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모의 자식이고 대개는 자식의 부모가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는 주인공 옥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의 아내가 흐느끼며  

‘아이들 원하는 걸 나는 해줄 수가 없어요’ 하던 말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옥스발은, 전립선암이 손 쓸 수 없게 번져 죽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멘토인 여자 무당을 찾아가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며 괴로워한다. 

무당은 옥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미 죽음의 징조에 휩싸여 해줄 게 없으니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네가 아니라 온 우주가 키우는 것을 알잖니... ’ 

옥스발은 말한다. 

‘온 우주가 월세를 내주지는 않아’ 

옥스발 역시 프랑코총통의 압제 때문에 멕시코로 도망 갔다가 2주만에 폐렴으로 죽었다는 아버지를...  당연히,  얼굴도 못 보고 자랐다. 그런 아버지를 연민하고, 한편으로는 아버지 부재상태에서 자라야했던 자신을 연민하고, 결국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서야 할 고작 다섯 살인 아들과 열두어 살 딸 아이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식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든 것을 해주려는 게 대개의 부모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부모와 완전히 단절될 때 자식은 온전히 제 힘으로 세상에 선다. 과보호가 자식을 망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제 힘으로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위해 어떤 동물이 최선을 다해 능력을 기르고 땀을 쏟겠는가.  

어떤 술자리에선가 ... 자식을 위한 최선의 선물은 결핍감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고 ...누구가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더라도... 자식을 위해 일부러 불행한 가정환경을 조성하거나, 미리 사라져주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부모는 애면글면하면서 간도 쓸게도 다 바쳐가며 자식을 위해 살다죽게 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인간이 정한 게 아니라 '온우주'가 그렇게 해놓은 것일 게다.

영화에는 돈이 파괴한 우울한 인간사가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떼죽음을 당해 해변에 주검으로 밀려온 고레떼처럼... 세네갈에서 건너와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 맞으면서 언제 강제추방 당할지 모르는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지하실에 폐기물처럼 널부러져 자면서 열 몇 시간씩 고된 노동을 감당하다 결국 가스중독으로 비참하게 떼죽음을 당하는 중국인 노동자들.

요근래 시네큐브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럽은 대개 잿빛 하늘 아래 암담한 풍경이 이어진다. 얼마전에 본 '웰컴'도 그랬고... 바르셀로나의 빈민가가 주 무대인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다양한 장치와 발언들이 모두,  "나는 어떤 부모의 자식이고 또 자식에게 어떤 부모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환호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아이가 아플 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본 사람들에게는 더욱 감정이입이 돼 무시로 눈물이 주루륵 흐르게 하는 장면이 많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또 대개는 누군가를 자식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부모들도 나처럼 자식에게 할 수 있는한 모든 것을 다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로운 무당이 하던 말처럼,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온 우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으랴.

밥상이 무너진 황량한 풍경... 

감독이 의도한 것이겠지만, 영화속에는 쓸쓸하고 황량한 밥상이 몇 차례 나온다. 아내가 없는 부엌에서,  해산물과 야채를 상상하는 아이들에게 그것처럼 여기라는 듯 말하며 쏟아붓던 시리얼에 설탕을 듬뿍듬뿍 뿌려대던 메마른 밥상.  그리고... 다시 ‘제대로’ 가족을 꾸려 살아보자고 재활의 의욕을 보이며 돌아온 아내가 차려주었다는 (영화에서는 냄비만 보이고 음식은 보여주지않았다) ‘맛없는 스파게티’.

다들 ‘먹고살자고’ 이 눈물세상을 견디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저 세네갈 이주민들과 지하창고에서 떼로 잠을 자다 죽는 중국노동자들은 가족들과 단란한 밥상에 둘러앉을 수 있을까. 자본의 탐욕이 마을의 울타리와 가족을 무너뜨린 이 세상에서 그런 세계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의문에 대한 비극적인 전망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희망하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누구나 그랬듯이 그냥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죽은 아비가 나타나 저 세계로 인도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대장정1권~5권 /웨이웨이 글 선야오이 그림 송춘남 옮김 보리출판사

지난 여름...참 끔찍했다. 멈추지 않고 내리던 비...
그런 8월에, 윤구병 선생 인터뷰 하러갔다가
엉겁결에 받아온 다섯 권까지 소설 [대장정]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근심하면서 사나흘남짓 잠자기 전 침대맡에서 읽었다.
하룻밤을 새워 단숨에 다섯 권을 읽었다는 분들도 있었다.
워낙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문장도 번역도 훌륭했지만,

