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 6/7 금 이마바리 해변공원- 시코쿠주오시 비지니스호텥 


운행 85.52 km


아무도 없는 빈 바닷가... 적막감 때문인지... 새벽 세 시도 안 돼 잠에서 깨었다. 약간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화장실에  다녀온 뒤 ... 조금 더 자야겠다 싶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더 자지 못하고 4시 반에 일어났다. 텐트 지퍼를 열고 짐을 정리하고 조금 더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동 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무척 더울 것 같다. 


어제 저녁에 삶아둔 감자와



저녁에 먹다 남겨 둔 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주먹밥을 만들어 남은 감자, 빵과 함께 도시락으로 싸두고    

저녁 삶아 둔 감자 몇 알, 식빵도 굽고,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세토내해 (瀬戸内海)가 혼슈와 시코쿠 사이 호수처럼 닫힌 바다라 일출을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어딘들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랴. 



어김없이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역시나 외딴 바닷가인데도 산책을 나온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나는 이미 짐을 다 꾸려놓고 양치질까지  마쳤기에..  내가 이곳에서 야영을 했으리라고... 눈치 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휴지 한 장 흘린 게 없으니 무슨 폐가 될 일도 없었을 테고... 


6시 반 일단 출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  



한 동안 한적한 해변을 달리다가 다시 196번 도로쪽으로 나와 합류하게 되어 있다. 


해안과 나란히 진행하는 196번 도로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10km 가량 달리다가...  

도요(東予)항 부근에서 내륙쪽으로 우회전해서 마주 보이는 거대한 산군을 향해 달려가면서...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번 요코미네지(橫峰寺)는 해발 745미터지점에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자저거를 어느 지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지... 그것도 가늠이 안 되었다. 어차피 산 위에 있는 요코미네지에 가기 전에 그 길목에 일는 61번 고온지(香園寺)에 들러 가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기에... 먼저 그곳에 들러 납경소에서 길을 묻기로 했다. 



해안에서 48번 도로로 2km 가량 달려가다가 다시 좌회전 해서 전형적인 농촌마을 들판을 달렸다. 6월... 양파 수확할 즈음이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시기가 비슷했다. 예전에 경북 의성에 있는 쌍호 마을에 갔을 때 그분들도 6월 첫 주에는 양파를 캐내고 그 곳에 다시 모를 낸다고 했다.  경북 의성의 '양파'나 시코쿠의 '다마네기'나 그것을 길러내는 자연의 힘은 똑 같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정직한 땀...   


국경을 긋고 나와 남을 구분하고 ... 미워하고 ... 그것은 사람의 일.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질문하는 제자 수보리를 향해 ... '모든 상을 가진 것이 다 허망하니 만약 상을 가진 모든 것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면 여래를 보게 될 것(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아침 8시 반,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주부들이 한가롭게 집안을 청소하며 아침드라마라도 볼 시간...  제61번 고온지(香園寺)는 마을 한쪽에 있었다.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낯설었다. 무슨 강당 같은 건물 안에 본당이 있었다.

 


법당에 강당처럼 접이식 의자들이 설치 돼 있었다. 본존불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엄지를 감싸고 있는 '대일여래' 불이었다. 다니면서 읽게 되고 다시 유심히 생각하게 된 점인데... 밀교인 진언종에서는 이 대일여래가 가장 중요한 부처이며 우리에게는 비로자나불로 익숙하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는 몰랐던 점이 또 하나 있다. 대일여래... 태양처럼 온 세상에 불법을 비추는 부처님의 이름에서 곳곳에 '다이니치지(대일사)'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단순히 일본의 국수적인 사고에서 온 것으로 착각했던 점...  

 


이 부처님이 두 손을 하나로 모아 엄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중생과 부처, 깨달은 경지와 미혹한 경지가 본디 하나라는 점을 이르는 것이라던데... 쉬운 경지가 아니다. 그러나 새겨 읽다 보면, 적금을 부어서 차를 사고 집을 사는 일처럼... 당대에 덕을 쌓아 당장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의 성취가 있어야 것처럼 조바심을 내는...  나 같은 자들의 천박함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절이 이렇게 거대한 현대식 건물로 '부흥'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코보대사가 이 근방에서 괴로워 하는 임산부를 보고는 향을 피워 기도를 올리자 아이를 순산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탓에 아이를 무사히 낳기 원하는 이들이 시주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건물이 오히려 섭섭하고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남의 위압적인 대형교회들을 보면서... 어쩐지 이곳에 예수가 깃들기 어렵겠다 싶은 것처럼 말이다.  



