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행거리  97.56km

 

5시도 안 돼 눈이 떠졌다. 텐트 안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가  5시 반 경 스트레칭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쿠시마 공항 활주로가 내려다 보였다.  다카마쓰에서 도쿠시마까지 꽤 먼거리를 달려와  첫 캠핑을 무사히 마친 일이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한시 바삐 길을 나서야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침으로 한살림 감자라면을 끓여 저녁에 지어놓은 밥을 말아 먹었다. 텐트를 해체해 다시 네 개의 패니어와 랙팩, 핸들바백까지 여섯 개의 가방에 짐을 꾸리고 7시 경 길을 나섰다. 여전히 짐을 꾸리고 흔들리지 않게  랙에 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말도 서툰  이국의 거리를 달려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들을  헤쳐가야 할 일이 조금 두렵기기도, 설레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나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돌이켜보니 요즘의 나는 매사가 권태로웠다. 더 이상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은 없을 것 같고, 새롭게 분노할 일도 남모를 기쁨도 없을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밤에 라이터를 사러 왔던 편의점 로손에 들러. 물 2리터와 500밀리리터 쵸코우유를 샀다. 



일본사람들에게 편의점은 단순히 편의 이상의 의미인 것 같았다. 도쿄 같은 대도시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시코쿠의 어지간한 곳에는 대개 편의점이 과하다 싶게 드넓은 주차장을 끼고 들어서 있었다. 지도에도 로손, 패밀리마트, 선쿠스, 세븐일레븐, 쓰리에프, 미니스톱 같은 편의점을 꼭 표시돼 있다. 법이나 조례로 규정이라도 해놓은 것인지, 어느 점포에나 예외 없이, 식음료는 물론이고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 ATM, 복사기, 신문과 잡지 등이 갖춰져 있었다. 길이라도 물어보면 복사해둔 인근 지도를 꺼내 조금 감격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안내를 한 뒤 그 지도를 아예 가져가라고까지 한다. 


출퇴근 길에  대개 혼자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이나 주먹밥을 사서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 쓸쓸하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던 밥상이 무너진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좀 더 빨랐을 것이다. 우리네 출근길 풍경도 이제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순례가 시작되었다.GPS 상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는 1번 절 료젠지(靈山寺)를 향해 달렸다. 출근길 분주한 차들과 함께, 12번 국도 갓길에 나있는 자전거도로로 달리다 대충 방향을 보고 한적한 길로 접어 들었다. 지도에 나타난 것처럼 바다에 가까운 하구에는 복잡한 강줄기들이 흩어져 있고 도로는 이들 사이로 수많은 수로를 건너며 이어져 있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다. 인문교양서를 읽듯이 불경도 읽고 성경도 읽는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해마다 서너 번은 가고 집도 북한산 아래라 큰 절을 지나칠 일이 많은데 대개는 법당에 들러 삼배를 하지만 정해놓고 절이나 교회에 다닌 적은 없다. 종교에 기대 나의 어떤 결핍을 채우려는 생각도 해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돌이켜보니 군대에 있을 때, 가능하면 수요일 저녁과 일요일 오전에 허용된'종교행사'에 참여했다. 절반 이상은 절에 갔고 때로는 성당에도 교회에도 갔다. 졸병 때만이 아니라 제대할 때까지 그랬다. 막사에 남아서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군화를 닦거나 군복을 다리는 일은 하기 싫기도 했고, 욕설이 난무하는  난폭한 공간을 그때만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 무렵부터 몇 번이고 반야심경을 사경했다. 제대한 뒤에도 최근까지,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었던 참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마다 새벽에 일어나 반야심경을 붓펜으로 베꼐쓰면 위로가 됐다. 반야심경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허상이라고 말해주고 있잖은가. 

 


헨로(遍路)라는 시코쿠 섬의 사찰순례는 1200여 년 전 일본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空海, 코우보오 대사弘法大師, 774~835)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코우보오 대사가 수행하고 순례한 곳을 따라 시코쿠 전역에 있는 88개의 절을 돌게 돼 있다. 시코쿠 섬의 면적은 제주도의 열배인 약18,000 제곱킬로미터다. 