한두 페이지 넘기면 끝없이 나오는 삽화들이
소설 속의 장면들과 인물들의 심경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주어
대장정을 하고 있는 주은래나 주덕 같은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환호하면서 순식간에 읽히는 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연히...  
대장정은, 이북의 '불멸의 역사'시리즈들처럼 집권세력인 공산당이 자신들의 처지를 옹호하느라 쓴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는 조금 삐딱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슬몃 고개를 쳐든다.
말하자면 '관제'소설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수준이 있다.


우리 또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대학 1,2학년때... 이영희선생의 [우상과 이성]이나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책들에서 중국혁명을 만나고 에드가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 등을 읽으며 열광한 경험이 있다.
인간이 ... 이성의 힘으로 이렇게까지 대단해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 순정한 열정으로 고난받은 민중을 위해 목숨마저도 흔쾌히 던지며 고난을 감수하는 ... 그 인격들을 대하며 가슴이 설렜다.

실제로도... 그 무렵 선배와 동료들 가운데에도... 비록 총을 들고 대장정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비장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안위와 기득권을  모두 내던지고...
감옥이나 현장으로 가는 이들이 적잖았기에
그들의 대장정이 전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는... 그 혁명에도 그늘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아 사람아] 같은 책들이 꽤 여러권 나왔다. 동구권이 몰락하던 무렵,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분노로 질주하던
20대들이 87년 6월이 지난 뒤... 서른 즈음이 돼가고... 비로소 세상도,  자신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 이제 막 1990년대가 시작되던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을까...
때마침 1989년에는 천안문사태도 터졌던 것 같다.  

모택동이 얼마나 비정하게 권력을 추구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혁명에 참여했던 자신의 부모님들이 겪은 고난을 통해 묘사한 [대륙의 딸/장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무려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도
그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정말 그랬을까?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그러나 아무튼... [대장정]에 묘사된 마오쩌뚱은 무슨 완전한 인격의 화신이다. 그런 점은 재미가 없다. 
반면, [대륙의 딸]에서는...혁명의 동지인 자신의 부모님들께 죽음같은 고난을 강요한 모택동은 악의 화신이다. 이 점도 아쉽다.

모택동이 이끄는 인민혁명군에 열광해 혁명에 합류한 대열이 결국 중국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은데... 과연 악의 화신이기만 한 인간이 그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공포로 억압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일만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지도자가 되는 일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대장정에도 묘사돼 있지만, 모택동의 처는 대장정 중에 아이를 셋이나 낳아 마을에 버려두고 가야하는 ... 눈물겨운 일들도 겪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모택동이 지도력을 획득하는 것은  전투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입증하고 이를 배경으로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작가들은 인간에게 어떤 전형성을 부여하고 싶어한다. 선악이 분명할 때 극적인 대립구도가 분명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없거나... 갈등을 대충하는 전형적인 인물을 묘사한 소설이나... 인물평을 하는 이들의 말에는 ... 감동이 없다. 누구라서 고뇌와 갈등이 없겠는가... 하물며 설치류 동물에 비유되는 지금의 대통령마저도 ...

아무튼, 소설속에 나오는 주은래나 주덕, 팽덕회, 등소평 등...
생각해보니...얼마전까지 중국의 최고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무장투쟁과 대장정을 거친 이들 아닌가. 우리 사회의 세도가들이 하나같이 일제시대 친일파들의 자손인 점을 떠올리면... 이 건 참... 참담하다...  교과서를 뜯어고쳐가면서 일제 때문에 우리나라가 근대화 됐다는 식으로 씨부리는 이들이 왜 나왔겠는가...

