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6/11 다카마스 토요코인호텔~도쿠시마 1번 료젠지 앞 게스트하우스

운행거리 88.68km



오늘이 순례 마지막이 될까? ... 

 

역시나 새벽에 잠이 깼다.  여섯 시까지 침대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 7시에 로비에 내려가 밥을 먹고 올라왔다. 짐을 다시 꾸리고 자전거에 패니어를 장착하고 8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 



출근길 시내를 거쳐 야시마(屋島)로... 


편의점에 들러 순례 기간 내내 거의 매일 아침 한 통씩 마신 500 ml 카페오레를 오늘도 마셨다. 쏟는 땀이 엄청난 때문인지...  작지 않은 이 음료 한 통을 단숨에 마시는 일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20일 넘는 기간 동안 내내 잘 먹고 소화도 잘 되고 속도 편했다.


어제 저녁에 이미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기에 더 이상 경로를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곧장 시내를 가로질러 야시마에 들어가... 가타모토(潟元)역에서 멀지 않은 등산로 들머리로 직진... 어젯밤...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근길 주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릿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야시마지(屋島寺)는 섬의 산마루에 있다. 한 정거정을 더 가면 고토덴야시마(琴電屋島)역 앞에 자동차도로(屋島ドライブウェイ)를 오르는 버스(100엔)도 있지만, 다카마쓰 시내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등산로 들머리를 찾아갔다.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뒤 산 비탈 주택가 골목길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핸들바백만 메고 가볍게 산길을 올랐다. 



참배 때문인지, 건강을 위한 아침 산책인지...  산을 오르는 주민들이 많았다. 대개 주부들이나 은퇴한 노인들이다. 

더러 젊은 순례자들도 눈에 띄었다. 남산이나 북악산처럼... 시내를 조망하면서 느긋하게 오르는 도시의 산이었다. 만약 다카마쓰로 그저 관광을 온다면, 다카마쓰역에서 야시마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한 시간에 한 대 다닌다는 버스를 타고 이 절에 오르면 ...산정에 있다는 전망대에서 세토내해를 조망하면 되겠다. 



당나라의 이름난 스님이었다는 간징(鑑真)화상이 754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규모도 크고 ... 분위기도 차분하다.  



 어지간히 빨리 산을 오르는 ...나를 추월해 번개처럼 달려 올라와  참배를 하고 말을 걸 짬도 안 주고 역시 산을 달려 내려가던 젊은 헨로.... 





어제 저녁...   서서히 어둠이 짙어가던 늦은 저녁... 조금은 막막한 심정으로 야시마 섬을 한 바퀴 돌 때...  섬의 중턱으로 나 있는 도로를 횡단해 이어져 있던 도보 순례길...   



야시마지에서 이렇게 85번 야쿠리지(八栗寺)로 도보 순례길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야쿠리지까지는 걸어서 6.3km


10시30분 야시마지 참배를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로에서 아다찌 상과 다시 마주쳤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사흘 만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나는 내려가면서, 산길을 올라오는 아다찌 상을  그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한 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 순례자들이 입고 다니는 하쿠이(白衣)를 입고 거침없이 산길을 올라오는 모습이 놀랍기까지 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달리던 해안의 11번 국도며 징징거리며 올랐던 수많은 고갯길들을 ... 저 어린 여자가 고스란히 자전거를 타고 거쳐왔을 게 아닌가...  



"아다찌 상,  반가워요. 괜찮으세요? " 

"김상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다시 만나면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 ? " 

"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 세 곳의 기념품이에요."  


아다찌는 매고 다니던  힙색에서 나무로 된 작은 기념품을 꺼내 내게 주었다. 


오헨로상들이 순례에 나서기 전에 교토에 있는 도지(東寺) 등  대표적인 사찰 세 곳에 들러 순례자들의 필수품인 금강장과 삿갓과 작은 가방( 頭陀袋 ずだぶくろ)을 미리 장만하는 모양이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이 작은 기념품을 받고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다찌, 나는 아무 것도 줄 게 없네요. 어쩌죠. " 

"아, 괜찮아요."   


그는 오늘,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 순례를 마친 마치면 오후 서너 시경일 텐데.. 그 뒤에 1번 료젠지까지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 비로소 오늘 순례가 끝나는구나...' 

나는 아다찌의 말을 듣고서야 순례가 오늘 중으로 끝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순례를 하는 도중에 뒤늦게 알았지만,  순례자들은 88번 사찰까지 순례를 마친 뒤 다시 1번 료젠지에 가서 코오보 대사께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고 보고를 하고... 거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도쿠시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카야마에 있는 고야산까지 가서 참배를 함으로써 비로소 순례가 마무리되는 완전히 '결원(結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  


"글쎄,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해 놓은 건 없어요." 

"그래요? 저는 오늘 료젠지까지 갈 예정입니다. 절 앞에... 순례 시작할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원하시면 거기서 묵으셔도 될 겁니다. " 

" 그래요? 만약 저도 료젠지에 가게 되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을까요?" 

" 오헨로상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니 아마도 괜찮을 거예요." 



고야산까지 갔다 오는 것은 사흘 뒤인 14일 오전에 예약해둔 귀국 일정 때문에도 안 되고... 그렇다면 이 순례의 출발점이었던 료젠지에는 가야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귀국하는 날은 아침일찍 공항에 가기 바쁠 테고... 오늘을 빼면 이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료젠지에서 오늘 하루를 자더라도... 다음 날은 다카마쓰까지 80km 가량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귀국 전까지 단 하루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일단, 사찰 순례를 마무리 하자... 