종교가 세속을 뺨치는 일이 흔하다. 종교가 무슨 재테크도 아니고 자식 일류대학 합격이나 집값 오르게 해달라거나 사업이 '대박나게' 해달라는 정도에서 종교의 효용을 찾는 일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 그렇게 불려나와 있는 부처님과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참배를 하고 납경소에 갔더니 뜻밖에도 머리를 파랗게 깎은 젊은 비구니 스님이 앉아 있다. 60번 요코미네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찾아왔다며 자전거를 타고 60번 사찰 요코미네지 가려면 어떤 길을 택해야 좋을지 물어보았다.





 11번 도로에서 좌회전 해서 3.5km 가량 달려간 뒤 이와네(石根)우체국 근방에서 훼밀리마트를 보고 좌회전 한 뒤  ... 


 

산을 향해 난 147도로로 ...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서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고... TT 


147번 도로... 처음에는 산을 올라가는 기분도 들지 않을 만큼 완만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은 저 산을 향해 올라가게 돼 있다.경사가 고되지만, 차도 없고 날씨도 맑았다. 이 아침에 이 토록 고요한 풍경을 느릿느릿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콧노래마저 부르면서... 잠시 행복했다. 그러나 점점 ...

 


산길이 가팔라지고 ... 중턱에 커피를 볶아서 판다는 커피숍도 있었지만, 휴가철이나 휴일에나 여느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맛있는 커피 한 잔을 몸 안의 세포들이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할 수 없이 물통에 남아 있는 물과, 도시락으로 싸온 빵을 간식으로 먹고... 다시 기운을 내 등산 시작. 


 

10시 30분... 자전거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해발 330미터 지점(길이 끝난다)에 있는 휴식소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 이 지점에 약수터가 있다.  



왕복 4.4km라고 하니 걸을 만 한 거리다. 수통에 물을 담고 ...핸들바백만 어깨에 걸친 채 ... 

 

등산 시작...




 
'악로 통행주의' 표지판, 그리고 산 사태로 무너지 흔적까지... 조금 긴장하게 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험로(險路) 라고 했을 텐데... 싶었다. 악(惡)은 아무래도 상태의 좋고 나쁨보다는 선(善)의 반대 의미가 강한 게 아닌지...  


 

적막한 산길을 걸어올라 간다. 마치 지리산의 백무동 같은 들머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숲 그늘이 짙고 곧게 뻗은 삼나무들이 빽빽한 숲을이루고 있다. 다만, 참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우거진... 내게 익숙한 우리 산들과는 사뭇 다른 식생들...

 

 

누군가 달아 놓았을... '인생 즉 헨로'   

그렇구나... 사는 일... 끊임없이 내면에 물음을 던지며 걷는 일이로구나. 공감하면서 고사리가 무성한 축축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적막하고 고요했다. 고독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지점에선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메아리라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 수풀 속에서 불쑥 회색 전통 전통 의상을 입은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순례자 한 분이 불쑥 고개를 든다. 나도 그도 서로 놀란 것이다.   



도요타시에서 왔다는 그는 먹물 염색을 한 전통복장에 적잖은 세월이 느껴지는 삿갓, 금강장을 짚고 있어 만만찮은  경륜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잠깐 동안 앉아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는 자신의 배낭에 매달려 있던 작은 나무조각을 기념품이라며 내게 주었다. 자신이 직접 붓글씨로 썼다는 청정(淸靜) 두 글자... 이것 역시 상당한 미의식이 느껴지는 소품이었다.  


11: 30... 드디어 해발 745미터 산중에 있는 60번 요코미네지(橫峰寺)에 도착했다. 가파르긴 했지만 숲 속으로 난 무난한 등산로였기에 걷기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이시즈치산(石鎚山 1982m) 중턱이다. 일본에 오기 전에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여유가 된다면 산 아래 짐을 두고 이 산을 등정해볼까 생각 했었다. 그러나... 막상 산 아래 도달해 보니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단은 순례라도 무사히 마치자...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독경을 하고...  



오사메후다에 한 마디 적어서 넣고...  




납경소에 들렀다. 눈이 커다란 젊은 스님이 걸어서 왔는지 물었다. 자전거로 순례중이고 산 아래부터는 걸어왔다고... 대답하니 호오 그래요? 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요코미네지 위쪽에 코보대사의 수행처였다는 호시가모리가 있다는 것도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가게 된다면 이시즈치산정도 ...호시가모리에도 올라가고 싶다. 

 

11:50  하산 시작.