현실이 고되거나 사람들과 비루한 일들로 말싸움이나 해대고 있는 스스로를 내려다보는 순간이면 ...늘, 10년 여 전에  한번 가보았던 안나푸르나나 히말라야를 꿈꾸곤 했는데, 책을 읽고는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다. 쓰촨이나 귀주 운남성... 인민해방군이 고난의 대장정을 했다는 그 험준한 산세와 협곡이 있다는 그곳들을 느릿느릿 오랫동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 언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당분간은 점심시간에 남산이나 자주 걸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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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야기》는 2011년 여름, ‘원자력’과 ‘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 악몽이 잊혀지지도 않았는데, 일본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해 몹시 뒤숭숭합니다. 여전히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고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언론보도는 잠잠하고, 불안감은 수면 아래서 나날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이, 더 빨리 일하라고 채근은 사방에 난무합니다. 지리산생태영성학교 이병철 선생은 “세상을 망친 재난의 근원에 ‘무엇인가 해 내겠다’는 강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재난 연속의 시대를 돌아보고 숨을 돌리자고, 이번 호 특집은 ‘원자력, 쉼표가 필요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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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호 맛보기

이철수․새김 오늘도 굉장히 덥구나
식담 여름철 부엌 어미에게 여백을 주는 냉국과 비빔밥 글 문성희
제철살림 농부는 못자리를 살림꾼은 장 가르기를
- 여름 ․ 간장 된장 가르기 글 장영란
땅땅거리며 살다 살기는 좀 재미있게 살아!
- 경북 의성군 쌍호리 농부 김정상 씨 글 김성희
이 사람의 살림살이 온 천지가 먹을거리,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 효소와 장아찌로 자투리 음식 살려내는 김갑남 씨 글 우미숙
길을 묻다·길을 가다 미움보다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 968번째 수요시위에서 만난 길원옥 할머니 글 김선미

특집● 원자력

빛그림 이야기 흔들리는 대지, 불안한 미래 사진 조성수
고삐 풀린 욕망이 예고한 파국, 후쿠시마 글 황도근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불편한 일상 - 일본에서 보는 후쿠시마 사고 글 박희숙
방사능 물질, 무해한 노출 기준은 없다 글 임종한

특집 ●● 쉼표가 필요해

여는 글 섣불리 뭘 하겠다는 욕심이 외려 세상 망친다 글 이병철
종교와 쉼 하느님도 숨을 돌리셨대요 글 박총
자연 속 쉼● 차도 전기도 없는 히말라야를 걷노라면 글 김홍성
자연 속 쉼●● 억지로 일하지 않으면 일과 쉼이 따로 없네 글 안혜령
몸 쉼 단식,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 최민희
나의 쉼 나에게 쉼표가 되는 … 글 강형국 외
소복이 지금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림 소복이

살림, 살림

살림이 만난 고집쟁이 동네만 고집하는 동네 청년
- 희망동네 유호근 사무국장 글 김세진
시골살림 길잡이 ②먹고살기 내 앞가림 잘하면 세상평화 절로 온다 글 전희식
살림이 눈여겨본 이 물건 짜야만 소금? 아니, 소금은 달다 글 김준
교육살림 그가 선생이 되면 글 남호섭
아이살림 태어나고, 낳는 일에서부터 행복해지자 글 신순화
몸살림 자기를 용서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글 권복기
말글살림 ③ 한두 방울 톡 비꽃 떨어지면 비설거지해야
- 날씨에 대한 섬세한 우리말 글 박남일
살림이 들은 음악 전쟁의 고통이 피어올린 두 장의 음반
- 헨릭 고레츠키 교향곡 제3번 <슬픔의 노래>
- 펭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 글 최시우
살림의 책 목축시대 이후 인류는 문명의 노예가 되었다
- 톰 하트만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글 최성각
《살림이야기》가 밑줄 그은 책 《울기엔 좀 애매한》외
새로 나온 책 《돼지가 있는 교실》외
살림의 현장 ●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 평화의 섬을 전쟁터로 글 이기철
살림의 현장 ●● 파키스탄 - 농민들께 염소를 마을에는 상수도를
살림의 현장 ●●● 잠비아 은테베학교 아이들의 꿈은 다섯 가지뿐입니다
살림의 눈 이들 말고 그 누가 글.사진 김성희
《살림이야기》함께 읽기 ‘깨 털릴까’ 두려웠던 ‘호모쿵푸스’와의 대면

《살림이야기》는
- 한살림에서 말하는 살림의 지혜와 따뜻한 이야기가 샘솟는 생활 문화지 입니다.
- 1년에 4회 발간되는 계간지로서 이번 13호는 2011년 "여름 호”입니다.
- 2011년 “여름”호에서는 원전사고로 인한 뒤숭숭한 시대, ‘원자도 쉬게 하고 우리도 쉬자’는 의미로 원자력과 쉼을 특집으로 다줬습니다.
- 판매 수익금은 한살림 농업기금 등 공익적 목적으로 이용됩니다.

