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6/11 다카마스 토요코인호텔~도쿠시마 1번 료젠지 앞 게스트하우스

운행거리 88.68km



오늘이 순례 마지막이 될까? ... 

 

역시나 새벽에 잠이 깼다.  여섯 시까지 침대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 7시에 로비에 내려가 밥을 먹고 올라왔다. 짐을 다시 꾸리고 자전거에 패니어를 장착하고 8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 



출근길 시내를 거쳐 야시마(屋島)로... 


편의점에 들러 순례 기간 내내 거의 매일 아침 한 통씩 마신 500 ml 카페오레를 오늘도 마셨다. 쏟는 땀이 엄청난 때문인지...  작지 않은 이 음료 한 통을 단숨에 마시는 일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20일 넘는 기간 동안 내내 잘 먹고 소화도 잘 되고 속도 편했다.


어제 저녁에 이미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기에 더 이상 경로를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곧장 시내를 가로질러 야시마에 들어가... 가타모토(潟元)역에서 멀지 않은 등산로 들머리로 직진... 어젯밤...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근길 주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릿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야시마지(屋島寺)는 섬의 산마루에 있다. 한 정거정을 더 가면 고토덴야시마(琴電屋島)역 앞에 자동차도로(屋島ドライブウェイ)를 오르는 버스(100엔)도 있지만, 다카마쓰 시내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등산로 들머리를 찾아갔다.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뒤 산 비탈 주택가 골목길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핸들바백만 메고 가볍게 산길을 올랐다. 



참배 때문인지, 건강을 위한 아침 산책인지...  산을 오르는 주민들이 많았다. 대개 주부들이나 은퇴한 노인들이다. 

더러 젊은 순례자들도 눈에 띄었다. 남산이나 북악산처럼... 시내를 조망하면서 느긋하게 오르는 도시의 산이었다. 만약 다카마쓰로 그저 관광을 온다면, 다카마쓰역에서 야시마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한 시간에 한 대 다닌다는 버스를 타고 이 절에 오르면 ...산정에 있다는 전망대에서 세토내해를 조망하면 되겠다. 



당나라의 이름난 스님이었다는 간징(鑑真)화상이 754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규모도 크고 ... 분위기도 차분하다.  



 어지간히 빨리 산을 오르는 ...나를 추월해 번개처럼 달려 올라와  참배를 하고 말을 걸 짬도 안 주고 역시 산을 달려 내려가던 젊은 헨로.... 





어제 저녁...   서서히 어둠이 짙어가던 늦은 저녁... 조금은 막막한 심정으로 야시마 섬을 한 바퀴 돌 때...  섬의 중턱으로 나 있는 도로를 횡단해 이어져 있던 도보 순례길...   



야시마지에서 이렇게 85번 야쿠리지(八栗寺)로 도보 순례길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야쿠리지까지는 걸어서 6.3km


10시30분 야시마지 참배를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로에서 아다찌 상과 다시 마주쳤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사흘 만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나는 내려가면서, 산길을 올라오는 아다찌 상을  그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한 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 순례자들이 입고 다니는 하쿠이(白衣)를 입고 거침없이 산길을 올라오는 모습이 놀랍기까지 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달리던 해안의 11번 국도며 징징거리며 올랐던 수많은 고갯길들을 ... 저 어린 여자가 고스란히 자전거를 타고 거쳐왔을 게 아닌가...  



"아다찌 상,  반가워요. 괜찮으세요? " 

"김상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다시 만나면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 ? " 

"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 세 곳의 기념품이에요."  


아다찌는 매고 다니던  힙색에서 나무로 된 작은 기념품을 꺼내 내게 주었다. 


오헨로상들이 순례에 나서기 전에 교토에 있는 도지(東寺) 등  대표적인 사찰 세 곳에 들러 순례자들의 필수품인 금강장과 삿갓과 작은 가방( 頭陀袋 ずだぶくろ)을 미리 장만하는 모양이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이 작은 기념품을 받고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다찌, 나는 아무 것도 줄 게 없네요. 어쩌죠. " 

"아, 괜찮아요."   


그는 오늘,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 순례를 마친 마치면 오후 서너 시경일 텐데.. 그 뒤에 1번 료젠지까지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 비로소 오늘 순례가 끝나는구나...' 

나는 아다찌의 말을 듣고서야 순례가 오늘 중으로 끝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순례를 하는 도중에 뒤늦게 알았지만,  순례자들은 88번 사찰까지 순례를 마친 뒤 다시 1번 료젠지에 가서 코오보 대사께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고 보고를 하고... 거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도쿠시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카야마에 있는 고야산까지 가서 참배를 함으로써 비로소 순례가 마무리되는 완전히 '결원(結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  


"글쎄,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해 놓은 건 없어요." 

"그래요? 저는 오늘 료젠지까지 갈 예정입니다. 절 앞에... 순례 시작할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원하시면 거기서 묵으셔도 될 겁니다. " 

" 그래요? 만약 저도 료젠지에 가게 되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을까요?" 

" 오헨로상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니 아마도 괜찮을 거예요." 



고야산까지 갔다 오는 것은 사흘 뒤인 14일 오전에 예약해둔 귀국 일정 때문에도 안 되고... 그렇다면 이 순례의 출발점이었던 료젠지에는 가야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귀국하는 날은 아침일찍 공항에 가기 바쁠 테고... 오늘을 빼면 이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료젠지에서 오늘 하루를 자더라도... 다음 날은 다카마쓰까지 80km 가량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귀국 전까지 단 하루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일단, 사찰 순례를 마무리 하자... 


아다찌 상과 또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산길을 내려와  자전거를 세워둔 지점으로 돌아왔다. 경사가 급해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마을쪽으로 50m쯤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아다찌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아다찌는  도쿄에서는 도둑 때문에 자전거를 길에 세워둘 수 없는데 시코쿠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고...  일본도 대도시에서는 자전거 도난이 흔한 모양이다. 



