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연휴를 맞아 국토종주를 결심하고 떠났지만, 

도중에 친구 아버님 부고를 받고 대구에서 돌아와야 했다. 

 

지난 2013년 시코쿠섬 88개 사찰 순례 이후 처음 떠난 장거리 라이딩. 

방치돼 있던 자전거를 다시 정비하고 늘어진 근육을 깨우고

무엇인가,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듯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 여행이었다. 

 

- 5월 3일~ 5월 5일 13:00 

- 서울 세검정~충주 앙성 능암온천(1박)~ 상주 자전거민박(2박)~ 대구 강정보, 대구서부고속터미널  

- 주행거리 약 400 Km

 

5월 3일 아침 7시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출발해 야심차게 부암동 고개를 넘어 청운동으로 내달리던 중 

뒷바퀴 흙받이가 덜렁거리면서 뒷바퀴를 간섭해 주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출발선에서 넘어진 꼴이라 사기가 꺾였다.

겨우 달릴 수 있게 지탱하고 용산 바이클리로. 

개점시간이 11시라고 돼 있어 옆에 있는 노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출발이 늦어진 일도 자전거 트러블이 조기에 드러난 일도 다 무엇인가 뜻이 있으려니... 

 

다행히 10시경 출근하시는 트랄라님을 만났다. 문제가 된 흙받이뿐만 아니라 

스포크 장력까지 꼼꼼하게 손 봐주셨다. 늘 그렇듯이 정말 감사합니다.TT  

 

트랄라님이 일일이 나사를 풀고 제 자리에 끼우며 조이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 없었나? 비로소 돌아보게 되었다. 

싯포스트에 달린 백에 멀티공구가 들어있었지만 ... 그만큼 나는 자전거와 멀어져 있었다. 

오전 11시. 출발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내심 첫날 목표로 한 충주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  

자전거 타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 
양수리까지는 가벼운 하이킹을 하듯 달렸다. 

 

오후 1시 양수리에 도착, 점심을 먹고 출발. 

양수리에서 양평이 그리 먼지도 잘 몰랐다. 수 많은 터널을 지나고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양평 미술관 인증센터 오후 2시30분 도착. 

 

아이들 어릴 때 10년 동안 양평 인근에서 살았기에 옛 생각이 많이 났다. 

서른 중반에, 도시를 벗어나 무엇인가 우리 방식으로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기르겠다고 겁없이 

시골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기질적인 문제인지, 그 무렵 일요일 저녁이면 어떤 우울감이 밀려들곤 하던 기억. 

무엇인가 왁자하고 떠들썩한 도시의 삶으로 부터 유폐된 기분.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양평에서 이포로 가는 길은 더 없이 아름답다. 

 

이포보 인증센터 오후 3시 30분. 

아무래도 충주나 수안보까지 가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주 인근에 강에서 퍼올린 모래들. 이른바 4대강 사업의 흔적이다. 

역사가 평가하겠지. 이 무모한 국토 개조 사업에 대해. 

강원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천보 오후 5시. 이제 어디서 숙박을 할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해가 지면서 조금씩 초조해지긴 했지만 해질녘 남한강은 고적하고 아름다웠다. 

트랄라님이 떠나는 내게 톡으로 국토를 천천히 감상하라시던 말씀...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우리 국토에 대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만이 아니라 이름난 관광지만이 아니라

우리 국토도 무척 아름답구나...


첫날 샤오미스마트폰에 나타난 주행거리 156km. 

능암온천 주변 무인텔에서 잤다. 

식당에 물어보니 새로 문 연 무인텔이 깨끗할 것이라고 해서... 

그러나 자전거여행자가 혼자 자기에는 비쌌고(5만원)

 

축협 고기매장에서 고기를 사서 인근식당에 가 

이른바 상차림비(4천원)를 받고 구워먹는 시스템인데 음식은 형편없고 

1인이 가도 2인분 차림비가 기본이며, 된장찌개 공깃밥 각각 다 돈을 계산하게 돼 있어 

나올때 보니 형편없는 식사에 고깃값을 포함해 거의 5만원 지불한 한 꼴이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의 무인텔도 편안치 않았다. 

아침 7시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 차가운 공기. 풀잎에 맺힌 이슬. 

청량했다. 간밤의 어수선한 잠자리를 충분히 위로해주는 아침 라이딩. 

그런데 같은 충주라고 해도 앙성에서 충주, 충주에서 수안보가 이리 멀 줄이야
탄금대 인증센터 오전 8시 30분 

 


수안보에서 올갱이 해장국을 먹고 11시 15분 다시 출발. 

