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순례를 다년온 지 일년이 다 돼 가도록 기록을 마치지 못했다.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기록은 무엇을 위해 왜 해야 하나 하는 회의도 있었다. ... 이렇게 ... 게으름을 피우던 중 ,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졌다.  차마 무슨 이야기를 태연하게 쓰기가 어려웠다. 

이런 세상을 우리 세대가 만들었구나... 개인에 따라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회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방조를 하거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고 생명이고 인권이고 뭐고... 

오로지 돈과 출세, 경쟁과 이익만을 위해 안면몰수... 맹목으로 질주하는 이런 사회를 만들고 ... 그 천진한 아이들을 몰살시키는 일에 부역을 했구나 적어도 방조는 했구나 하는 심정에 참담했다. 


또 다시 새벽마다 잠이 깨는 일들이 되풀이 됐다. 이 기록도 더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4년 5월 25일) 



# 21:  6/10 월  우탄구라ㅡ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운행 81.81km

역시나, 간밤에 과음을 했다. 그러나 다섯 시 경 어김없이 잠이 깼다. 날이 완전히 개어 있었다. 



지난 밤 안수창 씨 식당 '낙원'에서 이리에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사모님이 차린 8가지 반찬의 황송한 아침상을... 받았다.   순례자들의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신다고 ... 이렇게 덕을 쌓고 계시는구나... 


순례자들을 자기 집에 재우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간식을 내밀거나 ... 오히려 오셋타이라며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돈을 손에 쥐어주고 가는... 이런 수많은 주민들이 시코쿠를 시코쿠로 만들었으리라...  


쌀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다 먹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보고 사모님께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두 덩어리 주먹밥까지... 

점심은 이것으로 해결하면 걱정이 없겠다... 싶었는데... TT 



두 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탄구라 홈페이지도 숙박하고 간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신다고... 



6시45분  또 다시 출발... 옷도  빨아서 말렸고 날도 개었고 몸도 개운해졌다. 오늘 하루 또 달려보자... 


우탄구라에서 79번 사찰  텐노지(天皇寺)까지는  7.4 km.  철길을 따라 평탄한 도로를 달리게 되어 있다. 등교와 출근으로 부산한 시내를 나만 독특한 복장으로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 시간 가량 달려 절에 도착했다. 절 입구에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있었다. 보통 신사 앞에 서 있는 이 문은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처럼 돼 있다. 성황당에 쳐 있는 금줄이나 솟대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에 세워놓는... 



전설에 따르면, 12대 천황의 아들들인 사루레오가 부하들과 괴물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오히려 잡아먹혔는데, 요코나미묘진(横潮明神) 이라는 신이 이 부근에 있다는 야소바의 영천(八十場の霊泉) 의 샘물을 먹여 모두 살려냈다고 한다... 


이후에 코우보 대사가 이 곳을 찾아왔을 때, 샘을 지키던 산신이 대사께 귀의하고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1156년 내전에서 패한 스토쿠 천황이 이곳으로 쫓겨와 죽었는데, 장례절차를 중앙정부에 상의하는 동안 천황의 시신을 야소바의 샘물에 담궈두었더니 고스란히 보존되었다고...  이 절이  텐노지,  천황사가 된 것은  이런 유래라고...  



참배를 하고 나오니  엊그제 71번  이야다니지(弥谷寺)지 앞에서 만났던 순례자와 다시 마주쳤다. 간단히 목례로 아는 체를 했다. 걷거나 자전거로, 또는 승용차나, 단체 관광버스로... 드물게는 택시를 대절해서 이렇게 순례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비루한 일상을 떠나 불경을 독송하며 탈속한 가치를 떠올리며 걷는 일... 일상에서 쌓아가고 있는 업을 벗어나려는 마음,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돌이켜보면 내게는, 산길을 걷는 일이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북한산이 그랬고... 안산이나 안양 인근에 살던 고단한 시절에는 안양에 있는 수리산과 관악산... 그리고 해마다 서너 번 지리산과 설악산...을 찾아가 걷다보면 옥죄여오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산길을 걷다보면 살아갈 힘이 다시 고이는 것 같았다. 


양배추 수확철인 모양이다. 마사토 같은 사질토양과 비닐멀칭이 없어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농업이 날로 어려워지는 현실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식량자급률도 25%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8시10분 ... 다시 텐노지에서 출발. 80번 고쿠분지(國分寺)까지는 7. 3 km 가량 도로를 따라 달리게 되어 있다. (돌아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차라리 79번- 81번-82번-80번 순으로 가는 것이 길도 편하고 거리도 단축된다고... 도보여행자는 물론 자전거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문제는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와  82번 네고로지(根香寺)다. 지도와 가이드북을 보면 두 절 모두 고쿠분지가 등지고 있는 두 산 봉우리 시로미네산(白峯)과 오히라(大平)산 위에 있다. 두 산은 능선이 이어져 있었다. 고쿠분지에서 산을  올려다보면서 시계방향으로 되돌아 가야 오르막 들머리를 만나게게 되어 있었다.  