도보 구간의 길이는 모두 1200Km쯤, 하루에 30~40Km 씩 40일~50일 동안, 때로는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고된 길이 이어진다.  1번 사찰에서 88번사찰까지 도쿠시마에서 시계방향으로 제주도의 열배쯤 되는 시코쿠 섬을 한 바퀴 돌게 되며,  반대방향으로 돌거나 구간별로 끊어서 도는 이들도 있고 자전거나 승용차로 순례를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일본 불교는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다. 절의 분위기도 문화도 그랬다. 일본의 진언종은 우리나라에 일반적인, 문자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는 현교(顯敎)와 구분되는  밀교(敎)라고 한다. 구카이(空海)는  불교를 현밀이교(顯密二敎)로 구분하고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했다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밀교(敎)가 생겨난 것은 인도에서 힌두교 등의 영향 때문이 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어려운 경전을 이해시키고 전파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옴마니 밧메훔' 같은 진언을 외우거나 마니차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를 하는 일만으로도  부처의 경지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카이(空海)는 불교에 귀의하기 전부터 이미 한문에 능했고, 당에서 유학한 뒤로는  일본인으로는는 최초로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한 이였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 문자로 쓰고 있는 가타카가나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라는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을 세워 불교와 유교를 가르치다 855년에 입적한 뒤에 "코우보오(弘法)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시코쿠 순례 내내 들르는 절마다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보다 코오보오 대사의 흔적이 도드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절이나 부처를 모신 본당뿐만 아니라 대사를 모신 대사당이 본당과 비슷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당에 들른 뒤 대사당에 들러 똑 같이 예불을 드렸다. 


1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강을 건너고 논과 연꽃 모내기 끝난 논을 지나며 절이 있는 산 아래 동네를향해 달렸다. 설마 저 산을 넘거나 하지는 않겠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드디어 반도역을 지나 1번 절 료젠지(靈山寺) 눈에 들어왔다. 


 

 

 


뭘 어째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다른 이들의 여행기나 자료에서 읽은 대로 일주문을 지나 미즈야(水屋)에서 물을 떠 손과 입을 씻고 본당에 가서 향 한 촉을 50엔 주고 사서 사른 뒤 반야심경을 독경을 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두 분 형님, 그리고 아주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최근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떠올렸다. 


절을 둘러보고 주차장 앞에 있는 매점에 가서 납경장(納經, 2천엔)을 사서 납경을 받았다. 절마다 들러 확인을 받으며 도장과 붓글씨를 받는 것을 납경이라고 하는데, 300엔을 내야 한다. 납경장에 88개 사찰의 납경을 모두 받는 걸 일본사람들이 가보처럼 여긴다는데, 88개 절에서 모두 납경을 받자면 우리 돈으로 30만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 굳이 모든 절에서 납경을 받아야 하나 싶어 하루에 한 번 또는 십번 단위로 한 번, 이렇게 띄엄띄엄 받기로 작정했다.  



한글 안내 지도가 있어 한 권 샀다(2천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헨로보존협회에서 펴년 가이드북 지도편을 샀어야 했다. 상세한 지도와 순례길 인근에 있는 숙소 등도 그 지도가 가장 잘 편집돼 있었다. 그러나, 료젠지를 지난 뒤에는 아래 사진에 나온 지도편을 좀 처럼 살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난 뒤에 순례 중반을 지난 뒤에야 결국 사긴 했지만 말이다. 



매점 앞 주차장에 들어갈 때 못 본 다혼 폴더형 자전거가 놓여있어, 누군가 나처럼 자전거 순례를 시작하는모양이구나, 궁금하기도 해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꺼내 마시며 기다려보았다. 내 자전거에 비해 단촐한 차림이 부럽기도 했다. 좀 더 가볍게 올 걸 그랬나... 더 줄일 수는 없었을까... 


절 안에서 스쳐지나쳤던 자전거 쫄바지를 입은 청년이 자전거의 주인이었다. 타이완에서 왔다는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청년.  자신은 순례를 모두 마쳤다고, 나를 보면서 뭔가 해줄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조심하세요. 힘 내세요' 인사를 남기고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도쿠시마 방향으로 달려갔다.  