아다찌 상과 또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산길을 내려와  자전거를 세워둔 지점으로 돌아왔다. 경사가 급해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마을쪽으로 50m쯤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아다찌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시코쿠 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아다찌는  도쿄에서는 도둑 때문에 자전거를 길에 세워둘 수 없는데 시코쿠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고...  일본도 대도시에서는 자전거 도난이 흔한 모양이다. 



시내 주택가인데도 저수지가 있다. 인근에 농경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84번 야시마지에서 85번 사찰 야쿠리지(八栗寺)까지는  5.5km. 11번국도를 따라 시내를 달리다가 전차 야쿠리(八栗)역 인근에서 야쿠리지 표지판을 보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가면 된다. 



야쿠리지는 산 중턱에 있지만... 



언덕을 조금 오른 뒤에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된다.  케이블카 코겐잔(五劍山)역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것을 타고 올라가기로...  


11시 45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  85번 야쿠리지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케이블카라고 하는 공중에 매달려 가는 운송 수단을 일본에서는 로프웨이라고 하고... 



급경사면에 굵은 쇠줄을 감으며 올라가게 되어 있는 기차를 가리켜 케이블카라고 ... 



야쿠리지(八栗寺).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이곳에 밤 여덟 알을 묻어두고 무사귀환을 기원한 뒤 떠났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하늘에서 자오곤겐(蔵王權現)이  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내려오며... 이 땅이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고했다고...  코오보 대사가  그 칼들을  다섯 개의 산봉우리 묻었는데, 다섯 개 중 산봉우리 한 개는 3백년 전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   




동일본 부흥기원... 아마도 후쿠시마가 있는 동북지방의 복구를 염원하는 포스터인 것 같다...



후쿠시마는 이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파괴된 핵발전소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방사성물질을...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미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성물질이 체르노빌 사고 때의 열 배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핵폐기물은 보관하는 것 말고는 근원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없는 상태로... 핵발전을 지속하는 것... 그 자체가 인류의 비극적 전망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천재지변이든 전쟁과 같은 재난이든 사고나 고장이든... 핵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 일 것이다.  발생 시점이 문제일 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일본의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다행히 날이 맑다. 하늘도 파랗고.



도보 순례자들은 곧장 산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12시 15분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



야쿠리지 역 앞에서 86번 시도지(志度寺)까지는 8km. 오르막 없는 평탄한 시내 도로를 달리게 된다. 야쿠리지에 올라가 참배를 하고 내려오면서, 아다찌 상과 또 마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순례의  마지막 순간은 고요하게 마무리 하고 싶었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일지라도... 마주치고 인사하고 그런 일들이 조금 성가시기도 하고 

아다찌상에게도 일생에 ... 몇 번 없을 큰 프로젝트일 시코쿠 순례가 

우연히 자꾸 마주치는 외국인 아저씨 때문에 산란스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싶었다. 


마침 점심 시간도 되었다. 절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케이블카 역 앞에 있는 우동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조금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했다. 


길을 찾는 면이나 도로 주행능력 면에서... 아다치는 남자인 나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우월한 것 같았다. 며칠 전 처음 만난 날... '당신 운동선수였냐? ' 이렇게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다시 시내를 달린다. 


그런데, 86번 시도지(志度寺)를 앞둔 지점에서 건널목에 앞서가고 있던 아다찌 상과 다시 만났다. 이 여자는 점심 밥도 안 먹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야시마지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했을지도 모르겠다.  



86번 시도지(志度寺)


먼 옛날, 당나라로 시집 갔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中臣鎌足 614~669)의 딸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공양물로 삼아 여러 보물들을 오빠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에게 보냈는데, 사도만에서 폭풍을 만나 보물들 가운데 구슬 하나를 바닷 속 용왕에게 빼았기고 말았다. 


후히토는 이 구슬을 찾으러 바닷가에 있는 이 마을에 왔다가 이곳에 사는 해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낳은 사람이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 뒤에 해녀는 남편의 신분을 알게 된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해녀는 남편에게 아들 후사사키를 정식으로 후지와라 집안에 들여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신의 몸에 밧줄을 감고 그 구슬을 찾으러 용궁으로 들어갔다. 이를 알아차린 후히토가 급이 밧줄을 건져올렸으나 이미 해녀의 몸은 용신에게 물어뜯긴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의 구분 없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런가 보다... 자신의 몸이 물어 뜯기는 한이 있어도  자식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보내놓으면 그것으로 보람을 삼는...   


나는 본당에 들러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나와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아다찌는 본당을 거쳐 대사당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87번 나가오지(長尾寺)까지는 곧장 북쪽으로 뻗은 3번 국도를 따라 섬의 내륙쪽으로 7.3km 가량 달리면 되었다.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밀밭이 있길래 일부러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도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모를 심는지는 모르겠다. 


단 두 개의 절만 남았다. 절까지 가는 동안 오렌지타운이라는 전원주택단지 같은 곳이 있었다. 


도로 한 곳도 허투로 방치되어 있지 않고 잘 관리되고 있는 사회. 공중 예절을 잘 지키며, 이방인들에게도 친절한 주민들. 외견상 일본은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맑고 쾌활한 모습...방과 후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노는 아이들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스치듯 얼핏 보기에...  어른들은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였고 지쳐 보였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한국과 일본은 농업이 신통치 않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농업을 포기하고 제조업과 수출에 기대 경제를 급격히 발전시킨 방식에서 한국에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핵발전을 기반으로 자국 농업을 팽개치고 무역에 의지해 경제 규모를 부풀려 가는 방식이 ...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허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일 만큼이나 허망한 일이 아닐까. 



