통을 가중시키게 되었겠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친일'과 '반민족'은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친일반민족문제진상규명위원회'의 일부 보수적인 위원들의 '실용'적인 관점에 대해 그는 뚜렷하게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다.

이른바 '생계형 친일'에 대해서는 이해하자는 입장이면서도 젊은이들을 학병이나 정신대로 내몬 적극적인 친일파들이 고스란히 남한 사회의 기득권세력으로 유전된 과정에 대해 그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북에 대해 객관적인 이해, 따뜻한 관심과 연대의식이 느껴진다. 아마도 북에서는 친일파들에 대해 합당한 청산절차를 거친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또한, 50년이 지난 뒤에도 나치에 부역한 비시정권 참여자들을 찾아내 종신형을 선고한 프랑스와 우리 현실을 비교하기도 한다. 

일제에 부역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강도들이 호위호식하는 남한의 역사에서 '약삭빠른 처세'말고 후손들이 배울 교훈이 무엇이겠는가

또한, 책의 후반에는 확고하게 '평화통일'노선에 대해 강조하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은 오히려 통일자문회의의 학자들보다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념이 더 앞섰다는 서술도 해놓았다. 그처럼, 가치추구형, 학자적 양심을 가친 정치지도자를 우리 역사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래는 책을 읽다 밑줄 그은 몇 군데 구절들이다.
------------------

- 한반도는 전쟁방법으로는 통일될 수 없는 곳임을 그 전쟁을 통해 배우고, 평화통일을 지향해가는 것이 민족사적.세계사적 흐름에 부응하는 길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봐야한다.

- 속없는 사람들이 "남자는 군대에 가봐야된다" 같은 말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않다고 생각한다. 국방의무는 신성하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사회가 미개해서 전쟁이 문제해결의 최고수단이던 시대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활개치던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나는 서목사(서남동 )에게 중세 카톨릭의 처지에서 보면 개신교는 종교로 생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앞으로 세상이 더 발전하게 되면 지금의 기독교에서 섬기고 있는 신이 신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그런 때에도 기독교가 존속될 수 있겠는가,하는 대단히'무례한'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서남동목사가 "강교수는 역사학 전공잔데 역사를 움직이는 법칙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반문하기에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이 존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지금의 신이 신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쯤리면 역사를 움직이는 접칙같은 그것이 곧 그때의 신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 사람이란 현실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역사위에서는 불안전하고 부당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현실에서는 불안전하고 손해보는 삶이지만 역사위에서는 안전하고 당당한 삶을 살 수도 있다.

- 신분제의 울타리 안에서나마 '우리'를 위해 살던 중세적 공동체는 근대로 오면서 모두 해체되었다. 비록 다수 인민의 자유를 제약하던 신분제 울타리는 해체되었다해도, 모든 인간이 굶어죽을 자유까지 보장된 철저한 개체가 되어 홀몸으로 광야를 헤매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

-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통해 두번이나 통일고문을 맡았지만 상대적으로 통일고문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김대중정부 때였다고 기억된다. ... 통일고문들이 자문하기보다 오히려 반평화통일적 생각을 가진 통일고문들이 김대중대통령의 평화통일 강의를 듣는 자리가 되었다 해도 크게 틀리다 않았다.

- "역사는 인간이란 이성적 동물이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도, 때로는 엄청난 희생을 바쳐서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기어이 현실화해온 처절한 과정 그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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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살림이야기]만 펴내던 도서출판 한살림에서 1989년에 발표된 '한살림선언'의 전문과 이를 다시 읽고 해석한 '한살림선언다시읽기'가 수록된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한살림선언/ 한살선언다시읽기]를 펴냈다.  변형국판(130*200, 178p 8,000원모심과살림연구소편 도서출판 한살림 펴냄)
 
[한살림선언]을 재해석하고 이를 기초로 현 시점에 맞는 사회운동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부제, 한살림선언∥한살림선언 다시읽기 / 도서출판 한살림)가 7월 12일 발간됐다.

