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째 - 5월 24일(금) 요시노가와시 요시노여관~도쿠시마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17번 이도지

주행97.56km


사찰들이 납경을 시작하는 시간은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다. 문을 닫아놓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 시간 동안 순례자를 받는다. 여관을 관리하는 청년(?)은 아침 여섯시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여전히 허둥대면서 패니어와 랙팩을 정리하고 여섯시가 조금 넘어 식당에 내려갔다. 다른 순례객들은 이미 짐을 꾸려 여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집 아침밥이 이렇겠지 싶은 그런 밥상.
미소 된장국과 베이컨, 계란 프라이, 약간의 채소, 맛없는 일본 김, 열빙어 두 마리 그리고 오차. 입맛이 없었으나 하루 동안 흘릴 땀을 생각하며 남김없이 먹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가장 높고 험난한 산길 위에 있다는 12번쇼산지 (焼山寺)까지 자전거를 끌고 갈 일이 걱정이 돼  여관 종업원에게 지도를 펼쳐 놓고 상의를 했다. 혹시 11번 후지이데라에서 가장 단거리로 표시된 산길로 자전거를 가져갈 수 있는지...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자전거를 여기에 두고 걸어서 갔다온 뒤 13번 다이니치로 가는 것은 어떤지... 왕복 12시간은 걸릴 테니 무리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할 때 가장 합리적인 루트는 뭔가요? 
그냥 요시노가와시에서 도쿠시마쪽으로 뻗은 192번 도로를 따라 10km 달리다 우회전해서 산을 넘어가 20번 도로를 따라 쇼산지 뒤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가는 게 제일 낫다는 대답.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도 오르막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아... 그렇군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정해진 고난을 피해가거나 생략할 수는 없다. 단념 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래, 가자. 어차피 그러자고 시코쿠에 온 게 아니었나. 



7시, 어제 저녁에 황망하게 들렀던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까지는 그냥 빈 자전거로 올라갔다. 여기까지도 고도가 상당했다. 어제 달린 1번부터 10번까지 절들이 있는 산은 요시노가와 건너 편 산맥처럼 뻗어 있었다. 쇼산지는 반대편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본당 왼쪽 옆 산길로 쇼산지 가는 길을 아리는 핸로미치 표지판이 있었다. 

어제 10번 절기리하타지 앞에서 만났던 아저씨를 만났다. 반가웠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 사람도 순례를 하는 오헨로상인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아, 어제 만난 사람이구나. 어디서 잤어요." "요 아래 요시노여관에서요. 캠핑장도 무료로 잘 수 있다는 젠콘야도도 못 찾고 시간도 너무 늦어서... 쇼산지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걱정했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 그래 , 같이 갑시다." 
여관에 내려가 짐을 매달 때까지 근 이십 여분을 그는 길가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야마시타(山下) 나이는 56세라고 했다. 


 야마시타씨와 함께 7시반 요시노 여관 앞에서 출발해 요시노가와 시내를 10km쯤 달린 뒤 20번도로로 우회전 이때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 



야마시타 상이 길을 착각해 오르막 하나를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그래도 동행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 오늘은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17번 절까지 간 뒤에 바닷가 야영장까지 가는 게 목표인데...' ' 무리가 아닐까'  '야마시타상은 어디서 잘 생각인가요?' '어디라도 좋아'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이미 걸어서 세 번 순례를 했고 이제 네 번째 순례를 자전거로 하고 있다고 했다. 

오십대 중반에 혼자 순례를 하면서... 어디서 잠을 자도 그만이라는 이 사내... 나는 그리스인조르바가 떠올올리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의 자전거에는 기어가 없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내게 20번 도로를 따라 가면 쇼산지까지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그와 헤어지는 게 서운해서 그래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늦어질 수 있다며... 먼저 가라고 ...  


터널 앞에 멈춰 뒷등을 켜고 심호흡을 했다. 갓길 폭도 좁아 긴장이 됐다. 터널을  통과한 뒤에는 작은 산맥 뒷편으로 나란히 뻗은 하천을 따라 산골 마을이 펼쳐져 있다. 터널 두 개 통과한 뒤 하천을 끼고 열시 반 까지 줄곧 달렸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도보순례자들이 점점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니치지로 향하는 이들일 것이다. 