이후로 줄곧 오르막 구간이 시작되면서  

국토종주 구간의 상징적인 고난구간 소조령과 이화령을 넘었다. 


소조령 11시45분. 


이화령 정상까지 5.2km 업힐. 

자! 가보자. 


한 발 한 발이 고통스러웠지만 숙명처럼 견디며 페달을 밟아가니 고갯마루에 도달했다.

사는 일도 그렇겠지.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꾸준하게 ...

이화령 도착12:40 
까막득하게 이화령 터널을 통과하는 차들이 내려다 보였다.

한 시간 남짓 거친 숨을토하며 패달을 밟아 

업힐 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13:05 다시 출발. 


고갯마루를 지나면 경상북도 문경이다. 백두대간을 넘은 것이다. 

 


보상처럼 주어진 내리막길을 달려 

순식간에 문경을 통과하고 불정역 인증센터 14:20 

 


오후로 접어들며 볕이 뜨거워졌다.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 


문경을 지날무렵, 아들 3형제가 모두 미국에 체류중인 고등학교 동창 아버님 부음을 받았다. 

유년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공유한 친구.

 

자전거로 출발하던 아침에, 아버님이 위독하신 것 같아 급히 

뉴욕에서 티켓을 끊었다고 전갈이 왔었고, 며칠은 버텨주실 것 같아 

종주 마치고 서울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바 있었다. 

발인 전에 서울로 돌아가 함께 장례를 치러야 겠다. 

 

부음을 받은 뒤로는 자전거 주행에 마음이 집중되지도 않았다. 

다음날 오후 대구까지 가서 상경하면 친구가 도착할 시간까지 빈소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종주는 중단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상풍교에서 상주보까지 하도 고난의 오르막이 있다고 해서

상풍교를 건너 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는 자전거 도로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상주보 도착 17:30. 

 

 

둘쨋날 달린 거리 약 140km

 

탄금대 인증센터부터 홍보물이 붙어있던 '상주자전거민박'에 전화해서 숙소를 예약했다.

자전거길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트럭으로 픽업을 하러 오고, 저녁과 아침 식사도 만족스러웠다. 

 

 

여섯 명씩 이층침대 한 방에 자는 도미토리형 숙소는 숙박비(2식 포함 3만원)를 생각하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두 분이 하도 코를 심하게 곯아 잠을 설쳤다. 고된 일정을 소화한 이들의 단잠이다. 

잠이 깰 따마다 거실에 나갔다가 마당에 나갔다 하면서 밤을 보냈다. 

다시 묵게 된다면 귀마개를 준비해야 겠다. 

아침 7시 민박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는 역시 상쾌하다. 

대구 강정보까지 100km 남짓이라고 하니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오후 4시 버스를 예약하고 


유장한 낙동강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낙단보를 지나고 구미보를 지나. 

 

구미에서 한 차례 길을 잃고 시내로 한 시간간 가까이 헤맨 끝에

 다시 강변길을 찾아 나온 뒤. 

 

 

이팝나무, 언뜻 보기에 라벤더인가 착각하게 되는 보라색 갈퀴나물꽃이 지천인 

강변길을 달려... 


낙동강 하구둑까지 남은 거리 275km 

예정대로라면 1박 2일을 더 달려 완주를 했을 테지만... 

버스 시간을 감안하며 천천히 달렸다. 

어린이날이기도 한 일요일, 대구에서 출발했지 싶은 라이더들이 많았다. 


12:00  성주대교 공사현장 아래 

트럭 노점에서 3천원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13:10  잠정 중단지점으로 잡은 강정고령보... 도착. 

쉴 때마다 마주쳤던 종주자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셋째날 상주 자건거민박~ 강정보  85km

나는 왼쪽으로 금호강 자전거길로 꺾어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지방국도로 접어든 듯

풍경도 달리는 이들도 분위기가 다르다. 



금호강을 끼고 20km 남짓 달려 

염색공단 인근에서 자전거길읏 벗어나 

14:40  서대구고속터미널 도착 

15:20  프리미엄고속버스가 있다 해 표를 바꾸고 탑승 

  

짧았던 2박 2.5일의 자전거 여행은 이렇게 마쳤다. 