오후 2시 반, 87번 나가오지(長尾寺)에 도착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텅 빈 드넓은 사찰 경내... 그리고 순례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어떤... 홀가분한 심정, 그리고 아쉬움 ...  



쇼토쿠 태자가 절을 열었다는 설도 있지만,  덴표(天平)11년 쿄키보살(行基菩薩)이 열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쿄키보살이 땅을 걷고 있을 때  한 버드나무에 신령스러움을 느껴 그 나무에 관세음 보살상을 새겨 이 절에 본존으로 안치하고 법상종(法相宗)을 창건했고,  그 후,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로 떠나기 전에 이 절을 찾아 연초 7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 풍습이 현재까지 계승 돼 매년 정월 칠일,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코오보 대사는 다시 이 지역을 찾아와 불교의 밀교 경전인《대일경(大日經(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을 돌 하나에 한 자씩 새겨 공양탑을 세우고 법상종에서 진언종으로 개종 했다고 한다. 


*《대일경》은 7세기 중엽 서부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고 선무외(善無畏: 637~735)의 한역과 

9세기 초 인도 승려 시렌드라 보디와 티베트의 번역관 페르체크가 공역한 티베트어 역본이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천황이 귀의 한 사원이지만, 전국시대에 전쟁에 휩싸여  본당을 빼고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가 에도시대에 번주  마쓰다이라가 중창하고 이때 다시 천태종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만 남았다. 마지막 22km... 계속 오르막이다.  도중에 있다는 헨로교류살롱까지는 5Km 남짓, 거기서부터 오쿠보지까지는 또 다시 15Km 남짓... 역시나 계속 산을 올라야 한다. 


나가오지를 빠져나오는데 ... 아다찌가 막 도착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86번 시도지에서 87번 나가오지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나는 GPS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평속 30km 가까이... 빠르게 달려왔는데... 그는 내가 본당에 참배하고 납경을 받는 정도의 짧은 시차를 두고 절에 도착한 것이다. 역시 대단하다. 



이제 선거가 임박했을 것이다. 시코쿠를 도는 동안 선거 포스터를 계속 보아왔다. 

역시나 자민당의 구호는 '성장' 이다. '희망과 성장' 


경제규모로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에서도 보수 여당의 구호는 역시나 성장이다. 일본 경제가 더 성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될까... 만약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믾다면 그것은 경제 때문인가...  



사민당이나 일본 공산당의 구호는 이에 비해 탈핵이나 평화 같은 것이었다.  일본도 우리도 경제성장이나 부의 집적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음의 평화는 돈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세대처럼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인류는 전 세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없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 수출액은 1966년 1억달러... 기억 속에도 우리가 겪은 유년시절은 세계 최빈국의 수준이었다. 1970년대 1천불소득 100억수출을... 초등학생들도 노래가사처럼 외고 다녔다. 2013년 한국의 1인당 연간 소득은 2만4천 달러에 가깝다고 한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예가 드물고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조금은 으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자살률, 이혼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살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제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일... 이웃과 함께 사는 일에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르막을 2,3 km 가량 올라간 지점에... 큰 인공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마에야마 오헨로교류살롱 (前山おへんろ交流サロン)과  나가오 미찌노에키 (道の駅ながお)가 있었다. 

오헨로 교류살롱은...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센터, 자료관 역사관 같은 곳이었다. 



섬 전체를 모형을 만들어 놓고 88개 사찰을 표시해둔 모형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저 험준한 산과 계곡을... 패달을 밟으며...때로 비에 젖어 밤길을 달리며... 지나왔구나... 




고승들의 유적들도 전시 돼 있고...



절들마다 전해오는 전설도 ... 아이들을 위해 쉽게 만화로도 설명해 놓았다. 



30분 가량 구경을 마치고...나와 맞은 편에 있는 미찌노에키에 들러 음료수를 사 마셨다. 

이제 산길을 15km 꾸준히 올라가는 수밖에... 외줄기 3번 도로를 따라 꾸준히 오르다가... 한 차례 377번 국도로 좌회전 해서 5km 남짓 달리면 88번 사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도보 순례자들이 걷는 길과 자전거가 가는 길은 간간이 만나기는 하겠지만... 길이 겹치지 않는다. 자전거 순례자를 위한 안내 스티커는 좀처럼 보지 못했는데...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외줄기 도로에서 막판에 발견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 외진 산길... 아다찌는 앞서 갔는지 뒤쳐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절을 1km 앞둔 지점에서 자전거 끌고  걸어 올라가고 있는 아다찌와 또 만났다. 나는 기어를 기어를 최대한 낮추고 신음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가며 그를 추월하며 손을 흘들어 인사를 했다. 그는 '어라' 하고 잠깐 놀라는 소리를 냈다. 



오후 4시 40분 드디어 결원(結願)의 성지...  88번 오쿠보지(大窪寺)에 도착했다. 


해발 782m  도봉산 정상 정도의 높이... 산중이라 해가 더 빨리 져  산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본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미즈야에서 역시나... 죄업의 근원이라는 손과 입을 헹구고...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 

가자! 가자! 저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저 온전한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반야심경은 한 번에 독송 하기에도 적당히 짧으면서도 불교의 핵심이 다 추려져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다. 