히로노소학교 (広野小学校) 인근 마을에서 구멍가게에 들어가 선블록 (600엔) 생수2리터(240엔) 쥬스(220엔)을 샀다. 시골로 들어온 게 실감났다. 모든 게 비싸다.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해준다. 


깨끗한 계곡과 울창한 숲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는 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순례길 가운데 가장 고즈넉한 길이 이 구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은 예외없이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교통안전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특히 이 동네에서는 하교길 초등학생들을 위해 동네 경찰과 학부모 교사들이 나와서 별로 차량 통행도 없는 도로에서 대단한 작전이라도 펼치듯이 ... 하교지도를 하고 있었다. 중고생들은 예외없이 하얀 핼멧을 쓰고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 한쪽 차선을 막고 도로공사를 하는 곳에서는 꼭 양쪽에 교통 통제를 하는 사람이 두 사람 서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작업자는 굴삭기 기사 한 명인데 교통통제 인원은 두세 사람이나 되는 곳도 있었다. 



뭐든 대충 넘어가는데 익숙한 우리 눈에는 조금 과하다 싶도록 ... 일본 사람들은 매뉴에 원칙을 고수하는 것 같다. 배울 만한 점이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전커넥션과 정직하지 못한 도쿄전력과 무책임한 일본정부의  대응...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칙대로, 안전한 나라를 경영하고 있다는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흔들리게 했다. 


조세고교 가미야마분교(城西高等学校 神山分校) 부근에서 강을 건넌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쇼산지가 있는 산을 오르게 된다



이 지점이 쇼산지에 올랐다가 돌아올 때 갈림길인 모양이었다. 


 오르막 길에 어제 사 둔 밀감과 에너지바, 물을 거의 1.5리터쯤 마셨다. 열한 시 경, 결국 쇼산지까지 4km 남은 지점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헉헉대며 올라오는 나를 길 두 사람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인 준과  스페인사람 카를로스. 



 준은 일본을 오토바이로 일주하는 중에 시코쿠에서는 걸어서 45일 예정으로 88번사찰을 순례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사람 카를로스는 헨로미찌를 순례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했다. 그는 내 자전거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나라 제냐?' '제이미스오로라는 여행용 자전거다. 미국메이커이지만 메이드인 차이나' 'ㅎㅎㅎ 지금은 모든 게 메이드인 차이나다' 


두 사람은 내려오는 길이었다. '두 시간 더 끌고 올라가라' 카를로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다리에 힘에 쪽 빠지는 것 같았다. 경사가 너무 급해 더 이상 끌고 올라가는 것도 무리였다. 오백미터쯤 올라가다가  해발 390m 지점에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랐다. 



쇼산지는 해발 790m 지점에 있다. 거의 백운대 높이에 가까운 고도다. 산 아래 마을들에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60kg은 족히 나갈 자전거와 짐을 떼어 놓고 걷는 일은 호흡부터가 평화로웠다.  

쇼산지 입구에는 어른 대여섯 사람의 품으로도 벅찰 것 같은 거대한 삼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부모님을 떠올렸다. 여행길에서 내게 말을 거는 할아버지들의 말투와 태도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끝내 재기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가난 속에서 마루에 앉아 붓글씨로 승상사당 하처심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장사영웅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 ... 두보의  시를 끝없이 되풀이해서 쓰시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올라와 정착한 동네가 돈암동이었다. 서울 성 밖이었고, 멀리 인수봉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산 비탈의 허름한 집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내게 아버지는 이 시를 해석해주시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며 조자룡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천하제일 청빈(天下第一 淸貧)' 이니 군자는 무소불위(無所不爲)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가 야속하셨을 것이다. 당장 끼니가 막연한데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시는 아버지가 말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내게 '어떻게 그 세월을 헤쳐나왔나 꿈만 같다.' 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래도 너희들 교육시키고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아낸 게 기적같은 일이었다.' 


