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순례를 다년온 지 일년이 다 돼 가도록 기록을 마치지 못했다.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기록은 무엇을 위해 왜 해야 하나 하는 회의도 있었다. ... 이렇게 ... 게으름을 피우던 중 ,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졌다.  차마 무슨 이야기를 태연하게 쓰기가 어려웠다. 

이런 세상을 우리 세대가 만들었구나... 개인에 따라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회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방조를 하거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고 생명이고 인권이고 뭐고... 

오로지 돈과 출세, 경쟁과 이익만을 위해 안면몰수... 맹목으로 질주하는 이런 사회를 만들고 ... 그 천진한 아이들을 몰살시키는 일에 부역을 했구나 적어도 방조는 했구나 하는 심정에 참담했다. 


또 다시 새벽마다 잠이 깨는 일들이 되풀이 됐다. 이 기록도 더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4년 5월 25일) 



# 21:  6/10 월  우탄구라ㅡ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운행 81.81km

역시나, 간밤에 과음을 했다. 그러나 다섯 시 경 어김없이 잠이 깼다. 날이 완전히 개어 있었다. 



지난 밤 안수창 씨 식당 '낙원'에서 이리에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사모님이 차린 8가지 반찬의 황송한 아침상을... 받았다.   순례자들의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신다고 ... 이렇게 덕을 쌓고 계시는구나... 


순례자들을 자기 집에 재우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간식을 내밀거나 ... 오히려 오셋타이라며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돈을 손에 쥐어주고 가는... 이런 수많은 주민들이 시코쿠를 시코쿠로 만들었으리라...  


쌀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다 먹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보고 사모님께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두 덩어리 주먹밥까지... 

점심은 이것으로 해결하면 걱정이 없겠다... 싶었는데... TT 



두 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탄구라 홈페이지도 숙박하고 간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신다고... 



6시45분  또 다시 출발... 옷도  빨아서 말렸고 날도 개었고 몸도 개운해졌다. 오늘 하루 또 달려보자... 


우탄구라에서 79번 사찰  텐노지(天皇寺)까지는  7.4 km.  철길을 따라 평탄한 도로를 달리게 되어 있다. 등교와 출근으로 부산한 시내를 나만 독특한 복장으로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 시간 가량 달려 절에 도착했다. 절 입구에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있었다. 보통 신사 앞에 서 있는 이 문은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처럼 돼 있다. 성황당에 쳐 있는 금줄이나 솟대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에 세워놓는... 



전설에 따르면, 12대 천황의 아들들인 사루레오가 부하들과 괴물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오히려 잡아먹혔는데, 요코나미묘진(横潮明神) 이라는 신이 이 부근에 있다는 야소바의 영천(八十場の霊泉) 의 샘물을 먹여 모두 살려냈다고 한다... 


이후에 코우보 대사가 이 곳을 찾아왔을 때, 샘을 지키던 산신이 대사께 귀의하고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1156년 내전에서 패한 스토쿠 천황이 이곳으로 쫓겨와 죽었는데, 장례절차를 중앙정부에 상의하는 동안 천황의 시신을 야소바의 샘물에 담궈두었더니 고스란히 보존되었다고...  이 절이  텐노지,  천황사가 된 것은  이런 유래라고...  



참배를 하고 나오니  엊그제 71번  이야다니지(弥谷寺)지 앞에서 만났던 순례자와 다시 마주쳤다. 간단히 목례로 아는 체를 했다. 걷거나 자전거로, 또는 승용차나, 단체 관광버스로... 드물게는 택시를 대절해서 이렇게 순례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비루한 일상을 떠나 불경을 독송하며 탈속한 가치를 떠올리며 걷는 일... 일상에서 쌓아가고 있는 업을 벗어나려는 마음,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돌이켜보면 내게는, 산길을 걷는 일이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북한산이 그랬고... 안산이나 안양 인근에 살던 고단한 시절에는 안양에 있는 수리산과 관악산... 그리고 해마다 서너 번 지리산과 설악산...을 찾아가 걷다보면 옥죄여오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산길을 걷다보면 살아갈 힘이 다시 고이는 것 같았다. 


양배추 수확철인 모양이다. 마사토 같은 사질토양과 비닐멀칭이 없어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농업이 날로 어려워지는 현실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식량자급률도 25%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8시10분 ... 다시 텐노지에서 출발. 80번 고쿠분지(國分寺)까지는 7. 3 km 가량 도로를 따라 달리게 되어 있다. (돌아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차라리 79번- 81번-82번-80번 순으로 가는 것이 길도 편하고 거리도 단축된다고... 도보여행자는 물론 자전거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문제는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와  82번 네고로지(根香寺)다. 지도와 가이드북을 보면 두 절 모두 고쿠분지가 등지고 있는 두 산 봉우리 시로미네산(白峯)과 오히라(大平)산 위에 있다. 두 산은 능선이 이어져 있었다. 고쿠분지에서 산을  올려다보면서 시계방향으로 되돌아 가야 오르막 들머리를 만나게게 되어 있었다.  