미리 지형을 살피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 일정을 앞두게 되면 ... 여전히 전날부터 마음 무거웠다. 스스로 시작한 순례가 여전히 남이 채운 족쇄처럼 버거운 것이다. 



9시,  80번 고쿠분지(國分寺)에 도착했다. 


고쿠분지라는 절 이름이 여러 곳인 이유는, 741년 쇼무천황이 정국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절들이 모두 같은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국사당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남산 식물원으로 오르는 길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돌계단을 볼 때마다 ... 그것이 일제가 남기고 간 유적이라는데 생각이 미처 늘 마음 불편했다. 나라 굿을 하던 국사당을 인왕 선바위로 쫓아내고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천대 받는 실정인데...적어도 일본에서는 신도가 이 나라 최대의 종교가 되어 일상속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 생각해볼 대목이다. 신내림굿을 하는 무당들뿐만 아니라, 마을마다 모시던 성황당이나 집집마다의 터주, 조왕신 등 다양한 전통신앙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근대의 깃발 아래 '미신'으로 몰려 일거에 청산된 일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일본사람으로 자라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스스로 투철했던 박정희에게... 우리 전통은 일본 전통과 달라 청산되어야 할 야만으로 치부된 것이었는지...  



고쿠분지는 이름이나 유래에 걸맞게 무척 넓고 크고 고색창연한 절이었다. 


납경을 받으며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길이 없겠는지 물어보았으나 도리없이 산 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오던 방향을 거슬러 바닷가쪽으로 돌아가서 산을 올라야 한다고...  


도보순례자라면 고쿠분지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81번 시로미네지로  곧장 올라가면  되겠지만 자건거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달려보자...  일단, 81번 시로미네지까지는 14km 가량이다.  마지막 6km는 쉼 없는 오르막이다. 



긴장한 마음을 자전거도 알아차렸는지... 오르막길에 어프로우치 하기도 전에... 도중에 체인이 빠졌다. 비닐 같은 게 감겼던 모양인데,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꽤 애를 먹었다... 패니어를 모두 떼어내고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40분은 족히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짐을 다시 챙기며 살펴보니 분명히 아침에 우탄구라에서 받았던 주먹밥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수창씨가 준 열라면과 삼육두유만...  짐을 꾸리고 인사를 하면서 옆에다 놓고 떠나온 모양이었다. 점심을 어쩔 것인가... 시골길이라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대책없이 오르막이 시작됐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면서... 멀리 세토대교가 내려다보였다. 



12시 경,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에  도착했다. 해발 337m 라고 하는데... 해안선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꽤 까마득하게 올라온 느낌이었다. 




이 곳에서 뜻밖에도 요코미네지 오르던 산길에서  만나 내게 청정()이라는 나무 기념패를 준 분을 다시 만났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나오다보니... 그는 절 입구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도보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나...물으니,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시내 구간은 전철로 이동했다고... 



실례가 안 되면 이름을 여쭤봐도 되냐고... 하니까... '아무 아무개(와다시노 나마에와 고노 요노 ... 나이)' 정도로만 알아두시라고...?  아... 그러시냐고... ^ ^;



납경소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는 디자인도 카피도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취가 시코쿠의 길이 되었습니다.'  루쉰이 했다는 말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아서 ... 길도 처음에는 없었지만... 누군가 많은 사람이 걸어가자 그것이 길이 되었다...' 던 말처럼... 

시코쿠가 시코쿠가 된 것은... 천 년 넘게, 저마다 절박한 사연을 안고 걸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 때문이겠지... 



'청정 아무아무개' 선생은 내게, 이 절의 산문은 다른 절들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고려양식이라 한다. 솟을 대문처럼... 생긴 이 절의 산문이 어쩐지 정겹게 여겨졌다. 



이 절은  오전에 들렀던 텐노지와 연관된 곳이었다. 텐노지에서 죽은 비운의 스토쿠 천황을 장사 지내고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청정 선생'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하는데... 자판기 음료수말고는 먹을 게 없었다. 아침에 흘리고 온 주먹밥이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오히라 산을 향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 보니... 산정 가까운 곳에 온천 휴양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따..땅... 따 ...땅... 



분명히 총소리였다. 사방에 군부대가 있는 우리나라에서야 익숙할 법 하지만... 여기서는 웬 총소리일까... ... 정말 총소리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을 올랐다. 