산길에서도 걷는 길과 차도는 수시로 갈라졌다 합쳐졌다 하면서 산록에 있는 쇼산지까지 이어진다.  


자존심을 지키느라 이익과 상충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면이다. 조카들 가운데에도 몇이 그렇다. 


시코쿠미찌... 사코쿠 순례길을 안내하는 이 표지판을 앞으로 지겹도록 만나게 된다. 




절에 올라갔다가 자전거를 세워놓은 지점까지  내려오니 오후 1시. 눈물이 날 만큼 고된 길이었다. 터덜터덜 내려오다  적막한 삼나무 숲에 세워둔 제이미스오로라가 고요히 서 있는 광경을 보니...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오랜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대물 애착이 생길 지경이다


어쨌든 한 고비를 넘었다. 오후 1시반,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올라갈 때 그토록 아득하던 길이... 허무하게도 짧았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이치지(大日寺)까지는 27km. 과연 아침에 이길을 달렸단 말인가 싶게 길었다. 두어 번 길이 헷갈려 되짚어 길을 찾아야 했다. 골프장 앞 다리에서 강을 건너 다이이치지를 향해 가는 업힐 강변 구간을 외롭게올랐다.

 

언덕위로 올라선 뒤 다시 평탄한 강변길을 달리다가 야마시타 상을 만났다.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길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너 12번 쇼산지 갔다왔냐?' '야마시타상도?'  '길이 엇갈렸나? 이제다이이치가 바로 근처다. 너 참 빨리 달리는 것 같으니 네가 말한대로 17번 이도지(井戸寺) 까지 간 뒤에 야영할 수 있겠다.' 


 피난길에 헤어진 형제라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동행이 있다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될줄이야. 


'아,  잠깐 뒷바퀴가 이상하다.' 야마시타상이 내 자전거를 가리켰다.  뒷바퀴 크랭크에 비닐이 감겨 있었다. 일일이 띁어내느라 시간이 꽤 소요됐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뒤편 왼쪽 패니어 아래쪽 고리가 랙에서 빠져나와 바퀴와 마찰이 돼  반쯤 갈려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자전거가 매끄럽지 않다 했더니...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변으로 뻗은 21번 도로를 달려...오후 3시경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에 도착했다.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길가에 면해 있어 자전거를 대고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첫날 언덕 위에 있던 4번 사찰도 다이니치지(大日寺)였다다이니치(大日)라는 말이 ... 야마토(大和)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대한(大韓)처럼 국가정체성을 강조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야마시타 상이 납경소에 들어가 뭔가 이야기를 했더니... 납경을 해주던 노인이 나에게 들어와 보라고 했다. 한국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이 절의 주지 김묘선씨인데... 지금은 절에 없다고... 자신은 한국에 살며 가끔 절에 와서 납경장에 글도 써주고 있다고 했다. 어렴풋이 전날 9번 절 호린지 앞에서 탁발승이 말해준 한국인 '옥상'(おくさん, 奥さん) 이 이 절 주지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싶었다. 

 

김묘선 주지스님(?)은... 절 인근에 한국전통무용 강습소를 지어서 운영하는가 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연도 자주하는 유명한 고전무용가 이기도 하다고 ...한다.  다이니치지 옆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대규모 숙박시설도 있었다. 얼핏 듣기에 저녁과 아침밥을 포함해 1박에 7500엔 쯤 한다고 했다.  한국사람이 어떻게 88번 사찰 가운데 하나의 주인이 되었는지...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또, 한국의 절들처럼 비구와 비구니들의 승가공동체가 전국의 사찰을 거의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역시 다른 분위기가 있다는 점... 이것은 1200년 전통을 가진 88번 사찰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80 넘었다는 김선생은 이미 이 절을 거쳐간 한국사람들... 최성현씨나 현직 판사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국 사람이 시코쿠 88 순례를 하다니 대단하다며 무료로 납경을 해주고  빵과 떡, 사탕이 들어 있는 간식꾸러미를 건네주며 지칠 때는 단 게 필요할 테니 순례중에 먹으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포를 만나 반가웠다. 국가니 민족이니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쉽게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위축된 상태로 낯선 공간을 여행하다가 한국사람을 만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까지 전해들으니 괜시리 콧끝이 찡해질 지경이었다. 

