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 일요일.  스쿠모(宿毛)  오시마(大島) ~미나미 레구(南レク)오토캠핑장 

운행 61.21km 

빗소리, 가볍게 출렁이는 파도,  바람에 서걱대는 플라이 소리... 이런 소리들이 가수면 상태에서 의식 속으로 밀려들곤 했다. 밤새 잠을 설쳤다. 4시부터는 고깃배들이 출항하면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와 엔진소리 때문에 더 이상 누워있기도 어려웠다. 엎드린 채 집에 보낼 엽서를 썼다. 순례 첫날 열 장의 엽서를 사서 두 딸과 아내에게 틈틈이 엽서를 써서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열 장 가운데 두어 장은 미처 도착도 하기 전이고 대개는 식탁 유리판 아래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스마트폰을 충전시켜 놓고 텐트 안에 있는 집을  정리한 뒤 찬 밥에 어제 저녁 사 놓은 즉석 카레를 부어 먹었다. 텐트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짐을 다 꾸렸지만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섯 시가 되기도 전인데 주민들이 빗속에 산책을 나왔다.  


나카야마(오른쪽 62세)씨와 이웃에 사는 친구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 분들도 조금 흥분한 상태가 되어 말이 많아졌다. 나카야마 씨는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본에는 이혼이 많다고 ...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집에 키우는 고양이기 이야기까지... 



저 앞에 있는 섬까지 간조 때는 걸어 갈 수 있어요.  한국에 진도도 그런 데가 있다면서요?  어? 진도를 아시네요?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서 알고 있어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카야마 씨가 빗속으로 달려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세 개 뽑아 오더니 함께 마시자며 건넨다. 야영을 한 데다 비까지 내려 찬 커피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즐겁게 마셨다.  자신들은 아침마다 여기가 고향이고 아침마다 산보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으니 이제 은퇴했다고...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혼자 살며 새벽같이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지만 딱히 출근할 곳이 없는 사내들. 역시 쓸쓸한 얘기다. 자전거 순례 초반에 만났던 야마시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장성한 자식들은 이미 품을 떠난 상태에서 시코쿠 순례를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가족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언감생심 가족들에게 호령하던 가부장의 모습은 고사하고 과연 남성이 생물학적인 유전이라도 이어갈 수 있을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우리가 자랄  때 당연시 되던 남성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초 중고등학교에서 예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여자아이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남성에게는 남성이 남아 있는 게 좋은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비판 받을 소리일 수 있겠으나... 말이다. 


자상하고 친절하며 남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피부 관리를 위해 화장품을 차례대로 바르고 패션에 섬세한 관심을 기울이는 남자들은 늘었는데 오히려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하거나 자기 말이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는 어떤 점에서 ... 여성들이 시원시원한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남성에게는 이제까지 전혀 다른... 새로운  성역할이 요구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시50분 출발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아 출발했다 . 어제 넘어온 국민숙사(國民宿舍) 야자(子)앞 고개쪽이  아니라 오른쪽 해안길로 섬을 빠져나왔다.  


대나무보다 더 큰 갈대가 비바람에 휘어져 길을 막고 있다.  


먹을거리들이 줄어든 탓에 짐이 많이 가벼워졌다.  비가 내리고 있긴 하나 잘 하면 80km 가량 떨어져 있는 기타우와지마(北宇和島)에 있는 41번 류코지(龍光寺) 42번부츠모쿠지(仏木寺) 까지 순례하고 인근에 있는 해변 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일요일인데다 비까지 내려 수쿠모 시내의 아침은 한산했다. 우선은 26~7km 가량 떨어진 미나미우와(南宇和)군의 40번 사찰 간지자이지(観自在寺)까지 가는 게 먼저였다. 길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7번 지방도로와  내륙으로 나 있는 56번 국도 어디를 선택할지 잠시 망설였다

스쿠모 시내로 나와 스쿠모 역 철길 아래를 지나 좌회전 한 뒤 해안을 따라 7번 도로를 따라 달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해안길이 조금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산이었다. 