정말로... 산 위에는 자위대 훈련장이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총성은 계속 온 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군대에서 매일 저녁마다 총을 꺼내 분해하고 기름걸레로 닦고 심심찮게 실탄 사격도 해야 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총이나 총알은 단단한 금속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응축된 살기가 늘 섬칫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겠다는 응축된 의지... 총은 그런 것이었다. 가장 지능이 뛰어나다는 인간만이 총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높은 지능이 우주를 관장하는 힘이나 생명의 본성과는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일본 땅에서도 이런 총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가는 곳마다 심심찮게... 일본의 군사력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일본 헌법 9조를 지키자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구호를 마주하던 것과... '강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아베 자민당의 선거포스터가 겹쳐 보이던 것도 이런 일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말이 자위대지... 사실상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엄청난 플라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이미 2차 대전 당시에 항공모함을 만들고 운영했으며, 인공위성을 스스로 발사하고 있다. 언제든 중국과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군사대국이 될 게 분명하다. 19세기말처럼 ... 한반도의 운명은 또다시 격랑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올라가다 지치면 내려서 끌고... 조금 완만해지면 다시 타고... 시로미네산과 이어진 오히라 산정까지 ...  해발 500미터가 넘었다. 정상 부근에 있는 갈림길에서  82번 네고로지(根香寺)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꼬박 그 높이만큼 다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다. 



오후 1시반...  82번 네고로지(根香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코오보 대사가 당나라에 가기 전에 초가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고, 832년 치쇼(智證)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천수관음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나무 뿌리로 조각한 본존불이 오래토록 향기 내뿜었다는데서 근향'(根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 


절은 산중이라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인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양쪽으로 회랑이 가운데 정원을 감싸고 둘러 있다. 


회랑 안에는 신도들이 봉헌했다는 3만 개에 달하는 관음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본당까지 이어진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오면... 잘 가꾸어진 중정이 있었다. 



나이든 어머니와 딸... 침묵하며 기도하는 신도들도 꽤 많았다. 



사탕 몇 알과 자판기 음료수 말고는 한 나절 동안 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아침에 산길로 접어든 뒤로는 식당도 만날 수 없었다. 너댓 시간 줄곧 오르막을 오르느라...체력도 고갈돼 가고 있었다.  




다시  그러나 다음 절로 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시 고갯마루에 있는 갈림길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는 다카마쓰(高松) 시내인 것 같았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그 지점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서 온 것이다. 스쳐온 일들이 떠올라 왠지 감회가 복잡했다.  


꽤 긴 거리를 다운힐... 

산을 내려오니 기온도 높고, 공기도 달라졌다.다시 햇살 따가운 한 여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80번대를 넘어섰다.  남아 있는 절이라고 해야 83번부터 88번까지 여섯 개... 



산 아래 마을들은 저수지를 끼고 있었다. 논농사 때문일 것이다. 또다시 11번 국도를 만나고... 동쪽으로 달리다가 83번 이치노미야지  (一宮寺)를 향해 달렸다. 



오후 3시쯤 길가에 있는 중국집(중화소바)집이 있어 늦은 점심을 먹어야 겠다 싶어 들렀더니... 오후 5시까지는 준비 시간이라 밥을 줄 수 없다고...TT  ... 아, 그렇겠지... 그게 정상이겠지... 


점심도 못 먹고 허둥대며 산 아래 마을을 헤맨 게 조금 처량하기도 했다. 


도중에 패밀리마트가 있어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사서... 안에서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TT 문밖 주차장에 예전에 야마시타상이 그랬던 것처럼... 선 채로 컵라면과 주먹밥을 먹었다. 우탄구라에서 두 분이 챙겨준 주먹밥을 잘 간직하고 왔다면 훨씬 여유가 있었을 텐데... 




운행중에 스마트폰에 GPS 앱 로커스프로(Locus pro)를 줄곧 사용했다. 목표지점을 설정하면 방향과 남은 거리를 오프라인 지도상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 없이 여행하는 동안 큰 도움을 받았다.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지고 간 카메라 배터리가 빨리 방전돼 핸드폰 사진을 찍으라 핸들에서 탈부착을 하는 일이 힘들었다. 이 때문에 '고질라포드'로 감고 다녔는데... 두 번 떨어트려 스마트폰 꼴이 말이 아니다. 



아이들 등교시간에 80번 고쿠분지에 들렀는데... 벌써 하교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산을 헤매고 다니 것이다. 밥도 굶은 채... 



일본 아이들이 우리나라 아이들보다는 나아 보였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모습...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겠으나 ...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자정 무렵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나라 같은 곳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4시20분 ... 다카마쓰 외곽에 있는 83번 사찰 이치노미야(一宮寺)에  도착했다. 이치노미야(一宮)라는 명칭은 1679년부터 이 일대 신사들의 중심 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불교 사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이 절에 모셔ㅗ놓은 약사여래의 대좌 아래에는 지옥으로 빠지는 구멍이 있어, 죄가 있는 사람이 머리를 넣으면 빠지지 않는다는 ...  