작은 언덕을 오를 때에도 나의 엔진은 허덕거렸다. 다시 근육을 당기고 

더 자주 달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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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 5월 24일(금) 요시노가와시 요시노여관~도쿠시마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17번 이도지

주행97.56km


사찰들이 납경을 시작하는 시간은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다. 문을 닫아놓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 시간 동안 순례자를 받는다. 여관을 관리하는 청년(?)은 아침 여섯시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여전히 허둥대면서 패니어와 랙팩을 정리하고 여섯시가 조금 넘어 식당에 내려갔다. 다른 순례객들은 이미 짐을 꾸려 여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집 아침밥이 이렇겠지 싶은 그런 밥상.
미소 된장국과 베이컨, 계란 프라이, 약간의 채소, 맛없는 일본 김, 열빙어 두 마리 그리고 오차. 입맛이 없었으나 하루 동안 흘릴 땀을 생각하며 남김없이 먹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가장 높고 험난한 산길 위에 있다는 12번쇼산지 (焼山寺)까지 자전거를 끌고 갈 일이 걱정이 돼  여관 종업원에게 지도를 펼쳐 놓고 상의를 했다. 혹시 11번 후지이데라에서 가장 단거리로 표시된 산길로 자전거를 가져갈 수 있는지...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자전거를 여기에 두고 걸어서 갔다온 뒤 13번 다이니치로 가는 것은 어떤지... 왕복 12시간은 걸릴 테니 무리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할 때 가장 합리적인 루트는 뭔가요? 
그냥 요시노가와시에서 도쿠시마쪽으로 뻗은 192번 도로를 따라 10km 달리다 우회전해서 산을 넘어가 20번 도로를 따라 쇼산지 뒤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가는 게 제일 낫다는 대답.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도 오르막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아... 그렇군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정해진 고난을 피해가거나 생략할 수는 없다. 단념 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래, 가자. 어차피 그러자고 시코쿠에 온 게 아니었나. 



7시, 어제 저녁에 황망하게 들렀던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까지는 그냥 빈 자전거로 올라갔다. 여기까지도 고도가 상당했다. 어제 달린 1번부터 10번까지 절들이 있는 산은 요시노가와 건너 편 산맥처럼 뻗어 있었다. 쇼산지는 반대편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본당 왼쪽 옆 산길로 쇼산지 가는 길을 아리는 핸로미치 표지판이 있었다. 

어제 10번 절기리하타지 앞에서 만났던 아저씨를 만났다. 반가웠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 사람도 순례를 하는 오헨로상인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아, 어제 만난 사람이구나. 어디서 잤어요." "요 아래 요시노여관에서요. 캠핑장도 무료로 잘 수 있다는 젠콘야도도 못 찾고 시간도 너무 늦어서... 쇼산지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걱정했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 그래 , 같이 갑시다." 
여관에 내려가 짐을 매달 때까지 근 이십 여분을 그는 길가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야마시타(山下) 나이는 56세라고 했다. 


 야마시타씨와 함께 7시반 요시노 여관 앞에서 출발해 요시노가와 시내를 10km쯤 달린 뒤 20번도로로 우회전 이때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 



야마시타 상이 길을 착각해 오르막 하나를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그래도 동행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 오늘은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17번 절까지 간 뒤에 바닷가 야영장까지 가는 게 목표인데...' ' 무리가 아닐까'  '야마시타상은 어디서 잘 생각인가요?' '어디라도 좋아'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이미 걸어서 세 번 순례를 했고 이제 네 번째 순례를 자전거로 하고 있다고 했다. 

오십대 중반에 혼자 순례를 하면서... 어디서 잠을 자도 그만이라는 이 사내... 나는 그리스인조르바가 떠올올리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의 자전거에는 기어가 없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내게 20번 도로를 따라 가면 쇼산지까지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그와 헤어지는 게 서운해서 그래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늦어질 수 있다며... 먼저 가라고 ...  


터널 앞에 멈춰 뒷등을 켜고 심호흡을 했다. 갓길 폭도 좁아 긴장이 됐다. 터널을  통과한 뒤에는 작은 산맥 뒷편으로 나란히 뻗은 하천을 따라 산골 마을이 펼쳐져 있다. 터널 두 개 통과한 뒤 하천을 끼고 열시 반 까지 줄곧 달렸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도보순례자들이 점점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니치지로 향하는 이들일 것이다. 



히로노소학교 (広野小学校) 인근 마을에서 구멍가게에 들어가 선블록 (600엔) 생수2리터(240엔) 쥬스(220엔)을 샀다. 시골로 들어온 게 실감났다. 모든 게 비싸다.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해준다. 


깨끗한 계곡과 울창한 숲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는 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순례길 가운데 가장 고즈넉한 길이 이 구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은 예외없이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교통안전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특히 이 동네에서는 하교길 초등학생들을 위해 동네 경찰과 학부모 교사들이 나와서 별로 차량 통행도 없는 도로에서 대단한 작전이라도 펼치듯이 ... 하교지도를 하고 있었다. 중고생들은 예외없이 하얀 핼멧을 쓰고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 한쪽 차선을 막고 도로공사를 하는 곳에서는 꼭 양쪽에 교통 통제를 하는 사람이 두 사람 서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작업자는 굴삭기 기사 한 명인데 교통통제 인원은 두세 사람이나 되는 곳도 있었다. 