《살림이야기》가 2011년 여름 호부터 가격을 인상합니다.

제작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가격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비용이 아깝지 않도록 알찬 책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정기구독을 하고 계신 분들은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 정기구독,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1년 4권×6,500원 = 26,000원→23,000원 (10%↓+수첩 )
2년 8권×6,500원 = 52,000원→44,000원 (15%↓+수첩 +《살림이야기》 한 호 연장)
3년 12권×6,500원 = 78,000원→62,000원 (20%↓+수첩 +《살림이야기》 두 호 연장)

입금 계좌 : 우리은행 1005-701-727851 예금주 : 윤형근 (도서출판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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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 추위가 오락가락하지만 계곡의 얼음은 계속 녹아내리고 있다.
경칩이라고 하지만 개구리, 가재가 산다는 이 작은 개울에 아직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터운 얼음장에 돌이킬 수 없게 치명적인 균열을 내며 계절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물가의 나무들도 물속에서도 쉼없이 자란다.  


딸들에게 백사실 산책을 가겠냐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 모시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부모를 따라와 라면을 먹는 꼬마들. 아이들 어릴 때 안고, 업고 북한산 관악산을 많이 넘어다녔다. 어린 딸들은 조금이라도 더 밀착하려고 착~ 들러붙곤 했는데... 이제는 거 참...  




현통사 앞 계곡의 얼음은 이제 완전히 녹았다.
눈 녹은 텃밭에는 벌써 퇴비를 준비해 놓았다.
갈아엎어두었다가 4월경에는 씨앗이나 모종들을 심겠지.


잠시 주춤거리기도 하지만 봄은 틀림없이 오고 있다.
겨우내 계곡 얼음에 갇혀 있었을 지난 가을 낙엽도 결빙에서 풀려나고

태풍 곤파스로 쓰러졌던 계곡가 키 큰 참나무도 저렇게... 얼렸다 풀렸다 하면서 분해 돼
흙으로 물로... 그리고 바람으로 유기물이 되어 뒤섞이겠지...

서남쪽으로 향해 있는 현통사 계곡의 얼음은 이제 거의 다 녹았다.
양지바른 쪽에는 제법 풀들이 얼굴을 내밀고...
곤지암 살 때... 이즈음이면 논두렁, 밭둑에 노란 안개처럼 꽃다지나 솜양지꽃이 피어나곤 했다.

겨울동안 삭막한 풍경과 우울한 기분에 갇혀 ...
이 시골을 떠나 어디든 가야지 생각하다.
솟아 오르는 새싹들과 대지에 들어차는 생명의 기운에 매년 감격해하면서...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주저앉곤 했었다.


백사실 계곡의 이 양버즘나무가 어떻게 이 산중턱까지 올라왔을까... 늘 궁금했는데...
나무 아래... 어미 나무가 필사적으로 멀리 던지듯이 떨어뜨렸을 그 씨앗이 '그걸 몰랐단 말이냐?' 하듯이 되똑하게 파란 풀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숙성한 씨앗은 스스로의 몸을 뽀개고... 솜털에 싸인 작은 씨앗은 여린 바람에도 가볍게 몸을 날려...
어디로든 갈 것이다. 부모나 고향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새날에 대한 희망에만 가슴 설레 하면서...

'빗방울전주곡' 같은 음악이라도 들여올 것 같은... 이 작은 개울에...
두터운 얼음이 녹아내리고 물 속에도 생명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밭둑의 눈은 이미다 다 녹았다. 누군가 씨앗을 뿌리고 또 한 시절을 가꾸겠지.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이 희망이겠지... 역사 이래도 쉼없이...  이어온 ...

입춘 지나자 거짓말처럼 날이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현통사 계곡물은 두껍게 얼어붙어있다.  귀 기울이면 얼음장 아래 힘차게
흘러가는 냇물소리가 들린다.

지난 겨울 참 알차게도 추웠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한강물이 꽁꽁 얼어붙고 수은주가 영하 15도로  곤두박질치던 게 다반사였는데... 어려서 그랬나. 그것이 가혹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입성도 부실한 채 스웨터 바람으로 동네 아이들이 빼곡하게 몰려다니면서  치기장난이나 축구를 하면서
겨울을 났다.  