미리 지형을 살피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 일정을 앞두게 되면 ... 여전히 전날부터 마음 무거웠다. 스스로 시작한 순례가 여전히 남이 채운 족쇄처럼 버거운 것이다. 



9시,  80번 고쿠분지(國分寺)에 도착했다. 


고쿠분지라는 절 이름이 여러 곳인 이유는, 741년 쇼무천황이 정국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절들이 모두 같은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국사당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남산 식물원으로 오르는 길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돌계단을 볼 때마다 ... 그것이 일제가 남기고 간 유적이라는데 생각이 미처 늘 마음 불편했다. 나라 굿을 하던 국사당을 인왕 선바위로 쫓아내고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천대 받는 실정인데...적어도 일본에서는 신도가 이 나라 최대의 종교가 되어 일상속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 생각해볼 대목이다. 신내림굿을 하는 무당들뿐만 아니라, 마을마다 모시던 성황당이나 집집마다의 터주, 조왕신 등 다양한 전통신앙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근대의 깃발 아래 '미신'으로 몰려 일거에 청산된 일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일본사람으로 자라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스스로 투철했던 박정희에게... 우리 전통은 일본 전통과 달라 청산되어야 할 야만으로 치부된 것이었는지...  



고쿠분지는 이름이나 유래에 걸맞게 무척 넓고 크고 고색창연한 절이었다. 


납경을 받으며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길이 없겠는지 물어보았으나 도리없이 산 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오던 방향을 거슬러 바닷가쪽으로 돌아가서 산을 올라야 한다고...  


도보순례자라면 고쿠분지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81번 시로미네지로  곧장 올라가면  되겠지만 자건거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달려보자...  일단, 81번 시로미네지까지는 14km 가량이다.  마지막 6km는 쉼 없는 오르막이다. 



긴장한 마음을 자전거도 알아차렸는지... 오르막길에 어프로우치 하기도 전에... 도중에 체인이 빠졌다. 비닐 같은 게 감겼던 모양인데,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꽤 애를 먹었다... 패니어를 모두 떼어내고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40분은 족히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짐을 다시 챙기며 살펴보니 분명히 아침에 우탄구라에서 받았던 주먹밥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수창씨가 준 열라면과 삼육두유만...  짐을 꾸리고 인사를 하면서 옆에다 놓고 떠나온 모양이었다. 점심을 어쩔 것인가... 시골길이라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대책없이 오르막이 시작됐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면서... 멀리 세토대교가 내려다보였다. 



12시 경,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에  도착했다. 해발 337m 라고 하는데... 해안선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꽤 까마득하게 올라온 느낌이었다. 




이 곳에서 뜻밖에도 요코미네지 오르던 산길에서  만나 내게 청정()이라는 나무 기념패를 준 분을 다시 만났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나오다보니... 그는 절 입구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도보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나...물으니,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시내 구간은 전철로 이동했다고... 



실례가 안 되면 이름을 여쭤봐도 되냐고... 하니까... '아무 아무개(와다시노 나마에와 고노 요노 ... 나이)' 정도로만 알아두시라고...?  아... 그러시냐고... ^ ^;



납경소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는 디자인도 카피도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취가 시코쿠의 길이 되었습니다.'  루쉰이 했다는 말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아서 ... 길도 처음에는 없었지만... 누군가 많은 사람이 걸어가자 그것이 길이 되었다...' 던 말처럼... 

시코쿠가 시코쿠가 된 것은... 천 년 넘게, 저마다 절박한 사연을 안고 걸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 때문이겠지... 



'청정 아무아무개' 선생은 내게, 이 절의 산문은 다른 절들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고려양식이라 한다. 솟을 대문처럼... 생긴 이 절의 산문이 어쩐지 정겹게 여겨졌다. 



이 절은  오전에 들렀던 텐노지와 연관된 곳이었다. 텐노지에서 죽은 비운의 스토쿠 천황을 장사 지내고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청정 선생'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하는데... 자판기 음료수말고는 먹을 게 없었다. 아침에 흘리고 온 주먹밥이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오히라 산을 향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 보니... 산정 가까운 곳에 온천 휴양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따..땅... 따 ...땅... 



분명히 총소리였다. 사방에 군부대가 있는 우리나라에서야 익숙할 법 하지만... 여기서는 웬 총소리일까... ... 정말 총소리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을 올랐다. 