뭐든 대충 넘어가는데 익숙한 우리 눈에는 조금 과하다 싶도록 ... 일본 사람들은 매뉴에 원칙을 고수하는 것 같다. 배울 만한 점이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전커넥션과 정직하지 못한 도쿄전력과 무책임한 일본정부의  대응...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칙대로, 안전한 나라를 경영하고 있다는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흔들리게 했다. 


조세고교 가미야마분교(城西高等学校 神山分校) 부근에서 강을 건넌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쇼산지가 있는 산을 오르게 된다



이 지점이 쇼산지에 올랐다가 돌아올 때 갈림길인 모양이었다. 


 오르막 길에 어제 사 둔 밀감과 에너지바, 물을 거의 1.5리터쯤 마셨다. 열한 시 경, 결국 쇼산지까지 4km 남은 지점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헉헉대며 올라오는 나를 길 두 사람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인 준과  스페인사람 카를로스. 



 준은 일본을 오토바이로 일주하는 중에 시코쿠에서는 걸어서 45일 예정으로 88번사찰을 순례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사람 카를로스는 헨로미찌를 순례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했다. 그는 내 자전거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나라 제냐?' '제이미스오로라는 여행용 자전거다. 미국메이커이지만 메이드인 차이나' 'ㅎㅎㅎ 지금은 모든 게 메이드인 차이나다' 


두 사람은 내려오는 길이었다. '두 시간 더 끌고 올라가라' 카를로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다리에 힘에 쪽 빠지는 것 같았다. 경사가 너무 급해 더 이상 끌고 올라가는 것도 무리였다. 오백미터쯤 올라가다가  해발 390m 지점에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랐다. 



쇼산지는 해발 790m 지점에 있다. 거의 백운대 높이에 가까운 고도다. 산 아래 마을들에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60kg은 족히 나갈 자전거와 짐을 떼어 놓고 걷는 일은 호흡부터가 평화로웠다.  

쇼산지 입구에는 어른 대여섯 사람의 품으로도 벅찰 것 같은 거대한 삼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부모님을 떠올렸다. 여행길에서 내게 말을 거는 할아버지들의 말투와 태도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끝내 재기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가난 속에서 마루에 앉아 붓글씨로 승상사당 하처심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장사영웅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 ... 두보의  시를 끝없이 되풀이해서 쓰시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올라와 정착한 동네가 돈암동이었다. 서울 성 밖이었고, 멀리 인수봉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산 비탈의 허름한 집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내게 아버지는 이 시를 해석해주시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며 조자룡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천하제일 청빈(天下第一 淸貧)' 이니 군자는 무소불위(無所不爲)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가 야속하셨을 것이다. 당장 끼니가 막연한데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시는 아버지가 말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내게 '어떻게 그 세월을 헤쳐나왔나 꿈만 같다.' 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래도 너희들 교육시키고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아낸 게 기적같은 일이었다.' 


산길에서도 걷는 길과 차도는 수시로 갈라졌다 합쳐졌다 하면서 산록에 있는 쇼산지까지 이어진다.  


자존심을 지키느라 이익과 상충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면이다. 조카들 가운데에도 몇이 그렇다. 


시코쿠미찌... 사코쿠 순례길을 안내하는 이 표지판을 앞으로 지겹도록 만나게 된다. 




절에 올라갔다가 자전거를 세워놓은 지점까지  내려오니 오후 1시. 눈물이 날 만큼 고된 길이었다. 터덜터덜 내려오다  적막한 삼나무 숲에 세워둔 제이미스오로라가 고요히 서 있는 광경을 보니...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오랜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대물 애착이 생길 지경이다


어쨌든 한 고비를 넘었다. 오후 1시반,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올라갈 때 그토록 아득하던 길이... 허무하게도 짧았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이치지(大日寺)까지는 27km. 과연 아침에 이길을 달렸단 말인가 싶게 길었다. 두어 번 길이 헷갈려 되짚어 길을 찾아야 했다. 골프장 앞 다리에서 강을 건너 다이이치지를 향해 가는 업힐 강변 구간을 외롭게올랐다.

 

언덕위로 올라선 뒤 다시 평탄한 강변길을 달리다가 야마시타 상을 만났다.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길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너 12번 쇼산지 갔다왔냐?' '야마시타상도?'  '길이 엇갈렸나? 이제다이이치가 바로 근처다. 너 참 빨리 달리는 것 같으니 네가 말한대로 17번 이도지(井戸寺) 까지 간 뒤에 야영할 수 있겠다.' 