 

큰 근심거리였던 요코미네지에 올랐다가 하산 하는 길... 마음이 가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여전히 마음 속에 사찰순례를 마치 숙제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아무리 산 마루에 있는 절이라고 해도 ... 스스로 마음을 내고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무슨 업무 스트레스처럼 여기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 시인의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 시가 떠올랐다. 1980년대에 만인보를 쓰실 때는 도무지 장황해서 이게 무슨 시란 말인가 싶은 때도 있었는데 ... 젊은 시절 선승이었던 그답게 무슨 게송 같은 충격을 주던 그 구절.  


지ㄱ


시코쿠를 떠올리고 떠나올 때의 내 심정은 ... 참담하고 슬픔에 겨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이나... 쇠락해가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해...느끼는 비애감?... 인생의 한 고빗사위를 올라가는 중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삿된 욕망을 좇아본 적도 없는데... 삶은 늘 고달프고 정열을 바쳐온 일들은 점점 가망이 없어져 보였다. 세상이 이 점점 더 불의하고 불평등하며 위태로워 지고 있다는 생각도 ...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짐승의 지경에서 꾸준히 나아가 '세계인권선언' 수준에 도달하고... 근로기준법을 제정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는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고 실현되는 것이다. 자신의 배가 고프더라도 곁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제 것을 덜어주는 것...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회...  


그런데 그 뒤로는 어땠나...  지금은 어떤가...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삶이 허망해진 느낌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유년기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지... 무엇인가를 성취할 때마다,  내심 내가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니까... 갑자기 내 안에 세워 놓은 있던 깃발 하나가 툭 꺾인 기분이 들었다. 


오후 한 시.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 올라가기 시작한 그 지점까지 하산. 정자도 한 채 있고 약수터도 화장실도 있기 때문에 자전거나 도보 순례자들에게 좋은 숙영지가 될 것 같다. 단,  먹을거리와 침낭을 갖췄을 때 ... 말이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오전 내 혀를 빼 물고 올라오던 길을 불과 1,20분만에 휘파람 불면서 하강했다. 

 

오후 2시 20분.  62번호쥬지(寶壽寺)에 도착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들렀던  제61번 고온지(香園寺)에서 11번 도로를 따라 3.2km 쯤 동쪽으로...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본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휘장으로 둘러 놓아 접근이 어려웠다. 햇볕은 살갗을 태울 만큼 뜨거웠다. 기온은 34도 쯤 되는 것 같았다. 이 절에서 늘씬한 로드바이크를 탄 사내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내가 미처 알아듣지 못해 그냥 어색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나의 반응이 실망스러웠는지 그는 뭔가 조금 기분 나빠하는 표정으로 스쳐지나갔다. 내가 일본어가 서툴러 상대방의 기분이나 의도를 충분히 배려해주지 못했다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63번 기치죠지(吉祥寺)는 호쥬지에서 불과 1.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1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만날 수 있었다.  



호쥬지에서 만난  로드바이크 사내는 여기서도 함께 참배를 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아내인듯한 여자가 꽤 비싸 보이는 렉서스를 절 앞에 대 놓고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 절까지는 자전거로 달려가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줄곧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음 절에서는 앞바퀴를 분리해 뒷 트렁크에 싣고는 승용차를 타고 가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남편의 자전거 순례를 아내가 이런 식으로 뒷바라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치죠지((吉祥寺)는 우리 발음대로 읽으면 '길상사'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떠올랐다. 그 동네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길상사가 '대원각'이라는 요리집일 때, 삼청동 큰 집에 살던 문예반 동기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해 따라가고 있었는데... 불쑥 들어가더니 거기서 갈비탕을 사준 적이 있다. 고등학생의 씀씀이도, 서울 복판에 그토록 자연이 고스란히 간직된 요리집이 있다는 점도 내게는 다 놀랍기만 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그 요리집 주인이 법정스님에게 그곳을 통째 시주해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다는 뉴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억만금일지라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을 줄 아는 경지... 


금강경에서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갠지즈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보화를 시주하고... 갠지즈강의 모래만큼 많은 갠지즈강들의 강변에 있는 모래만큼 많은 보화를 시주하는 것의 복덕이 크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깨닫고 잘 지닌 채 타인들에게 전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던 말씀이 떠올랐다.  


64번 마에가미지(前神寺)도 3.2km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1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잠시 우회전한 지점에 있었다.  




마에가미지(前神寺) 참배를 마친 시간은 오후 2시 40분 경이었다. 숙소를 찾아가기도 어중간한 시간이고... 다음 절... 



65번 산카쿠지(三角寺)까지는 48.5 km.  꽤 먼길을 달려가야 한다. 빠듯한 시간이다.  열심히 달리면 두 시간이면 가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착각이었다. 