정말로... 산 위에는 자위대 훈련장이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총성은 계속 온 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군대에서 매일 저녁마다 총을 꺼내 분해하고 기름걸레로 닦고 심심찮게 실탄 사격도 해야 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총이나 총알은 단단한 금속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응축된 살기가 늘 섬칫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겠다는 응축된 의지... 총은 그런 것이었다. 가장 지능이 뛰어나다는 인간만이 총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높은 지능이 우주를 관장하는 힘이나 생명의 본성과는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일본 땅에서도 이런 총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가는 곳마다 심심찮게... 일본의 군사력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일본 헌법 9조를 지키자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구호를 마주하던 것과... '강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아베 자민당의 선거포스터가 겹쳐 보이던 것도 이런 일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말이 자위대지... 사실상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엄청난 플라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이미 2차 대전 당시에 항공모함을 만들고 운영했으며, 인공위성을 스스로 발사하고 있다. 언제든 중국과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군사대국이 될 게 분명하다. 19세기말처럼 ... 한반도의 운명은 또다시 격랑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올라가다 지치면 내려서 끌고... 조금 완만해지면 다시 타고... 시로미네산과 이어진 오히라 산정까지 ...  해발 500미터가 넘었다. 정상 부근에 있는 갈림길에서  82번 네고로지(根香寺)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꼬박 그 높이만큼 다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다. 



오후 1시반...  82번 네고로지(根香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에 가기 전에 초가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고, 832년 치쇼(智證)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천수관음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나무 뿌리로 조각한 본존불이 오래토록 향기 내뿜었다는데서 근향'(根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 


절은 산중이라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인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양쪽으로 회랑이 가운데 정원을 감싸고 둘러 있다. 


회랑 안에는 신도들이 봉헌했다는 3만 개에 달하는 관음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본당까지 이어진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오면... 잘 가꾸어진 중정이 있었다. 



나이든 어머니와 딸... 침묵하며 기도하는 신도들도 꽤 많았다. 



사탕 몇 알과 자판기 음료수 말고는 한 나절 동안 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아침에 산길로 접어든 뒤로는 식당도 만날 수 없었다. 너댓 시간 줄곧 오르막을 오르느라...체력도 고갈돼 가고 있었다.  




다시  그러나 다음 절로 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시 고갯마루에 있는 갈림길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는 다카마쓰(高松) 시내인 것 같았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그 지점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서 온 것이다. 스쳐온 일들이 떠올라 왠지 감회가 복잡했다.  


꽤 긴 거리를 다운힐... 

산을 내려오니 기온도 높고, 공기도 달라졌다.다시 햇살 따가운 한 여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80번대를 넘어섰다.  남아 있는 절이라고 해야 83번부터 88번까지 여섯 개... 



산 아래 마을들은 저수지를 끼고 있었다. 논농사 때문일 것이다. 또다시 11번 국도를 만나고... 동쪽으로 달리다가 83번 이치노미야지  (一宮寺)를 향해 달렸다. 



오후 3시쯤 길가에 있는 중국집(중화소바)집이 있어 늦은 점심을 먹어야 겠다 싶어 들렀더니... 오후 5시까지는 준비 시간이라 밥을 줄 수 없다고...TT  ... 아, 그렇겠지... 그게 정상이겠지... 


점심도 못 먹고 허둥대며 산 아래 마을을 헤맨 게 조금 처량하기도 했다. 


도중에 패밀리마트가 있어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사서... 안에서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TT 문밖 주차장에 예전에 야마시타상이 그랬던 것처럼... 선 채로 컵라면과 주먹밥을 먹었다. 우탄구라에서 두 분이 챙겨준 주먹밥을 잘 간직하고 왔다면 훨씬 여유가 있었을 텐데... 




운행중에 스마트폰에 GPS 앱 로커스프로(Locus pro)를 줄곧 사용했다. 목표지점을 설정하면 방향과 남은 거리를 오프라인 지도상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 없이 여행하는 동안 큰 도움을 받았다.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지고 간 카메라 배터리가 빨리 방전돼 핸드폰 사진을 찍으라 핸들에서 탈부착을 하는 일이 힘들었다. 이 때문에 '고질라포드'로 감고 다녔는데... 두 번 떨어트려 스마트폰 꼴이 말이 아니다. 



아이들 등교시간에 80번 고쿠분지에 들렀는데... 벌써 하교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산을 헤매고 다니 것이다. 밥도 굶은 채... 



일본 아이들이 우리나라 아이들보다는 나아 보였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모습...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겠으나 ...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자정 무렵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나라 같은 곳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4시20분 ... 다카마쓰 외곽에 있는 83번 사찰 이치노미야(一宮寺)에  도착했다. 이치노미야(一宮)라는 명칭은 1679년부터 이 일대 신사들의 중심 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불교 사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이 절에 모셔ㅗ놓은 약사여래의 대좌 아래에는 지옥으로 빠지는 구멍이 있어, 죄가 있는 사람이 머리를 넣으면 빠지지 않는다는 ...  