 피난길에 헤어진 형제라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동행이 있다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될줄이야. 


'아,  잠깐 뒷바퀴가 이상하다.' 야마시타상이 내 자전거를 가리켰다.  뒷바퀴 크랭크에 비닐이 감겨 있었다. 일일이 띁어내느라 시간이 꽤 소요됐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뒤편 왼쪽 패니어 아래쪽 고리가 랙에서 빠져나와 바퀴와 마찰이 돼  반쯤 갈려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자전거가 매끄럽지 않다 했더니...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변으로 뻗은 21번 도로를 달려...오후 3시경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에 도착했다.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길가에 면해 있어 자전거를 대고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첫날 언덕 위에 있던 4번 사찰도 다이니치지(大日寺)였다다이니치(大日)라는 말이 ... 야마토(大和)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대한(大韓)처럼 국가정체성을 강조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야마시타 상이 납경소에 들어가 뭔가 이야기를 했더니... 납경을 해주던 노인이 나에게 들어와 보라고 했다. 한국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이 절의 주지 김묘선씨인데... 지금은 절에 없다고... 자신은 한국에 살며 가끔 절에 와서 납경장에 글도 써주고 있다고 했다. 어렴풋이 전날 9번 절 호린지 앞에서 탁발승이 말해준 한국인 '옥상'(おくさん, 奥さん) 이 이 절 주지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싶었다. 

 

김묘선 주지스님(?)은... 절 인근에 한국전통무용 강습소를 지어서 운영하는가 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연도 자주하는 유명한 고전무용가 이기도 하다고 ...한다.  다이니치지 옆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대규모 숙박시설도 있었다. 얼핏 듣기에 저녁과 아침밥을 포함해 1박에 7500엔 쯤 한다고 했다.  한국사람이 어떻게 88번 사찰 가운데 하나의 주인이 되었는지...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또, 한국의 절들처럼 비구와 비구니들의 승가공동체가 전국의 사찰을 거의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역시 다른 분위기가 있다는 점... 이것은 1200년 전통을 가진 88번 사찰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80 넘었다는 김선생은 이미 이 절을 거쳐간 한국사람들... 최성현씨나 현직 판사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국 사람이 시코쿠 88 순례를 하다니 대단하다며 무료로 납경을 해주고  빵과 떡, 사탕이 들어 있는 간식꾸러미를 건네주며 지칠 때는 단 게 필요할 테니 순례중에 먹으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포를 만나 반가웠다. 국가니 민족이니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쉽게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위축된 상태로 낯선 공간을 여행하다가 한국사람을 만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까지 전해들으니 괜시리 콧끝이 찡해질 지경이었다. 

다이니치지를 나오며 야마시타 상은 또 '다시 만나자' 며 앞서 가라고 했다. 순례길이 어차피 한 길이니 또 만날 일이 있겠지... 하며 이번에도 범상하게 헤어졌다. 


14번 절 죠라쿠지(常樂寺)는 다이니치지에서 2.3km 떨어져 있다. 강을 건너 만나는 마을 뒤로 올라가 있는 산 기슭, 조그만 호수 위에 ... 바위를 그대로 조금씩 파내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15번 고쿠분지(国分寺)는 골목을 끼고 조금 돌아나오니 있었다. 불과 0.8km. 



단체 참배객 한 할아버지가 '너 어디서 왔냐? 한국에는 88개 절이 없냐? 나는 부산에 가봤다. 날이 더구니까 물을 자주 마시고 자주 쉬고 저녁 다섯시까지만 달린 뒤에 꼭 멈춰서 쉬어야한다. ' 이런 말을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감사하다고 답을 하니 헤어지면서 '간밧데!'  외쳐주었다.


 고쿠분지에서 16번까지는 작은 골목길 사이로 달려야 했다.  이날부터 오후 4시는 심리적인 제한선 같은 게 되었다. 4시부터는 새 절을 찾아가기보다 잠자리를 물색해야 한다... 첫날 요시노여관에서 엉겁결에 자면서 깨달은 점이다. 실은, 서울 바이클리에서 강의를 하던 이영덕 사장님도 이 점을 강조했었다. 달래 경험자들이 그런 조언을 했던 게 아니었다. 



16번 간온지(観音寺) 까지는 1.8km. 이제부터는 시내 주택가를 달려야 한다. 


도쿠시마시내까지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 오전에 달리던 호젓한 산길들을 떠올리면 웅성거리는 시가지와 전차와 밀려다니는 자동차... 밀집해 있는 주택들 모두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집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다. 