지도상으로도 시코쿠 섬의 북쪽 해안에서 길쭉한 한 면을 다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 먼 길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몸은 지쳐 있었다. 



11번 국도를 따라 평탄한 길이라 일단은 줄곧 시속 30km 내외를 유지하며 달렸다.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조금씩 페이스가 떨어졌다. 


꼬마들이  학교 파할 시간이었다. 11번 도로는 새로 낸 자동차길이라 ... 

이면에 오래된 옛길들이 거의 나란히 뻗어있었다. 사람들 얼굴만 보아도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일부러 11번 도로를 버리고 옛길로 달렸다. 


해가 뜨거웠다. 하천은 말라붙은 채 강바닥이 태양에 달궈져... 사막 같은 모습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도중에 규동 체인점이 있어 몸도 식힐 겸 ...들어갔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몸도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식권발매기에서 옵션을 선택해 식권을 뽑아 주문을 하게 돼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사막 같은 길을 한참 달렸다. 두어 시간 달린 뒤에... 너무 지쳤지만 국도 변에는 마땅히 앉아 쉴 만한 그늘도  드물었다. 시코쿠주오시(四国中央市)에 거의 도달한 지점에 완만하지만 꽤 긴 고개가 있었다. 내려서 끌고 가자니 더 지칠 것 같아서 기를 쓰고... 패달을 밟으며 올라갔다. 이미 다섯 반이 넘어 있었다.  


언덕 마루에 다다를 무렵... 앞서 가는 자전거 순례자를 만났다. 뒤에서 볼 때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여자였다. 




그는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라... ' 복장을 보고 같은 순례자인 것을 확인하고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는 근 30분 이상 언덕길을 걸어내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다찌 사토미 상은 '도쿄에 사는 20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 딸도 스무 살이라고 ... 하니까...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도대체 몇 살인데 딸이 스무 살이냐고... 꽤 많다고...ㅎㅎ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했느냐? 고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렇다고... 출발한 지 24일 째라고... '왜 순례를 하고 있나요? ' '작년에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면서 순례하고 있어요.' '와... 대단하네요. 할아버지가 제일 중요한 분이었군요. 부모님이 아니고? ' ' 부모님은 이혼해서 함께 살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요.'  


기억을 되살려보니... 26번 곤고후쿠지에서였나... 택시 기사가 '예쁜 여자가 혼자 자전거로 순례를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하던 ... 말이 생각났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와이온나'가 바로 아다찌 상인 모양이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어디서 잘 계획이냐고 물으니 자신은 시코쿠주오시에 있는 1박에 5천엔짜리 비지니스 호텔을 예약해두었다고... 나는 그때까지 잘 곳이 막연했다. 내가 미처 잘 곳을 정해놓지 못했다고 하자 사토미는 자기 전화기로 인터넷에 접속해 일본 여행 숙박 예약 사이트인 자란넷(www.jalan.net) 을 통해  시코쿠 주요시 이오미시마역 인근1박 3,600엔 짜리 리브마크스 호텔을 찾아서 예약까지 해주었다. 


 

잠자리문제까지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내가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지만, 그는 내게 손님이니 자신이 저녁을 사는 게 맞다고 했다. 역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엄청난 안주를 시켜서 맥주를 무척 많이 마셨다. 가게 주인부부도 합세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자카야 안 주인은 한국 드라마 매니아였다. 내게 수많은 드라마 이야기를 했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일본사람들가운데는 드믈게... 핸드폰도 삼성 갤노트2를 쓰고 있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묵언수행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낯설 이국의 거리를 그저 달리고 달려왔는데, 떠들썩한 술자리에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 일이 낯설고도 즐거웠다.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고... 결국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반씩 '분빠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11시가 다 돼 술자리가 파했다. '김상 내일 몇 시에 출발 하세요?' '보통 7시쯤 떠납니다.' '아, 저는 8시쯤 출발했요.' '네... 힘 내세요.' ' 아마도 또 만나게 될 거예요. 가는 길이 같으니'  이렇게 아다찌 상과 헤어졌다. 


길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나는 되도록 혼자서 호젓하게 달리고 싶었다.  그 점은 ...  비상한 기획으로 귀한 시간을 내 순례를 하고 있을 아다찌 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을 모으고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무엇인가 정신을 고양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3600엔짜리 비지니스호텔은... 토요코인에 비해 떨어질 게 없었다. 다만, 아침밥이 없었다. 대신 로비에 컵라면 자판기가 놓여있었다. 




숙박 3600엔, 규동 500엔, 납경 2회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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