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9 일 간온지시(観音寺市)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 78번 고쇼지(郷照寺) 인근 우단구라 

운행 41.39 46.45



4시쯤 잠에서 깼다. 신문배달부인지...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며 새벽 공원의 적막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4시반 경부터 산책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녀노소가 따로없다. 어떤 가족은 다섯 시도 되기 전에 어린 자녀들까지 다 함께 해변 산책에 나섰다. 



어린 시절...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  우리에게도 이런 아침 문화가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동이 틀 무렵 아버지와 정릉 약수터에 다녀오다 보면 맞은 편 안암동쪽 개운산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던 광경...  

아이들 유년시절, 곤지암 산 속에 작은 집을 짓고 살던 때,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기 전까지... 개를 데리고 달리기를 하고 마당 텃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장작을 패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다 보면 창밖에 새들이 지저귀던 ... 그런 아침... 


지난 30년 새 국민소득이 세 배로 늘었다지만... 소득과 행복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아침밥상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눈길 마주치며 밥을 함께 먹는 일...  왜, 언제부터 불가능해졌을까... 중고생 자녀들을 자졍무렵까지 학원으로 독서실로 내모는 우리 세대는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그랬던 것 일까  ... 



허준호 감독의 영화 <행복> 에서 ... 

지리산 기슭의 요양원을 나와 감나무가 있는 작은 집을 얻어 ... 단지 함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영수와  은희. 영수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도시의 삶을 기웃거리게 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권태로워한다. 그러면서 은희에게 '신문에 노후 자금으로 4억 7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며... 우리는 뭘 준비하고 있느냐고... 푸념한다. 은희는 그런 영수를 잠시, 암담한 절망이 어린 눈으로 쳐다본 뒤 ... 오늘 잘 살고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무엇을 위해 왜 4억7천만 원이 필요하냐고...  말한다. 영수는 네가 뭘 아느냐고, 네가 밥을 천천히 먹는 모습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아느냐고... 은희는 영수가 떠나갈 것으 예감한다. 그리고 절망감에 ... 자결이라도 하려는 듯 불치병을 앓는 몸이면서 심장이 터질 지경으로 도로위를 달리다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절망 앞에 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해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의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책없이 오늘을 탕진하자는 말이 아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를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태도는 옳은가. 지금 이 순간, 여기. 곁에 있는 사람들...  영화는 행복을 이것들 말고 어디서 행복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질문하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 이국의 해변에 앉아, 조금은 쓸쓸한 기분으로 어린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진행될 여정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온종일 달려가 저녁무렵 도달할 지점쯤에 마땅한 캠핑장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지니고 있는 돈도 이제 2만엔도 채 남지 않아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침은 미니스톱에 가서 도시락(398엔)과 커피(150엔)로 해결했다.  매번 가이드북을 꺼내 확인하는 일이 번거로워  오늘 달릴 부분을 복사(55엔)해 형광펜(88엔)으로 루트를 마킹해두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핸들바백 위 지도케이스에 넣어두고 달리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작업인데, 편의점에 복사기가 있으니 새로운 욕망이 싹트고 소비가 발생하는 것이다... 대개의 소비가 그런 게 아닐까... 


밥을 먹는 동안 핸드폰도 충전 하고... 



아침 7시... 다시 출발. 도시명 자체가 불성 가득한 간온지시(観音寺市) 역시, 조용하고 차분한 시가지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70번 모토야마지 (本山寺) 까지는 5.7km가량  평탄한 도로를 달리면 된다.  



아니, 너희들 일요일 아침부터 어딜 단체로 가는 거냐? 핼맷까지  제대로 갖춰쓰고 ...  



역시 야당들의 선거 이슈는 ... '평화헌법수호'다. 일본 공산당은 원자력발전 중단을 좀 더 강하게 요구하는 것 같고...  