 

매점과 안내소가 있는 건물 처마밑에 제비집이 있었다. 어릴 시절, 서울 돈암동에 있는 우리집 처마에도 제비집이 있었다. 제비는 몇 해 동안 가을이면 사라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았다. 우리 가족들은 제비새끼들이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부모들이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광경에 열광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부터 제비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우리도 그 집을 떠났다. 그 뒤로 40년은 흐른 것 같다. 서울에 다시 제비가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이다.  


 2번사찰 고쿠라쿠지(極楽寺)는 료젠지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있다. 료젠지에 비하면 좀 더 현대적인 절이다. 순산을 기원하는 절이라고 했다.  표지판도 잘 돼 있고 바로 옆 동네나 마찬가지라... 잠깐 방심한 채 달리다보면 닿는다. 핸들바에 묶어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인 로커스프로에 의존해 길을 찾는 일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 전혀 엉뚱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컸는데, 료젠지부터는 길모퉁이마다 순례길을 안내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본당에 들렀다가 납경소가 있는 매점에서 순례자들이 입는 흰 옷 가운데 소매 없는 '오이즈루'(2천엔)를 샀다. 료젠지에서 만났던 타이완 청년의 옷이 빛바래고 얼룩이 진 것이 생각났다. 새로 산 내 옷은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다. 여기서도 납경을 받았다.  

 

 

 

 

절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좁다란 샛길로 순례길 스티커가 있어 따라가 보았다. 동네 뒤로 자전거가 오르기에는 좁지 싶은 오솔길이 묘지를 지나게 돼 있었다. 이때까지는 몰랐는데, 대개의 절 옆에는 묘원이 있었다. 봉분은 없고,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일본의 묘지. 산 자들의 주거공간과 죽은 이들의 처소를 구분해 양택과 음택을 명확한 구분한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 한 가운데도 묘지가 늘어서 있는 일본은 생사관이 다른 것 같다. 


사별을 많이 겪으면서, 점점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죽음은 어린 시절에는 두려움이었고, 좀 더 자란 뒤에는 슬픔이었고, 이제 와 생각하면 ...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할 게 아니라... 잘 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든 뒤에  평생 지키온 신념과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죽어가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자~알 죽어야지... 암만...   




미처 몰랐는데, 헨로미치(遍路道)를 안내하는 이 빨깐 스티커들은 대개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별 생각없이 스티커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갔다가 뒤에 몇번 낭패를 겪게 된다. 


 

3번 곤센지(金泉寺)는 지도상으로, 고쿠라쿠지에서 2.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본당에 들렀다 나오려고보니, 버스를 타고온 단체 순례객들이 합창을 하듯 함께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다. 문자로는 똑같이 260자 한자로 표기돼 있지만, 당연히 그들이 독송하는 소리는 '방묘싱교...' 하는 식으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부부간에, 또는 혼자서 승용차로 순례를 시작하고 있었다. 더러는 어디서 왔느냐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할 거냐며 대단하다, 조심해라...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4번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곤센지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곤센지를 나와 오른쪽으로 달리다 아직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조금 버거운 업힐 구간을 만나 꽤 당황했다. 햇볕도 따가웠다. 

 

다이니치지 오르막 길은 앞으로 펼쳐질 순례길의 고행에 대한 어떤 암시와도 같았다. 거친 숨소리를 토해가며 절 앞에 도달해보니 사람도 거의 없고 조용했다. 도보 순례자들 몇 명과는 지나치며 가벼운 목례를 나누었다. 

 

5번 지조우지(地蔵寺)는 다이니치지에서 곧장 내리막길을 2km쯤 내려오다보면 금방 만나게 된다.  내려오는 길가에 무인 판매대가 있길래 아기사과 한 봉지(100엔) 오렌지 2개 (50엔)를 사서 앞쪽 패니어에 넣고 달렸다.  


6번 안라쿠지(安楽寺)는 12번 도로를 따라 5.3km 가량 떨어져 있다. 헨로미치 스티커는 도로 이면으로 난 마을 길로 안내 돼 있어 일부러 따라다녔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하기까지 한 마을을 정말 묵언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달렸다.  


 

 

4번 다이니치지에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조금 맥이 빠진 탓일까, 지치는 느낌이었다. 안라쿠지 마당 안에는 전통 가옥 지붕 양식이겠지 싶은 띠 같은 풀로 엮은 건물과 잘 가꾼 연못이 있었다. 절에 딸려있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100엔)을 사 먹으며 잠시 앉아서 쉬었다.  


