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마르면 물을 마신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이것이 진보의 논리입니까 보수의 논리입니까. 기독교나 불교만의 논리입니까, 과거에는 맞고 현대에는 틀린 논리입니까. 이렇게 사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진리를 놓고는 다툴 일이 없습니다.

 

생명은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물코처럼 세상만물이 이어져 함께 의지한 채 살아갑니다. 뭇 생명이 태양에 기대어 삽니다. 그런데 모두 공짜입니다. 우리가 언제 돈을 낸 적이 있습니까? 공기가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지만 이것도 거저 얻어먹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평화순례를 하면서) 5년 동안 얻어먹어서 압니다. 얻어먹으려면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나눠야 합니다. 그것이 우주의 존재법칙이고 진리입니다. 이 법에 따라야만 우리 살고 싶어 하는 삶, 평화롭고 행복하고 홀가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신기하고 불가사이한 일은 생명이 존재하는,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물위를 걷는 일, 내세나 과거를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종교인들이 그런 소릴 합니다. 이건 다 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둬서 뭘 합니까. 내세를 봐서 뭘 어쩐다는 겁니까. 내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지극히 고맙고 거룩하고 귀한 존재는 바로 너, 이웃, 자연입니다. 이들이 없이는 우리가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을 그 가치에 걸맞게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네가 없으면 좋겠어.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보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인데, 이렇게 되면 싸움밖에 날 게 없습니다. 그러나 “너 없이는 못살아, 네게 의지해야 내가 살 수 있어” 이건 생명의 원리가 그렇잖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도저히 이기적인 입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상대와 협력하고 상대를 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명백한 진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진리의 눈으로, 깨달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권력이나 돈, 재산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자연과, 이웃과 상대와 더 잘 조화를 이루는 삶. 그것이 대안이고 희망입니다. 생명의 원리, 이것이 법입니다. 이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에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야기만 무성하고 공중에 떠있었는데 요 며칠 전부터 이야기가 현장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사회적 대안을 만들자는 취지로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마을을 일구자는 것인데, 마을에는 100명 정도 다니는 초등학교와 50명 규모의 중등학교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이웃이 어울려 살며 품앗이를 하는 농촌사회의 대안마을로 산내면을 만들려고 꿈꾸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팔정도(八正道)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 사실에 입각해 사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내 생각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어제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이 오늘은 내게 깍듯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늘  예쁘게 해도 어제 상한 감정 때문에 이것을 곱게 보지 못합니다. 이미 흘러간 어제의 감옥에 갇혀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고자 노력하면 우리는 과거의 집착과 관념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만약 나에게 두개의 사랑의 길이 있었다면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말할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뒤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반드시 하나를 멈춰야 다음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시에 두 가지를 행할 수 없다는 데 오히려 구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제의 생각에 갇혀 오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그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곧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보는 것’이고 염불이고 화두입니다. 상대방이 미운마음이 들더라도 그 순간 알아차리고 “관세음보살” 을 외며 관세음보살의 눈으로 상대를 보려고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되풀이 하면 습이 됩니다.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라고 했습니다. 자꾸 되풀이 하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이 생기고 꾸준히 반복하면 절로절로 되는 경지가 됩니다. 이것이 부처의 경지고 도인의 경지입니다. 먼 훗날에 깨달아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미운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즉각 해탈” 할 수 있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에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제 마음대로 쓸 수 없다면, 그것의 주인을 당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면 내 돈이 아닌 것이죠.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고 있습니까? 미워하는 마음이 뜻 한 대로 생깁니까? 나도 모르게 흘러들고 거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만약 내 마음을 의도대로 쓰게 되면 그것이 곧 깨달은 것입니다. 미워하더라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만 하고 또 그칠 수 있다면 그것이 깨달은 경지입니다.

 

한살림은 생명평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단체들 가운데 크고 영향력도 많은 곳 입니다. 한살림이 주축이 되어 생명평화를 추구하는 NGO들과 종교계가 뜻을 모아서 올 12월 대선에 생명평화의 가치가 반영된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이 대선공약이 되게 노력했으면 합니다. 한살림이 나서주세요.

 

간디에 관한 일화입니다. 집에서 키우던 소가 늙고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소를 안락사 시키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생명을 죽일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가족들은 그렇다면 당신이 그 소를 책임지고 돌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소를 돌보자니 돌볼 수도 없거니와 그것이 소를 위하는 길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합니다. 이럴 때는 죽이는 것도 사랑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죽이는 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신을 중심에 두는 종교들은 인간의 판단과 능력을 너무 불신합니다. 그 때문에 죽이는 게 낫겠다는 인간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에 둔 종교입니다.