1989년 발표된 [한살림선언]은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결성한 [한살림모임]이 1년간 생명의 눈으로 시대의 흐름과 산업문명을 진단하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중요한 문건으로 주목되어왔다. 한살림선언은 시대를 앞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산업주의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이들의 관점은 태생적으로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불가능한 죽임의 세계관이라는 점을 통찰하고 우주생명의 일원으로서 사람과 자연이 조화와 공존을 이루고 도시와 농촌이 서로 돕는 호혜적인 관계를 모색하며 한살림운동, 한살림생활문화운동을 제시하고 있다.

도서출판 한살림이 새로 펴낸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부제, 한살림선언∥한살림선언 다시읽기)에는 1부에 [한살림선언]이 전문 수록되어 있으며, 2부 [한살림선언 다시읽기]에는 지난 2년간 모심과살림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된 관련 토론과 연구 등의 결과들이 정리되어 있다. 모심과살림연구소는 이를 위해 2008년부터 ‘한살림선언 다시읽기’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공부모임과 토론회 등을 진행해왔으며, 이를 통해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적확한 한살림선언의 시대적의미를 찾는 데 노력해왔다.

1980년대 말 [한살림선언]의 집필에도 함께 참여했던 박재일 사)한살림 명예회장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 공생의 가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가 더 좋은 삶과 사회를 꿈꾸는 운동가, 활동가, 일반인들에게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전했다. 도서구입 문의_도서출판 한살림 02)6931-3612, www.salimstory.net

<< 책의 목차 >>
다시 한살림을 선언하며
편집자의 말
「 1부 」 한살림선언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산업문명의 위기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한살림

「 2부 」 한살림선언 다시읽기
한살림세상을 희망하다
또 하나의 역사
한살림선언의 탄생


일요일 해질녘 집을 나섰다. 등산객들이 대개 다 귀가한 시간. 산은 고적했다. 호젓하게 혼자 걷지않는다면 산에는 대체 왜 가야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온 것 같다. 문득 유희나 체력단련으로서의 산행과 홀로걷는 산행은 전혀 별개의 행위라는 생각.  

탕춘대능선을 따라 곧장 걸어가면 향로봉이 있다. 암벽길도 아니고 릿지로도... 난이도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사람들이 추락해 한 명씩 죽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여럿 죽었을 만한 길도 막아놓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야리산장에서 미나미다케쪽으로 아무도 없는 눈길을 향해 떠나려는 나에게... 일본 산악인 할아버지가 한 말은 '가보겠느냐?'는 물음 뿐이었다. 그 뒤로 내가 걲었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생사관이 다른 것인지... 죽고 살고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인데, 무책임한 것인지 개인의 자율성을 너무도 존중하는 '쿨함'인지... 하긴, 죽고 사는 것을 스스로 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정해준다는 말인가.

능선에 앉아 커피를 마신 시간들까지 합쳐 향로봉-비봉-문수봉을 거쳐 대남문을 통해 구기동으로 하산하기까지... 2시간 반이 걸렸다. 때로 거친 숨을 토해야 했다. 북알프스에서 눈길을 찍으며 올라갈 때 '숨이 가빠도 스무걸음은 꼭 걸어간 뒤 쉬어야지...' 결심하고도 꼭 열 다섯 걸음정도에서는 쉬어야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또 1992년에...안산에서 병든 몸으로 돌아와... 매일 해야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걷고 또 걷던 삼성산 자락이 떠오르기도 했다.

