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ㅡ6/1 토  아시즈리곶(足摺岬) 핫토민박 ㅡ스쿠모宿毛 오시마(大島) 야영장

운행거리  81.57 km


간밤에 기록을 남기지도 못하고 골아 떨어졌다. 5시에 잠에서 깨어 하루 동안 지난 일들을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기록 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주인 아저씨 기타다상이 웃통을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아사히신문을 읽고 있다. 어린 시절 잠결에 깨어 졸린 눈을 부비고 보면 아버지가 조간신문을 읽고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본 신문들은  세로짜기에 컬러 인쇄도 별로 없다.  신문의 영향력이 여전히 센 것 같다. 



매체 환경의 변화는 우리나라가 가장 빠르지 않을까. 종이 신문이 몰락하고 ...  대신 SNS 등 뉴미디어가 컨텐츠 소통의 주요한 플랫폼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신문의 몰락은 자신들 스스로 '사실'이나 '객관'이 아니라 편향된 주의주장을 무리하게 ... 그것도 선정적으로 해댄 탓에 자초한 면이 있다. 


아침 밥은 여섯 시 반에 먹는다고 신문을 읽던 기타상이 말해준다. 어제 저녁에 안주인도 해준 말이다. 야영을 했다면 아침밥을 준비해야 하지만 느긋하게 짐을 꾸리고 식당에 가서 차려진 밥을 받아먹었다. 


아침상은 저녁에 비해 소박했다. 생선구이와 생선과 두부를 넣고 맑게 끓인 국, 김과 무즙, 단무지, 그리고 날 계란, 계란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는데... 핸로인 나카무라씨가 밥 위에 탁 깨트려서 간장을 뿌려 비벼 후루룩 먹는다. 따라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계란에 밥을 비벼 많이 먹었다. '심야식당'에 일본사람들의 '소울푸드'로  버터라이스가 나오는 걸 보면서 아하... 싶었던 적이 있다. 우리도 어린시절에 비록 버터는 없었지만 마가린에 간장을 뿌려 비벼먹곤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타다상의 '늠름한'(?) 가부장적인 태도는 일본에서도 이제  변방이랄 수 있는 아시즈리곶에나 겨우 남아있을 것일 터다. 도쿄나 이곳 시코쿠 섬의 도회지랄 수 있는 다카마쓰나 도쿠시마... 그리고 서울 거리에 마주치는 사내들이 어딘지 위축되고 쓸쓸해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   


나카무라(65세)씨와 핫토 민박을 떠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일 사람 미하일은 이미 길을 떠난 모양이었다. 


39번 절 엔코지(延光寺)까지는 기필코 최단거리로 가리라 결심. ... 그래도 직선거리로만 60km다.  실제 주행은 100km 가까이 하게 될 것 같다. 밥을 먹고 나니  기타다상이 약도를 가지고오더니 오르막 없는 길을 그려가면서 알려준다. 오른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우회전 해서 토사시미즈(土佐清水) 가는 길을 택하라고...그래야 오르막이 덜하다고 일러준다. 그 마음이 고맙다. 



기타다상이 일러준 길의 핵심은 아시즈리에서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토사시미즈를 향해 좌회전 한 뒤  토사시미즈시를 지나 한동안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28번 현도로 우회전을 한 뒤 소로가와 (宗呂川)을 따라 내륙으로 달려 스쿠모에 도착하는 것이다. 평면도 만으로는 선뜻 해안도로인 321번 도로를 버리고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강을 따라 달리는 길은 내내 평탄했고 고요했다. 


7시45분 핫또 민박집을 나서서 곤고후쿠지(金剛福寺)에 가서  참배를 하고 납경을 받았다. 



코보대사가 823년에 개찰한 절이라고 한다. 



절 경내에는 아열대 식물들과 차분한 연못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경내는 고즈넉 했다. 


태평양을 향해 탁 트여있을 아시즈리곶에서 바다를 본다. 심리적인 이유 때문일까... 우리 동해의 수평선도 광막한데 이보다도 훨씬 아득한 느낌이다.

광활한 바다를 등지고1852 나카하마만지로(中浜万次郞, 죤 만지로) 라는 사내의 동상이 서 있다. .. 