 8시 50분 경 드디어 에히메 현(愛媛県)으로 접어들었다. 고치 현(高知県)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싶었다. 

아직은 완만한 경사다. 비도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언덕위에서양식장이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 보였다. 해남과 완도 사이에 있던 한살림 김 양식장이 생각났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어업을 지키는 숲'이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바다와 숲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완만하게 오르던 해안길이 어느새  완전 등산 코스로 바뀌고 있었다. 설마 오늘도 이런 등산을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허를 찔린 셈이다. 맥이 빠졌다.  


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다. 길에는 칡넝쿨이 뒤덮여 있고 인적마저 끊긴 길을 오전 내내 올라야 했다. 그러나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경고는 정말 꼼꼼하게 많이 붙여 놓았다. 그만큼 많이 버린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는데... 


 아침을 좀 더 배불리 먹지 않고 대충 먹은 것도, 해안길이 조금 평탄할 줄 알고 7번 도로를  택한 것도 후회됐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드디어 오후 한 시쯤 ... 지겹게 올라온 고도를 단 몇 분  동안의 내리막길로 탕진한 뒤... 해안길을 벗어나 56번 국도를 만났다.  이곳 역시 뭐 대단히 평탄한 길은 아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길 가로 이 지역 특산물인 귤밭들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다. 


사실은 아침에 서울에서 온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지난 봄... 예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만났던 동료들의 중학교 2학년 아들이 갑자기 목숨을 끊었다. 인물도 좋고, 성적도 뛰어났고...가끔 만날 때 보면... 나이에 비해 너무 조숙숙한 게 아닐까 싶게 과묵한 아이였는데...  아무튼 그랬다. 


그 아이의 49재가 오늘 열리는데 참석할 수 있는지 ... 또 다른 동료가 연락을 한 것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나는 상상만 할 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 봄... 그 충격적인 상가에 가서 나는 뭐라고 위로의 말도 차마 건네지 못했다. 



연락을 한 지난 날의 동료는 ... 나 역시 나름의 사정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다 마음을 수습하러 일본에 와서 자전거 순례를 하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갈 수 없는 사정을 짧게 설명하고 순례를 하며 들르게 되는 절에서 그 아이의 명복을 빌겠다고 답을 했다.  


고개를 내려선 뒤.. 만나는 미나미우와(南宇和)시의 풍경은 차분했다. 



40번 간지자이지(観自在寺)에 가서 한국에서 49재를 치르고 있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선량하기 그지 없는 부모들을 위해 향을 사르고 합장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아이였는데... 



간지자이지(観自在寺)는 1번 절 료젠지(霊山寺)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절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 정말로 양쪽에 아령처럼 불거진 부분이 있는 좌우로 긴 타원 모양의 시코쿠섬에서 이 절은 도쿠시마에 있는 1번 절 료젠지와 대각선으르 마주보고 있는 지점에 있다.  



사별한 가족과 친구들 때문에 이 섬을 떠올리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침에 받는 연락 때문에 나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별을 떠올려며 삶의 비애를 곱씹어야 했다. 



절 앞에는 전통 있어 보이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승용차를 타고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산을 넘어온 피로감도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허 해져서 어딘가 들어가  남이 차려준 밥을 먹어야겠는데...마땅한 데가 없었다. 


시코쿠에 오던 첫날 다카마쓰 시내에서 장을 본 대형마켓 'A・MAX에이난(愛南) 점' 이 있길래 들어가서 주먹밥, 장어덮밥, 커피우유 단팥빵 등을 샀다. 어딘가 좋은 자리가 나오면 도시락은 점심으로, 주먹밥과 빵은 운행중에 행동식으로 먹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마땅한 마땅한 자리가 없다. 도로변에 앉아서 밥을 먹기는 싫고... 



오전 내내 고통스럽게 하던 7번 도로처럼은 아니지만 56번 국도 역시 오르막의 연속이다. 다리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도 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언제 쏟아질지 모르게 음습한 날씨였다. 