이미 오후 4시가 넘었으므로...  다음 절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싶어... 절 앞에 앉아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캠프장 두 곳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몇 번 찾아갔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나름 미리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다. 



GPS 포인트를 입력해온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미네야마(峰山) 공원 캠프장 등 두 곳 에 전화 했으나  모두 다 안 된다고... 한 곳은 낮 동안만 개장을 하는 공원이라서... 한 곳은 다음 날인 화요일이 휴일이라서...  안된다고...  도시에 오니 여지가 없다...  캠핑장이 두 곳이나 있어 별 걱정 안 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GPS 포인트에 표시된 캠핑 표시는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젠콘야도 리스트에 나와 있는 '슬로우라이프'라는 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이치노미야지에서 북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곳이라고 했는데... 500엔에 숙박이 가능한 곳이라고...  전화를 걸 때 이미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슬로우라이프는 옆에 붙어 있는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전화를 받는 이에게 슬로라이프냐고 ...하니까... 전화를 몇 번 연결한 뒤에야...담당자인 것 같은 남자가 받았다.  조금 사무적으로 ...숙박은 가능하지만, 6시까지 체크인 해야 한다고...  그런데, 찾아가는 도중에 길을 헤매다 여섯 시가 넘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며 여섯 시까지 체크인 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고... 전화를 끊었다. 단지 오분 지난 시점이었다. 규정이나 그런 것은 알겠는데... 조금 야속했다. 



더 이상 운행을 계속하기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는 이치노미야지에서 다카마쓰시를  북쪽으로 대각선  가로지른 지점... 야시마라는 섬의 산 위에 있었다. 인근까지 가서... 섬이니까 바닷가에 야영 가능한 해수욕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야시마지 인근에 있는 여관이라도 찾아보자... 는 심정으로  일단 달려보았다. 



퇴근시간  다카마쓰시내에는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바쁘게 밀려 다니고 있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툭 떨어진 사람처럼...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란 나는... 어둠이 내린 거리를 묵묵히 달렸다.  


결국 야시마를 한 바퀴 다 돌고도 마땅히 잘 곳을 찾지못했다. 산 위에 있는 야시마로 오르는 들머리에 작은 여관이 있었지만 불도 꺼 놓았고... 어쩐지 기분도 가라앉아 들어가 흥정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7시가 넘어서... 일본에 도착한 첫날 묵었던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토요코인 호텔에 전화를 했다. 방이 있다고... 오라고... 


호텔을 예약 해 놓고 나니... 몸은 지쳤지만 다시 시내를 향해 돌아가는 마음은 조금 느긋해졌다. 어쩔 수 없이 이제 분주하고... 어떤 여유도 없어 보이는 도시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드물게 교통사고 현장도 목격했다.  



여덟 시가 다 돼  한 접시에 99엔이라고 선전하는 그 회전 초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호텔 프론트의 담당 직원은 마침 첫날 만났던 사람이었고 나를 알아보았다. 순례가 어땠냐고... 자전거 박스는 잘 보관해두었다고...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주니 어쩐지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렇게 긴 하루가 또 저물었다. 내일이면 절 순례는 모두 마치게 될 것 같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16-6/6 목 마쓰야마유스호텔~이마바리시(今治市) 사쿠라이해변만남의 광장(桜井海浜ふれあい広場)
운행 79.81 km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에 넘치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느낌. '모두는 개인을 위해, 개인은 모두를 위해' ..... 

이  낯 익은 낭만적인 구호... 



화장실에도 지구를 위해 고지함율 100% 의 재생지를 쓰고 있으니 아껴 써 달라는 당부... 일하고 있는 한살림에서 ... 가능한 모든 홍보물을 재생지로 만들려고 노력고 있는 입장에서... 절로 미소가 머금어질 수밖에... 



만화책과 핸드폰 충전기, 무선공유기, 피싸가 있는 1층 로비 ... 


저녁이면 식당에 둘러앉아 '마지꾸' 공연을 하면서 남녀노소 어울려 킬킬 대는 곳... 


아침 7시 1층 식당에서 전날 예약(550엔)해둔 아침을 먹었다. 비지니스 호텔들처럼 부페식으로 차려둔 음식들은 만족스러웠다. 현미밥에 햄과 샐러드와 채소 미소 된장국을 다 먹고... 옆에 있는 빵도 몇 조각 잼을 발라 든든히 먹고, 커피까지... 


온종일 땀을 흘리며 달리다 보면, 내 몸이 자동차와 다를 게 없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탄수화을 소화시켜 녹말을 포도당으로 분해해 에너지원으로  태우면서 달리고 달린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   그리고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들이 절반 정도의 의식을 지배한다면, 온종일 뭘 먹을까, 어디 가서 잘까 이런 생각도 절반... 아니 절반 이상인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단순해지는구나... 단순해지기 위해 떠나왔구나... 