한 자 한 획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는 완벽한 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현실에 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저 높은 경지로 가자는 이 마지막 진언이 특히 가슴을 치곤 했다.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 이 말을 되뇌일 때면 살면서 겪게 되는 째째하고 비루한 일들쯤 아무 것도 아닌 듯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 막막한 저녁시간에 나는 틈틈이 반야심경을 베껴 쓰면서 절망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곤했었다. 그 뒤로도 살아오는 동안 틈틈이 ... 그랬다.  



납경소 앞에는 순례를 마친 이들이 코오보 대사의 분신처럼 순례길 내내 함께 걸어온 금강장(즈에)을 봉납하게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문예반 지도교사며 시인이던 국어 선생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은 수업에 들어와 한 마디도 안 하고 오늘은 '묵언의 날' 이라고...칠판에 쓴 뒤 한 시간 내내 판서만 하다가 나가시는가 하면... 하루는  학과 진도와는 무관하게...  반야심경을 한 줄 한 줄 써주시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본래 수업시간에 다른 책 읽기가 특기였던 나로서는... 어느 수업보다도 그 시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 생전에 틈틈이 독송하시던 반야심경이 그런 의미였구나...싶기도 했고 말이다. 




경내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불길을 보존해 놓은  곳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본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라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염원도 클 것이다. 진보적인 야당들이 평화헌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불 앞에서 동전을 보시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두 번 다시... 지구 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핵폭탄을 투하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본당 참배를 마칠 즈음 아다찌가 도착했다. 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김상 잠시 뒤에 참배 마친 뒤에 함께 사진 찍어요."   



나는 22일만에... 그는 나보다 오륙일 정도 더 달렸다고 했으니 거의 한 달만에... 순례를 마친 것이다. 

"아디찌 상 축하해요. 당신 참 대단해요. 깜짝 놀랐어요." 


그는 료젠지로 가겠냐고... 다시 내게 물었다. 이미 시간이 다섯 시가 넘었다. GPS 상으로는 40km 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지금부터 달려도 도착할 수 있겠나?" 

"내리막길이니까...  빨리 달리면 ..." 



젊은 여자가 순례를 마친 일이 일본인 순례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남자 순례자가 좀처럼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아다찌를 따라다니면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대화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출발이 20여 분 늦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이 될 일본의 산골 마을을 지나치며 ... 30km 정도 빠른 속도로 줄곧 달렸다. 



산을 내려가면 도쿠시마 시가 나올 것이다.  내가 주춤 주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만큼 경사가 가팔랐지만, 앞서 달리는 아다찌는 무서운 속도로 내리막길을 달렸다. 덕분에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다. 



도중에 아다찌가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예약을 해주었다. 


산을 다 내려온 다음에야...사진을 찍을 여유가 생겼다.





도중에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투숙객들이 할인점 마루나카로 마중을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라는 젊은 친구(이름도 잊었다)와 젊은 여자 두 사람... 이들 모두 새로 순례를 떠날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다치는 출발 전에 도쿄에서 와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고 했다.  


장을 보길래... 저녁을 같이 지어먹는가보다...싶었는데... 각자 먹을 것을 고르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식료품은 일본이 훨씬 싼 것 같았다.  



사진 속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조금씩 대화를 이어갈 수록...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어쩐지 나를 빈정거리는 느낌도 들고... 비열하게 비웃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얘가 왜 이러지? '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게스트 하우스는 료젠지 정문 앞에서 길 건너 곧장 뻗은 골목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장을 보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저녁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마당도 있고.. 거실과 방이 서너 개 가량 있는 꽤 넓은 집이었다. 우타쬬에 있던 우탄구라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규모나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지... 젊은이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이 게스트 하우스는 게으른 대학생들이 단체로 자취를 하는 집 만큼이나 어수선하고 황량했다.  우탄구라의 두 부부가 정성껏 가꿔놓은 집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숙박비는 2천엔. 침낭을 소지하고 있어 침구(시트와 담요)를 쓰지 않으면 2백엔 할인해서 1800엔이라고 했다. 

식탁에 있는 밥솥에서 밥은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밥이 떨어지면 자유롭게 쌀 포대에서 쌀을 덜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차례를 기다려 샤워를 하고... 장 봐온 반찬거리들로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사 가지고 온 캔맥주도  가볍게 마셨다. 함께 마실 줄 알고 여섯 개 들이를 사왔는데 각자 자기 것을 마시는 눈치라 두 캔만 마시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기부했다.


사진 속에 있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갸냘픈 여성들도 다음날 자전거 순례를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아다찌와 달리 자전거도 기어도 제대로 없는 생활자전거인데다  매사가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이들도 조금씩 단련이 되어 가리라... 


후지산 인근에서 왔다는 가와베 군, 나가노에서 왔다는  다카하시는 자전거 순례를 거의 끝 마쳐간다고  했다. 오카야마 아오이... 등 


이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젊은이들은 대개 여행 경험담을 나누며 순례를 마친 사람과 ㅅ작하는 사람들이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데... 


주인장은 나를 의식한 때문인지... 계속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런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어느 정도 상대의 의중을 읽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외교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이니까 서로를 잘 이해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식으로... 


그런데 그 자는 끝나 속내를 드러내고 계속 도발을 했다. 