이미 오후 4시가 넘었으므로...  다음 절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싶어... 절 앞에 앉아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캠프장 두 곳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몇 번 찾아갔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나름 미리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다. 



GPS 포인트를 입력해온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미네야마(峰山) 공원 캠프장 등 두 곳 에 전화 했으나  모두 다 안 된다고... 한 곳은 낮 동안만 개장을 하는 공원이라서... 한 곳은 다음 날인 화요일이 휴일이라서...  안된다고...  도시에 오니 여지가 없다...  캠핑장이 두 곳이나 있어 별 걱정 안 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GPS 포인트에 표시된 캠핑 표시는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젠콘야도 리스트에 나와 있는 '슬로우라이프'라는 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이치노미야지에서 북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곳이라고 했는데... 500엔에 숙박이 가능한 곳이라고...  전화를 걸 때 이미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슬로우라이프는 옆에 붙어 있는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전화를 받는 이에게 슬로라이프냐고 ...하니까... 전화를 몇 번 연결한 뒤에야...담당자인 것 같은 남자가 받았다.  조금 사무적으로 ...숙박은 가능하지만, 6시까지 체크인 해야 한다고...  그런데, 찾아가는 도중에 길을 헤매다 여섯 시가 넘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며 여섯 시까지 체크인 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고... 전화를 끊었다. 단지 오분 지난 시점이었다. 규정이나 그런 것은 알겠는데... 조금 야속했다. 



더 이상 운행을 계속하기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는 이치노미야지에서 다카마쓰시를  북쪽으로 대각선  가로지른 지점... 야시마라는 섬의 산 위에 있었다. 인근까지 가서... 섬이니까 바닷가에 야영 가능한 해수욕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야시마지 인근에 있는 여관이라도 찾아보자... 는 심정으로  일단 달려보았다. 



퇴근시간  다카마쓰시내에는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바쁘게 밀려 다니고 있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툭 떨어진 사람처럼...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란 나는... 어둠이 내린 거리를 묵묵히 달렸다.  


결국 야시마를 한 바퀴 다 돌고도 마땅히 잘 곳을 찾지못했다. 산 위에 있는 야시마로 오르는 들머리에 작은 여관이 있었지만 불도 꺼 놓았고... 어쩐지 기분도 가라앉아 들어가 흥정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7시가 넘어서... 일본에 도착한 첫날 묵었던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토요코인 호텔에 전화를 했다. 방이 있다고... 오라고... 


호텔을 예약 해 놓고 나니... 몸은 지쳤지만 다시 시내를 향해 돌아가는 마음은 조금 느긋해졌다. 어쩔 수 없이 이제 분주하고... 어떤 여유도 없어 보이는 도시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드물게 교통사고 현장도 목격했다.  



여덟 시가 다 돼  한 접시에 99엔이라고 선전하는 그 회전 초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호텔 프론트의 담당 직원은 마침 첫날 만났던 사람이었고 나를 알아보았다. 순례가 어땠냐고... 자전거 박스는 잘 보관해두었다고...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주니 어쩐지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렇게 긴 하루가 또 저물었다. 내일이면 절 순례는 모두 마치게 될 것 같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20-6/9 일 간온지시(観音寺市)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 78번 고쇼지(郷照寺) 인근 우단구라 

운행 41.39 46.45



4시쯤 잠에서 깼다. 신문배달부인지...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며 새벽 공원의 적막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4시반 경부터 산책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녀노소가 따로없다. 어떤 가족은 다섯 시도 되기 전에 어린 자녀들까지 다 함께 해변 산책에 나섰다. 



어린 시절...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  우리에게도 이런 아침 문화가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동이 틀 무렵 아버지와 정릉 약수터에 다녀오다 보면 맞은 편 안암동쪽 개운산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던 광경...  

아이들 유년시절, 곤지암 산 속에 작은 집을 짓고 살던 때,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기 전까지... 개를 데리고 달리기를 하고 마당 텃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장작을 패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다 보면 창밖에 새들이 지저귀던 ... 그런 아침... 


지난 30년 새 국민소득이 세 배로 늘었다지만... 소득과 행복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아침밥상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눈길 마주치며 밥을 함께 먹는 일...  왜, 언제부터 불가능해졌을까... 중고생 자녀들을 자졍무렵까지 학원으로 독서실로 내모는 우리 세대는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그랬던 것 일까  ... 



허준호 감독의 영화 <행복> 에서 ... 