집을 꾸려 여덟 시가 다 돼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하루 동안 후방으로 휴가를 나왔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는 병사만큼이나 마음이 비장해졌다.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던  마쓰야마 시내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해두고 싶었다.  



52번 다이산지(太山寺)로 가려면 출근길 시민들과 뒤섞여  해안쪽으로 달려야 했다. 컨테이너 차량들과 부두가 창고와 산업시설들...을 지나친 뒤 다시 북쪽으로... 도고온천 근방에 있는 마쓰야마유스호스텔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헤매느라 오전 9시쯤 절에 도착했다. 본당까지는 일주 문에서 500 미터 가량 산을 올라가야 한다. 신음소리를 내며 오르막을  오르는 내게 승용차로 순례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서울서 왔다니까 깜짝 놀란다. 예의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하느냐고... 



1305년 마쓰야마의 성주인 고노(河野)가 기증했다는 다이산지의 본당은 일본 국보라고 한다. 


53번 엔묘지 (円明寺)는 다이산지에서 불과 3Km도 안 되는 지점, 시내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이한 건 없었는데, 이 절에는 1924년에 순례를 하던 미국사람 스타르가 발견했다는 가장 오래된 동판 오사메후다(納札)가 유물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오사메후다는 순례도중에 알게 되었는데...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주소, 기원하는 바를 적어 본당과 대사당 앞에 있는 함에 넣은 것으로 순례자들끼리는 이것을 명함처럼 주고받기도  했다.   


엔묘지를 참배하고 나니 9시 30분. 당분간 해안선을 따라 이마바리시(今治市)까지 줄곧 달려야 한다. 54번 엔메이지(延命寺)까지의 거리는 36km다. 


엔묘지에서 나와 건널목 사진을 찍으려 돌아섰더니 옆집 할머니가 나와서 엔메이지 가는 쪽은 이쪽이 아니고 저리로 교각을 지나서 곧장 가라고 말을 한다.  주춤하는 나를 지켜봤던 모양이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가는지... 재잘대며 곁을 스쳐갔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노란 모자다... 시인성 높은 모자로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이겠지... 귀여운 녀석들...ㅎㅎ 



내를 벗어나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커피우유와 단팥빵 (252엔)을 사서 우유는 마시고 빵은 핸들바백에 넣고 출발... 

이제 시내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지도에서 보듯이 줄곧 해안을 달리게 돼 있다.  시코쿠 지도를 보면 좌우로 조금 길게 뻗어 있고 북쪽 바다를 향해 양 끝에 뿔 두 개가 혼슈 쪽으로 솟아 있는데, 오늘은 왼쪽 뿔을 돌면서 196번 국도(이마바리가도)를 따라 해안을 돌아야 한다. 지도를 보면서 가늠하기로는 이마바리시에 있는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뿔의 오른쪽 사면에 있는 바닷가 사쿠라이 해변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태평양에 면해 있는 남쪽 바다와 달리 이쪽, 세토내해는  파도도 거의 없다. 바다다운 호방한 느낌도 없다. 게다가 바이패스로 자동차 전용도로가 분리된 곳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뒤에서 달려오는 트레일러들을 의식하면서 긴장한 채 달려야 하는 구간이었다. 



보행자나 자전거를 위한 도로가 구분이 돼 있지만 하수관로가 밑에 깔려 있거나 요철이 심해 자전거로 달리기는 상당히 불편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그냥 자동차 도로로 빠르게 달리다가... 엄청난 속도로 추월하는 트레일러들에 한번씩 휘청하고 나면... 급격히 위축돼 다시 자전거 도로로 피해 들어가는 일이 반복 됐다. 


또 이용자가 많지 않은 해안 길이이라 갈대와 풀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곳들도 있었다. 괜찮겠지 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가다가 풀들에 부딪쳐 단차가 있는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다.   



더러는 호조(北条)같은 작은 마을들을 관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오전 내 인가가 없는 해안길들을 달려야 했다. 


마쓰야마시와 이마바리시 중간 지점 쯤에 있는 가자하야노사토후와리(風早の郷 風和里)  미찌노에키 . 


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널찍한 휴게공간... 한 동안 쉬었다.  


처마 밑에 제비들이 많아서 한참 구경했다.  우리 생전에 서울 인근에도 제비가 돌아오는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휴게소에서  로드 자전거를 타고 들렀다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가끔 만나던 도보 순례자들을 해안길에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줄곧 시속 30km 가량을 유지하면서 빠르게 달리는데도 다소 지치는 길이었다. 구름에 가려 해가 '쨍하게' 비치지 않으면서도 뭉근하게 달아오른 날씨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다. 