시내 주택가인데도 저수지가 있다. 인근에 농경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84번 야시마지에서 85번 사찰 야쿠리지(八栗寺)까지는  5.5km. 11번국도를 따라 시내를 달리다가 전차 야쿠리(八栗)역 인근에서 야쿠리지 표지판을 보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가면 된다. 



야쿠리지는 산 중턱에 있지만... 



언덕을 조금 오른 뒤에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된다.  케이블카 코겐잔(五劍山)역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것을 타고 올라가기로...  


11시 45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  85번 야쿠리지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케이블카라고 하는 공중에 매달려 가는 운송 수단을 일본에서는 로프웨이라고 하고... 



급경사면에 굵은 쇠줄을 감으며 올라가게 되어 있는 기차를 가리켜 케이블카라고 ... 



야쿠리지(八栗寺).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이곳에 밤 여덟 알을 묻어두고 무사귀환을 기원한 뒤 떠났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하늘에서 자오곤겐(蔵王權現)이  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내려오며... 이 땅이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고했다고...  코오보 대사가  그 칼들을  다섯 개의 산봉우리 묻었는데, 다섯 개 중 산봉우리 한 개는 3백년 전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   




동일본 부흥기원... 아마도 후쿠시마가 있는 동북지방의 복구를 염원하는 포스터인 것 같다...



후쿠시마는 이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파괴된 핵발전소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방사성물질을...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미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성물질이 체르노빌 사고 때의 열 배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핵폐기물은 보관하는 것 말고는 근원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없는 상태로... 핵발전을 지속하는 것... 그 자체가 인류의 비극적 전망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천재지변이든 전쟁과 같은 재난이든 사고나 고장이든... 핵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 일 것이다.  발생 시점이 문제일 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일본의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다행히 날이 맑다. 하늘도 파랗고.



도보 순례자들은 곧장 산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12시 15분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



야쿠리지 역 앞에서 86번 시도지(志度寺)까지는 8km. 오르막 없는 평탄한 시내 도로를 달리게 된다. 야쿠리지에 올라가 참배를 하고 내려오면서, 아다찌 상과 또 마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순례의  마지막 순간은 고요하게 마무리 하고 싶었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일지라도... 마주치고 인사하고 그런 일들이 조금 성가시기도 하고 

아다찌상에게도 일생에 ... 몇 번 없을 큰 프로젝트일 시코쿠 순례가 

우연히 자꾸 마주치는 외국인 아저씨 때문에 산란스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싶었다. 


마침 점심 시간도 되었다. 절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케이블카 역 앞에 있는 우동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조금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했다. 


길을 찾는 면이나 도로 주행능력 면에서... 아다치는 남자인 나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우월한 것 같았다. 며칠 전 처음 만난 날... '당신 운동선수였냐? ' 이렇게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다시 시내를 달린다. 


그런데, 86번 시도지(志度寺)를 앞둔 지점에서 건널목에 앞서가고 있던 아다찌 상과 다시 만났다. 이 여자는 점심 밥도 안 먹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야시마지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했을지도 모르겠다.  



86번 시도지(志度寺)


먼 옛날, 당나라로 시집 갔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中臣鎌足 614~669)의 딸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공양물로 삼아 여러 보물들을 오빠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에게 보냈는데, 사도만에서 폭풍을 만나 보물들 가운데 구슬 하나를 바닷 속 용왕에게 빼았기고 말았다. 


후히토는 이 구슬을 찾으러 바닷가에 있는 이 마을에 왔다가 이곳에 사는 해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낳은 사람이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 뒤에 해녀는 남편의 신분을 알게 된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해녀는 남편에게 아들 후사사키를 정식으로 후지와라 집안에 들여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신의 몸에 밧줄을 감고 그 구슬을 찾으러 용궁으로 들어갔다. 이를 알아차린 후히토가 급이 밧줄을 건져올렸으나 이미 해녀의 몸은 용신에게 물어뜯긴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의 구분 없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런가 보다... 자신의 몸이 물어 뜯기는 한이 있어도  자식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보내놓으면 그것으로 보람을 삼는...   


나는 본당에 들러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나와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아다찌는 본당을 거쳐 대사당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87번 나가오지(長尾寺)까지는 곧장 북쪽으로 뻗은 3번 국도를 따라 섬의 내륙쪽으로 7.3km 가량 달리면 되었다.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밀밭이 있길래 일부러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도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모를 심는지는 모르겠다. 


단 두 개의 절만 남았다. 절까지 가는 동안 오렌지타운이라는 전원주택단지 같은 곳이 있었다. 


도로 한 곳도 허투로 방치되어 있지 않고 잘 관리되고 있는 사회. 공중 예절을 잘 지키며, 이방인들에게도 친절한 주민들. 외견상 일본은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맑고 쾌활한 모습...방과 후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노는 아이들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스치듯 얼핏 보기에...  어른들은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였고 지쳐 보였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한국과 일본은 농업이 신통치 않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농업을 포기하고 제조업과 수출에 기대 경제를 급격히 발전시킨 방식에서 한국에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핵발전을 기반으로 자국 농업을 팽개치고 무역에 의지해 경제 규모를 부풀려 가는 방식이 ...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허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일 만큼이나 허망한 일이 아닐까. 



오후 2시 반, 87번 나가오지(長尾寺)에 도착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텅 빈 드넓은 사찰 경내... 그리고 순례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어떤... 홀가분한 심정, 그리고 아쉬움 ...  