국도 변으로 자전거 도로는 대체로 잘 나 있었다. 도보 통행인이나 자전거를 위해 따로 터널들이 나 있고...  


또 다시 큰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라면집을 발견하고는 랙팩 안에 도시락과 먹을 거리가 잔뜩 들어있는데에도 더 이상 못 가겠다 싶어 들어갔다. 


라면 달라고 하니까 알아서 미소라면과 밥 한 공기를 갖다준다(700엔). 

 

주인 내외의 정성이 느껴지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먹고 나니 조금 몸도 마음도 회복되는 것 같았다.  무리하지말라 싶어서 ... 조금 타고 오르다가 고개 중턱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서 고개를 넘었다. 고개 너머에서  오사카에서 왔다는 예순 살,  지식인풍의 도보순례자를 만났다. 


그와 20 분 가량 왼쪽으로 펼쳐진  해수욕장(室手海水浴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으며 대화를 했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도 역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의 대답은 '전과 동'이다. 남북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적대적인 긴장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는 정도... 



무슨 이야기 끝엔가... 한국과 일본은 천 년 전에는 한 나라처럼 오갔다고  '시바료타로 (司馬 遼太郎) 같은 사람들도 주장하던데, 두 나라의 개성이 지금 너무 다른 것 같다는 말을 했더니...  한국에도 시바 료타로가 알려져 있느냐고... 우연히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그의 책을 두어 권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호오... 한국에도 그의 책이 출판됐다고요...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그와 헤어진 뒤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넘어졌다. 


우와지마 시 (宇和島市)를 향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게 부담스러워  자전거 도로로 올라타는 순간... 내작은 턱에 바퀴가 미끄러졌다. 내리막길이었고 시속 30km쯤 속도를 내고 있었다. 



무르팍이 깨지고 .바지도 찢어졌다. 새로 사 입은 지 며칠 안 된 것인데... 그나마 이 옷을 덧 입지 안았다면 부상이 좀 더 심각했을 것이다. 자전거 핸들이 훽 돌아가 있고... 그립 부분의 브레이크도 손잡이도 틀어져 있었다. 핸들바에 테잎도 찢어졌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계속 운행을 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일어나 어디 부러진 데가 없는지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손목에 충격이 있었는데...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음은 자전거... 틀어진 부분들에 힘을 주니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굴리면서 변속을 해 보았는데... 그나마  미끄러지면서 브레크를 잡아 충격이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았다.  

 

열흘 동안 두 번 넘어진 것이다. 갈비뼈와 무릎. 그렇잖아도 침울하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나빠졌다. 오후 네 시가 넘었다. 더 전진하는 것은 무리다.  지도에 보니 미나미 레구(南レク) 오토캠핑장이 있어 그리로 가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야영을 하게 됐으니 일단 마을 입구에 있는 대형마트'마루나가'에 들러 ... 부탄가스와 반짓고리 리 그리고 먹을 거리를 좀 더 샀다. 



 아침에 목표로 삼았던 기타우와지마(北宇和島)에 있는 41번 류코지(龍光寺)나 42번 부츠모쿠지(仏木寺)에는 한참 못 미친 지점이었다. 레구(レク)가 무슨 뜻인지 한참 갸웃거렸는데... 레크리에이션의 일본식 축약인 모양이었다. 



시내에서 3km 가량 바다쪽으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오토캠핑장이 있다. 정문을 통과한 뒤 언덕 위로 오르니까... 차량 차단봉이 내려져 있고, 예약자에 한해 출입이 허용되며 예약은 인터넷을 통해 하라고 돼 있다. 이러 제길... 다행히 자전거 한 대는 겨우 통과할 틈이 옆으로 나 있어 살살 피해 올라가 보았다. 



일요일 오후라 오토캠핑을 한 주민들은 모두 빠져 나가고... 관리인 한 사람이 당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정을 말하니까... 야영을 하시라고... 숙박계를 쓰라고 내 준다. 