동상에 새겨진 설명을 읽어보니 이 지역 사람 만지로는 14살 때 고기잡이 나갔다가 무인도에 표류했다가 미국 포경선 존하울랜드호 선장에게 발견돼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

어쩌다 보니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 된 만지로는 24살 때까지 영어, 항해술, 측량술, 포경술 등을 배우고 1852년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막부 치하의 일본으로 돌아와 정책 조언을 하고 항해술, 포경술, 근대적인 조선술에 대한 자료를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고  도쿄대 전신이라는 개성학교(開城學校) 교수가 되어 어를 가르치다 71살 때 죽었다는 설명... 



바닷가에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이 우연한 표류가 그를  미국 유학생이 되게 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고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구나... 


섬의 끝... 관세음보살이 사는 보타낙가(普陀洛迦) 에 가장 가깝다는 전설이 있는 곳... 아시즈리곶(足摺岬).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곳 절벽에 와서 투신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보타낙가에 다다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일까. 


부산 영도 태종대에 있는 자살 바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스무 살 무렵, 사는 일이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 태종대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과 그냥 놀러 갔던 길이었다. 몇 걸음만 곧장 걸어가면 수직 절벽 아래.. 흰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까마득한 졀벽 있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붙어 있구나... 갑자기 손에 땀이 쥐어지고 어떤 긴장감에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있을 만한 곳에는 당연히 신사가 있다.




안내 책자에  민박집 인근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족탕이 8시에 문을 연다고 나와 있어 참배를 마치고 다시 되돌아가 보았다. 나카하마 만지로가 이 동네 대표선수는 선수인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해안 절벽 위에 바다를 바라보며 계단식으로 앉아 족욕을 할 수 있게 해놓은 족탕은 일부러 찾아간 일을 후회하지 않게 할 만큼  아릅다웠다.


기타상이 일러준 대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족탕을 하는 동안 나카무라 아저씨는 앞서 걷고 있었다. 그를 추월하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이별했다. 



토사시미즈 시(土佐清水市)로 가기 위해 해안도로에서 우회전 하는 지점 


토사시미즈 (土佐清水). 어제 저녁에 그냥 가던 길을 멈추고 숙소를 잡을까 망설이다 지나친 곳이다. 아시즈리곶에서  아침에 떠나 도착한 방향과 반대쪽으로 해질 무렵 우울한 마음으로 패달을 밟던 생각이 났다.   


쓰리에프에 들러 카페오레 5백밀리(110엔)과 쵸코빵 (152엔)을 샀다. 점원이 녹차 한 병을 오세타이(接待)라며 꺼내준다. 쓰리에프 편의점에서 이런 일은 두어 번 겪었다. 순례자들에게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일년에 15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섬을 찾아온다는데, 적은 비용이 아닐 것 같았다. 


가게 앞에서 고등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생인가? 아니오 고등학생이오. 오 그래?  이들도 강남스타일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나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오하이오고자이마스가 한국말로 뭐예요... 응 안녕하세요. 


사진에서 맨 왼쪽에 있는 친구는 개그맨처럼 계속 친구들을 웃겼다. 순진하고 유쾌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이 즐거워졌다. 


편의점 인근에 우체국이 보이길래 간밤에 써두었던 엽서를 발송했다.  오르막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일러준 기타다상에게 고마워하면서 달리고 달렸다. 



채석강을 연상하게하는 해변을 지나 터널을 지난 뒤 알려준 평탄한 길이 나온 것 같아 한번 더 물어보고  28번 현도로 우회전, 소로가와(宗呂川)를 따라 달렸다. 인적조차 드문 고요한 길이다. 

작은 오르내리막을 지나 고개 위이 터터널을 지난 뒤 스쿠모 시(宿毛市)까지 18km는  줄곧 하강길이었다.


오후 2시경 스쿠모에 거의 도달한 지점에 있는 스쿠모 서니사이드파크  미찌노에키에서  도시락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찬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김에 싸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다. 


미치노에키 한쪽 끝에 남아 있는... 이 목조누각(하마다노 도마리야)는 고지현 서부지역에 남아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축제 준비 등 성인이 되어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담당해야 할 일 등을 교육시키는 장소였다고 한다. 