구기동으로 내려설 무렵에는 이내가 짙게 깔려있었다. 밤이 오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둥지를 찾아가는 시간. 일상의 공간에서는 늘 산을 그리워하면서 산에서는 또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일... 토요일날, 죽은 친구 희창이가 있는 납골당에 다녀오면서...욱이와 무슨 얘기끝엔가... 쇼펜하우어가 했다던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존재'라는 말. 존재기반을 허무는 일과 자기 정체성을 쌓아가는 일이 인간들에게는... 늘 혼란스럽게 뒤섞여있다...
친구는 죽기 전 일이 년 동안, 앞뒤 안가리고 돈만 벌겠다고 했었다. 실제로도 가족들과 떨어져 오피스텔에 살면서 새벽까지 돈벌이에 골몰했다. 그 때문에 돈은 무엇 때문에 왜 벌어야 하는 것이냐고 말하는  친구들과 언쟁을 하기도 했다.
상황논리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늘 길을 잃는다. 자기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가끔씩, 삶에도 능선이 있어 훌쩍 뛰어올라 스스로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길을 잃고 마는... 그런 일들을 ... 피할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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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이한구씨가 솜씨좋게 꾸며놓은 갤러리 류가헌. 
한옥 기와지붕 사이로 경복궁 잎 가로수들과 서울의 그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하늘이 올려다보인다. 잔디를 깔아놓고 발 딛는 곳에는 섬돌을 놓아둔 마당. 툇마루에 앉아 아내와 한바라와 함께 차를 마셨다.

때마침 시인이며 화가이면서 무용평론가였던 김영태선생 3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문학과지성 시집에... 수많은 시인작가들의 케리커쳐를 그렸던 그이에 대해 정작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별 게 없었다. 이웃에 사는 류가헌 안주인이 건네준 팜플릿을 꼼꼼히 읽어본다. 인터뷰도 자신이 한 것이었다.  

김영태 선생의 그림들을 보자니...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도다리를 먹으며 같은... 황동규 오규원 황지우 김광규의 시집들... 늘 배가 고팠던 20대 때... 몽롱한 눈으로 버스 차창에 기대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시집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로부터...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무뎌졌고 타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 고스란히 빗물을 스며들게 해줄... 그 살아있는 마당...
요만한 마당이라도 있다면... 원주에 가있는 강이를 데려올 수 있을 텐데... 10살도 넘은 강이가
늙어죽기 전에... 다시 데려와 새벽산책을 같이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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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북알프스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오래되었다. 1996년께부터였다. 그러나 꼭 가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그렇듯이 떠올려보고 마는 정도였다.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슬픔과 괴로움. 그에 맞서고 있는 나 자신을 휩싸고 있는 무력감... 이런 것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과정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일도 바빴다.


안내산행은 대개 7월 이후에나 일정이 잡혀있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잡지 마감이시작되고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6월 17일  혼자 도쿄로 가서 그날 밤11시 신주쿠에서 버스를 타고 아침 7시에 가미코지(上高地)에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나의 산행은 대개 혼자 오래 걷는 식이었다. 
지리산 종주나 설악산의 공룡능선, 서북능선을 걷는 식으로. 말이다. 
교회에 가는 일이나 요근래 직장 동료들이 떼로 몰려가고 있는 아바타 같은 자기 이해 과정들에 어떤 효용이 있다면... 
내가 산길을 오래 걷는 일과 비슷하겠거니... 혼자 걷는 일은, 온전히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며 
숲의 속삭임에 조응하는 일이기에... 상처투성이 내 몸과 마음은 그 과정에서 치유가 된다. 분명히 효과가 있다. 어차피 그런 목적으로 떠난 길이었다.  


가미코지에서 계곡을 따라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갓파바시(河童橋), 묘진칸(明神館), 도쿠사와(德沢) 요코오(橫尾)를 거쳐 
야리사와(槍沢)롯지 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계곡길이다. 울창한 숲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눈 쌓인 연봉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일반 관광객들은 대개 갓파바시나 묘진칸까지가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북알프스 관광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이 설악동에 가서 권금성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타거나 좀 더 결심을 해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비선대까지 올라 가서 계곡물에 발담그거나 조금 더 용기를 내 울산바위까지 올라가는 것처럼말이다. 



행동식은 모두 한살림물품으로만 가지고 갔다. 산에 갈 때마다 스니커즈같은 수입초콜릿 같은 걸 먹으면서 입안이 개운치 않았는데 한살림 건강 행독식은 참 좋았다. 화성한과의 약과와 땅콩캬라멜, 그리고 우리쌀 채소건빵.