사찰 옆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신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신자보다는 신도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17번  이도지(井戸寺)에 저녁 5시경 도착했다.  


훗날에야 알았지만... 이날의 여정은 무척 무리를 한 것이었다.  가장 난코스라고 여기는 쇼산지를 올라갔다 내려온 뒤... 다시 도쿠시마 시내까지 ... 아직까지 잠자리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저녁이 다 됐다. 

 



마지막 순례자들이 빠져나가자 절 마당에는 긴 그림자와 적막감만 남았다. 



목표로 삼은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해변 캠프장까지, GPS에서 가리키는 직선거리는 9km미터. 어두워지기 전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힘을 냈다.



한 시간쯤 달려 도쿠시마 시내 마트에서 연어 세 토막 (180엔) 우유 500 미리 두 개 작은 팩 1개 김치 한통 (260엔) 사서 우유 한 팩은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엄청 먹어 대지만 소모량 너무 많아 먹어도 계속 허기가 졌다. 


저녁 6시가 전후로 퇴근길 자전거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다들 바쁘게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틀 전에 묵었던 곳도 도쿠시마시였다. 엉겁결에 와서 자고 간 도시. 도쿠시마시는 도쿠시마현의 중심도시이고... 시코쿠에서 가장 큰 도시인 것 같은데... 여전히 내게는 잠 잘 자리가 모호하다




gps가 가리키는 캠핑장을 찾아 가려고 보니...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아, 저 다리를 넘어가면 최단거리로 캠핑장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하고 다리에 다가갔으나... 자전거 통행제한... 자동차 전용다리였다. 또 다시 5km 가량을 시내쪽으로 되돌아와  최대한 보수적인 선택을 하면  도로를 따라 바닷가에 있다는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캠핑장에 접근해보려고 노력했다. 


아래 보이는 언덕 너머 바닷가 끝 지점쯤에 캠핑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속이 탔다.

 

마지막에는 언덕을 따라 마을길을 계속 돌면서 바닷가에 인접한 접근로를 겨우 찾았다.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는 500미터쯤 되는 언덕을 하나 넘는 것이었다.  조깅을 하는 젊은이가 있길래 ...언덕 너머에 캠핑장이 있냐고 물어보니... 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달려내려갔다. 이제는 캠핑장이 없대도 아무데나 공중 화장실 근처에라도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안 공원에는 해수욕장 앞에 넓은 솔숲이 있고... 유스호스텔과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퇴근을 하고 테니스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공을 네트너머 넘기면서 '사요나라!, 아리갓또!' 하면서 유쾌하게 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쩐지 쓸쓸했다.

 

해수욕장 솔숲은 깨끗하게 관리된 조리대와 화염소(火焰所)라고 적힌 바베큐장이 함께 있었다. 나중에 여행하면서 들러본 거의 모든 캠핑장에는 이렇게 바베큐장이 마련돼 있었다. 아예 캠핑이라는 말 자체가 야외에서 하는 '숙박'의 의미보다는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는 장소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텐트를 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여가 서너 명씩... 몰려와 고기를 구워먹는 이들은 두어 팀이 보였다. 일단 텐트는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 수도가 있는 조리대에서 밥을 짓고, 연어를 굽고, 즉석 육개장을 끓여 저녁을 지어먹었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곳에서 캠핑이 가능하냐?' 고 물었더니 '아마 안 될 것!' 이라는 비관적인 대답... 게다가 경찰이 자주 순찰을 하기 때문에 ... 시내에 가서 호텔에서 자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까지...  



밥을 지어먹고 나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순찰차가 왔다. 어쩌면 좀 전에 조언을 해준 그 친구가... 수상한 외국인이 야영을 하려고 한다고 이른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꽤 넓은 솔밭에서...  순진한 인상의 경찰이 나를 향해 정확히 걸어와...'오늘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 88번 사찰 일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캠핑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숙박을 할 수 없다. 밥을 지어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래? 나는 구글에서 캠핑이 가능하다고 해 찾아왔는데, 지금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6시 이전에 떠날 테니 여기서 잠시 자고 가면 안 되겠냐?' '나는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곤란하다.' 내가 계속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는 할 수 없다는 듯...'남들 눈에 띄이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이렇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경찰관으로부터 야영 허가를 받은 것이다.

 

밤 9시...완전히 날이 어두워지고 인적도 뜸해질 때까지는 텐트를 펼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타 마시고... 해변가 산책도 했다. 아베크족들...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폭죽을 터트리고... 한강변의 공원처럼...  아름다운 해수욕장에 다들 불안한 마음도 없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해수욕장 한쪽 끝 인적이 드문 취사장에 텐트를 펼쳤다. 일단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고 쉰 뒤... 11시 넘어서 수둣가에서 코펠로 물을 떠 샤워를 했다. GPS 포인트가 가리키는 캠핑장이... 모두 다 야영이 가능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이날의 경험으로 알 게 되었다.