유튜브에서 나찌나 군국주의 일제 시대를 연상케 하는...  일본 사람의 웅변조 연설을 틀어주면서 보라고 했다. '제군들... ' 하면서 악을 쓰는 영상 속의 사내는 대화혼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다. 도쿄대 강당에서 운동권 학생들과 혼자 맞서 토론을하고, 자기 집 테라스에서 군중들을 향해 대중연설을 한 뒤  할복 자살을 한 미시마 유키오를 연상케 하는 그런 광적인 분위기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는 마침 한국인 잘 만났다는 식으로 내게 말을 툭 던졌다. 

"뭐가  달랐냐? " 

"일본은 조선에 학교를 세워 교육도 시키고, 철도나 전기도 부설해 주었다. 조선을 도왔다. " 

"...?! ...  일본 학교에서는 역사를 그렇게 가르치냐?  일본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조선에 학교도 전기도 철도도 없었을 것 같냐? "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 사람 수십 만 명을 죽이고 전쟁과 징용에 끌고 갔고, 수십 년 동안 식량과 자원을 수탈했다. 독일이 과거를 참회하고 철저히 청산하는데 비해 일본은 자신들이 한 일을 인정도 못하는 것 같다."     


일본 친구들이 오히려 주인장에게 '듣기 싫은 사람들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요구 했다. 주인장의 극단적인 의견 피력도... 다른 투숙객들이 주인장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것도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흔히 봐 오던 이본인들의 태도와는 달라 의아했다. 


그냥 짐을 꾸려서 그 집을 나올까 하다가... 그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그냥 꾹 참고 자기로 했다.  


나는 평소에... 국가나 민족을 강조하는 데 반발심 마저 가지고 있다. 월드컵 응원의 광기도 거북하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소통하는데  국적이나 피부색,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그 신념이 시험 받을 기회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국가를 강조하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을 혐오도 하고 차별도 하고  침략도 하고 수탈도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전쟁과 비극의 씨앗이었고 말이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두 나라의 시민들이 서로를 적대시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지막 날 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맛 보았다.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 조금만 자제력을 잃었다면 개처럼 끌고 나가 그 놈을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무슨 소용이랴... 이 자들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면... 

그것이 일본 소시민들의 수준이고 하나의 흐름이라면...  한일 관계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떠들썩한 그 방을 빠져나와 침실로 쓰는 다다미방에 와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일본 총선은 어쩐지 해보나 마나일 것 같았다. 핵발전소 폭발까지 일어나 침체될 대로 침체된 일본은... 이렇게 또다시 밖으로 원인을 돌리면서 여론을 전환하려고 하는구나... 


날이 밝으면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여행의 마무리가 이렇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던 바였다. 유감스럽게 ... 



음료수 600(4회)  점심 우동 450엔  간식 500엔  납경 450엔 , 게스트하우스1800엔   저녁 아침 먹을거리 장본 것 2000엔  

4일째 - 5월 24일(금) 요시노가와시 요시노여관~도쿠시마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17번 이도지

주행97.56km


사찰들이 납경을 시작하는 시간은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다. 문을 닫아놓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 시간 동안 순례자를 받는다. 여관을 관리하는 청년(?)은 아침 여섯시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여전히 허둥대면서 패니어와 랙팩을 정리하고 여섯시가 조금 넘어 식당에 내려갔다. 다른 순례객들은 이미 짐을 꾸려 여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집 아침밥이 이렇겠지 싶은 그런 밥상.
미소 된장국과 베이컨, 계란 프라이, 약간의 채소, 맛없는 일본 김, 열빙어 두 마리 그리고 오차. 입맛이 없었으나 하루 동안 흘릴 땀을 생각하며 남김없이 먹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가장 높고 험난한 산길 위에 있다는 12번쇼산지 (焼山寺)까지 자전거를 끌고 갈 일이 걱정이 돼  여관 종업원에게 지도를 펼쳐 놓고 상의를 했다. 혹시 11번 후지이데라에서 가장 단거리로 표시된 산길로 자전거를 가져갈 수 있는지...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자전거를 여기에 두고 걸어서 갔다온 뒤 13번 다이니치로 가는 것은 어떤지... 왕복 12시간은 걸릴 테니 무리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할 때 가장 합리적인 루트는 뭔가요? 
그냥 요시노가와시에서 도쿠시마쪽으로 뻗은 192번 도로를 따라 10km 달리다 우회전해서 산을 넘어가 20번 도로를 따라 쇼산지 뒤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가는 게 제일 낫다는 대답.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도 오르막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아... 그렇군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정해진 고난을 피해가거나 생략할 수는 없다. 단념 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래, 가자. 어차피 그러자고 시코쿠에 온 게 아니었나. 



7시, 어제 저녁에 황망하게 들렀던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까지는 그냥 빈 자전거로 올라갔다. 여기까지도 고도가 상당했다. 어제 달린 1번부터 10번까지 절들이 있는 산은 요시노가와 건너 편 산맥처럼 뻗어 있었다. 쇼산지는 반대편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본당 왼쪽 옆 산길로 쇼산지 가는 길을 아리는 핸로미치 표지판이 있었다. 

어제 10번 절기리하타지 앞에서 만났던 아저씨를 만났다. 반가웠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 사람도 순례를 하는 오헨로상인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아, 어제 만난 사람이구나. 어디서 잤어요." "요 아래 요시노여관에서요. 캠핑장도 무료로 잘 수 있다는 젠콘야도도 못 찾고 시간도 너무 늦어서... 쇼산지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걱정했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 그래 , 같이 갑시다." 
여관에 내려가 짐을 매달 때까지 근 이십 여분을 그는 길가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야마시타(山下) 나이는 56세라고 했다. 