'강한 나라보다 편안한 사회' ... 폐허가 된 후쿠시마 원전을 배경으로 군말없이 써 놓은 한 마디가 울림을 준다. 잘 만든 포스터라고 여겨졌다 


이에 비해 자민당은... '강한 일본'을 복구하자'고 외친다.  '부국강병'은 국가권력이 흔히 제시하는 슬로건인데...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도 행복해지는가? 하는 질문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나라도... 개인도...어떻게 하면 '강'해지는 것일까...  국가의 무력을 강화하고, 개인이 완력을 기르고 재산과 권력을 쌓으면?   핵심은 '멘탈'일 텐데... 일본이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고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서조차... 인정도 반성도 못하는 , 그 나약한 정신(자신의 과오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 것인다)...  일본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선거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는 거리를 지나며...  쓸데 없이 남의 나라 걱정까지 하면서 채 일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거리를 달려... 모토야마지에 도착했다. 


70번 사찰 모토야마지(本山寺) 



16세기에 시코쿠 섬을 평정했다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때문에 섬 안의 모든 절들이 불타고 무너졌는데 이 절은 보존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절에 몰려들자 절에 모셔둔 아미타여래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6.25 전쟁 때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가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것이라며 불태우려 찾아갔을 때, 주지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도 함께 태우라고 해서 소실을 면했다는 이야기... 를 떠올리게 한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서려니 본당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  기도를 마치고는 법당 주변을 정돈하고 보살핀 뒤...  




절 앞 벤치에 앉아 가족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고 있는 내게 다가와... 오셋타이라며... 작은 꾸러미를 안기고 

표표히 멀어진다... 달콤한 젤리와 비스킷과 사탕 몇 알...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누려고 이렇게 준비해 다니시는 모양이다.  일본에는 재가불자들 가운데 죽고난 뒤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오는 분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71번 사찰  이야다니지(弥谷寺)지까지는 11번 국도를 따라 비교적 순탄한 길을 따라 12.4km 가량 달리면 된다.  코오보 대사의 고향인 젠츠지시 (善通寺市)로 넘어가는 고개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 마을을 지나 산 등성이를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이 벅차기는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아 견딜만 하다. 


이 지역은... 독특하게도 곳곳에 곳곳에 이런 저수지가 많았다.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진 탓인듯... 



이야다니지 인근에는 유명한 온천 파크(후레아이파크 미노 ふれあいパークみの)가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같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다.  



온천파크 주차장 맞은 편 절로 오르는 길 옆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곳 주차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올라야 한다. 




우리 산과는 수종도 풀도 조금씩 달라 어딘지 서먹한 일본의 산길...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이끼도 많다. 


절로 오르는 산길 옆으로 설악산 비선 가는 길처럼 상점들도 몇 개 있고... 



108계단도 올라야 한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모든 감각과 의식에서 받아들이고 피어나는 자극과 판단과 호오의 감정들로부터 108번뇌가 빚어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 ...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몸은 번뇌에 사로잡힌 채 쩔쩔매면서 삶을 밀고 가고 있는...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나즈막히 읊조리다보면 당장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나를 이 여행으로 떠민 현실의 고통... 그리고 사별의 슬픔들도,  이렇게 일상을 빠져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니 마음이 진정되는 면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눈물 세상을 견디며 걸어가는 게 우리들 삶 아닐까... 그런 우리와 ... 나에 대해 연민이 들기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담대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아래 저자거리들이 저 멀리 아스라히 내려다보일 만큼 산을 올라와 있다. 




코우보 대사가 나고 자란 동네가 인근인지라... 이 절에는 '사자의 돌집'이라고 불리는 이 동굴에도 그 분이 수행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본당은 신을 벗고 마룻바닥 안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순례를 하는 이 분은 일행이  본당에 다녀올 때까지 계단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멈춘 채 독송을 하며 무엇인가 간절히 기원 하고 있다. 


만약, 중병에 걸려 생을 정리하는 순간이 와서... 이렇게 영과 육을 함께 정돈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 어쩌면 삶이 좀 더 완결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절에서 내려온 시간은 11시. 점심을 먹기도 그냥 달려가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온천에 들러 쉬기로 했다. 



간밤에 야영을 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휴일이라 가족나들이를 나선 이들을 바라보자니  무슨 고행을 하듯이 내처 달리기만 할 게 무엇이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온천파크는 제법 규모가 큰 휴양시설이었다. 깨끗한 온천욕장은 물론이고 편히 누울 수 있는 안마기가 있는 수면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아이들을 위한 오락실과 기념품 상점까지... 