부인하고 싶은 나이 쉰.  다시  가슴 뛸 일이 있을까.

 

어느새 쉰 살이 넘었다. 실감 나지 않는 나이. 아니, 부인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내 마음이 어떠하든 나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해 봄, 친구 S가 갑자기 죽었다. 암에 걸렸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랬다. 각별했던 사이라 장례식장을 나흘 내내 지키다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고향  벌교에 가서  묻고 올라오면서,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7년 근속하면 1개월  '안식월' 휴가를 쓸 수 있다. 7년을 넘겨 9년이  되도록 휴가 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일과 일상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게 되었다.

 

 S가 죽기 불과 열흘 전, 경주에 있는 자연치유원에서 경남 거창 그가 귀농해 살던  집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그는  다섯 살짜리 늦둥이 아들에 대해 회한을 토로했다. "책임감 강한 체 해왔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정말 책임감이 강하다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지, 애걸복걸하면서 건강 망치고 무엇 하나 책임을 못 지게 생겼잖아."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마음을 끓이며 집착하고 있는 일들이 다 허무해졌다.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일.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여행밖에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정도가 전부였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 Km.  걸어서 45일  이상 걸리는 먼 길. 자전거를 타고 돌면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시코쿠 순례를 시작하기 전 한강변을 연습 삼아 달려보았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 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 차라리 걷는 일이라면 홀가분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제나 제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내 마음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도로 위로 자동차들에 뒤섞여 그 정도를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큰 고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 무렵 나는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 가서 넣어달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전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 (지금은 용산역 인근으로 옮겨가 있다.)  5주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렘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바이클리의 교육은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 장력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로 알차게 짜여 있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MTB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겠다는 건축사,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 놓고 티베트와 인도 네팔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단 하겠다는 서른일곱 살 학원강사, 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을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을 해 도쿄에 일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내친김에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하겠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 번에 하겠다고 준비하던 젊은이. 알고 보니 바이클리는 전 세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거쳐가는 플랫폼이었다.   

 

도중에 체인이 끊어지면 이렇게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라는 브랜드의 여행용 자전거.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달 수 있는 모델이었다. 본래는 출퇴근 때 가끔 타던 생활자전거를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집에서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까지 왕 70Km를 한 번 왕복해본 뒤 아무래도 자전거를 바꾸는 게 좋겠다 싶었다. 자전거를 바꾸어도 걱정은 여전했다.  한강변 안전한 자전거길로 70km를 달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싶게 힘겨운데, 과연 20여 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해낼 수 있을까.

 

실제로 겪은 상황보다 미리 걱정하는 일이 더 힘겨웠다.

삶에서 겪는 일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떠나기 전 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안했다. 여행 준비는 엉성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일정 별로 진행 구간을 미리 정하는 등 세부 계획을 세우려고 했으나 일에 쫓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정보도 부족했다.

말도 서툰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다닐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스마트폰에서 바로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를 저장하고 이것을 로커스라는 앱에 불러온 뒤 시코쿠 88개 사찰과 시코쿠 섬 야영장 GPS 좌표를 얹었다.     

 

떠나기 전 날 독서실에서 자정 다 돼 돌아온 고등학교 2학년 작은 딸과 식탁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세상의 부조리한 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세상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바꿔보고 싶다고 했다. 두 아이는 기질도 성향도 판이하다. 어떤 면은 부모를 물려받은 것이지 싶고, 어떤 면은 도대체 어디서 온 성품인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두 아이에게 다 있다.

 

우리 세대는 청춘의 시절을 최루탄 난무하는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눈물과 땀에 범벅돼  거리를 달리면서  막연하게  우리 아이들은 좀 더 합리적인 세상에서 살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위태롭고 어떤 면에서는 더 숨 막히는 곳이 되었다. 우리가 채 다 못한 숙제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유전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야영을 하려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랙팩과 패니어 등 여섯 개의 가방에 실을 짐들

 

5월 21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한여름을 방불케 더운 날씨였다. 아침을 먹고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로 짐을 들고 지하철로 갔다.  전날 자전거를 타고 가서 분해해서 박스에 포장을 해두었기에 나머지 짐만 꾸려 랙팩과 핸들바백에 담았다. 먹을거리와 옷가지, 그리고 캠핑장비들까지...  어깨가 빠지게 무거웠다.   