묘진을 지난 뒤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모처럼 하산중인 팀 하나를 만났는데, 대학산악부로 보이는 세 명의 젊은이들, 배낭에 피켈을 달고 있었고 옷차림이나 행색이 격전을 치른 것처럼 보였다. '피켈이 필요한가?' 걱정이 됐다. 

오전 11시 야리사와 롯지를 떠나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흙길과 눈길이 뒤섞인 길 시작되더니  天狗原부터는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규모의 거대한 눈사면이다. 거대하게 뚫린 구멍 아래로는 삼킬듯이 산정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계곡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긴장이 됐다. 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이가 한 사람 있길래 길이 어떤가 물어보았다. '계속 눈이 쌓여있으니까 주의해야 한다' 며 여태 오버트라우저도 꺼내입지 않고, 또 아이젠도 없이 날나리같이 걸어올라가고 있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그래도 조금 더 그 상태로 그냥 걸어올라갔다.


더 이상 길도 없고 눈 사면 위로 나란히 꽂혀 있는 1m 남짓의 대나무깃대만이 가야 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눈이 쌓여있었도 기온이 낮은 것은 아니라서 처음에는 아이젠도 착용하지 않고 눈을 찍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2600미터쯤부터는 비바람에 시야도 흐려지고 거대한 자연 속에 나 혼자 그 불투명한 길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바지도 겨울바지로 갈아입고, 오버트라우저를 꺼내 덧 입은 뒤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고 카메라도 배낭 안에 넣고 행동식으로 기력도 보충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었다고나 할까. 고난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면이 있다면 대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르고 올라도 산장이 보이지 않았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으면 이미 능선에 올라도 벌써 올랐을 시간인데도 그랬다. 스케일이 다르다는 게 실감됐다. 

이제 방향 분간도 지형 판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대나무 표지에만 의지에 오를 뿐이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는 아무리 길어도 너댓 시간이면 능선에 도달하는데...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섯시간을 꼬박 걸어올라간 끝에 야리산장을 만났다. 

시계(視界)가 불과 10여 미터밖에 안돼 얼마나 더 가야할지 가늠할 수 없었고 이미 오후 4시가 다 돼 가고 있어 초조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눈 앞에 산장이 나타났다. 지도에는 중간에 삿쇼산장(殺生山荘)_이 있다고 했는데 안개때문에 보지 못했다. 눈 때문에 야리산장으로 직등하는 길이 생긴모양이다. 


산장의 외양은 우리나라 지리산이나 설악산 산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젖은 옷과 장비를 말릴 수 있는 건조실이나 잘 관리되고 있는 침실과 침구, 자연발효식 화장실 등에서는 일본사람들 특유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저녁과 아침을 주는, 1박2식에(9천엔), 다음날 도시락까지 포함하면 1만엔.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스트레칭을하고 식당에 내려가 밥을 먹고 캔맥주를 마시고 8시경 잠이 들었다. 

밤새 버스를 타고와 온종일 걸어 해발 3천1백미터지점에 와 눈비가 몰아치는 광경을 보면서 잠든 것이다. 나를 덮친 슬픔과 고난도 어쩌면 비현실적인 꿈처럼 그런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산 아래의 일들이 가물가물 현실감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터리 때문에 꺼두었던 전화를 켜 아내와 딸들과 통화를 했다. 


가고시마에서 왔다는 67살 동갑내기 친구들과 나, 산장에 묵은 손님은 네 명이 전부였다.  
가운데 서 있는 이가 코기라는 산악인이고 이 팀의 리더였다. 일본산악연맹과 관련이 있다고 하고, 전국에 안 가 본 산이 없다고 했다. 

예순일곱살에 나 역시 또 이 산을 오를 수 있을까. 그런 정신과 몸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겠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에서 혼자 잤다. 매트리스와 침구도 깨끗했다. 매트리스는 땀을 흡수하면 열이 나는 발열시트가 들어있다고 씌여있었다.