김동리는 '역마'라는 소설에서 화개장터 인근 섬진강 길을 묘사하면서 아무리 걸어도 '길멀미'가 나지 않는 길이라고 했었다. 쌍계사 쪽으로 지리산에 갈 때마다 그 구절이 떠오르곤 했다. 어쩌면 그리도 적확하게 묘사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마바리가도를 달리는 나는 길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바다쪽에서는 상쾌한 바람 한 자락 불어오지 않았다. 파도도 치지 않는 숨죽인 바다... 





시외로 드라이브를 나왔다가 해안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해적우동... 시간이 맞았다면 일부러라도 들러보고 싶은 바닷가 우동집... 


12시30분 ... 길가에 있는 라면집 '돈돈라멘'을 보고 무조건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립기도 했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기가 미안해 주방과 마주 보고 앉는 바에 않아 라면을 먹었다. 덕분에 라면을 어떻게 조리하는지 고스란히 지켜보았는데... 비닐 봉투에 든 공장 양산 생면을 뜯어서 거름망에 담은 뒤에 가스렌지 위에 올려둔 커다란 국물 솥에 몇 차례 토렴을 하고 돼지 뼈를 우려냈을 국물을 부은 뒤 양파와 숙주 같은 채소들을 한 줌 올려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라면은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500엔) 


 인근에서 계속 엷은 연두색 유니폼 입은 사람들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근처에 있는 태양석유  직원들이었다. 식당 손님들도 대개 그들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온 직원들은 라면집에성 만화책을 보면서 라면을 먹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후다닥 회사로 돌아갔다.  



라면집을 나와 정유탑에서 불을 뿜고 있는 태양석유를  지난 뒤에도 한동안 달렸다. 


이마바리시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호시노우라 해변공원. GPS에 캠핑장으로 표시된 곳이었지만, 공원 관리사무소는 비어있었고...샤워를 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텐트를 치더라도 국도변이라 편한 잠을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급수대가 있긴 했지만...아무래도 야영을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굳이 잠을 자자면 안 될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인근에 혼슈의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까지 연결하는 니시세토자동차도로(세토우치 시마나미카이도)가 있다고 했다.  세토나이카이의 섬을 9개의 다리로 연결하는 약 60km 달하는 자동차 도로고, 다리들에는 자전거ㆍ보행자 전용도로도 있다고 하지만... 감히 넘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나쳐야 했다. 



길 건너편에 에이코프(A Coop) 대형 매장이 보여, 일부러 들러보기로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한살림은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린코프 생협이나, 도쿄를 중심으로 주로 관동지방에서 활동하는 생활클럽 생협과 오랫동안 교류를 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생협의 역사가 20년 쯤 앞서고, 규모도 훨씬 크다. 그 가운데 앞 서 말한 두 생협은 반전평화, 주민자치, 복지 등에서 대단히 진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생협들은 시민네트워크('네또')라는 준 정당적인 조직까지 결성하고(일본도 생협법에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시민후보를 지방자치단체 등에 출마시켜 단체장이나 시의원들을 상당 수 의회에 진출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조합원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분들이고, 이들은 받는 월급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원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네또'에 내놓고 있으며, 개인의 경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협이 내세우는 식량자급, 반전, 반핵 평화, 주민 복지 등을 위해 시 예산을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2번까지만 출마가 허용되고, 그 뒤에는 후배 활동가에게 출마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우리나라 생협운동은 한살림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생협들에 비해 유기농, 친환경물품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하다. 다만, 일본의 고베 시 같은 곳은 전 주민의 80% 조합원일 정도로 대중적인 기반이 훨씬 넓어, 일반 시장에서도 생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린코프나 생활클럽 같은 생협들은 운동성도 강하지만 다른 생협들은 또 그런 경향들이 강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값 싼 중국식재료를 수입해다가 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 생협들도 있다고 ... 





그러나 어쨌든, 반갑기도 해서 생협매장을 둘러보려고 자전거를 세워 놓고 매장으로 걸어가는데...  육십 세쯤 돼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전해준다. 도로에서 달리는 걸 보고 따라온 것 같았다. 여전히 오셋타이를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몇 번 거절했더니 ' 실례인 줄 알지만 이걸 받아 주세요.  주스라도 마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다시피 한다. ..또 거절 못했다. 


생협매장은 우리나라의 한살림 매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일반 마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저가의 중국산 생활용품까지 파는 백엔숍 (세리아) 마저 있었다. 한쪽에  접골원,  카페인 듯한 마마스키친 등까지...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수제 도시락과 주먹밥(오니기리) 정도가 남 달라보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 였다. 


이곳에서 오니기리 쵸코칩쿠기,  우유, 어느 절엔서가 풀어 놓고 잃어버린 반다나(등산용 스카프), 아이이스 크림 등을 쇼핑했다.(모두 750엔) 




곧 이마바리(今治) 시내로 접어들었다. 


 54번 엔메이지(延命寺).   오후 2시에 도착했다. 시내에 있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멀리 달려온 게 감격스러워 오늘의 납경을 이 절에서 받았다. 