느긋하게 온천욕(온천파크 입장료 1520엔) 을 하고 밥(돈가스 840엔)도 먹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일본 사람들은 몇 번씩 온천욕장을 들락거리고 낮잠도 자고 식당에서 맥주도 마셔가며 휴일을 온종일 이곳에서 보내며 쉬는 것 같았다.  


온천욕장의 규모나 시설은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대중 사우나나 찜질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청결도나 정돈 상태는 많이 달랐다. 욕조 안에 들어갈 때 얼마나 깨끗이 몸을 닦고 들어가는지... 냉온욕을 번갈아 하는 이들도 매번 어김없이 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샤워기로 씻은 뒤에 냉탕에 들어가는 ...식의  결벽증에 가까운 공중 에티켓... 우리가 배울 부분이라고 여겨졌다. 

오후 1시.  다시 출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뉴스가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이제 환전해온 돈도 채 2만엔이  남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러나 씻고 쉬었더니 몸은 가뿐해졌다.  그긋하게 내리막길을 달려내려온 뒤 젠쓰지시(善通寺市) 방향으로 좌회전해 11번 국도를 만난 뒤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오후 1시 30분.  72번 사찰  만다라지(曼荼羅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일본발음도 그대로 만다라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오보 대사가 가지고온 만다라를 안치한 뒤에 절 이름이 만다라지(寺)가 되었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찰은 한산했다. 하늘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생각은 조금씩 복잡해진다. '오늘은 어디서 묵을 것인가'... 그런 나를 스스로 지켜보는 일도 또 하나의 수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길에서만 그런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살기보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일...  


73번 슈샤카지(出釈迦寺)는 만다라지 위쪽 산 위로 500미터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지도상의 거리 500미터를 보면서 마음을 놓고 올라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인근 묘원에... 마침 장례를 치르러 온 가족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몇년 새 장례를 줄줄이 치러야 했던 나로서는 그런 가족들의 표정과 모습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절에에도... 코오보 대사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그가 7살 때 이 절 뒤에 있는 벼랑에서 '불도에 입문해 대중을 구원하고 싶다.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석가여래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주오.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목숨을 부처님께 바친다'고 말하고 몸을 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이 때 연꽃 위에 앉은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선녀가 어린 코오보 대사를 받아 안았다고...'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어머니와 작은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초여름에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정릉에 있는 국민대학교와 북악터널 사이에서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숲속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해 서울로 올라온 뒤 늘 형편이 쪼들려 사는 데 여유가 없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어머니와 함께 깨끗한 신록의 숲으로 소풍을 갔다.  작은 개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십여 미터는 족히 되는 가느다란 폭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서 나무 그늘에 자리를 폈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도 먹고  어머니와 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 나는 숲속으로 혼자 돌아다니다가 ...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 없지만...  그 폭포위에서 미끄러져 자칫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다행히 돌출한 홀드를 붙잡고 매달려있다가 간신히 기어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머릿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스쳐갔다. 그날 일을  함께 갔던 어머니와 누이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나는 ...줄곧 그 생각 뿐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코오보 대사가 7살 때 벼랑에서 몸을 던진 일이... 전설 그대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합리와 이성'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강한 나 같은 자는 ...  아마도 내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그런 류의 일들을... 기록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점점 완결된 신화로...거듭나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는 식이다.

서른이 넘어 그 숲에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등골이 오싹하던 그 찰나의 기억... 내게 엄청난 일들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면서 스쳐가던 조금은 쓸쓸하고 체념에 젖었던 그 독특한 감정들... 그리고 그 아름답던 신록의 숲...  


다시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1996년엔가 어느 토요일...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서 경기도 고양시 화정에 살던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국민대학교 옆 등산로에서 시작해 형제봉을 거쳐 산성리로 하산하는 루트로 등산을 할 겸...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숲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크고 작은 암자들까지 조악한 시멘트포장을 해 찻길들이 내면서 숲도 만싱창이가 돼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74번 사찰 고야마지(甲山寺) 


73번 슈샤카지로 부터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리막이기도 하고 멀지 않은 길이라 편하게 도달했다. 