 

7번 주라쿠지(十楽寺)는 안라쿠지에서 1.2Km 떨어져 있다. 일주문 옆에 대형 숙소가 마련돼 있어 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절에서 운영하는 숙소들도 요금은 6천엔 이상으로 만만찮은 것 같았다. 

 

 

88개 사철 어디나 초입에 사진 오른쪽에 있는 미즈야(水屋)가 있어 먼저 손과 입을 씻고 본당과 대사당에 참례하게 돼 있다. 손과 입... 그렇구나... 욕망을 짓는 것도 스스로를 모욕하게 만드는 것도 손과 입이구나... 자극은 눈으로도 오고 코로도 오겠지만 욕망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기관은 손과 입이겠구나... 


나는 초반에는 본당에만 참배하고 대사당은 그냥 지나쳤다. 코우보오대사(弘法大師)가 여전히 낯설었기 때문에 그랬다.  


카메라 배터리가 벌써 방전됐다. 당황스러웠다. 하루 정도는 버텨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이렇게 됐다. 오랫동안 써오던 캐논20D를 가져갈까 하다가 무게가 부담스러워 파나소닉 루믹스 LX3를 중고로 사서 가져갔는데, 후회가 됐다. 이제부터는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을 해야 했다. 문제는 스마트폰은 핸들바에 결합해 놓고, GPS로 쓰고 있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이것을 풀고 조으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때로는 사진이고 뭐고 귀찮아지는 순간도 너무나 많았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의 사진들이 좀... 그렇다.

7번 쥬라쿠지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냉우동(500엔)을 사먹었다. 식당의 손님들은 모두 순례자들이었다. 승용차, 도보, 자전거 제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냉 우동은 점심요기로는 허전했다. 


8번 쿠마타니지 (熊谷寺)는 4.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산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길이 헷갈려 우왕좌왕하다가 트럭운전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오르막 길을 제대로 찾았다.   

 

중간에 일주문이 있길래, 금방인줄 알았더니 일주문을 통과한 뒤에 다시 도로를 건너고나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본당이 있었다. 

 



절마다 기부자들의 이름과 금액을 세워둔 이런 비가 늘어서 있었다.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차별은 없었다. 수백 년 전에 세워진 비들에는 단돈 일백엔이라고 적힌 비들도 있었다.  

 


아직 순례형 몸으로 다져지기 전이라 졸음도 쏟아졌다. 첫날인데, 이런식으로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사기가 떨어졌다. 납경소 앞 휴식소 벤치에 앉아 잠깐 졸기도 하고 의기소침해 앉아 있는데, 일흔도 더 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몇 마디 하시고 '순례하면 죽어서 좋은데 간다, 나는 14번째다. 간밧데! 간밧데라는 말 알고 있나?' 이렇게 격려를 해주고 갔다. 묘하게 힘이 났다. 말투와 표정이 어쩐지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아 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일제 치하에서 생계가 막연했던 친가 외가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불과 아홉 살 네 살의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며 자식들을 길러냈다. 7남매의 장남이던 아버지는 불과 아홉의 나이에 일본에서 공장에 다니며 할머니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은 종종 일본어로 대화를 하시곤 했다. 두 분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 게 싫어서 나는 해찰을 부리곤 했다. 무슨 말을 나누셨냐고, 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냐고... ㅎ 


 