다만 요금은 조금 비쌌다. 1박에 2500엔... 자동차든 자전거든 똑 같이 한 구획을 이용하게 되니 요금이 동일하다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샤워는 코인샤워... 200엔, 세탁도 건조기도 모두 200엔씩 600엔... 모두 합하면 3천100엔... 차라리 시내에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빗방울까지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시설은 훌륭했다. 후회는 해서 뭐 하겠나... 텐트를 치고... 

의자를 빌려서 잠시 쉰 뒤....


샤워를 하고 빨려를 돌려놓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자... 

저녁 다섯 시부터 ... 여섯 시 반까지... 고기에 김치도 사 왔기에... 엄청나게 먹고... 맥주도 한 캔 마시고... 


기왕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거... 대충 빨아서 가지고 다니던  옷들까지 다 꺼내 빨고 말렸다. 


헤드램프를 켜고... 찢어진 바지를 꿰맸다. 너덜너덜한 채로 다닐 수는 없겠다 싶었기 때문에... 

짐을 정리하고... 기록을 하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열 시가 다 됐다. 스트레칭을 하고...잠을 청했다. 


집을 떠난 지 이주 가량 지났다. 지친 모양이다. 가족들이 그리웠다.  오늘의 가벼운 사고는 쉬어가라는 신호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고 자전거도 멀쩡하니까 말이다. 새벽녘에 텐트 위로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방수가 잘 되는 텐트라 걱정할 건 없었다. ... 힘 내자!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도쿠시마 달맞이언덕 텐트촌 (츠키미가 오카 月見ヶ丘海岸)

주행거리 86km

자전거 여행 첫날.



뒤척이다 자정 넘어  잠들었지만  4시경 잠이 깼다. 긴장해 있었다. 짐을 풀고 다시 꾸린 뒤  7시경 1층 로비에 차려진 호텔 조식을 먹었다. 주먹밥과 미소된장국, 감자 샐러드. 식욕이 없었지만  온종일 달리며 후회할 것 같아 꾸역꾸역 먹어두었다.  


자전거 앞뒤에 매다는 패니어 4개,  랙 팩, 핸들에 고정하는 핸들바 백 등 모두 여섯 개의 가방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보며 양쪽의 균형을 맞추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9시가 다 돼 호텔을 나섰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이국의 도로.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한 여름 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첫날 숙박은 출발지점인 다카마스(高松)에서 시코쿠섬 북단의 반대쪽 도쿠시마(德島) 공항 옆 바닷가 '달맞이언덕 캠핑장'에서 할 작정이었다. 시코쿠 88개 사찰 중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에서 10km쯤 떨어진 곳이다. 지도상으로는 거리와 지형이 가늠되지 않는다. 대략  80km 이상 달려야 한다. 달맞이언덕.  낭만적인 이름의 바닷가 캠핑장?  살짝 기대도 됐다


 호텔 문을 나서면서부터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북쪽 해안을 따라 뻗어있는  11번 도로는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아 남쪽으로 가서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한 뒤 12번, 10번 도로 등을 조합해가며 도쿠시마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패니어를 부착하다 보니 앞바퀴 오른쪽 랙의 나사가 헐거웠다. 렌치로 조이려고 해도 계속 겉돌기만 했다. 다행히 얼마 달리지 않아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자전거 수리점을 만났다.  나사 몇 개를 조이더니 1천 엔이라고 했다. 휴대용 공구로 스스로 처리할 만한 일이었는데 싶었다.  


자전거포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으니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192번 도로가 있고,  그 길로 계속 가다 강을 건넌 뒤 193번 도로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192번도 193번도 찾지 못하고 오전 내 무척 헤맸다. 10번 도로를 타고 도쿠시마가 있는 동쪽으로 일관되게 달릴 수 있게 된 건 정오가 다 되어서다.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기 좌표를 읽고  GPS의 표시된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는데  계속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자전거를 멈추고  혹시 앞 펜다가 바퀴에 긁히는지 살펴봐도 그런 낌새는 없다.  다시 출발하다 멈춰 살펴보니 뒷 팬다를 고정해놓은 나사가  빠져 달아나고 랙 팩을 묶어둔 줄이 풀려 뒷바퀴에 마찰되면서 긁히고 있었다.  긴장한 탓에 간단한 이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도 고팠다. 어디서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처음에는 막막했다.