쇼토쿠 태자가 절을 열었다는 설도 있지만,  덴표(天平)11년 쿄키보살(行基菩薩)이 열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쿄키보살이 땅을 걷고 있을 때  한 버드나무에 신령스러움을 느껴 그 나무에 관세음 보살상을 새겨 이 절에 본존으로 안치하고 법상종(法相宗)을 창건했고,  그 후,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떠나기 전에 이 절을 찾아 연초 7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 풍습이 현재까지 계승 돼 매년 정월 칠일,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코오보 대사는 다시 이 지역을 찾아와 불교의 밀교 경전인《대일경(大日經(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을 돌 하나에 한 자씩 새겨 공양탑을 세우고 법상종에서 진언종으로 개종 했다고 한다. 


*《대일경》은 7세기 중엽 서부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고 선무외(善無畏: 637~735)의 한역과 

9세기 초 인도 승려 시렌드라 보디와 티베트의 번역관 페르체크가 공역한 티베트어 역본이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천황이 귀의 한 사원이지만, 전국시대에 전쟁에 휩싸여  본당을 빼고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가 에도시대에 번주  마쓰다이라가 중창하고 이때 다시 천태종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만 남았다. 마지막 22km... 계속 오르막이다.  도중에 있다는 헨로교류살롱까지는 5Km 남짓, 거기서부터 오쿠보지까지는 또 다시 15Km 남짓... 역시나 계속 산을 올라야 한다. 


나가오지를 빠져나오는데 ... 아다찌가 막 도착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86번 시도지에서 87번 나가오지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나는 GPS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평속 30km 가까이... 빠르게 달려왔는데... 그는 내가 본당에 참배하고 납경을 받는 정도의 짧은 시차를 두고 절에 도착한 것이다. 역시 대단하다. 



이제 선거가 임박했을 것이다. 시코쿠를 도는 동안 선거 포스터를 계속 보아왔다. 

역시나 자민당의 구호는 '성장' 이다. '희망과 성장' 


경제규모로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에서도 보수 여당의 구호는 역시나 성장이다. 일본 경제가 더 성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될까... 만약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믾다면 그것은 경제 때문인가...  



사민당이나 일본 공산당의 구호는 이에 비해 탈핵이나 평화 같은 것이었다.  일본도 우리도 경제성장이나 부의 집적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음의 평화는 돈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세대처럼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인류는 전 세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없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 수출액은 1966년 1억달러... 기억 속에도 우리가 겪은 유년시절은 세계 최빈국의 수준이었다. 1970년대 1천불소득 100억수출을... 초등학생들도 노래가사처럼 외고 다녔다. 2013년 한국의 1인당 연간 소득은 2만4천 달러에 가깝다고 한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예가 드물고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조금은 으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자살률, 이혼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살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제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일... 이웃과 함께 사는 일에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르막을 2,3 km 가량 올라간 지점에... 큰 인공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마에야마 오헨로교류살롱 (前山おへんろ交流サロン)과  나가오 미찌노에키 (道の駅ながお)가 있었다. 

오헨로 교류살롱은...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센터, 자료관 역사관 같은 곳이었다. 



섬 전체를 모형을 만들어 놓고 88개 사찰을 표시해둔 모형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저 험준한 산과 계곡을... 패달을 밟으며...때로 비에 젖어 밤길을 달리며... 지나왔구나... 




고승들의 유적들도 전시 돼 있고...



절들마다 전해오는 전설도 ... 아이들을 위해 쉽게 만화로도 설명해 놓았다. 



30분 가량 구경을 마치고...나와 맞은 편에 있는 미찌노에키에 들러 음료수를 사 마셨다. 

이제 산길을 15km 꾸준히 올라가는 수밖에... 외줄기 3번 도로를 따라 꾸준히 오르다가... 한 차례 377번 국도로 좌회전 해서 5km 남짓 달리면 88번 사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도보 순례자들이 걷는 길과 자전거가 가는 길은 간간이 만나기는 하겠지만... 길이 겹치지 않는다. 자전거 순례자를 위한 안내 스티커는 좀처럼 보지 못했는데...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외줄기 도로에서 막판에 발견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 외진 산길... 아다찌는 앞서 갔는지 뒤쳐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절을 1km 앞둔 지점에서 자전거 끌고  걸어 올라가고 있는 아다찌와 또 만났다. 나는 기어를 기어를 최대한 낮추고 신음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가며 그를 추월하며 손을 흘들어 인사를 했다. 그는 '어라' 하고 잠깐 놀라는 소리를 냈다. 



오후 4시 40분 드디어 결원(結願)의 성지...  88번 오쿠보지(大窪寺)에 도착했다. 


해발 782m  도봉산 정상 정도의 높이... 산중이라 해가 더 빨리 져  산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본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미즈야에서 역시나... 죄업의 근원이라는 손과 입을 헹구고...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 

가자! 가자! 저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저 온전한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반야심경은 한 번에 독송 하기에도 적당히 짧으면서도 불교의 핵심이 다 추려져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다. 

한 자 한 획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는 완벽한 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현실에 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저 높은 경지로 가자는 이 마지막 진언이 특히 가슴을 치곤 했다.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 이 말을 되뇌일 때면 살면서 겪게 되는 째째하고 비루한 일들쯤 아무 것도 아닌 듯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 막막한 저녁시간에 나는 틈틈이 반야심경을 베껴 쓰면서 절망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곤했었다. 그 뒤로도 살아오는 동안 틈틈이 ... 그랬다.  



납경소 앞에는 순례를 마친 이들이 코오보 대사의 분신처럼 순례길 내내 함께 걸어온 금강장(즈에)을 봉납하게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문예반 지도교사며 시인이던 국어 선생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은 수업에 들어와 한 마디도 안 하고 오늘은 '묵언의 날' 이라고...칠판에 쓴 뒤 한 시간 내내 판서만 하다가 나가시는가 하면... 하루는  학과 진도와는 무관하게...  반야심경을 한 줄 한 줄 써주시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본래 수업시간에 다른 책 읽기가 특기였던 나로서는... 어느 수업보다도 그 시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 생전에 틈틈이 독송하시던 반야심경이 그런 의미였구나...싶기도 했고 말이다. 