다이니치지를 나오며 야마시타 상은 또 '다시 만나자' 며 앞서 가라고 했다. 순례길이 어차피 한 길이니 또 만날 일이 있겠지... 하며 이번에도 범상하게 헤어졌다. 


14번 절 죠라쿠지(常樂寺)는 다이니치지에서 2.3km 떨어져 있다. 강을 건너 만나는 마을 뒤로 올라가 있는 산 기슭, 조그만 호수 위에 ... 바위를 그대로 조금씩 파내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15번 고쿠분지(国分寺)는 골목을 끼고 조금 돌아나오니 있었다. 불과 0.8km. 



단체 참배객 한 할아버지가 '너 어디서 왔냐? 한국에는 88개 절이 없냐? 나는 부산에 가봤다. 날이 더구니까 물을 자주 마시고 자주 쉬고 저녁 다섯시까지만 달린 뒤에 꼭 멈춰서 쉬어야한다. ' 이런 말을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감사하다고 답을 하니 헤어지면서 '간밧데!'  외쳐주었다.


 고쿠분지에서 16번까지는 작은 골목길 사이로 달려야 했다.  이날부터 오후 4시는 심리적인 제한선 같은 게 되었다. 4시부터는 새 절을 찾아가기보다 잠자리를 물색해야 한다... 첫날 요시노여관에서 엉겁결에 자면서 깨달은 점이다. 실은, 서울 바이클리에서 강의를 하던 이영덕 사장님도 이 점을 강조했었다. 달래 경험자들이 그런 조언을 했던 게 아니었다. 



16번 간온지(観音寺) 까지는 1.8km. 이제부터는 시내 주택가를 달려야 한다. 


도쿠시마시내까지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 오전에 달리던 호젓한 산길들을 떠올리면 웅성거리는 시가지와 전차와 밀려다니는 자동차... 밀집해 있는 주택들 모두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집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다. 




사찰 옆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신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신자보다는 신도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17번  이도지(井戸寺)에 저녁 5시경 도착했다.  


훗날에야 알았지만... 이날의 여정은 무척 무리를 한 것이었다.  가장 난코스라고 여기는 쇼산지를 올라갔다 내려온 뒤... 다시 도쿠시마 시내까지 ... 아직까지 잠자리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저녁이 다 됐다. 

 



마지막 순례자들이 빠져나가자 절 마당에는 긴 그림자와 적막감만 남았다. 



목표로 삼은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해변 캠프장까지, GPS에서 가리키는 직선거리는 9km미터. 어두워지기 전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힘을 냈다.



한 시간쯤 달려 도쿠시마 시내 마트에서 연어 세 토막 (180엔) 우유 500 미리 두 개 작은 팩 1개 김치 한통 (260엔) 사서 우유 한 팩은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엄청 먹어 대지만 소모량 너무 많아 먹어도 계속 허기가 졌다. 


저녁 6시가 전후로 퇴근길 자전거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다들 바쁘게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틀 전에 묵었던 곳도 도쿠시마시였다. 엉겁결에 와서 자고 간 도시. 도쿠시마시는 도쿠시마현의 중심도시이고... 시코쿠에서 가장 큰 도시인 것 같은데... 여전히 내게는 잠 잘 자리가 모호하다




gps가 가리키는 캠핑장을 찾아 가려고 보니...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아, 저 다리를 넘어가면 최단거리로 캠핑장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하고 다리에 다가갔으나... 자전거 통행제한... 자동차 전용다리였다. 또 다시 5km 가량을 시내쪽으로 되돌아와  최대한 보수적인 선택을 하면  도로를 따라 바닷가에 있다는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공원 캠핑장에 접근해보려고 노력했다. 


아래 보이는 언덕 너머 바닷가 끝 지점쯤에 캠핑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속이 탔다.