정오가 조금 넘어,  '365일 싸다'는 슬로건을 내 건 코스모스 마트에 들렀다. 사이다, 우유, 빵과 잼을 사서  그늘에 앉아 요기를 하고 나머지는 랙 팩에 넣은 뒤 다시 달렸다.


다카마쓰를 통과하고 우동으로 유명한 사누키 시도 거의 다  벗어난 지점에서 우동을 사 먹었다.  어느새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맑은 국물에 국수가닥뿐인데 맛은 좋았다. 국수만으로는 허전해서 튀김과 주먹밥까지 합쳐서 600엔.

물통에 얼음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출발. 볕이 무척 따가웠다. 견딜 만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꾸준히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평균속도 30Km. 꽤 부지런히 달렸다. 긴장감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


바다. 찾기 어려운 지름길은 포기하고 해안을 따라 달리기로 했다. 얼핏 지도에 보기에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로 가려면  히가시카가와 시 (東かがわ市)를 지난 뒤에 무척 경사가 가파른 산을 넘어야 하지만, 어차피 첫날은 절에 갈 게 아니라 캠핑장을 향해  계속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 변에 자전거 도로는 잘 정비돼 있었다. 일본의 행정구역 '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개념인 것 같았다. 마을을 통상 '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가는 차들 말고 사람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도쿠시마에 거의 다 도달한 해안에서 약수터를 발견하고 수통에 물을 채웠다. 트렁크에 물통을 가득 싣고 와 물을 긷고 있던 아주머니가 관심을 가지고 어디로 가냐고 질문을 했다. 외진 도로변, 시멘트 옹벽 안에 있는 약수터에 단 둘만 있는 게 불안하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해안길이 끝나고 도쿠시마에 들어선 뒤로는 시가지를 달려야 했다. 야영장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공단을 지나 마을과는 동떨어진 공항 인근 동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공항 안내판에 도쿠시마 아와오도리 공향( 徳島阿波おどり空港)이라고 쓰여있다. 아와오도리는 도쿠시마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댄스 페스티벌이라고 한다.


저녁 6시경 해안에서 멀지 않은 달맞이 언덕 캠프촌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상하던 바닷가 낭만적인 캠핑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게 잠긴 철문에 무단 캠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맥이 빠졌다. 안내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입니다. 캠핑을 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가능하지만, 내가 캠프장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린다. 괜찮냐? 텐트는 가지고 있냐?  일박에 600엔이다. " 물론 괜찮고말고 어차피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처지 아닌가.

시코쿠 첫 야영장. 달맞이언덕 캠핑장.  쓸쓸한 적막감만 감도는 곳이었다.

시코쿠에서 첫 캠핑이 가능할 것 같아 마음이 느긋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니 노년의 내외가 작은 트럭을 타고 왔다. 600엔을 내고 아무 데나 텐트를 치라고 했다. 샤워장,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쳤다. 그런데 사워를 하려면 100엔 더 내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입으니 주인 내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바글대던 시절이 있었을까. 늙고 낡은 캠핑장에는 쓸쓸한 적막감만 가득했다.


주인장 내외가 떠나고 나자 호젓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첫날 자전거 주행을 이렇게 마쳤구나.  밥을 차려 먹으려고 보니,  라이터가 없어 버너를 켤 수 없었다. 다시 자전거로 공단을 가로질러 왕복 8km. 편의점 로손을 찾아가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사 가지고 다시 텅 빈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옥외에서 충전이 가능한 콘센트를 겨우 찾아  핸드폰과 충전 배터리를  충전시켜 놓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초롱했다. 가족들도 저 별을 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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