 여기도 드넓은 묘지를 끼고 있었다. 



인간이 불안하고 나약하다 보니 종교가 필요하겠지... 불안의 근원에는 사멸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 아예 죽음 뒤에 펼쳐질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종교적 신념에 기대 불안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리라... 





나 역시, 우리 세대 많은 이들처럼 20대에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물질이며, 정신의 작용마저도 물질의 반응이라는 설명이... 어떤 면에서는 위안을 주기도 했다. 죽어서 물과 바람과 흙이 된다는 것,  ... 관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나 잠깐 남을 뿐 ...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믿음... 


그 믿음이 튼튼할 때는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오로지 이성적 합리와 양심에 따라 걸어가면 되었다. 설령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을 조금 앞당길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세계도 인간도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닫게 됐다. 영혼의 문제나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이나 권위에 대해... 느끼고 깨닫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생명( 이 역시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과 의지에 닿아 있는 부분이겠지만) 은 '물질의 합법칙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라는 점도... 믿게 되었다. 



세계를 물질로만 보는 관점... 그런 신념이 세계를 망가뜨려온 게 근대의 역사가 아닐까. 이성에 대한 오만한 신념. 문명이나, 산업... 이것이 이제 인간의 생존 자체를 극한까지 위협 하고 있잖은가...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성물질들...  


이마바리시 역시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예의 시내 한 복판에는 언덕 위에 오래된 성이 있었다. 골목을 달리고, 물길을 건너면서 시내를 헤매다 보니 절이 나타났다.   



55번 난코오보오(南光坊). 오후 2시 50분에 도착했다. 88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 사(寺)자가 아니라 동네 방(坊)자가 붙은 절이다. 절 자체 휑 하고 별 게 없는데 산문은 도로변에 거대하게 서 있었다. 이곳에도 예의 바로 옆에 더 큰 규모의 신사가 있었다. 



두어 시간 내로 56번 다이산지(泰山寺)부터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해변 캠프장에 도달할 수 있을지...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적하지만 잘 정비된 시내. 차량 통행에 비해 도로가 과한 게 아닐까 싶은 길을 3km 가량... 다시 내륙쪽으로  달려 

56번 다이산지(泰山寺)에 도착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절이었다. 전설에는 인근에 있는 하천이 해마다 범람하자, 코보대사가 주민들을 지도해 제방을 쌓아 치수 했다는 ... 



그 때문인지... 다이산지는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57번 에이후쿠지(栄福寺)는 고속도로(196번도로 바이패스) 너머에 있었다.

하교길의 학생들이 얼마나 티 없어 보이던지... 그렇다고 믿자... 그렇겠지... 비록 내면이 들끓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들 만큼 괴롭지는 않겠지... 


하나같이 삭발한 머리에 흰색 헬멧을 쓰고 예외 없이 자전거다... 교복이겠지만 흰색셔츠와 감색 바지...  



시의 외곽, 논들이 한가롭게 펼쳐져 있는 시골 동네... 



 별 다른 표지도 없이 있어 하마터면 절을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아니, 들머리를 지나쳐 200미터쯤 지나친 뒤 혹시 지나친 이 가게가  절 앞 기념품 가게 아닐까 싶어 되돌아와 절을 찾았다. 

오후 4시.   에이후쿠지(栄福寺) 참배를 마쳤다. 


모내기 마친 지 얼마 안 지난 어린 모들이 심어진 논들이 펼쳐진 들판 위에 살짝 올라 앉은 어

대절 버스를 타고온 단체 순례자들이 오늘의 마지막 절에 들렀다는 듯... 한가로운 표정으로 본당에서 내려서고들 있었다. 




58번 센유지(仙遊寺)... 그토록 높은 산 위에 있는지 몰랐다. 


완만한 언덕 위로 뻗어 있는 길을 느릿느릿 조금 한가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고도가 장난이 아니다. 시내가 온통 내려다 보이는 산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생협매장에서 사 둔 주먹밥을 먹으며 기운을 내지 않았다면... 다리가 후들거려 애를 먹을 뻔 했다. 



예상치 못한 고도. 절은 가히  선유 할 만 한 높이에 있었다.  결국 인왕문 못 미친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서 올라야 했다. 


온천도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잘 되어 있고... 내려다보는 경치도 그만이라... 그냥 하룻밤 여기서 자고 갈까...




 망설이다가 ... 내려가서 자전거 끌고 올라올 일도 암담하고 예정에 없던 숙박도 내키지 않아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규모도 크고 건물들도 물론, 세로 지은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본당은 제법 연륜이 느껴졌다. 



공수도 강습도 한다는 안내도 있고... 규모가 상당한 절이다. 


지친 때문인지...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왔다.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느닷없는 ...  