다음 날 가고시마 노인들과 앞서거니뒤서거니 야리다케에 올랐다. 

산장에서 불과 2,30분만 올라가면 정상에 도달하지만... 비바람 때문에 산 아래 광경은 전혀 조망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들은 야리사와를 거쳐 도쿠사와에 가서 자고 놀다 귀가한다면서 내게 미나미다케 능선길을 가보겠냐? 고 묻고는 조심하라고(오 기오츠케테 구다사이) 인사를 하고는 휙 내려가버렸다. 지난 5월 중순 월간 마운틴 이영준기자가 한중일 대학생들과 함께 그 길을 갔다와 쓴 기사에... 곳곳에 눈이 있어 애를 먹었지만 뭐 그리 심각하게 묘사해놓은 부분이 없었기에... 혼자였지만 가볼 수 있을 것 같아 아침 8시30분경, 야리산장을 떠나 그 길을 갔다. 지난 저녁에 주문해둔 도시락은 주먹밥 한 덩이와 패트병에에 든 오차가 전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나미다케(南岳)까지 가지 못한 채... 오후 3시쯤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바람이 거센데다 방향구분이 어려웠다.  

능선에 쌓인 눈때문에, 등산로 표지가 중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이라면 표지기나 표시판, 쇠줄 같은 게 곳곳에 박혀있었겠지만, 

일본은 달랐다. 바위에 간혹 흰페인트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경우가 있지만, 이것을 한 번 놓친 뒤로는, 사방에 가득찬 가스(안개) 때문에 방향 구분도 어렵고 등산로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등산로이겠거니 짐작되는 암릉을 한 시간 가량 너덜지대를 오르내리며 전진했지만 그 뒤로는 페인트 표시도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비바람이 조금 더 거세졌다. 이 산에 산다는 뇌조가 무슨 몽환적인 그림처럼 꾹꾹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스쳐갔다. 

방수 재킷을 뒤집어 쓰고 주먹밥과 오차를 마시며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자칫하면 이국의 산록에서 조난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히 능선 정상으로 되돌아온 뒤 야리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산장으로 돌아오니 산장 직원은 길을 못 찾았냐? 고 예사롭게 묻는다. 식당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몸을 덮히고, 오후 4시부터 하산하기 시작했다. 산장 직원은 시간이 늦었으니 바로 밑에 있는 야리사와 산장에 연락을 해둘 테니 거기 가서 자라고 했다. 

온 종일 비바람속을 혼자 걷다보니 호젓하고 좋았지만, 정도가 조금 심했다. 한국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원시적인 공포가 있었다.  

저녁 6시에 야리사와 롯지에 도착해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고 말해주고 그곳에서 잘까 하다가 빙하 녹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너무 시끄럽기도 했고 좁은 협곡에 자리잡은 산장이 갑갑하게 여기지기도 해 한 시간 더 걸어내려가 요코오 산장에 가서 지기로 했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한 시간 남짓 더 걸어내려갔다. 이제 산행은 다 끝났다. 

요코오 산장은 북알프스에서 오호다카와 야리가다케 갈림길에 있는 곳이다. 빙벽 같은 일본 소설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곳이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듯 깨끗하고 시설도 훌륭했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무엇보다 여기부터는 더운 물에 목욕도 할 수 있었다. 목욕탕도 훌륭했다. 다만, 산중에서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비누와 샴푸와 치약은 못쓰게 했다. 

예약도 하지 않고 늦게 도착했는데도 식당에는 다행히 밥이 남아있었다. 목기로 된 이중 밥통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양껏 밥을 떠먹게 했고, 뜨거운 미소된장국과 생선구이와 절임 야채 몇 가지, 달걀말이. 목욕도 했겠다.맥주도 한 병 시켜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여자와 함께 온 서양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하며... 자신은 터키사람이라고..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고구려가 중국과 대항할 때 투르크 족도 서쪽에서 그런 인연으로 연대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얼핏 그런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지만 긴가민가 했는데 터키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에 대해 그런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내 기억 속에는  한국과 터키는 터키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과 2002년 월드컵에 뜻밖에도 한국과 터키가 4강에 올랐던 점 정도말고는 별 배경지식이 남아있지 않았다. 