한동안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다시 해안도로인 321번 도로와 만나고, 스쿠모시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분주해졌다. 갑자기 날도 궂어지고 바람도 거세졌다. 스쿠모시에 들어서마 마쓰다 강(松田川)을 건너게 된다. 


 39번 사찰 엔코지(延光寺)는  강을 건넌 뒤 우회전 해서 8.5km 정도 들어가야 한다.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자전거는 역풍에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아침부터 이제까지는 순탄하게 달려온 편이었는데 걱정이 밀려왔다. 


캠핑을 하려고 마음 먹고 있는 오시마 (大島) 휴식의 광장 (憩いの広場) 캠핑장은 정 반대 방향이라 엔코지까지 갔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와 왼쪽 해변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거센 역풍을 뚫고 엔코지에 도달했다.  39번 사찰 엔코지(延光寺)에는 코보대사가 지팡이로 땅을 치니까 샘이 솟아나 물부족으로 고통받던 주민들을 구원했다는 전설이 있다. 



붉은 거북이가 용궁에서 범종을 가지고 왔다는 전설도... 

,

참배를 하고 절을 나오다 자신을 은퇴한 회사원이라고 소개한 사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인생의 과제를 이제 내려놓았다는 듯한 홀가분한 표정으로 도보순례를 하고 있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런 길을 걷고 있다. 


어릴 때부터 각별하게 지낸 친구가 나보다 삼 년 먼저 결혼을 했었다. 그는 이십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내게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떤 점에서 자기로서의 자기는 이제 끝'이라고 다소 우울한 이야기를 했다. 유아기와 청년시절까지는 자신에 대해, 주로 어린 시절의 결핍과 억눌린 내면에 대해 골몰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장이 되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골몰하면서 나이를 먹는다. 그 짐을 내려놓고 나면 이제 늙어있다.


나는 친구가 했던 그 말에 대해 일면 수긍했고 일면 부정했다. 어떤 점에서 존재는 관계인데, 자신이 선택해 출발하는 가족 관계를 떠나 '나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물론, 시간과 노력의 대부분을 가족들과 먹고 사는데 쏟다 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살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드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의식도 감각도 없이 그저 출퇴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을 하는 순간에도 또 묵묵히 길을 걷는 순간에도 '나로서의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모색하면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잖은가... 그것이 나로서의 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엔코지를 나서자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하루 목표로 한 순례는 모두 마쳤다. 이제 이 한 몸 누울 자리를 찾기만 하면 된다. 비를 맞으며 스쿠모시로 달려나왔다. 


엘마트라는 편의점에 들어설 즈음에는 비가 너무 쏟아져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고등어통조림(147엔) 즉석카레 288 (엔) 식빵 (116엔)을 산 뒤   알바생에게  오시마에 캠핑장이 있는지,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친구도 기다렸다는 듯이 인근 약도를 꺼내더니 '네 캠핑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바다쪽으로 가신 뒤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바닷가에 있는 현립 자연공원에 갈 수 있고, 거기서 캠핑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똘똘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러더니 약도는 가지고 가라고... 


오시마(大島)는 이름과는 달리 스쿠모시 앞바다에 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었다.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올라선 뒤 국민호텔 (國民宿舍)를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바닷게에 공원이 있었다. 국민숙사라는 대중호텔들도 대개 일박에 6천5백원에 저녁과 아침을 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주말이라 호텔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야영을 하기로 했으니 그냥 지나쳤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혼자 텐트를 쳐도 될지 조금 망설여졌다. 비도 주룩주룩 내렸다. 


관리동이랄 수 있는 건물 안에는 코인샤워장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경찰관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 건물 안에서 화기 사용, 전원 사용을 하면 안 되고 ... 등등의 주의 사항은 조금 고압적인 어투로 붙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카메라와 핸드폰을 충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 건물 뒤 바닷가쪽 처마 밑에 텐트를 치고 동전을 넣고 더운물 샤워를 하고... 콘센트를 찾아 카메라 등 전기기구를 모두 충전시키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빗소리와 차분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 오늘도 캠핑장에는 혼자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 


지출 : 계.1513엔 - 쓰리에스 262 (카페오레 110, 쵸코빵 152)  미찌노에키 꼬치구이 100엔,  스쿠모 편의점 엘마트 551엔(카레 288 고등어통조림 147 식빵 116)  납경 2회 600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