 

마지막에는 언덕을 따라 마을길을 계속 돌면서 바닷가에 인접한 접근로를 겨우 찾았다.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는 500미터쯤 되는 언덕을 하나 넘는 것이었다.  조깅을 하는 젊은이가 있길래 ...언덕 너머에 캠핑장이 있냐고 물어보니... 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달려내려갔다. 이제는 캠핑장이 없대도 아무데나 공중 화장실 근처에라도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안 공원에는 해수욕장 앞에 넓은 솔숲이 있고... 유스호스텔과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퇴근을 하고 테니스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공을 네트너머 넘기면서 '사요나라!, 아리갓또!' 하면서 유쾌하게 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쩐지 쓸쓸했다.

 

해수욕장 솔숲은 깨끗하게 관리된 조리대와 화염소(火焰所)라고 적힌 바베큐장이 함께 있었다. 나중에 여행하면서 들러본 거의 모든 캠핑장에는 이렇게 바베큐장이 마련돼 있었다. 아예 캠핑이라는 말 자체가 야외에서 하는 '숙박'의 의미보다는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는 장소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텐트를 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여가 서너 명씩... 몰려와 고기를 구워먹는 이들은 두어 팀이 보였다. 일단 텐트는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 수도가 있는 조리대에서 밥을 짓고, 연어를 굽고, 즉석 육개장을 끓여 저녁을 지어먹었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곳에서 캠핑이 가능하냐?' 고 물었더니 '아마 안 될 것!' 이라는 비관적인 대답... 게다가 경찰이 자주 순찰을 하기 때문에 ... 시내에 가서 호텔에서 자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까지...  



밥을 지어먹고 나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순찰차가 왔다. 어쩌면 좀 전에 조언을 해준 그 친구가... 수상한 외국인이 야영을 하려고 한다고 이른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꽤 넓은 솔밭에서...  순진한 인상의 경찰이 나를 향해 정확히 걸어와...'오늘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 88번 사찰 일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캠핑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숙박을 할 수 없다. 밥을 지어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래? 나는 구글에서 캠핑이 가능하다고 해 찾아왔는데, 지금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6시 이전에 떠날 테니 여기서 잠시 자고 가면 안 되겠냐?' '나는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곤란하다.' 내가 계속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는 할 수 없다는 듯...'남들 눈에 띄이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이렇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경찰관으로부터 야영 허가를 받은 것이다.

 

밤 9시...완전히 날이 어두워지고 인적도 뜸해질 때까지는 텐트를 펼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타 마시고... 해변가 산책도 했다. 아베크족들...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폭죽을 터트리고... 한강변의 공원처럼...  아름다운 해수욕장에 다들 불안한 마음도 없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해수욕장 한쪽 끝 인적이 드문 취사장에 텐트를 펼쳤다. 일단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고 쉰 뒤... 11시 넘어서 수둣가에서 코펠로 물을 떠 샤워를 했다. GPS 포인트가 가리키는 캠핑장이... 모두 다 야영이 가능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이날의 경험으로 알 게 되었다.




주행거리  97.56km

 

5시도 안 돼 눈이 떠졌다. 텐트 안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가  5시 반 경 스트레칭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쿠시마 공항 활주로가 내려다 보였다.  다카마쓰에서 도쿠시마까지 꽤 먼거리를 달려와  첫 캠핑을 무사히 마친 일이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한시 바삐 길을 나서야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침으로 한살림 감자라면을 끓여 저녁에 지어놓은 밥을 말아 먹었다. 텐트를 해체해 다시 네 개의 패니어와 랙팩, 핸들바백까지 여섯 개의 가방에 짐을 꾸리고 7시 경 길을 나섰다. 여전히 짐을 꾸리고 흔들리지 않게  랙에 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말도 서툰  이국의 거리를 달려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들을  헤쳐가야 할 일이 조금 두렵기기도, 설레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나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돌이켜보니 요즘의 나는 매사가 권태로웠다. 더 이상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은 없을 것 같고, 새롭게 분노할 일도 남모를 기쁨도 없을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밤에 라이터를 사러 왔던 편의점 로손에 들러. 물 2리터와 500밀리리터 쵸코우유를 샀다. 