 야마시타씨와 함께 7시반 요시노 여관 앞에서 출발해 요시노가와 시내를 10km쯤 달린 뒤 20번도로로 우회전 이때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 



야마시타 상이 길을 착각해 오르막 하나를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그래도 동행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 오늘은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17번 절까지 간 뒤에 바닷가 야영장까지 가는 게 목표인데...' ' 무리가 아닐까'  '야마시타상은 어디서 잘 생각인가요?' '어디라도 좋아'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이미 걸어서 세 번 순례를 했고 이제 네 번째 순례를 자전거로 하고 있다고 했다. 

오십대 중반에 혼자 순례를 하면서... 어디서 잠을 자도 그만이라는 이 사내... 나는 그리스인조르바가 떠올올리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의 자전거에는 기어가 없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내게 20번 도로를 따라 가면 쇼산지까지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그와 헤어지는 게 서운해서 그래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늦어질 수 있다며... 먼저 가라고 ...  


터널 앞에 멈춰 뒷등을 켜고 심호흡을 했다. 갓길 폭도 좁아 긴장이 됐다. 터널을  통과한 뒤에는 작은 산맥 뒷편으로 나란히 뻗은 하천을 따라 산골 마을이 펼쳐져 있다. 터널 두 개 통과한 뒤 하천을 끼고 열시 반 까지 줄곧 달렸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도보순례자들이 점점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니치지로 향하는 이들일 것이다. 



히로노소학교 (広野小学校) 인근 마을에서 구멍가게에 들어가 선블록 (600엔) 생수2리터(240엔) 쥬스(220엔)을 샀다. 시골로 들어온 게 실감났다. 모든 게 비싸다.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해준다. 


깨끗한 계곡과 울창한 숲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는 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순례길 가운데 가장 고즈넉한 길이 이 구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은 예외없이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교통안전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특히 이 동네에서는 하교길 초등학생들을 위해 동네 경찰과 학부모 교사들이 나와서 별로 차량 통행도 없는 도로에서 대단한 작전이라도 펼치듯이 ... 하교지도를 하고 있었다. 중고생들은 예외없이 하얀 핼멧을 쓰고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 한쪽 차선을 막고 도로공사를 하는 곳에서는 꼭 양쪽에 교통 통제를 하는 사람이 두 사람 서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작업자는 굴삭기 기사 한 명인데 교통통제 인원은 두세 사람이나 되는 곳도 있었다. 



뭐든 대충 넘어가는데 익숙한 우리 눈에는 조금 과하다 싶도록 ... 일본 사람들은 매뉴에 원칙을 고수하는 것 같다. 배울 만한 점이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전커넥션과 정직하지 못한 도쿄전력과 무책임한 일본정부의  대응...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칙대로, 안전한 나라를 경영하고 있다는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흔들리게 했다. 


조세고교 가미야마분교(城西高等学校 神山分校) 부근에서 강을 건넌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쇼산지가 있는 산을 오르게 된다



이 지점이 쇼산지에 올랐다가 돌아올 때 갈림길인 모양이었다. 


 오르막 길에 어제 사 둔 밀감과 에너지바, 물을 거의 1.5리터쯤 마셨다. 열한 시 경, 결국 쇼산지까지 4km 남은 지점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헉헉대며 올라오는 나를 길 두 사람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인 준과  스페인사람 카를로스. 



 준은 일본을 오토바이로 일주하는 중에 시코쿠에서는 걸어서 45일 예정으로 88번사찰을 순례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사람 카를로스는 헨로미찌를 순례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했다. 그는 내 자전거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나라 제냐?' '제이미스오로라는 여행용 자전거다. 미국메이커이지만 메이드인 차이나' 'ㅎㅎㅎ 지금은 모든 게 메이드인 차이나다' 


두 사람은 내려오는 길이었다. '두 시간 더 끌고 올라가라' 카를로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다리에 힘에 쪽 빠지는 것 같았다. 경사가 너무 급해 더 이상 끌고 올라가는 것도 무리였다. 오백미터쯤 올라가다가  해발 390m 지점에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랐다. 



쇼산지는 해발 790m 지점에 있다. 거의 백운대 높이에 가까운 고도다. 산 아래 마을들에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60kg은 족히 나갈 자전거와 짐을 떼어 놓고 걷는 일은 호흡부터가 평화로웠다.  

쇼산지 입구에는 어른 대여섯 사람의 품으로도 벅찰 것 같은 거대한 삼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부모님을 떠올렸다. 여행길에서 내게 말을 거는 할아버지들의 말투와 태도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끝내 재기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가난 속에서 마루에 앉아 붓글씨로 승상사당 하처심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장사영웅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 ... 두보의  시를 끝없이 되풀이해서 쓰시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올라와 정착한 동네가 돈암동이었다. 서울 성 밖이었고, 멀리 인수봉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산 비탈의 허름한 집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내게 아버지는 이 시를 해석해주시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며 조자룡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천하제일 청빈(天下第一 淸貧)' 이니 군자는 무소불위(無所不爲)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가 야속하셨을 것이다. 당장 끼니가 막연한데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시는 아버지가 말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내게 '어떻게 그 세월을 헤쳐나왔나 꿈만 같다.' 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래도 너희들 교육시키고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아낸 게 기적같은 일이었다.' 


산길에서도 걷는 길과 차도는 수시로 갈라졌다 합쳐졌다 하면서 산록에 있는 쇼산지까지 이어진다.  