백사실은 시내에서 가깝지만 오랜 세월 살아남은 큰 나무들이 많다.
소나무들은 설악산 같은 데서나 만날 법한 굵은 것들이 제법 있다. 이 계곡이 깊게 느껴지는 것은
이 큰 나무들 덕인데... 그 사이에 제법 큰 '양버즘 나무(플라타너스)' 가 한 그루 있다.


얼마전까지 서울시내 가로수가 대부분 이 외래 수종이었으니...산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다.
이 나무가 어떻게 이 북악산 중턱까지 와서 이리도 우람하게 자랐을까...
연원이 무엇이든... 그래도 장하게 자라 우뚝 하늘로 솟구쳐 있다.

백사실 뒷골 텃밭 고랑의  잔설. 풍수를 하는 최창조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선가...
솟아있는 것은 무엇이나... 논두렁마저도 '산'으로 친다는 말이 생각났다.
남쪽으로 면한 이랑의 한 쪽에는 이미 눈들이 다 녹았고, 그 뒤편 그늘에는 눈들이 남아있다.
며칠 뒤에 오면 다 녹아 있겠지...

시리고...시린 겨울이 끝나고... 푸른 봄이 오기를
올해는 더더욱 간절하게 기다란다.
입춘무렵.



둘 다 최수연씨가 직접 만들었다.

나무는 제 성질 그대로 부드럽고,
따뜻하고,
유연하다.
금속이나 자기에 비해
소박하고 친근하기도 하다.

참나무 함지박은, 나무 안에 벌레먹고 썩었던 흔적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문양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들도 결국... 우리 내면에 문양을 만들고 그것들이 모여
우리를 우리다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호두나무 접시는, 전에 집에 올 때 선물로 준 것이다. 참나무 함지박에 비해 조금 작고
조직은 조금 더 치밀하다. 더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기름을 두어 번 먹였기 때문에 색이 더 짙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곤지암 삼합리, 우리  살던 집에 이사온 사진찍는 최수연씨가
사진도 사진이지만, 목공 솜씨가 여염집 수준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최수연표 나무그릇 두 개...
우리집에 오래 아껴쓸 보물이
자주 지나다녀 고향처럼 여겨지는 함양 버스터미널
인근에 있는 찜질방서 쪽잠을 자고... 9시반 백무동 관리소를 통과했다.
산에 들어서니 두통은 가셨다.


하동바위길 참샘...찬물을 긷고 다시 길을 나섰다 .
장터목에 도달할 때까지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겨울풍경이 깊어졌다 .





장터목에서 천왕까지...  눈도 많았고, 눈보라가 거셌다.






세석산장에서 잠을 잤다. 일출을 보러 촛대봉에 올라갈까 하다가 말았다. 새벽에 대피소 창밖으로 별이 초롱했다. 일출이 좋을 것 같았다. 산장 위로 난 능선길에 노루발자국이 올 겨울 이미지가 되었다.




산장을 나서 벽소령을 향해 걷다가... 떠오른 해가 맞은편 영신봉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을 만났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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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참 힘겨웠다.
견디기 힘들만큼 그랬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일들이 계속되었다.
내처 걷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이 위안을 주랴.

상명대 삼거리 홍지문에서 탕춘대 성을 따라 인왕산을 오른다... 인왕산을 다 걷고











무악재로 내려선 뒤, 다시 안산을 넘어
내처 걷다보면



안산 능선길은 연세대학교정으로 잦아든다. 1981년 연대 백일장에 왔던 기억이 난다. 시절이 그랬기 때문이겠지... 백일장 출품은 하지도 않고, 연대 탈반인지 농악대인지... 대학생들에 이끌려 만추의 숲속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그만 취해버렸던 청송대.

1990년 범민족대회때 함성이 뜨겁던 그 교정은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로 예전의 정취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월은 가고 ... 추억은 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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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파동은 배추만의 문제로 끝날까?  살림이야기 2010년 겨울호 특집은 "배추, 그대 무사한가" 입니다.
배추파동은 식량대란의 전주곡이라는 천규석 선생의 글부터, 중국배추 수입에 대한 자세한 속사정,
배추는 어떻게 배추가 되었는지, 순무와 유채가 만나 배추가 되기까지의 과정, 유기농 배추농사를 짓는 박남완 농부의 글.... 등 배추를 키워드로... 기후변화, 식량문제 등을 깊이 따라 읽을 수 있습니다.

광고가 전혀없는 유기농 계간지,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생명세상"을 꿈꾸는 살림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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