경내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불길을 보존해 놓은  곳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본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라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염원도 클 것이다. 진보적인 야당들이 평화헌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불 앞에서 동전을 보시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두 번 다시... 지구 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핵폭탄을 투하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본당 참배를 마칠 즈음 아다찌가 도착했다. 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김상 잠시 뒤에 참배 마친 뒤에 함께 사진 찍어요."   



나는 22일만에... 그는 나보다 오륙일 정도 더 달렸다고 했으니 거의 한 달만에... 순례를 마친 것이다. 

"아디찌 상 축하해요. 당신 참 대단해요. 깜짝 놀랐어요." 


그는 료젠지로 가겠냐고... 다시 내게 물었다. 이미 시간이 다섯 시가 넘었다. GPS 상으로는 40km 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지금부터 달려도 도착할 수 있겠나?" 

"내리막길이니까...  빨리 달리면 ..." 



젊은 여자가 순례를 마친 일이 일본인 순례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남자 순례자가 좀처럼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아다찌를 따라다니면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대화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출발이 20여 분 늦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이 될 일본의 산골 마을을 지나치며 ... 30km 정도 빠른 속도로 줄곧 달렸다. 



산을 내려가면 도쿠시마 시가 나올 것이다.  내가 주춤 주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만큼 경사가 가팔랐지만, 앞서 달리는 아다찌는 무서운 속도로 내리막길을 달렸다. 덕분에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다. 



도중에 아다찌가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예약을 해주었다. 


산을 다 내려온 다음에야...사진을 찍을 여유가 생겼다.





도중에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투숙객들이 할인점 마루나카로 마중을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라는 젊은 친구(이름도 잊었다)와 젊은 여자 두 사람... 이들 모두 새로 순례를 떠날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다치는 출발 전에 도쿄에서 와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고 했다.  


장을 보길래... 저녁을 같이 지어먹는가보다...싶었는데... 각자 먹을 것을 고르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식료품은 일본이 훨씬 싼 것 같았다.  



사진 속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조금씩 대화를 이어갈 수록...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어쩐지 나를 빈정거리는 느낌도 들고... 비열하게 비웃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얘가 왜 이러지? '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게스트 하우스는 료젠지 정문 앞에서 길 건너 곧장 뻗은 골목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장을 보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저녁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마당도 있고.. 거실과 방이 서너 개 가량 있는 꽤 넓은 집이었다. 우타쬬에 있던 우탄구라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규모나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지... 젊은이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이 게스트 하우스는 게으른 대학생들이 단체로 자취를 하는 집 만큼이나 어수선하고 황량했다.  우탄구라의 두 부부가 정성껏 가꿔놓은 집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숙박비는 2천엔. 침낭을 소지하고 있어 침구(시트와 담요)를 쓰지 않으면 2백엔 할인해서 1800엔이라고 했다. 

식탁에 있는 밥솥에서 밥은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밥이 떨어지면 자유롭게 쌀 포대에서 쌀을 덜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차례를 기다려 샤워를 하고... 장 봐온 반찬거리들로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사 가지고 온 캔맥주도  가볍게 마셨다. 함께 마실 줄 알고 여섯 개 들이를 사왔는데 각자 자기 것을 마시는 눈치라 두 캔만 마시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기부했다.


사진 속에 있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갸냘픈 여성들도 다음날 자전거 순례를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아다찌와 달리 자전거도 기어도 제대로 없는 생활자전거인데다  매사가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이들도 조금씩 단련이 되어 가리라... 


후지산 인근에서 왔다는 가와베 군, 나가노에서 왔다는  다카하시는 자전거 순례를 거의 끝 마쳐간다고  했다. 오카야마 아오이... 등 


이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젊은이들은 대개 여행 경험담을 나누며 순례를 마친 사람과 ㅅ작하는 사람들이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데... 


주인장은 나를 의식한 때문인지... 계속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런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어느 정도 상대의 의중을 읽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외교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이니까 서로를 잘 이해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식으로... 


그런데 그 자는 끝나 속내를 드러내고 계속 도발을 했다. 


유튜브에서 나찌나 군국주의 일제 시대를 연상케 하는...  일본 사람의 웅변조 연설을 틀어주면서 보라고 했다. '제군들... ' 하면서 악을 쓰는 영상 속의 사내는 대화혼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다. 도쿄대 강당에서 운동권 학생들과 혼자 맞서 토론을하고, 자기 집 테라스에서 군중들을 향해 대중연설을 한 뒤  할복 자살을 한 미시마 유키오를 연상케 하는 그런 광적인 분위기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는 마침 한국인 잘 만났다는 식으로 내게 말을 툭 던졌다. 

"뭐가  달랐냐? " 

"일본은 조선에 학교를 세워 교육도 시키고, 철도나 전기도 부설해 주었다. 조선을 도왔다. " 

"...?! ...  일본 학교에서는 역사를 그렇게 가르치냐?  일본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조선에 학교도 전기도 철도도 없었을 것 같냐? "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 사람 수십 만 명을 죽이고 전쟁과 징용에 끌고 갔고, 수십 년 동안 식량과 자원을 수탈했다. 독일이 과거를 참회하고 철저히 청산하는데 비해 일본은 자신들이 한 일을 인정도 못하는 것 같다."     


일본 친구들이 오히려 주인장에게 '듣기 싫은 사람들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요구 했다. 주인장의 극단적인 의견 피력도... 다른 투숙객들이 주인장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것도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흔히 봐 오던 이본인들의 태도와는 달라 의아했다. 


그냥 짐을 꾸려서 그 집을 나올까 하다가... 그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그냥 꾹 참고 자기로 했다.  