고야마지 인근이 코오보 대사의 출생지라고 한다. 어린시절의 대사가 뛰놀던 곳이 이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제로 절 마당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한가롭게 거닐고 있어 여염집 같은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오후 2시 50분. 진언종의 총본산이라는 젠츠지(善通寺)에 도착했다. 75번사찰이다. 이렇게 큰 절인줄 모르고 도착했다가 ... 무슨 잔칫날 같은 분위기에 어리둥절 했다. 



별 정보가 없었는데, 젠츠지는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에 있는 곤고부사(金剛峯寺), 교토 토후쿠지(東福寺)와 함께 3대 사찰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젠츠지는 보통 큰 사찰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만한 잉어들이 헤엄치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큰 사찰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회장을 따라 가람들이 배치돼 있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규모가 상당했다. 




기념품상점에서 나와 아내, 두 딸의 띠 별로 ... 한 마리씩... 용과 닭과 개와 쥐를 샀다...  띠별 기질 같은 게 정말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기질이 은근히 띠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절 마당에는 아예 농기구와 모종, 분재를 파는 장터가 열려 있었고... 



무대에서는 가라데 시범과 공연도 벌어지는 등... 무슨 어린이날의 대공원을 방불케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구경도 하고... 절 앞 유서깊어 보이는 가게에서 전통 전병도 사 먹고... 잠시 즐기다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다시 길을 재촉... 


다시 달려보자... 설마 시내에서 또다시 산길로 이어져 있지는 않겠지...하면서  헨로 스티커를 따라 가보기로 ... 



76 곤죠지 (金倉寺)


코오보 대사의 조카인 치쇼우 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이 절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쇼류우지를 본떠 절의 가람을 정비했다고 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해 오버재킷을 꺼내 뒤집어 썼다. 마음은 더욱 위축됐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반야심경 독경도 어쩐지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 

 


비가 쏟아진다.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호텔이나 민박에 대한 정보도 없고 인근에는 야영장도 없다.  이 빗속에서 오늘밤 어디에 이 한 몸 누일 것인가.  







77번 도류지(道隆寺)는 거의 바닷가에  다다른 지점에 있었다.  

GPS는 바닷가 철길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78번 고쇼지까지 간 뒤 시내에서 호텔을 찾아가 잠을 자야 겠다 싶었다. 




마루가메시 (丸亀市) 시내를 지나면서 은행이 나올 때마다 현금 인출을 시도해보았다. 2만엔쯤 더 인출을 해두어야 안심이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현금인출은 모두 실패. 편의점에 들러 비도 피할 겸 커피 한 잔을 사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일본 ATM 가운데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한국과 체인이 이어져 있어 우리나라 비자나 마스터카드 가맹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단, 휴일에는 안 되고 평일도 오후 두 시까지만 가능하다고... 


78번 고쇼지(郷照寺)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다섯시... 이제 순례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오늘 호텔에서 자고 이삼 일 더 버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 순례자들이 지니고 다니던 무료숙소 정보를 보았다. 

78번 고쇼지 산문앞에서 동쪽으로 200미터를 가면 우탄구라라는 젠콘야도가 있다고...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동쪽을 향해 우호전 한 뒤 고지식할 정도로 200미터를  세며 걸어간 뒤 곁에 있는 집을 살펴보았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5시 20분.  작은 글씨로 '우탄구라'라고 씌여있는 집이 정말 있었다.  이리에 무네노리, 이리에 노리코 두분이 운영하는 젠콘야도다. 우탄구라는 이 동네 이름인 우타즈 초 (宇多津町) 를 스페인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더러 전해 듣기는 했지만 혼자 자전거로 이동하며 주로 야영장을 이용해온 나로서는 20일만에 젠콘야도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쓰미마센...' 하고 불러 보았다.  