지리산 기슭의 요양원을 나와 감나무가 있는 작은 집을 얻어 ... 단지 함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영수와  은희. 영수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도시의 삶을 기웃거리게 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권태로워한다. 그러면서 은희에게 '신문에 노후 자금으로 4억 7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며... 우리는 뭘 준비하고 있느냐고... 푸념한다. 은희는 그런 영수를 잠시, 암담한 절망이 어린 눈으로 쳐다본 뒤 ... 오늘 잘 살고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무엇을 위해 왜 4억7천만 원이 필요하냐고...  말한다. 영수는 네가 뭘 아느냐고, 네가 밥을 천천히 먹는 모습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아느냐고... 은희는 영수가 떠나갈 것으 예감한다. 그리고 절망감에 ... 자결이라도 하려는 듯 불치병을 앓는 몸이면서 심장이 터질 지경으로 도로위를 달리다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절망 앞에 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해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의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책없이 오늘을 탕진하자는 말이 아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를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태도는 옳은가. 지금 이 순간, 여기. 곁에 있는 사람들...  영화는 행복을 이것들 말고 어디서 행복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질문하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 이국의 해변에 앉아, 조금은 쓸쓸한 기분으로 어린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진행될 여정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온종일 달려가 저녁무렵 도달할 지점쯤에 마땅한 캠핑장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지니고 있는 돈도 이제 2만엔도 채 남지 않아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침은 미니스톱에 가서 도시락(398엔)과 커피(150엔)로 해결했다.  매번 가이드북을 꺼내 확인하는 일이 번거로워  오늘 달릴 부분을 복사(55엔)해 형광펜(88엔)으로 루트를 마킹해두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핸들바백 위 지도케이스에 넣어두고 달리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작업인데, 편의점에 복사기가 있으니 새로운 욕망이 싹트고 소비가 발생하는 것이다... 대개의 소비가 그런 게 아닐까... 


밥을 먹는 동안 핸드폰도 충전 하고... 



아침 7시... 다시 출발. 도시명 자체가 불성 가득한 간온지시(観音寺市) 역시, 조용하고 차분한 시가지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70번 모토야마지 (本山寺) 까지는 5.7km가량  평탄한 도로를 달리면 된다.  



아니, 너희들 일요일 아침부터 어딜 단체로 가는 거냐? 핼맷까지  제대로 갖춰쓰고 ...  



역시 야당들의 선거 이슈는 ... '평화헌법수호'다. 일본 공산당은 원자력발전 중단을 좀 더 강하게 요구하는 것 같고...  




'강한 나라보다 편안한 사회' ... 폐허가 된 후쿠시마 원전을 배경으로 군말없이 써 놓은 한 마디가 울림을 준다. 잘 만든 포스터라고 여겨졌다 


이에 비해 자민당은... '강한 일본'을 복구하자'고 외친다.  '부국강병'은 국가권력이 흔히 제시하는 슬로건인데...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도 행복해지는가? 하는 질문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나라도... 개인도...어떻게 하면 '강'해지는 것일까...  국가의 무력을 강화하고, 개인이 완력을 기르고 재산과 권력을 쌓으면?   핵심은 '멘탈'일 텐데... 일본이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고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서조차... 인정도 반성도 못하는 , 그 나약한 정신(자신의 과오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 것인다)...  일본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선거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는 거리를 지나며...  쓸데 없이 남의 나라 걱정까지 하면서 채 일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거리를 달려... 모토야마지에 도착했다. 


70번 사찰 모토야마지(本山寺) 



16세기에 시코쿠 섬을 평정했다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때문에 섬 안의 모든 절들이 불타고 무너졌는데 이 절은 보존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절에 몰려들자 절에 모셔둔 아미타여래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6.25 전쟁 때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가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것이라며 불태우려 찾아갔을 때, 주지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도 함께 태우라고 해서 소실을 면했다는 이야기... 를 떠올리게 한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돌아서려니 본당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  기도를 마치고는 법당 주변을 정돈하고 보살핀 뒤...  




절 앞 벤치에 앉아 가족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고 있는 내게 다가와... 오셋타이라며... 작은 꾸러미를 안기고 

표표히 멀어진다... 달콤한 젤리와 비스킷과 사탕 몇 알...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누려고 이렇게 준비해 다니시는 모양이다.  일본에는 재가불자들 가운데 죽고난 뒤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오는 분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71번 사찰  이야다니지(弥谷寺)지까지는 11번 국도를 따라 비교적 순탄한 길을 따라 12.4km 가량 달리면 된다.  코오보 대사의 고향인 젠츠지시 (善通寺市)로 넘어가는 고개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 마을을 지나 산 등성이를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이 벅차기는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아 견딜만 하다. 


이 지역은... 독특하게도 곳곳에 곳곳에 이런 저수지가 많았다.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진 탓인듯... 



이야다니지 인근에는 유명한 온천 파크(후레아이파크 미노 ふれあいパークみの)가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같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다.  



온천파크 주차장 맞은 편 절로 오르는 길 옆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곳 주차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올라야 한다. 