나는 평소에... 국가나 민족을 강조하는 데 반발심 마저 가지고 있다. 월드컵 응원의 광기도 거북하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소통하는데  국적이나 피부색,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그 신념이 시험 받을 기회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국가를 강조하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을 혐오도 하고 차별도 하고  침략도 하고 수탈도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전쟁과 비극의 씨앗이었고 말이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두 나라의 시민들이 서로를 적대시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지막 날 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맛 보았다.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 조금만 자제력을 잃었다면 개처럼 끌고 나가 그 놈을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무슨 소용이랴... 이 자들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면... 

그것이 일본 소시민들의 수준이고 하나의 흐름이라면...  한일 관계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떠들썩한 그 방을 빠져나와 침실로 쓰는 다다미방에 와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일본 총선은 어쩐지 해보나 마나일 것 같았다. 핵발전소 폭발까지 일어나 침체될 대로 침체된 일본은... 이렇게 또다시 밖으로 원인을 돌리면서 여론을 전환하려고 하는구나... 


날이 밝으면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여행의 마무리가 이렇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던 바였다. 유감스럽게 ... 



음료수 600(4회)  점심 우동 450엔  간식 500엔  납경 450엔 , 게스트하우스1800엔   저녁 아침 먹을거리 장본 것 2000엔  

#13-6/2 일요일.  스쿠모(宿毛)  오시마(大島) ~미나미 레구(南レク)오토캠핑장 

운행 61.21km 

빗소리, 가볍게 출렁이는 파도,  바람에 서걱대는 플라이 소리... 이런 소리들이 가수면 상태에서 의식 속으로 밀려들곤 했다. 밤새 잠을 설쳤다. 4시부터는 고깃배들이 출항하면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와 엔진소리 때문에 더 이상 누워있기도 어려웠다. 엎드린 채 집에 보낼 엽서를 썼다. 순례 첫날 열 장의 엽서를 사서 두 딸과 아내에게 틈틈이 엽서를 써서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열 장 가운데 두어 장은 미처 도착도 하기 전이고 대개는 식탁 유리판 아래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스마트폰을 충전시켜 놓고 텐트 안에 있는 집을  정리한 뒤 찬 밥에 어제 저녁 사 놓은 즉석 카레를 부어 먹었다. 텐트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짐을 다 꾸렸지만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섯 시가 되기도 전인데 주민들이 빗속에 산책을 나왔다.  


나카야마(오른쪽 62세)씨와 이웃에 사는 친구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 분들도 조금 흥분한 상태가 되어 말이 많아졌다. 나카야마 씨는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본에는 이혼이 많다고 ...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집에 키우는 고양이기 이야기까지... 



저 앞에 있는 섬까지 간조 때는 걸어 갈 수 있어요.  한국에 진도도 그런 데가 있다면서요?  어? 진도를 아시네요?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서 알고 있어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카야마 씨가 빗속으로 달려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세 개 뽑아 오더니 함께 마시자며 건넨다. 야영을 한 데다 비까지 내려 찬 커피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즐겁게 마셨다.  자신들은 아침마다 여기가 고향이고 아침마다 산보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으니 이제 은퇴했다고...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혼자 살며 새벽같이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지만 딱히 출근할 곳이 없는 사내들. 역시 쓸쓸한 얘기다. 자전거 순례 초반에 만났던 야마시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장성한 자식들은 이미 품을 떠난 상태에서 시코쿠 순례를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가족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언감생심 가족들에게 호령하던 가부장의 모습은 고사하고 과연 남성이 생물학적인 유전이라도 이어갈 수 있을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우리가 자랄  때 당연시 되던 남성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초 중고등학교에서 예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여자아이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남성에게는 남성이 남아 있는 게 좋은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비판 받을 소리일 수 있겠으나... 말이다. 


자상하고 친절하며 남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피부 관리를 위해 화장품을 차례대로 바르고 패션에 섬세한 관심을 기울이는 남자들은 늘었는데 오히려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하거나 자기 말이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는 어떤 점에서 ... 여성들이 시원시원한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남성에게는 이제까지 전혀 다른... 새로운  성역할이 요구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시50분 출발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아 출발했다 . 어제 넘어온 국민숙사(國民宿舍) 야자(子)앞 고개쪽이  아니라 오른쪽 해안길로 섬을 빠져나왔다.  


대나무보다 더 큰 갈대가 비바람에 휘어져 길을 막고 있다.  


먹을거리들이 줄어든 탓에 짐이 많이 가벼워졌다.  비가 내리고 있긴 하나 잘 하면 80km 가량 떨어져 있는 기타우와지마(北宇和島)에 있는 41번 류코지(龍光寺) 42번부츠모쿠지(仏木寺) 까지 순례하고 인근에 있는 해변 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일요일인데다 비까지 내려 수쿠모 시내의 아침은 한산했다. 우선은 26~7km 가량 떨어진 미나미우와(南宇和)군의 40번 사찰 간지자이지(観自在寺)까지 가는 게 먼저였다. 길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7번 지방도로와  내륙으로 나 있는 56번 국도 어디를 선택할지 잠시 망설였다

스쿠모 시내로 나와 스쿠모 역 철길 아래를 지나 좌회전 한 뒤 해안을 따라 7번 도로를 따라 달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해안길이 조금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산이었다. 


 8시 50분 경 드디어 에히메 현(愛媛県)으로 접어들었다. 고치 현(高知県)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싶었다. 

아직은 완만한 경사다. 비도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언덕위에서양식장이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 보였다. 해남과 완도 사이에 있던 한살림 김 양식장이 생각났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어업을 지키는 숲'이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바다와 숲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완만하게 오르던 해안길이 어느새  완전 등산 코스로 바뀌고 있었다. 설마 오늘도 이런 등산을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허를 찔린 셈이다. 맥이 빠졌다.  


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다. 길에는 칡넝쿨이 뒤덮여 있고 인적마저 끊긴 길을 오전 내내 올라야 했다. 그러나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경고는 정말 꼼꼼하게 많이 붙여 놓았다. 그만큼 많이 버린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는데... 