자존심을 지키느라 이익과 상충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면이다. 조카들 가운데에도 몇이 그렇다. 


시코쿠미찌... 사코쿠 순례길을 안내하는 이 표지판을 앞으로 지겹도록 만나게 된다. 




절에 올라갔다가 자전거를 세워놓은 지점까지  내려오니 오후 1시. 눈물이 날 만큼 고된 길이었다. 터덜터덜 내려오다  적막한 삼나무 숲에 세워둔 제이미스오로라가 고요히 서 있는 광경을 보니...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오랜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대물 애착이 생길 지경이다


어쨌든 한 고비를 넘었다. 오후 1시반,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올라갈 때 그토록 아득하던 길이... 허무하게도 짧았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이치지(大日寺)까지는 27km. 과연 아침에 이길을 달렸단 말인가 싶게 길었다. 두어 번 길이 헷갈려 되짚어 길을 찾아야 했다. 골프장 앞 다리에서 강을 건너 다이이치지를 향해 가는 업힐 강변 구간을 외롭게올랐다.

 

언덕위로 올라선 뒤 다시 평탄한 강변길을 달리다가 야마시타 상을 만났다.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길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너 12번 쇼산지 갔다왔냐?' '야마시타상도?'  '길이 엇갈렸나? 이제다이이치가 바로 근처다. 너 참 빨리 달리는 것 같으니 네가 말한대로 17번 이도지(井戸寺) 까지 간 뒤에 야영할 수 있겠다.' 


 피난길에 헤어진 형제라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동행이 있다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될줄이야. 


'아,  잠깐 뒷바퀴가 이상하다.' 야마시타상이 내 자전거를 가리켰다.  뒷바퀴 크랭크에 비닐이 감겨 있었다. 일일이 띁어내느라 시간이 꽤 소요됐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뒤편 왼쪽 패니어 아래쪽 고리가 랙에서 빠져나와 바퀴와 마찰이 돼  반쯤 갈려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자전거가 매끄럽지 않다 했더니...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변으로 뻗은 21번 도로를 달려...오후 3시경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에 도착했다.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길가에 면해 있어 자전거를 대고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첫날 언덕 위에 있던 4번 사찰도 다이니치지(大日寺)였다다이니치(大日)라는 말이 ... 야마토(大和)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대한(大韓)처럼 국가정체성을 강조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야마시타 상이 납경소에 들어가 뭔가 이야기를 했더니... 납경을 해주던 노인이 나에게 들어와 보라고 했다. 한국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이 절의 주지 김묘선씨인데... 지금은 절에 없다고... 자신은 한국에 살며 가끔 절에 와서 납경장에 글도 써주고 있다고 했다. 어렴풋이 전날 9번 절 호린지 앞에서 탁발승이 말해준 한국인 '옥상'(おくさん, 奥さん) 이 이 절 주지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싶었다. 

 

김묘선 주지스님(?)은... 절 인근에 한국전통무용 강습소를 지어서 운영하는가 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연도 자주하는 유명한 고전무용가 이기도 하다고 ...한다.  다이니치지 옆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대규모 숙박시설도 있었다. 얼핏 듣기에 저녁과 아침밥을 포함해 1박에 7500엔 쯤 한다고 했다.  한국사람이 어떻게 88번 사찰 가운데 하나의 주인이 되었는지...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또, 한국의 절들처럼 비구와 비구니들의 승가공동체가 전국의 사찰을 거의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역시 다른 분위기가 있다는 점... 이것은 1200년 전통을 가진 88번 사찰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80 넘었다는 김선생은 이미 이 절을 거쳐간 한국사람들... 최성현씨나 현직 판사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국 사람이 시코쿠 88 순례를 하다니 대단하다며 무료로 납경을 해주고  빵과 떡, 사탕이 들어 있는 간식꾸러미를 건네주며 지칠 때는 단 게 필요할 테니 순례중에 먹으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포를 만나 반가웠다. 국가니 민족이니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쉽게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위축된 상태로 낯선 공간을 여행하다가 한국사람을 만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까지 전해들으니 괜시리 콧끝이 찡해질 지경이었다. 

다이니치지를 나오며 야마시타 상은 또 '다시 만나자' 며 앞서 가라고 했다. 순례길이 어차피 한 길이니 또 만날 일이 있겠지... 하며 이번에도 범상하게 헤어졌다. 


14번 절 죠라쿠지(常樂寺)는 다이니치지에서 2.3km 떨어져 있다. 강을 건너 만나는 마을 뒤로 올라가 있는 산 기슭, 조그만 호수 위에 ... 바위를 그대로 조금씩 파내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15번 고쿠분지(国分寺)는 골목을 끼고 조금 돌아나오니 있었다. 불과 0.8km. 



단체 참배객 한 할아버지가 '너 어디서 왔냐? 한국에는 88개 절이 없냐? 나는 부산에 가봤다. 날이 더구니까 물을 자주 마시고 자주 쉬고 저녁 다섯시까지만 달린 뒤에 꼭 멈춰서 쉬어야한다. ' 이런 말을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감사하다고 답을 하니 헤어지면서 '간밧데!'  외쳐주었다.


 고쿠분지에서 16번까지는 작은 골목길 사이로 달려야 했다.  이날부터 오후 4시는 심리적인 제한선 같은 게 되었다. 4시부터는 새 절을 찾아가기보다 잠자리를 물색해야 한다... 첫날 요시노여관에서 엉겁결에 자면서 깨달은 점이다. 실은, 서울 바이클리에서 강의를 하던 이영덕 사장님도 이 점을 강조했었다. 달래 경험자들이 그런 조언을 했던 게 아니었다. 