우리 산과는 수종도 풀도 조금씩 달라 어딘지 서먹한 일본의 산길...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이끼도 많다. 


절로 오르는 산길 옆으로 설악산 비선 가는 길처럼 상점들도 몇 개 있고... 



108계단도 올라야 한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모든 감각과 의식에서 받아들이고 피어나는 자극과 판단과 호오의 감정들로부터 108번뇌가 빚어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 ...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몸은 번뇌에 사로잡힌 채 쩔쩔매면서 삶을 밀고 가고 있는...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나즈막히 읊조리다보면 당장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나를 이 여행으로 떠민 현실의 고통... 그리고 사별의 슬픔들도,  이렇게 일상을 빠져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니 마음이 진정되는 면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눈물 세상을 견디며 걸어가는 게 우리들 삶 아닐까... 그런 우리와 ... 나에 대해 연민이 들기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담대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아래 저자거리들이 저 멀리 아스라히 내려다보일 만큼 산을 올라와 있다. 




코우보 대사가 나고 자란 동네가 인근인지라... 이 절에는 '사자의 돌집'이라고 불리는 이 동굴에도 그 분이 수행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본당은 신을 벗고 마룻바닥 안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순례를 하는 이 분은 일행이  본당에 다녀올 때까지 계단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멈춘 채 독송을 하며 무엇인가 간절히 기원 하고 있다. 


만약, 중병에 걸려 생을 정리하는 순간이 와서... 이렇게 영과 육을 함께 정돈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 어쩌면 삶이 좀 더 완결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절에서 내려온 시간은 11시. 점심을 먹기도 그냥 달려가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온천에 들러 쉬기로 했다. 



간밤에 야영을 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휴일이라 가족나들이를 나선 이들을 바라보자니  무슨 고행을 하듯이 내처 달리기만 할 게 무엇이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온천파크는 제법 규모가 큰 휴양시설이었다. 깨끗한 온천욕장은 물론이고 편히 누울 수 있는 안마기가 있는 수면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아이들을 위한 오락실과 기념품 상점까지... 



느긋하게 온천욕(온천파크 입장료 1520엔) 을 하고 밥(돈가스 840엔)도 먹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일본 사람들은 몇 번씩 온천욕장을 들락거리고 낮잠도 자고 식당에서 맥주도 마셔가며 휴일을 온종일 이곳에서 보내며 쉬는 것 같았다.  


온천욕장의 규모나 시설은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대중 사우나나 찜질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청결도나 정돈 상태는 많이 달랐다. 욕조 안에 들어갈 때 얼마나 깨끗이 몸을 닦고 들어가는지... 냉온욕을 번갈아 하는 이들도 매번 어김없이 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샤워기로 씻은 뒤에 냉탕에 들어가는 ...식의  결벽증에 가까운 공중 에티켓... 우리가 배울 부분이라고 여겨졌다. 

오후 1시.  다시 출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뉴스가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이제 환전해온 돈도 채 2만엔이  남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러나 씻고 쉬었더니 몸은 가뿐해졌다.  그긋하게 내리막길을 달려내려온 뒤 젠쓰지시(善通寺市) 방향으로 좌회전해 11번 국도를 만난 뒤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오후 1시 30분.  72번 사찰  만다라지(曼荼羅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일본발음도 그대로 만다라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오보 대사가 가지고온 만다라를 안치한 뒤에 절 이름이 만다라지(寺)가 되었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찰은 한산했다. 하늘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생각은 조금씩 복잡해진다. '오늘은 어디서 묵을 것인가'... 그런 나를 스스로 지켜보는 일도 또 하나의 수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길에서만 그런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살기보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일...  


73번 슈샤카지(出釈迦寺)는 만다라지 위쪽 산 위로 500미터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지도상의 거리 500미터를 보면서 마음을 놓고 올라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인근 묘원에... 마침 장례를 치르러 온 가족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몇년 새 장례를 줄줄이 치러야 했던 나로서는 그런 가족들의 표정과 모습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절에에도... 코오보 대사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그가 7살 때 이 절 뒤에 있는 벼랑에서 '불도에 입문해 대중을 구원하고 싶다.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석가여래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주오.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목숨을 부처님께 바친다'고 말하고 몸을 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이 때 연꽃 위에 앉은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선녀가 어린 코오보 대사를 받아 안았다고...'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어머니와 작은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초여름에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정릉에 있는 국민대학교와 북악터널 사이에서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숲속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해 서울로 올라온 뒤 늘 형편이 쪼들려 사는 데 여유가 없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어머니와 함께 깨끗한 신록의 숲으로 소풍을 갔다.  작은 개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십여 미터는 족히 되는 가느다란 폭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서 나무 그늘에 자리를 폈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도 먹고  어머니와 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 나는 숲속으로 혼자 돌아다니다가 ...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 없지만...  그 폭포위에서 미끄러져 자칫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다행히 돌출한 홀드를 붙잡고 매달려있다가 간신히 기어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머릿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스쳐갔다. 그날 일을  함께 갔던 어머니와 누이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나는 ...줄곧 그 생각 뿐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코오보 대사가 7살 때 벼랑에서 몸을 던진 일이... 전설 그대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합리와 이성'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강한 나 같은 자는 ...  아마도 내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그런 류의 일들을... 기록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점점 완결된 신화로...거듭나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는 식이다.