요코 산장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은... 등산이랄 게 없었다. 

느릿느릿 가미코지를 향해 내려오며 일반 관광객들처럼 기념품점을 구경하고 가미코지 안내관을 관람하고 ...도쿄행 버스를 기다리며 온천욕을 하고 밥을 먹은 일정도. 언젠가 초가을 다시 찾아와 야영을 하며 야리가다케 오호다카를 잇을 능선 종주를 해보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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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주고 받는 말만 들으면 내일이나 모레 바로 전쟁이 터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과연 진정으로 저들은 전쟁을 원하는가? 왜 원하는가? 누구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인가.

남북간에 전면전이 진행되면 승패와 무관하게 5백만 명이 죽는다고도 하고 3백만 명이 죽는다고 한다.
터질듯이 조밀하게 밀집된 남북의 군사력,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삼는 미국의 군사력을 감안하면
정말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겠다. 오래 끌다 누군가가 승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죽거나 다치고 직장이 문을 닫고
도로와 철도가 끊기고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굶주림이 만연할 그 상황에서 누가 이긴들 그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그런데도 조중동과 일부 호전세력들이 정부와 함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절대로 안된다. 어떤 명분, 어떤 이유로도 전쟁은 안된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청와대에 앉은 저들에게만 있느 게 아니고, 나에게, 내 이웃들에게 우리 새끼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에 안된다. 우리는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항의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전쟁을 반대한다. 이념 따위는 어때도 상관없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식의 사탕발림, 악마의 유혹도 다 필요없다. 지금 이대로 이렇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식구들과 밥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이 일상을, 이 소박하고도 삶의 모든 것인 이 평화를
누구의 어떤 협박과 꾀임에도 양보할 수 없다.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에 반대한다. 전쟁을 선동하는 자들에게 저항한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다음 주 6월2일 선거때
전쟁을 선호하는 세력들에게 반대하기 위해 투표 할 것이다.  

친구들과 선후배, 이웃들에게도 함께 그렇게 하자고 호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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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민들레는 어디서나 피어난다.

홀씨로 날리다 뿌리 닿은 곳이

하필이면 옹색한 돌틈이라고

푸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피어날 뿐이다. 푸른 하늘을 향해

길게 꽃대를 올린 채 노랗게 피어 흔들리면서

씨앗을 준비할 뿐이다.

악착같이 뿌리를 뻗어 축대를 움켜쥔 채

낮과 밤 모든 흔들림과 호흡을

하나의 점으로 모아 자기를 복제하고 진화시켜

씨앗을 날려 보내려 한숨을 몰아쉬고 있다.

 

지난 일요일 장모님 모시고 길상사에 갔다.
모진 겨울 끝에 잠시 화사한 봄날이 왔다. 동네 자하수퍼 앞 벚꽃이 눈부시다.
세검정 산등성이가 등불이라도 밝힌 것처럼 꽃사태.
겨우내 죽은 듯 시들어 있던 그 어디에 저런 화사한 빛깔들이 웅크리고 있었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겨울동안 어머니가 집에 와 계실 때. 걸음도 겨우 걸으시며 힘겨워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봄을 기다렸다. 날이 풀리고 어머니 건강도 좋아지면
모시고 길상사 나들이를 가야지 생각했는데... 이제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길상사에 매달린 울긋불긋 연등보다 그 아래 드리운 꼭 그만큼의 그늘에 눈길이 머물렀다.
우리 삶에 빛나는 무엇이 있었다면, 꽃다운 화양연화의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침묵과 희생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꼭 제 크기만큼의 그늘을 땅에 드리우고 꽃처럼 화사하게 바람에 흔들리더
실상사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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