혼자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갑자기 급습을 당한 듯,  밀려 든 회의감을 주머니속에 든 조약돌처럼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혼자 이렇게 침묵하는 순간을 느끼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을 자유. 얼마나 갈망했던 순간인가. 


게다가 부모님을 깊이 만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베풀어 주는 과분한 사랑이 당연한 듯 받았고,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나의 내면은 조금 복잡해졌다. 삼국지류나 채근담 같은 책을 자주 읽던그 무렵의 나는, 스스로 갑자기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 대해 '나는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었으니 나 스스로 아버지의 역할을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암시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미 우리가 낳은 딸들이 내가 아버지를 여읜 나이보다 더 자랐다. 나의 아버지보다,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에 더 많은 생각이 머무는 때가 되었다. 과연 나는 딸들에게 어떤 아비일까. 사실은 대학 1학년이 된 큰 딸 아이와는 떠나오던 무렵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빴다.  갈등의 원인은 다양했다. 자정까지로 정해 놓은 귀가 시간, 아무리 입시지옥에서 풀려난 1학년이라고 해도 책 한 줄 안 읽는 것 같은 실망스런 학습 태도... 이런 말을 안 해도 얼굴에 쓰여있기 마련이라...딸은 되도록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오후 5시가 다 돼 간다. 다시 이마바리 시내로 내려가야 한다.


이곳도 분위기가 조금 독특하다. 시내로 내려오면서 만나게 되는 일본의 조용한 소읍의 풍경.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찌 키우고 있나... 자정이 되어야 학원에서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나라의 중고등 학생들을 시코쿠에서 떠올리자니... 무슨 괴기스러운 부조리극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산을 내려서자마자  다섯 시 시보가 울려 퍼졌다. 베르너의 '들장미'. '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 중학교 음악시간에 친구들과 미소를 교환하며 합창을 하던 음악시간이 생각났다. 

해 질녘, 귀가를 재촉하듯 울려 퍼지는 시보까지... 마음은 더욱 애수에 젖어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는 9.3km 가량 떨어져 있었다. 센유지에서 산 중턱까지 내려와 우측으로 산간 도로를 한동안 달리다가 좌회전해서 해안 쪽으로 한참을 달려 내려가야 했다. 이미 납경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지나 있었다. 동네 수퍼에 저녁장을 보러 온 주부들이 분주한 시간이었다. 



시 외곽에 있는 고쿠분지.  이미 불 꺼진 향로에 향 세 촉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하루 동안의 순례는 또 마무리 되었다. 온종일 침묵 하는 가운데에도 마음 속에 무수히 피어나고 사라진 수많은 번민과 회억들...  그리고 오전에 ... 굳이 달리는 자전거를 쫒아 와 생협매장 앞에서 천원짜리를 쥐어주고 가던 그 할머니... 


오후 5시 50분.  잠자리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다. GPS가 가리키는 해변 캠핑장까지는 5.6km. 시내를 벗어나자 도무지  상점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먹을거리도 없이 야영장에 가서 처량한 밤을 보내야 하나? 이 난감한 상황을 어째야 하나 갈등하는 순간에 작은 시골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할아버지가 나오신다.그 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다.  이곳에도 소포장 쌀은 없었다. 사정해서 쌀 1kg을 샀다.  감자1kg 바나나 한 송이까지(모두 752엔)  쌀을 사고 나니까 마음이 느긋해졌다. 이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시외의 인적 드문 도로를 달렸다. 



차도 사람도 전혀 없는 무섭도록 조용한 시골길을 한 동안 달려 바닷가에 도착했다. '사쿠라이 해변 만남의 광장'이라는데... 개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종료나무가 길게 뻗어있고 제법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하지만,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은 곳들이 그렇듯이...뭔가 퇴락하고 서글픈 분위기... 


조금 무섭기까지 한 바닷가였다. 


물을 길을 수 있는 음수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을 뿐  쓸쓸하다. 물과 화장실이 있으니 잠은 잘 수 있겠다.  화장실은 낡기는 했어도 깨끗이 청소 돼 있었다. 역시나 이곳도 '깨끗한 공중화장실은 지자체의 자존심' 인 모양이다. 

어디에 텐트를 칠까... 쳐도 되나... 조금 주저됐지만 ...달리 대안도 없었다. 



시멘트로 지어놓은 배 모양의 어린이 놀이기구가 있길래 이 안에 텐트를 쳤다. 바람을 막아주었고,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세 칸 있어 걸터앉아 밥을 먹기도 좋았다.  


내일 가야 하는  60 번 절 요코미네지(横峰寺)는 지도상으로 보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산 위에 있다. 해발 696미터... 또 북한산 높이에 가까운 산을 올라야 한다. 어떻게 갈 것인지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한 채... 밤을 맞았다.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조금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잠을 청했다. 가끔씩 퉁퉁퉁...고깃배들이  엔진을 울리리면서 잠을 깨웠다.  조금은 서글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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