인자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나와서 ... 응대를 해주신다. 우탄구라의 안주인 노리코 상이시다. '자전거 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입니다.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만, 오늘 일박 할 수 있을까요?' ' 지금 몇시 인가요? 아, 다섯시가 넘었군요. 네 가능합니다. ' 하면서 본체를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간 뒤 별체로 안내해 주셨다. 그날 이 집에 묵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갈한 다다미 방과  정겨운 정원. 처마밑에 있는세탁기와 건조대. 오래 떠돌다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푸근한 마음이 되었다. 노리코 상은 화장실과 욕실, 세탁기 등 사용법을 일러주고 모기향까지... 피워주었다. 1박에 천엔...이고 아침은 여섯시부터 ... 저녁은 미안하지만 나가서 먹고 와야 한다....고. 순례길에 있는 민박집들이 대개 1박2식에 6천5백엔을 받는 것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다. 


감지덕지... 짐을 풀고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다 돌려서 널어 놓고는 갑자기천당에라도 떨어진 기분이 되어 느긋한 기분으로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외출했다 돌아온 이리에 선생이 내 자전거가 복잡해 보였는지 집에 있는 가정용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라고... 하셨다. 조용한 마을길을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자니 이리에 상이 따라오며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에 가보겠어요? 조금 비싸지만 서비스가 좋으니까... ' 이렇게 안내를 자처하신다. 


낙원(樂園). 제법 규모가 큰 고깃집이었다. 안수창이라는 동포가 주인이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호방한 말과 행동... 오랜만에 정말 한국사람을 만난 것이다.  주문을 하려고 하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내가 알아서 줄 테니...'...  그는  이리에 선생에게도 가지말고 앉으라고 하더니... 숯불구이, 철판구이, 갈비탕, 불고기를 골고루 내 왔다. 김치와 마늘도 썰어도 ...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다. 



끝없이 나오는 생맥주 때문에 나도 이리에 상도 과음을 했다. 이리에 선생은 본의 아니게 술자리가 시작되니까...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노리코 상이 도중에 와서 남편에게  2만엔을 남편에게 찔러주고 가신다. 당연히 내가 밥과 술을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에 상은 오사카 미쯔비시에서 40년 근무하고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우단구라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운영한 3년 동안  1700명 가량의 순례자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꽤 자주 온다고... 


자신도 순례를 14번 했고, 아내도 4번 순례를 했으며,  순례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센다츠(先達 )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은퇴 후에 이런 삶... 멋지다. 


안수창씨는 자신을 재일동포 3세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살길이 막막해 고향인 경남 함안을 떠나 일본으로 온 뒤, 돌아가지 못했다고... 자신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은, 그나마 '조선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아... 그래요. 나도 얼마 전 우리학교라는 영화를 봤어요'



안수창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를 어리게 보고...'여자 친구 있어요?' 했다가... 큰 딸이 대학생이라고 답을 하니까...몇 살인데 대학생 딸이 있냐고... 동갑인 걸 알고느 내게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는 이국 땅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온 일들, 남과 북으로 찢긴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 성장기에 겪은 필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해 짧게 말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성장한 부모님이 1945년에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면 ...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같은 것뿐 아니라 ... 민족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점에서도... 우리는 말이 잘 통했다. 


밤 11시가 넘어선 뒤에는 셋 다 만취한 뒤... 안수창 친구는 우리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태극기를 사이에 두고 박지성과 북한의 국가대표 안영학의 유니폼이 양옆에 걸려 있었다.  그가 일본의 이 외진 시골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아온 일이 어떤 일이었을지... 새삼 가슴이 아파왔다.  '어떤 일본 사람은 막 욕을 하기도 해요. 일본 땅에서 왜 조선사람 티를 내냐고' 



그는 내게, 한 달 가까이 이국 땅에서 자전거 순례를 하는 일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허락해준 네 부인이 더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아내와 아들을 불러다 인사를 시키고... 여행중에 먹으라며... 우리나라 라면과 두유를 선물로 안겼다. 결국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자정이 넘어 우타쬬의 거리를 달려 우단구라로 돌아왔다. 이리에 상은 그간 이 집을 거쳐간 한국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준다며 방명록을 펼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려고 했다... 


' 너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지금 자지 않으면 안 돼요.' 


심야에 소란을 떠는 우리를 향해 자다 깬 노리코 상이 나지막하게 제지를 했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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