다시 힘을 내 달렸다. 내리막 길이라 수월했다. 놀라운 것은, 도보순례자들의 속도가 예상보다 상당히 빠르다는 것이다. 7번 쥬라쿠지에서 마주쳤던 도보순례자 (아루키 헨로步き遍路)가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나를 추월해서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자전거 속도계를 보면 평지를 달릴 때는 시속 25~30Km, 오르막에서는 10~15km 정도는 유지한다. 걷는 속도는 빨라야 6km  남짓일 텐데... 이럴 수 있나 싶도록 빨랐다. 자전거로는 20일 내외, 걸어서는 40일 내외라고 할 때부터 내심 과연 그 정도 차이밖에 안 나나 ... ? 의구심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자전거로 순례를 하더라도 기간을 반 이상 줄이는 것은 무리였다. 도보순례자들은 최단거리로 산길을 넘어다니기도 하지만, 40킬로그램 가량 짐을 매달고 있는 자전거는 오르막에서 헐떡이며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9번 호린지 (法輪寺)는 구마니타지에서 내리막길을 한참 달린 지점, 2.4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후 4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절 앞에 탁발승이 있길래 100엔 동전을 시주했더니, 어디서 왔냐며 11번 절 앞에는 무료 숙소가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될 거라고... 13번 다이니치지에는 옥상(안주인)이 한국사람이니까  만나보라고... 이런 말을 했다.  한국사람이 주지스님의 부인이라는 말인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내가 일본어를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 하고는 그냥 지나쳤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숙박을 어떻게 할지, 막연한 상태였다. 


순례자들을 위한 무료숙소인 젠콘야도(善根宿)가 곳곳에 있다는 글은 읽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공원 같은데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지도 않았다. 뭐랄까...  남의 나라에 와 조금이라도 '실례'를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  그렇다고해서 계속 호텔에서 자면서 순례를 이어갈 만큼 돈을 준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조금 막연한 상태였다. 물론, 1~20km 인근에 캠핑장이 있다면 서슴없이 달려갈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늦어도 저녁 5시에는 이동을 중단하고 숙박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바이클리 사장님은 조언했었다. 나도 그 말을 들으며 당연히 그래야 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늦어도 하절기에는 5시, 동절기에는 4시에는 대피소나 하산지점을 통과해야 안전하다. 그 다음부터는 당황하게 되고, 체력도 떨어지고 렌턴마저 준비하지 못하면 조난의 위험도 있다. 

   


10번 기리하타지 (切幡寺)에 도달할 즈음 점점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도 막연한 가운데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기리하타지 아래 사하촌은 꽤 고풍스런 목조주택들, 상점과 여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만, 평일이라 그런지 대부분 문을 닫아 놓았다.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오르막길 입구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려던 한 사내가 거의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자물쇠로 묶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 오늘 어디서 잘 거냐? ' '한국에서 왔어요. 오늘 어디서 잘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11번 절 앞에 무료로 잘 수 있는 숙소가 있고 강변에 '캼프'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 그래요?' '그럼 또 만나자.' 그는 이런 '쿨한' 인사를 남기고 내리막길로 달려갔다.  이 사내는 뒤에 두 번 더 다시 만나게 되는 야마시타(山下)상이다.  


해가 기울고 있었기에 서둘러서 330개 계단을 밟고 본당에 올라가 참배를 했다.  




계단에는 액막이로 놓은 하얀 동전들이 놓여있었다. 주로 1엔짜리 백동전들이다.  


오후 4시10분경 절에서 내려왔다. 11번 절까지는 지도상으로는 10km 남짓 떨어져 있는데, 과연 다섯시 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안되면, 도중에 있다는 강변 캠핑장에서 자야겠다. 그런데 내가 가진 GPS에는 그 캠핑장이라는 것이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무슨 수로 찾아간단 말인가.   


11번 절 후지이데라(藤井寺)는 지도에 보면 절에서 내려와 시내를 관통한 뒤 요시노강을 건너 맞은 편 산 기슭에 있다고 나와 있다.  거리는 9.5Km 이미 4시 반이 다 됐다. 30분 안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절들은 납경도 다섯 시까지만 해준다. 향로도 꺼지고 발걸음도 끊긴다. 


요시노 강(吉野川)을 건너기 전 야와타 (八幡)라는 동네에서 우체국을 만났다. "당신, 다른 선물은 아무것도 필요 없지만 엽서는 꼭 써 보내야 해요."  여행 경비를 건네주며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내의 말보다, 불과 한국을 떠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울의 가족들이 벌써 그리웠다.  그림엽서 다섯 장과 일반 엽서 다섯 장 등  열 장을 샀다. 우체국에 들어가기 전에 엽서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직원 앞에 서니까 신기하게 생각이 떠올랐다. '하가끼(葉書) 부탁해요' 우체국 직원은 땀 범벅이 된 내가 안쓰러웠는지, 기념품 같이 준비해둔 '가제수건'을 한 장 건너주었다. 에어컨 때문에 시원한 우체국에서 나오기 싫을 정도로  태양이 뜨거웠다. '우체국 계단'에 앉아 첫 엽서를 썼다.  