 아침을 좀 더 배불리 먹지 않고 대충 먹은 것도, 해안길이 조금 평탄할 줄 알고 7번 도로를  택한 것도 후회됐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드디어 오후 한 시쯤 ... 지겹게 올라온 고도를 단 몇 분  동안의 내리막길로 탕진한 뒤... 해안길을 벗어나 56번 국도를 만났다.  이곳 역시 뭐 대단히 평탄한 길은 아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길 가로 이 지역 특산물인 귤밭들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다. 


사실은 아침에 서울에서 온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지난 봄... 예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만났던 동료들의 중학교 2학년 아들이 갑자기 목숨을 끊었다. 인물도 좋고, 성적도 뛰어났고...가끔 만날 때 보면... 나이에 비해 너무 조숙숙한 게 아닐까 싶게 과묵한 아이였는데...  아무튼 그랬다. 


그 아이의 49재가 오늘 열리는데 참석할 수 있는지 ... 또 다른 동료가 연락을 한 것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나는 상상만 할 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 봄... 그 충격적인 상가에 가서 나는 뭐라고 위로의 말도 차마 건네지 못했다. 



연락을 한 지난 날의 동료는 ... 나 역시 나름의 사정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다 마음을 수습하러 일본에 와서 자전거 순례를 하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갈 수 없는 사정을 짧게 설명하고 순례를 하며 들르게 되는 절에서 그 아이의 명복을 빌겠다고 답을 했다.  


고개를 내려선 뒤.. 만나는 미나미우와(南宇和)시의 풍경은 차분했다. 



40번 간지자이지(観自在寺)에 가서 한국에서 49재를 치르고 있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선량하기 그지 없는 부모들을 위해 향을 사르고 합장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아이였는데... 



간지자이지(観自在寺)는 1번 절 료젠지(霊山寺)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절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 정말로 양쪽에 아령처럼 불거진 부분이 있는 좌우로 긴 타원 모양의 시코쿠섬에서 이 절은 도쿠시마에 있는 1번 절 료젠지와 대각선으르 마주보고 있는 지점에 있다.  



사별한 가족과 친구들 때문에 이 섬을 떠올리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침에 받는 연락 때문에 나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별을 떠올려며 삶의 비애를 곱씹어야 했다. 



절 앞에는 전통 있어 보이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승용차를 타고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산을 넘어온 피로감도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허 해져서 어딘가 들어가  남이 차려준 밥을 먹어야겠는데...마땅한 데가 없었다. 


시코쿠에 오던 첫날 다카마쓰 시내에서 장을 본 대형마켓 'A・MAX에이난(愛南) 점' 이 있길래 들어가서 주먹밥, 장어덮밥, 커피우유 단팥빵 등을 샀다. 어딘가 좋은 자리가 나오면 도시락은 점심으로, 주먹밥과 빵은 운행중에 행동식으로 먹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마땅한 마땅한 자리가 없다. 도로변에 앉아서 밥을 먹기는 싫고... 



오전 내내 고통스럽게 하던 7번 도로처럼은 아니지만 56번 국도 역시 오르막의 연속이다. 다리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도 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언제 쏟아질지 모르게 음습한 날씨였다. 


국도 변으로 자전거 도로는 대체로 잘 나 있었다. 도보 통행인이나 자전거를 위해 따로 터널들이 나 있고...  


또 다시 큰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라면집을 발견하고는 랙팩 안에 도시락과 먹을 거리가 잔뜩 들어있는데에도 더 이상 못 가겠다 싶어 들어갔다. 


라면 달라고 하니까 알아서 미소라면과 밥 한 공기를 갖다준다(700엔). 

 

주인 내외의 정성이 느껴지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먹고 나니 조금 몸도 마음도 회복되는 것 같았다.  무리하지말라 싶어서 ... 조금 타고 오르다가 고개 중턱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서 고개를 넘었다. 고개 너머에서  오사카에서 왔다는 예순 살,  지식인풍의 도보순례자를 만났다. 


그와 20 분 가량 왼쪽으로 펼쳐진  해수욕장(室手海水浴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으며 대화를 했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도 역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의 대답은 '전과 동'이다. 남북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적대적인 긴장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는 정도... 



무슨 이야기 끝엔가... 한국과 일본은 천 년 전에는 한 나라처럼 오갔다고  '시바료타로 (司馬 遼太郎) 같은 사람들도 주장하던데, 두 나라의 개성이 지금 너무 다른 것 같다는 말을 했더니...  한국에도 시바 료타로가 알려져 있느냐고... 우연히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그의 책을 두어 권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호오... 한국에도 그의 책이 출판됐다고요...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그와 헤어진 뒤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넘어졌다. 


우와지마 시 (宇和島市)를 향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게 부담스러워  자전거 도로로 올라타는 순간... 내작은 턱에 바퀴가 미끄러졌다. 내리막길이었고 시속 30km쯤 속도를 내고 있었다. 



무르팍이 깨지고 .바지도 찢어졌다. 새로 사 입은 지 며칠 안 된 것인데... 그나마 이 옷을 덧 입지 안았다면 부상이 좀 더 심각했을 것이다. 자전거 핸들이 훽 돌아가 있고... 그립 부분의 브레이크도 손잡이도 틀어져 있었다. 핸들바에 테잎도 찢어졌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계속 운행을 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일어나 어디 부러진 데가 없는지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손목에 충격이 있었는데...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음은 자전거... 틀어진 부분들에 힘을 주니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굴리면서 변속을 해 보았는데... 그나마  미끄러지면서 브레크를 잡아 충격이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았다.  