일본사람들에게 편의점은 단순히 편의 이상의 의미인 것 같았다. 도쿄 같은 대도시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시코쿠의 어지간한 곳에는 대개 편의점이 과하다 싶게 드넓은 주차장을 끼고 들어서 있었다. 지도에도 로손, 패밀리마트, 선쿠스, 세븐일레븐, 쓰리에프, 미니스톱 같은 편의점을 꼭 표시돼 있다. 법이나 조례로 규정이라도 해놓은 것인지, 어느 점포에나 예외 없이, 식음료는 물론이고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 ATM, 복사기, 신문과 잡지 등이 갖춰져 있었다. 길이라도 물어보면 복사해둔 인근 지도를 꺼내 조금 감격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안내를 한 뒤 그 지도를 아예 가져가라고까지 한다. 


출퇴근 길에  대개 혼자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이나 주먹밥을 사서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 쓸쓸하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던 밥상이 무너진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좀 더 빨랐을 것이다. 우리네 출근길 풍경도 이제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순례가 시작되었다.GPS 상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는 1번 절 료젠지(靈山寺)를 향해 달렸다. 출근길 분주한 차들과 함께, 12번 국도 갓길에 나있는 자전거도로로 달리다 대충 방향을 보고 한적한 길로 접어 들었다. 지도에 나타난 것처럼 바다에 가까운 하구에는 복잡한 강줄기들이 흩어져 있고 도로는 이들 사이로 수많은 수로를 건너며 이어져 있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다. 인문교양서를 읽듯이 불경도 읽고 성경도 읽는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해마다 서너 번은 가고 집도 북한산 아래라 큰 절을 지나칠 일이 많은데 대개는 법당에 들러 삼배를 하지만 정해놓고 절이나 교회에 다닌 적은 없다. 종교에 기대 나의 어떤 결핍을 채우려는 생각도 해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돌이켜보니 군대에 있을 때, 가능하면 수요일 저녁과 일요일 오전에 허용된'종교행사'에 참여했다. 절반 이상은 절에 갔고 때로는 성당에도 교회에도 갔다. 졸병 때만이 아니라 제대할 때까지 그랬다. 막사에 남아서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군화를 닦거나 군복을 다리는 일은 하기 싫기도 했고, 욕설이 난무하는  난폭한 공간을 그때만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 무렵부터 몇 번이고 반야심경을 사경했다. 제대한 뒤에도 최근까지,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었던 참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마다 새벽에 일어나 반야심경을 붓펜으로 베꼐쓰면 위로가 됐다. 반야심경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허상이라고 말해주고 있잖은가. 

 


헨로(遍路)라는 시코쿠 섬의 사찰순례는 1200여 년 전 일본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空海, 코우보오 대사弘法大師, 774~835)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코우보오 대사가 수행하고 순례한 곳을 따라 시코쿠 전역에 있는 88개의 절을 돌게 돼 있다. 시코쿠 섬의 면적은 제주도의 열배인 약18,000 제곱킬로미터다. 


도보 구간의 길이는 모두 1200Km쯤, 하루에 30~40Km 씩 40일~50일 동안, 때로는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고된 길이 이어진다.  1번 사찰에서 88번사찰까지 도쿠시마에서 시계방향으로 제주도의 열배쯤 되는 시코쿠 섬을 한 바퀴 돌게 되며,  반대방향으로 돌거나 구간별로 끊어서 도는 이들도 있고 자전거나 승용차로 순례를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일본 불교는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다. 절의 분위기도 문화도 그랬다. 일본의 진언종은 우리나라에 일반적인, 문자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는 현교(顯敎)와 구분되는  밀교(敎)라고 한다. 구카이(空海)는  불교를 현밀이교(顯密二敎)로 구분하고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했다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밀교(敎)가 생겨난 것은 인도에서 힌두교 등의 영향 때문이 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어려운 경전을 이해시키고 전파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옴마니 밧메훔' 같은 진언을 외우거나 마니차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를 하는 일만으로도  부처의 경지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카이(空海)는 불교에 귀의하기 전부터 이미 한문에 능했고, 당에서 유학한 뒤로는  일본인으로는는 최초로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한 이였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 문자로 쓰고 있는 가타카가나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라는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을 세워 불교와 유교를 가르치다 855년에 입적한 뒤에 "코우보오(弘法)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시코쿠 순례 내내 들르는 절마다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보다 코오보오 대사의 흔적이 도드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절이나 부처를 모신 본당뿐만 아니라 대사를 모신 대사당이 본당과 비슷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당에 들른 뒤 대사당에 들러 똑 같이 예불을 드렸다. 