요시노강은 아름다웠다. 강가에는 갈대가 무성했고 석양에 반짝이는 강 위에서 플라이 낚시를 하는 태공들이 몇 사람 보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산맥들... 내가 이 산들올 오르내려며 험한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강 위로 나즈막하게 깔려있는 다리를 건넜다. 차가 한 대씩 교행할 수 있고, 비가 많이 내리면 그대로 물에 잠기게 된 다리였다. 헨로미찌 안내 스티커는 강을 건너 계단을 넘어 직진하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이무렵 핸드폰 배터리마저 모두 방전됐다. 이제 GPS도 없다. 1번 료젠지에서 산 한글판 지도책을 펼쳐보며 답답한 운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느 강을 건넌 뒤 좌회전해서 시가지를 2,3Km쯤 지난 뒤 산쪽으로 우회전하면 쉽게 11번 절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충분히 달렸다 싶어도 절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없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언덕을 하나 더 넘은 뒤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을 보게 될 것라고 했다. 이쯤이겠구나 싶은 곳에서 오른쪽 오르쪽이 나오길래  헉헉대며 1km쯤 산쪽으로 올라갔지만, 절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 여자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길래, 후지이데라를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단다. 중1,2학년쯤 돼 보이는 귀여운 꼬마들이었다. 이럴 수가... 동네에 있는 유명한 절일 텐데... 모른다고? 내가 당황스러워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하고는 근처에 있는 수퍼에 들어가 한참을 물어보고 나온다. 흰색 헬멧을 쓰고 펑퍼짐한 교복을 입은 모습이 여간 귀엽지들 않다.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겠단다.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말릴 새도 없이 휘리릭 언덕 위로 달려가더니 학교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TT   


아이들이 고맙기도 해서 기다려볼까 했지만 이제 더 지체하면 정말 낭패를 당할 것 같아 초조해졌다.  아이들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언덕을 내려오며 다시 192번 도로 큰 길을 따라 달리다가 절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헨로미찌 스티커를 발견했다. 캠핑할 수 있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절 앞까지 가서 숙박지를 정하는 수밖에... 


절에 도착하니  이미 다섯 시 반이 지났다. 헨로미찌 스티커를 따라 갔다가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들고 산속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야 했다. 이때까지도 도보순례길과 자전거 갈 길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납경은 포기하고 본당에 가서 향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납경소에 있던 노인이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묻기에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돈을 약간 지불해도 괜찮냐고... 괜찮다고... 자기를 따라 내려 오라며 오토바이로 앞장선다.  도로를 따라 2~3Km쯤 내려오니  조용한 시골동네에 2층 건물 요시노 여관이 있다. 하룻밤 5천 엔 저녁은 다 떨어졌으니 나가서 먹고 오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체크인을 하고, 패니어와 랙팩을 들고 2층에 있는 다다미방에 옮겨다 놓고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방을 모두 떼어낸 자전거는 이래도 되나 싶도록 가볍고 홀가분했다. 장 봐 올 게 있을 것 같아 빈 패니어 하나만 앞에 달고  요시노가와시 시내로 달려갔다. 


논과 마을이 섞여있는 조용한 시골동네였다. 식당이 있겠지 싶은 한 시간 전에 지나쳐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가끔 박쥐들이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192번 도로변에서 한 접시에 99엔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회전 초밥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다섯 접시쯤 먹고(460엔) 수퍼에서  우유 1리터(150엔), 다음날 행동식으로 할 요량으로 카스테라 (130엔),  맥주 500밀리리터(160엔) 을 사서 완전히 어두워진 거리를 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래층 욕탕에는 뜨거운 욕조가 있고, 2층에는 코인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 카메라, 전조등, 핸드폰을 모두 충전해 놓고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지나갔다. 당장 오늘도 오늘이었지만 내일, 가장 험난 하다는 12번 쇼산지 (燒山寺)를 어떻게 갈 것인지... 거의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래도 잠은 잘 잤다. 


순례 첫날... 길고 긴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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