 

열흘 동안 두 번 넘어진 것이다. 갈비뼈와 무릎. 그렇잖아도 침울하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나빠졌다. 오후 네 시가 넘었다. 더 전진하는 것은 무리다.  지도에 보니 미나미 레구(南レク) 오토캠핑장이 있어 그리로 가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야영을 하게 됐으니 일단 마을 입구에 있는 대형마트'마루나가'에 들러 ... 부탄가스와 반짓고리 리 그리고 먹을 거리를 좀 더 샀다. 



 아침에 목표로 삼았던 기타우와지마(北宇和島)에 있는 41번 류코지(龍光寺)나 42번 부츠모쿠지(仏木寺)에는 한참 못 미친 지점이었다. 레구(レク)가 무슨 뜻인지 한참 갸웃거렸는데... 레크리에이션의 일본식 축약인 모양이었다. 



시내에서 3km 가량 바다쪽으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오토캠핑장이 있다. 정문을 통과한 뒤 언덕 위로 오르니까... 차량 차단봉이 내려져 있고, 예약자에 한해 출입이 허용되며 예약은 인터넷을 통해 하라고 돼 있다. 이러 제길... 다행히 자전거 한 대는 겨우 통과할 틈이 옆으로 나 있어 살살 피해 올라가 보았다. 



일요일 오후라 오토캠핑을 한 주민들은 모두 빠져 나가고... 관리인 한 사람이 당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정을 말하니까... 야영을 하시라고... 숙박계를 쓰라고 내 준다. 




다만 요금은 조금 비쌌다. 1박에 2500엔... 자동차든 자전거든 똑 같이 한 구획을 이용하게 되니 요금이 동일하다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샤워는 코인샤워... 200엔, 세탁도 건조기도 모두 200엔씩 600엔... 모두 합하면 3천100엔... 차라리 시내에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빗방울까지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시설은 훌륭했다. 후회는 해서 뭐 하겠나... 텐트를 치고... 

의자를 빌려서 잠시 쉰 뒤....


샤워를 하고 빨려를 돌려놓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자... 

저녁 다섯 시부터 ... 여섯 시 반까지... 고기에 김치도 사 왔기에... 엄청나게 먹고... 맥주도 한 캔 마시고... 


기왕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거... 대충 빨아서 가지고 다니던  옷들까지 다 꺼내 빨고 말렸다. 


헤드램프를 켜고... 찢어진 바지를 꿰맸다. 너덜너덜한 채로 다닐 수는 없겠다 싶었기 때문에... 

짐을 정리하고... 기록을 하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열 시가 다 됐다. 스트레칭을 하고...잠을 청했다. 


집을 떠난 지 이주 가량 지났다. 지친 모양이다. 가족들이 그리웠다.  오늘의 가벼운 사고는 쉬어가라는 신호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고 자전거도 멀쩡하니까 말이다. 새벽녘에 텐트 위로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방수가 잘 되는 텐트라 걱정할 건 없었다. ... 힘 내자!


부인하고 싶은 나이 쉰.  다시  가슴 뛸 일이 있을까.

 

어느새 쉰 살이 넘었다. 실감 나지 않는 나이. 아니, 부인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내 마음이 어떠하든 나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해 봄, 친구 S가 갑자기 죽었다. 암에 걸렸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랬다. 각별했던 사이라 장례식장을 나흘 내내 지키다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고향  벌교에 가서  묻고 올라오면서,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7년 근속하면 1개월  '안식월' 휴가를 쓸 수 있다. 7년을 넘겨 9년이  되도록 휴가 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일과 일상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게 되었다.

 

 S가 죽기 불과 열흘 전, 경주에 있는 자연치유원에서 경남 거창 그가 귀농해 살던  집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그는  다섯 살짜리 늦둥이 아들에 대해 회한을 토로했다. "책임감 강한 체 해왔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정말 책임감이 강하다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지, 애걸복걸하면서 건강 망치고 무엇 하나 책임을 못 지게 생겼잖아."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마음을 끓이며 집착하고 있는 일들이 다 허무해졌다.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일.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여행밖에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정도가 전부였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 Km.  걸어서 45일  이상 걸리는 먼 길. 자전거를 타고 돌면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시코쿠 순례를 시작하기 전 한강변을 연습 삼아 달려보았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 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 차라리 걷는 일이라면 홀가분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제나 제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내 마음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도로 위로 자동차들에 뒤섞여 그 정도를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큰 고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 무렵 나는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 가서 넣어달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전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 (지금은 용산역 인근으로 옮겨가 있다.)  5주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렘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바이클리의 교육은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 장력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로 알차게 짜여 있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MTB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겠다는 건축사,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 놓고 티베트와 인도 네팔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단 하겠다는 서른일곱 살 학원강사, 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을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을 해 도쿄에 일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내친김에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하겠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 번에 하겠다고 준비하던 젊은이. 알고 보니 바이클리는 전 세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거쳐가는 플랫폼이었다.   

 

도중에 체인이 끊어지면 이렇게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라는 브랜드의 여행용 자전거.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달 수 있는 모델이었다. 본래는 출퇴근 때 가끔 타던 생활자전거를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집에서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까지 왕 70Km를 한 번 왕복해본 뒤 아무래도 자전거를 바꾸는 게 좋겠다 싶었다. 자전거를 바꾸어도 걱정은 여전했다.  한강변 안전한 자전거길로 70km를 달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싶게 힘겨운데, 과연 20여 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해낼 수 있을까.

 

실제로 겪은 상황보다 미리 걱정하는 일이 더 힘겨웠다.

삶에서 겪는 일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떠나기 전 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안했다. 여행 준비는 엉성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일정 별로 진행 구간을 미리 정하는 등 세부 계획을 세우려고 했으나 일에 쫓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정보도 부족했다.

말도 서툰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다닐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스마트폰에서 바로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를 저장하고 이것을 로커스라는 앱에 불러온 뒤 시코쿠 88개 사찰과 시코쿠 섬 야영장 GPS 좌표를 얹었다.     