서른이 넘어 그 숲에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등골이 오싹하던 그 찰나의 기억... 내게 엄청난 일들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면서 스쳐가던 조금은 쓸쓸하고 체념에 젖었던 그 독특한 감정들... 그리고 그 아름답던 신록의 숲...  


다시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1996년엔가 어느 토요일...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서 경기도 고양시 화정에 살던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국민대학교 옆 등산로에서 시작해 형제봉을 거쳐 산성리로 하산하는 루트로 등산을 할 겸...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숲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크고 작은 암자들까지 조악한 시멘트포장을 해 찻길들이 내면서 숲도 만싱창이가 돼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74번 사찰 고야마지(甲山寺) 


73번 슈샤카지로 부터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리막이기도 하고 멀지 않은 길이라 편하게 도달했다. 



고야마지 인근이 코오보 대사의 출생지라고 한다. 어린시절의 대사가 뛰놀던 곳이 이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제로 절 마당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한가롭게 거닐고 있어 여염집 같은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오후 2시 50분. 진언종의 총본산이라는 젠츠지(善通寺)에 도착했다. 75번사찰이다. 이렇게 큰 절인줄 모르고 도착했다가 ... 무슨 잔칫날 같은 분위기에 어리둥절 했다. 



별 정보가 없었는데, 젠츠지는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에 있는 곤고부사(金剛峯寺), 교토 토후쿠지(東福寺)와 함께 3대 사찰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젠츠지는 보통 큰 사찰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만한 잉어들이 헤엄치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큰 사찰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회장을 따라 가람들이 배치돼 있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규모가 상당했다. 




기념품상점에서 나와 아내, 두 딸의 띠 별로 ... 한 마리씩... 용과 닭과 개와 쥐를 샀다...  띠별 기질 같은 게 정말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기질이 은근히 띠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절 마당에는 아예 농기구와 모종, 분재를 파는 장터가 열려 있었고... 



무대에서는 가라데 시범과 공연도 벌어지는 등... 무슨 어린이날의 대공원을 방불케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구경도 하고... 절 앞 유서깊어 보이는 가게에서 전통 전병도 사 먹고... 잠시 즐기다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다시 길을 재촉... 


다시 달려보자... 설마 시내에서 또다시 산길로 이어져 있지는 않겠지...하면서  헨로 스티커를 따라 가보기로 ... 



76 곤죠지 (金倉寺)


코오보 대사의 조카인 치쇼우 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이 절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쇼류우지를 본떠 절의 가람을 정비했다고 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해 오버재킷을 꺼내 뒤집어 썼다. 마음은 더욱 위축됐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반야심경 독경도 어쩐지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 

 


비가 쏟아진다.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호텔이나 민박에 대한 정보도 없고 인근에는 야영장도 없다.  이 빗속에서 오늘밤 어디에 이 한 몸 누일 것인가.  







77번 도류지(道隆寺)는 거의 바닷가에  다다른 지점에 있었다.  

GPS는 바닷가 철길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78번 고쇼지까지 간 뒤 시내에서 호텔을 찾아가 잠을 자야 겠다 싶었다. 




마루가메시 (丸亀市) 시내를 지나면서 은행이 나올 때마다 현금 인출을 시도해보았다. 2만엔쯤 더 인출을 해두어야 안심이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현금인출은 모두 실패. 편의점에 들러 비도 피할 겸 커피 한 잔을 사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일본 ATM 가운데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한국과 체인이 이어져 있어 우리나라 비자나 마스터카드 가맹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단, 휴일에는 안 되고 평일도 오후 두 시까지만 가능하다고... 


78번 고쇼지(郷照寺)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다섯시... 이제 순례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오늘 호텔에서 자고 이삼 일 더 버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 순례자들이 지니고 다니던 무료숙소 정보를 보았다. 