 

자전거 박스에는 기내 반입이 어렵지 싶은 텐트 폴과 팩, 자전거 수리공구, 주머니칼 등과 침낭 옷가지만 넣었는데도 30kg이 넘었다. 다시 옷가지 텐트 등을 빼도 26Kg. 아시아나 홈페이지 안내에는  일본지역 무료 수하물은 이코노미의 경우  20kg까지고  5Kg 초과할 경우 다카마쓰까지는 2만 5천 원 차지를 물게 돼 있다. 그러나 공항터미널 담당 직원은 '네, 잘 다녀오세요!' 하더니 쿨하게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바이클리 사장님이 같은 날 캐나다 횡단을 위해 출국하는 로키님과 나를 삼성동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삼성동 공항터미널에서 짐을 부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세토대교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시코쿠섬 위를 날았다. 창밖으로 언뜻 내려다보기에도 평지는 별로 없고 온통 산과 계곡의 굴곡들뿐이라 덜컥 겁이 났다. 오토바이도 아니고, 내 심장을 동력으로 저 주름진 굴곡들을 이십여 일 달려야 하는구나.

 

여섯 시가 다 돼 다카마쓰(高松) 공항을 빠져나왔다. 부피가 큰 자전거 박스에 대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관심을 표하며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자전거 여행을 할 생각이냐? 잠은 어디서 자냐?  88번 사찰 일주를 할 생각이다. 잠은 비즈니스호텔을 이용하거나 캠핑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어 공항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이클리 사장님 조언대로 택시에 박스 채 싣고 예약해둔 다카마쓰 나카진초 토요코인 호텔로 갔다. 택시는 근 40분을 달렸다. 석양이 지는 낯선 거리에 하굣길 학생들과 퇴근길 시민들이 자전거 물결을 이루며 한가롭게 달리고 있었다. 택시비는 4천 엔. 비싼 줄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나왔다. 하룻밤 숙박비다.

 

자전거 분해는 해봤지만, 조립은 처음이라 진땀깨나 흘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 분해하면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부위별로 볼트와 너트를 따로 모으고 패니어를 부착할 랙이나 빗물받이도 부착된 모습을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게 도움이 됐다.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말도 서툰데 자전거 박스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호텔 프런트에 이런 말을 떠듬떠듬하니까 자전거 박스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박스를 분해할 필요도 없다고.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날인 6월 13일에 다시 호텔로 돌아올 예정이라  예약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스를 맡기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자전거로  시내도 둘러보고 밥도 먹을 겸 밤거리를 달려보았다. 자전거도로가 잘 구획돼 있었다. 일직선으로 곧장 달려가니 다카마쓰 항구와 붙어 있는 역이었다. 문 연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사에 붙어있는 꽤 큰 할인점은 밤 10시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신선식품은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도시락, 맥주와 내일 운행할 때 간식거리와, 쌀 1kg을  샀다. 물가가 비싼지 싼 지 아직은 전혀 감이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 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했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Km.  걸어서 45일쯤 걸어야 하는 먼 길이다. 자전거를 타며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 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까. 차라리 걷는 일이면 홀가분 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장충동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그것도 늘 조마조마했다. 도로 위로 자동차들 속에 뒤섞여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더 큰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나. 늘 이런 걱정을 안고 자전거를 타는 수준이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가서 넣곤 하는 수준말이다.  

 

배워서 준비하자검색을 시작했다. 다행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건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그러나 5월 중순에 휴가를 내기로 했는데그 전에 진행하는 4월 강좌는 이미 만원이었다. 바이클리 운영자분께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발송했다. 일단은 정원이 모두 찼으니 혹 결원이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신이 왔다. 그리고 며칠 뒤 등록했던 대학생이 여름방학으로 여행 계획을 미루면서 빈 자리가 생겼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5주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론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레임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여행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의 장력을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의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꼭 필요한 내용들로 알차게 짜인 교육이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엠티비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시겠다는 건축사분,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놓고 티벳과 인도 네판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당하겠다는 서른 일곱살 학원강사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 해 도쿄에서 일 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후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내친 김에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번에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던 젊은이.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 크로몰리 바디에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설치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자전거를 지참하고 오라는 말에 걱정이 앞서 집에 있던 출퇴근용 생활 자전거를 타고 강의가 시작되기 전 주 주말에 집에서부터 강동구청앞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본 적이 있다. 왕복 70Km 가량을 주행하고는 당장 그 다음주부터 강의를 듣는 일이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았다. 70km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과연 20여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일이 현실성 있는 계획인가?

 

내가 20대 젊은이도 아니고 미쳤지 무모한 일이야. 그냥 포기할까. 이런 망설임이 떠나기 전날까지 나를  전전반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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