 

떠나기 전 날 독서실에서 자정 다 돼 돌아온 고등학교 2학년 작은 딸과 식탁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세상의 부조리한 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세상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바꿔보고 싶다고 했다. 두 아이는 기질도 성향도 판이하다. 어떤 면은 부모를 물려받은 것이지 싶고, 어떤 면은 도대체 어디서 온 성품인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두 아이에게 다 있다.

 

우리 세대는 청춘의 시절을 최루탄 난무하는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눈물과 땀에 범벅돼  거리를 달리면서  막연하게  우리 아이들은 좀 더 합리적인 세상에서 살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위태롭고 어떤 면에서는 더 숨 막히는 곳이 되었다. 우리가 채 다 못한 숙제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유전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야영을 하려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랙팩과 패니어 등 여섯 개의 가방에 실을 짐들

 

5월 21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한여름을 방불케 더운 날씨였다. 아침을 먹고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로 짐을 들고 지하철로 갔다.  전날 자전거를 타고 가서 분해해서 박스에 포장을 해두었기에 나머지 짐만 꾸려 랙팩과 핸들바백에 담았다. 먹을거리와 옷가지, 그리고 캠핑장비들까지...  어깨가 빠지게 무거웠다.   

 

자전거 박스에는 기내 반입이 어렵지 싶은 텐트 폴과 팩, 자전거 수리공구, 주머니칼 등과 침낭 옷가지만 넣었는데도 30kg이 넘었다. 다시 옷가지 텐트 등을 빼도 26Kg. 아시아나 홈페이지 안내에는  일본지역 무료 수하물은 이코노미의 경우  20kg까지고  5Kg 초과할 경우 다카마쓰까지는 2만 5천 원 차지를 물게 돼 있다. 그러나 공항터미널 담당 직원은 '네, 잘 다녀오세요!' 하더니 쿨하게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바이클리 사장님이 같은 날 캐나다 횡단을 위해 출국하는 로키님과 나를 삼성동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삼성동 공항터미널에서 짐을 부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세토대교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시코쿠섬 위를 날았다. 창밖으로 언뜻 내려다보기에도 평지는 별로 없고 온통 산과 계곡의 굴곡들뿐이라 덜컥 겁이 났다. 오토바이도 아니고, 내 심장을 동력으로 저 주름진 굴곡들을 이십여 일 달려야 하는구나.

 

여섯 시가 다 돼 다카마쓰(高松) 공항을 빠져나왔다. 부피가 큰 자전거 박스에 대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관심을 표하며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자전거 여행을 할 생각이냐? 잠은 어디서 자냐?  88번 사찰 일주를 할 생각이다. 잠은 비즈니스호텔을 이용하거나 캠핑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어 공항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이클리 사장님 조언대로 택시에 박스 채 싣고 예약해둔 다카마쓰 나카진초 토요코인 호텔로 갔다. 택시는 근 40분을 달렸다. 석양이 지는 낯선 거리에 하굣길 학생들과 퇴근길 시민들이 자전거 물결을 이루며 한가롭게 달리고 있었다. 택시비는 4천 엔. 비싼 줄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나왔다. 하룻밤 숙박비다.

 

자전거 분해는 해봤지만, 조립은 처음이라 진땀깨나 흘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 분해하면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부위별로 볼트와 너트를 따로 모으고 패니어를 부착할 랙이나 빗물받이도 부착된 모습을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게 도움이 됐다.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말도 서툰데 자전거 박스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호텔 프런트에 이런 말을 떠듬떠듬하니까 자전거 박스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박스를 분해할 필요도 없다고.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날인 6월 13일에 다시 호텔로 돌아올 예정이라  예약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스를 맡기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자전거로  시내도 둘러보고 밥도 먹을 겸 밤거리를 달려보았다. 자전거도로가 잘 구획돼 있었다. 일직선으로 곧장 달려가니 다카마쓰 항구와 붙어 있는 역이었다. 문 연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사에 붙어있는 꽤 큰 할인점은 밤 10시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신선식품은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도시락, 맥주와 내일 운행할 때 간식거리와, 쌀 1kg을  샀다. 물가가 비싼지 싼 지 아직은 전혀 감이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 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했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Km.  걸어서 45일쯤 걸어야 하는 먼 길이다. 자전거를 타며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 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까. 차라리 걷는 일이면 홀가분 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장충동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그것도 늘 조마조마했다. 도로 위로 자동차들 속에 뒤섞여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더 큰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나. 늘 이런 걱정을 안고 자전거를 타는 수준이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가서 넣곤 하는 수준말이다.  

 

배워서 준비하자검색을 시작했다. 다행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건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그러나 5월 중순에 휴가를 내기로 했는데그 전에 진행하는 4월 강좌는 이미 만원이었다. 바이클리 운영자분께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발송했다. 일단은 정원이 모두 찼으니 혹 결원이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신이 왔다. 그리고 며칠 뒤 등록했던 대학생이 여름방학으로 여행 계획을 미루면서 빈 자리가 생겼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5주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론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레임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여행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의 장력을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의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꼭 필요한 내용들로 알차게 짜인 교육이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엠티비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시겠다는 건축사분,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놓고 티벳과 인도 네판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당하겠다는 서른 일곱살 학원강사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 해 도쿄에서 일 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후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내친 김에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번에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던 젊은이.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 크로몰리 바디에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설치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자전거를 지참하고 오라는 말에 걱정이 앞서 집에 있던 출퇴근용 생활 자전거를 타고 강의가 시작되기 전 주 주말에 집에서부터 강동구청앞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본 적이 있다. 왕복 70Km 가량을 주행하고는 당장 그 다음주부터 강의를 듣는 일이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았다. 70km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과연 20여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일이 현실성 있는 계획인가?

 

내가 20대 젊은이도 아니고 미쳤지 무모한 일이야. 그냥 포기할까. 이런 망설임이 떠나기 전날까지 나를  전전반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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