 

2천6백 년 전에 부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신과 인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대들도 자유를 얻고 법을 전하기 위해 떠나라”

 

2천6백 년 전 그 당시에는 신이 인간의 모든 것이 좌우한다는 것이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구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신을 믿건 안 믿건, 자기가 행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상식이지만 2천6백 년 전에는 파격이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일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모시는 일입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관계를 푸는 장입니다. 그걸 잘 하면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갈등하고 반목하면서 제사를 거창하게 지낸다고 부모님이 편안해지시겠습니까. 싸울 수도 있습니다. 잘 싸워야 합니다. 갈등을 끝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생떽쥐베리는 소설에서 사막에 불시착한 인간이 원수같은 사람이도 곁에만 있어주면 좋겠다고 쓴 구절을 읽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안전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 하는 일이 많습니다. 실상을 보는 게 아니라 관념으로 보려고 합니다. 실상사 신도들 가운데 할머니들이 많으세요. 그 분들 가운데는 자식에 대한 원망이 꽉 차있는 분들이 많아요.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만 했습니까? 아까 생명의 원리는 사랑이 했습니다. 자기들이 사랑한 결과로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은 태어나준 것만으로 이미 자식의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자식을 원망하는 할머니들께, 그러면 그 자식이 없어졌으면 좋겠냐. 없어지면 보람이 있겠냐 되물어봅니다. 그러면 “에이 그런 건 아니지요.” 합니다. 자식도 관념으로 보고 실상을 보지 못하니까 그런 집착이 생기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 봐야 하는데 말입니다.

 

조계종이 요즘 시끄럽습니다. 종교도 규모가 커지면 재정이나 회계 같은 세속의 일이 당연히 생기는데, 이걸 인정하지 않고 일관되게 성스러운 부분만 있는 것처럼  소홀히 해오다보니까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불교계가 특히 이런데 취약 합니다. 또 종단권력을 사이에 두고 다툼이 있으니까 이렇게 밖으로 소음이 터져나오는 것인데, 재산관리든 조직운영이든 이것을 합리적인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체계를 만들고 투명하게 운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화쟁위원회는,  내가 종단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오던 일이라 외면할 수 없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도법스님은 5월 6일자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화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화쟁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사상가 원효스님의 사상이 바로 화쟁사상인데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비유할 수 있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전모를 모른 채 서로 자기가 아는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라고 우기며 싸운다. 누구는 코를 잡고 그것이 코끼리라 하고, 누구는 다리를 잡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원효스님은 장님들로 하여금 코끼리의 전모를 파악하게 하면 싸움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모를 다 보는 게 쉽지는 않으므로 전모를 아는 누군가가 코끼리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도록 하면 싸움이 멈출 것이라고 했다. 화쟁위원회의 역할도 그렇다. 자기가 보는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않고 그래서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도록 하면서 대화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화쟁위원회가 지금  쌍용자동차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22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는데 우리 사회가 해결을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 문제도 양측이 진영논리로만 문제를 바라봅니다. 보수와 자본가의 입장, 진보와 노동자의 입장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서로를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여기에 사람의 입장이 빠져있습니다. 서로를 굴복시키겠다는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관점,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우선 종교계가 나서려고 합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등 5대종단이 모여서 그렇게 하자는 의논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서울을 100일동안 순례하는 것입니다. 서울시청, 명동성당 등 서울에서 의미있는 100곳을 선정해 걸어서 찾아가는 겁니다.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하자고, 문재인도 부르고 박근혜도 부르고 안철수도 불러서 생각을 들어보는 겁니다. 국민들의 반응이 커지면 정부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민원탁회의를 구성해서 양 진영의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국민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 죽음의 행렬을 멈춰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한살림도 적극 나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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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15일, 도법스님께서 한살림연합 실무자교육에 오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겨들을 내용이라 여겨져 메모한 내용을 정리해둔다. 도법스님께서 이날 하신 말씀을 들으며... 오늘 내가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상만물에 의지한 일이인데, 나를 살아가게 하는 당신과 이웃을 귀한 존재답게 대접하고 있었가... 하는 생각, 또다시 비로소 떠올렸다. 스님께서는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관세음보살'을 외며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이것이 습이 되고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니, 나중에는 '절로절로' 그렇게 바라볼 줄 아는 힘이 생긴다고 하셨다. 

 

늘 스스로 감옥을 짓고 그 안에서 신음하며 사는 게 '습'인 내게, 유익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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