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 행렬에 뒤섞여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날들이 행복이었음을... 세월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추석 전날 수원 처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라와... 우리만의 방식으로 부모님을 추모하며 넷이서 명절 아침밥을 먹었다. 울적한 마음에, 설악산에 가 오래 걷자는 생각에 밤 9시30분 고속버스로 속초에 갔다. 명절날 저녁 고속버스도 하행선 고속도로도 텅텅 비었다. 평창휴게소도 을씨년스럽도록 휑했다. 폭우가 쏟아지더니 그새 겨울이 왔나 싶도록 기온도 낮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방향으로 곧장 200미터쯤 걸어가면 바다가 조망되는 '해수찜질방'이 있다. 작년에도 그곳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당연히 푹 잘 수 없었고 토막토막 자다깨다 하면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산 아래서 밥을 먹어두자는 생각에 찜질방 인근 식당에서 대구매운탕을 시켜 먹었다. 후춧가루 냄새와 조미료를 빼면 생선은 왜 넣었나 싶도록 아쉬운 조반이었다. 설악동 가는 7번버스는 찜질방 맞은편에 있다.



혼자 걸으니 자주 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긴 했다. 식당이나 설악동에서 괜히 어정거리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비선대에서 10시경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됐다. 석주길, 천화대 리지에 붙어있는 산악인들이 많았다. 


아이폰으로 직찍...

도중에 확인한 페이스북에 내 프로필사진을 보고 인삿말을 남긴 정왕룡형이...
학교다닐 때 꽤 준수했던 얼굴이 이렇게 삭았냐고 ...이런...ㅎㅎ

햇반이 같이 포장돼 있는 오뚜기소고기국밥,라면과 빵, 아침에 마시겠다는 생각에 작은 포도주스도 한통 찜질방 근처 편의점에서 사갔다. 마등령에서 12시쯤 빵을 먹고, 공룡능선이 끝나는 지점인 희운각3시쯤 라면을 끓어먹었다. 4시부터 소청봉을 향해 올라가 5시쯤 소청봉에 도착했다. 

희운각에서는 1993년 신혼여행때 아내와 대청봉 대피소(중청산장이 생기기 전)에 가 자겠다고 오르다 당귀차를 사 마신 일이 있다. 그 향기가 지금도 생생한데, 훗날 안나푸르나 산길의 롯지에서 때 낀 주전자로 데워 설탕을 듬뿍 넣어주던 밀크티도 정겹지만... 편의점 진열대에서 플라스틱통에 든 음료수를 사 마시는 일은 참 싫다.

희운각도 양폭산장도 수렴동 산장도 이제는 방부목으로 다시 지었다. 허름했지만 정취가 넘치던 옛 산장들이 안목 있는 작가들의 산수화 같았다면 되똑하게 다시 태어난 수입 방부목 산장들은 어쩐지 싸구려 공산품 같아 아쉽다.



희운각 산장 옆 헬기장은 공룡능선과 천화대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같다. 풍경을 보자고 올라갔더니 5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주머니가 혼자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풍경을 보다가 ... 올라오는 내게, '아, 멋져요.'  탄식을 하며 스스럼없이 말을 한다. 누군들 설악의 그 풍경 앞에서 그런 탄식이 나오지 않으랴...

소청봉에서 중고생, 초등학교 2학년 막내아들까지, 4남매가 있길래 대견해서 말을 걸었더니, 경기도 광주에서 왔다고... 고향사람 만난 것처럼반가워서 한참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은 절대로 산으로 따라나설 것 같지 않은 두 딸을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길을 떠났으니 당연히 산장 예약은 하지 못했다. 사가지고 간 팩소주 두 개를 마시고  산장 로비에서 9시경 사진 속에 나온 이들처럼 침낭속에 들어가 잤다. 피곤해 푹 자면 좋았을 텐데 역시나 한 시간 간격으로 잠이 깼다. 새벽에 산장 밖에 나가 불빛 휘황한 속초시내와 밤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별들이 초롱했고 언뜻 중청봉 뒤로 꼬리를 남기고 스러지는 유성.


이날 새벽 대청봉의 기온이 영상 1도까지 내려갔다. 주목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앉았다. 날이 맑아 일출도 깨끗했다.   


해가 떠올랐지만 보름달은 여전히 중청봉 뒤에 남아있다. 한 하늘에 해와 달이 설악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 떠 있었다. 임금들 뒤에 세워두는 병풍 속 일월도처럼...

사실은 이번 산행도 '자학'적으로 오래 길게... 걸을 작정이었다. 중청에서 12선녀탕까지 서북주능선을 다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청을 떠난지 1시간도 안 돼 왼쪽 무릎에 통증이 왔다. 인대가 끊어진 게 아닐까 싶도록 날카롭고 지속적인 통증 때문에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이미 서북주능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도리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바위길이 견뎌야 했다.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만 불길한 생각에 여간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간 무리한 산행을 많이 한 탓에 연골이 상한 건 아닐까. 이제 산행은 끝인가, 산에 못 다니는 나는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알파인스틱에 의지해 절뚝 거리며 걷고 있으니 산 꽤나 다녔다는 지나가는 이들이 너도나도 자기도 겪어본 일이며 뜸을 뜨거나 해서 자가 치료를 했다는 말들에 충고에 조언에 ... 그걸 듣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7킬로미터 남짓 걸어 한계령 휴게소로 내려가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오색으로 가 그린야드 호텔에서 온천욕을 했다. 가족들이 함께 온 이들을 보니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났다. 가끔은 그냥 쉬러 다니는 여행도 같이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동안 하도 야영장으로만 끌고 다녀서 아이들이 여행을 기피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경복궁역 앞에 있는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는 쓱 만져보더니 별일 아니라고, 소염제 먹고 사나흘 쉬면 괜찮아질 테니 당분간 운동을 삼가하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침 운동도 삼가하고 근신중이다.

'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성곽 걷기1 ( 창의문~ 혜화문)  (0) 2010.11.24
밤길  (0) 2010.10.18
2010년 가을... 괴산  (0) 2010.09.19
덕산기계곡 안 정선애인  (2) 2010.07.26
저녁등산-북한산 향로봉  (0) 2010.07.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