78번 고쇼지 산문앞에서 동쪽으로 200미터를 가면 우탄구라라는 젠콘야도가 있다고...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동쪽을 향해 우호전 한 뒤 고지식할 정도로 200미터를  세며 걸어간 뒤 곁에 있는 집을 살펴보았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5시 20분.  작은 글씨로 '우탄구라'라고 씌여있는 집이 정말 있었다.  이리에 무네노리, 이리에 노리코 두분이 운영하는 젠콘야도다. 우탄구라는 이 동네 이름인 우타즈 초 (宇多津町) 를 스페인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더러 전해 듣기는 했지만 혼자 자전거로 이동하며 주로 야영장을 이용해온 나로서는 20일만에 젠콘야도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쓰미마센...' 하고 불러 보았다.  



인자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나와서 ... 응대를 해주신다. 우탄구라의 안주인 노리코 상이시다. '자전거 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입니다.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만, 오늘 일박 할 수 있을까요?' ' 지금 몇시 인가요? 아, 다섯시가 넘었군요. 네 가능합니다. ' 하면서 본체를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간 뒤 별체로 안내해 주셨다. 그날 이 집에 묵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갈한 다다미 방과  정겨운 정원. 처마밑에 있는세탁기와 건조대. 오래 떠돌다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푸근한 마음이 되었다. 노리코 상은 화장실과 욕실, 세탁기 등 사용법을 일러주고 모기향까지... 피워주었다. 1박에 천엔...이고 아침은 여섯시부터 ... 저녁은 미안하지만 나가서 먹고 와야 한다....고. 순례길에 있는 민박집들이 대개 1박2식에 6천5백엔을 받는 것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다. 


감지덕지... 짐을 풀고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다 돌려서 널어 놓고는 갑자기천당에라도 떨어진 기분이 되어 느긋한 기분으로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외출했다 돌아온 이리에 선생이 내 자전거가 복잡해 보였는지 집에 있는 가정용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라고... 하셨다. 조용한 마을길을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자니 이리에 상이 따라오며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에 가보겠어요? 조금 비싸지만 서비스가 좋으니까... ' 이렇게 안내를 자처하신다. 


낙원(樂園). 제법 규모가 큰 고깃집이었다. 안수창이라는 동포가 주인이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호방한 말과 행동... 오랜만에 정말 한국사람을 만난 것이다.  주문을 하려고 하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내가 알아서 줄 테니...'...  그는  이리에 선생에게도 가지말고 앉으라고 하더니... 숯불구이, 철판구이, 갈비탕, 불고기를 골고루 내 왔다. 김치와 마늘도 썰어도 ...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다. 



끝없이 나오는 생맥주 때문에 나도 이리에 상도 과음을 했다. 이리에 선생은 본의 아니게 술자리가 시작되니까...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노리코 상이 도중에 와서 남편에게  2만엔을 남편에게 찔러주고 가신다. 당연히 내가 밥과 술을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에 상은 오사카 미쯔비시에서 40년 근무하고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우단구라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운영한 3년 동안  1700명 가량의 순례자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꽤 자주 온다고... 


자신도 순례를 14번 했고, 아내도 4번 순례를 했으며,  순례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센다츠(先達 )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은퇴 후에 이런 삶... 멋지다. 


안수창씨는 자신을 재일동포 3세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살길이 막막해 고향인 경남 함안을 떠나 일본으로 온 뒤, 돌아가지 못했다고... 자신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은, 그나마 '조선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아... 그래요. 나도 얼마 전 우리학교라는 영화를 봤어요'



안수창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를 어리게 보고...'여자 친구 있어요?' 했다가... 큰 딸이 대학생이라고 답을 하니까...몇 살인데 대학생 딸이 있냐고... 동갑인 걸 알고느 내게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는 이국 땅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온 일들, 남과 북으로 찢긴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 성장기에 겪은 필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해 짧게 말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성장한 부모님이 1945년에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면 ...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같은 것뿐 아니라 ... 민족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점에서도... 우리는 말이 잘 통했다. 


밤 11시가 넘어선 뒤에는 셋 다 만취한 뒤... 안수창 친구는 우리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태극기를 사이에 두고 박지성과 북한의 국가대표 안영학의 유니폼이 양옆에 걸려 있었다.  그가 일본의 이 외진 시골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아온 일이 어떤 일이었을지... 새삼 가슴이 아파왔다.  '어떤 일본 사람은 막 욕을 하기도 해요. 일본 땅에서 왜 조선사람 티를 내냐고' 



그는 내게, 한 달 가까이 이국 땅에서 자전거 순례를 하는 일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허락해준 네 부인이 더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아내와 아들을 불러다 인사를 시키고... 여행중에 먹으라며... 우리나라 라면과 두유를 선물로 안겼다. 결국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자정이 넘어 우타쬬의 거리를 달려 우단구라로 돌아왔다. 이리에 상은 그간 이 집을 거쳐간 한국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준다며 방명록을 펼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려고 했다... 


' 너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지금 자지 않으면 안 돼요.' 


심야에 소란을 떠는 우리를 향해 자다 깬 노리코 상이 나지막하게 제지를 했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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