16번 간온지(観音寺) 까지는 1.8km. 이제부터는 시내 주택가를 달려야 한다. 


도쿠시마시내까지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 오전에 달리던 호젓한 산길들을 떠올리면 웅성거리는 시가지와 전차와 밀려다니는 자동차... 밀집해 있는 주택들 모두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집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다. 




사찰 옆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신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신자보다는 신도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17번  이도지(井戸寺)에 저녁 5시경 도착했다.  


훗날에야 알았지만... 이날의 여정은 무척 무리를 한 것이었다.  가장 난코스라고 여기는 쇼산지를 올라갔다 내려온 뒤... 다시 도쿠시마 시내까지 ... 아직까지 잠자리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저녁이 다 됐다. 

 



마지막 순례자들이 빠져나가자 절 마당에는 긴 그림자와 적막감만 남았다. 



목표로 삼은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해변 캠프장까지, GPS에서 가리키는 직선거리는 9km미터. 어두워지기 전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힘을 냈다.



한 시간쯤 달려 도쿠시마 시내 마트에서 연어 세 토막 (180엔) 우유 500 미리 두 개 작은 팩 1개 김치 한통 (260엔) 사서 우유 한 팩은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엄청 먹어 대지만 소모량 너무 많아 먹어도 계속 허기가 졌다. 


저녁 6시가 전후로 퇴근길 자전거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다들 바쁘게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틀 전에 묵었던 곳도 도쿠시마시였다. 엉겁결에 와서 자고 간 도시. 도쿠시마시는 도쿠시마현의 중심도시이고... 시코쿠에서 가장 큰 도시인 것 같은데... 여전히 내게는 잠 잘 자리가 모호하다




gps가 가리키는 캠핑장을 찾아 가려고 보니...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아, 저 다리를 넘어가면 최단거리로 캠핑장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하고 다리에 다가갔으나... 자전거 통행제한... 자동차 전용다리였다. 또 다시 5km 가량을 시내쪽으로 되돌아와  최대한 보수적인 선택을 하면  도로를 따라 바닷가에 있다는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캠핑장에 접근해보려고 노력했다. 


아래 보이는 언덕 너머 바닷가 끝 지점쯤에 캠핑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속이 탔다.

 

마지막에는 언덕을 따라 마을길을 계속 돌면서 바닷가에 인접한 접근로를 겨우 찾았다.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는 500미터쯤 되는 언덕을 하나 넘는 것이었다.  조깅을 하는 젊은이가 있길래 ...언덕 너머에 캠핑장이 있냐고 물어보니... 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달려내려갔다. 이제는 캠핑장이 없대도 아무데나 공중 화장실 근처에라도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안 공원에는 해수욕장 앞에 넓은 솔숲이 있고... 유스호스텔과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퇴근을 하고 테니스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공을 네트너머 넘기면서 '사요나라!, 아리갓또!' 하면서 유쾌하게 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쩐지 쓸쓸했다.

 

해수욕장 솔숲은 깨끗하게 관리된 조리대와 화염소(火焰所)라고 적힌 바베큐장이 함께 있었다. 나중에 여행하면서 들러본 거의 모든 캠핑장에는 이렇게 바베큐장이 마련돼 있었다. 아예 캠핑이라는 말 자체가 야외에서 하는 '숙박'의 의미보다는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는 장소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텐트를 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여가 서너 명씩... 몰려와 고기를 구워먹는 이들은 두어 팀이 보였다. 일단 텐트는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 수도가 있는 조리대에서 밥을 짓고, 연어를 굽고, 즉석 육개장을 끓여 저녁을 지어먹었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곳에서 캠핑이 가능하냐?' 고 물었더니 '아마 안 될 것!' 이라는 비관적인 대답... 게다가 경찰이 자주 순찰을 하기 때문에 ... 시내에 가서 호텔에서 자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까지...  



밥을 지어먹고 나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순찰차가 왔다. 어쩌면 좀 전에 조언을 해준 그 친구가... 수상한 외국인이 야영을 하려고 한다고 이른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꽤 넓은 솔밭에서...  순진한 인상의 경찰이 나를 향해 정확히 걸어와...'오늘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 88번 사찰 일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캠핑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숙박을 할 수 없다. 밥을 지어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래? 나는 구글에서 캠핑이 가능하다고 해 찾아왔는데, 지금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6시 이전에 떠날 테니 여기서 잠시 자고 가면 안 되겠냐?' '나는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곤란하다.' 내가 계속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는 할 수 없다는 듯...'남들 눈에 띄이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이렇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경찰관으로부터 야영 허가를 받은 것이다.

 

밤 9시...완전히 날이 어두워지고 인적도 뜸해질 때까지는 텐트를 펼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타 마시고... 해변가 산책도 했다. 아베크족들...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폭죽을 터트리고... 한강변의 공원처럼...  아름다운 해수욕장에 다들 불안한 마음도 없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해수욕장 한쪽 끝 인적이 드문 취사장에 텐트를 펼쳤다. 일단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고 쉰 뒤... 11시 넘어서 수둣가에서 코펠로 물을 떠 샤워를 했다. GPS 포인트가 가리키는 캠핑장이... 모두 다 야영이 가능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이날의 경험으로 알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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