1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강을 건너고 논과 연꽃 모내기 끝난 논을 지나며 절이 있는 산 아래 동네를향해 달렸다. 설마 저 산을 넘거나 하지는 않겠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드디어 반도역을 지나 1번 절 료젠지(靈山寺) 눈에 들어왔다. 


 

 

 


뭘 어째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다른 이들의 여행기나 자료에서 읽은 대로 일주문을 지나 미즈야(水屋)에서 물을 떠 손과 입을 씻고 본당에 가서 향 한 촉을 50엔 주고 사서 사른 뒤 반야심경을 독경을 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두 분 형님, 그리고 아주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최근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떠올렸다. 


절을 둘러보고 주차장 앞에 있는 매점에 가서 납경장(納經, 2천엔)을 사서 납경을 받았다. 절마다 들러 확인을 받으며 도장과 붓글씨를 받는 것을 납경이라고 하는데, 300엔을 내야 한다. 납경장에 88개 사찰의 납경을 모두 받는 걸 일본사람들이 가보처럼 여긴다는데, 88개 절에서 모두 납경을 받자면 우리 돈으로 30만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 굳이 모든 절에서 납경을 받아야 하나 싶어 하루에 한 번 또는 십번 단위로 한 번, 이렇게 띄엄띄엄 받기로 작정했다.  



한글 안내 지도가 있어 한 권 샀다(2천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헨로보존협회에서 펴년 가이드북 지도편을 샀어야 했다. 상세한 지도와 순례길 인근에 있는 숙소 등도 그 지도가 가장 잘 편집돼 있었다. 그러나, 료젠지를 지난 뒤에는 아래 사진에 나온 지도편을 좀 처럼 살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난 뒤에 순례 중반을 지난 뒤에야 결국 사긴 했지만 말이다. 



매점 앞 주차장에 들어갈 때 못 본 다혼 폴더형 자전거가 놓여있어, 누군가 나처럼 자전거 순례를 시작하는모양이구나, 궁금하기도 해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꺼내 마시며 기다려보았다. 내 자전거에 비해 단촐한 차림이 부럽기도 했다. 좀 더 가볍게 올 걸 그랬나... 더 줄일 수는 없었을까... 


절 안에서 스쳐지나쳤던 자전거 쫄바지를 입은 청년이 자전거의 주인이었다. 타이완에서 왔다는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청년.  자신은 순례를 모두 마쳤다고, 나를 보면서 뭔가 해줄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조심하세요. 힘 내세요' 인사를 남기고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도쿠시마 방향으로 달려갔다.  


 

매점과 안내소가 있는 건물 처마밑에 제비집이 있었다. 어릴 시절, 서울 돈암동에 있는 우리집 처마에도 제비집이 있었다. 제비는 몇 해 동안 가을이면 사라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았다. 우리 가족들은 제비새끼들이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부모들이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광경에 열광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부터 제비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우리도 그 집을 떠났다. 그 뒤로 40년은 흐른 것 같다. 서울에 다시 제비가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이다.  


 2번사찰 고쿠라쿠지(極楽寺)는 료젠지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있다. 료젠지에 비하면 좀 더 현대적인 절이다. 순산을 기원하는 절이라고 했다.  표지판도 잘 돼 있고 바로 옆 동네나 마찬가지라... 잠깐 방심한 채 달리다보면 닿는다. 핸들바에 묶어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인 로커스프로에 의존해 길을 찾는 일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 전혀 엉뚱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컸는데, 료젠지부터는 길모퉁이마다 순례길을 안내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본당에 들렀다가 납경소가 있는 매점에서 순례자들이 입는 흰 옷 가운데 소매 없는 '오이즈루'(2천엔)를 샀다. 료젠지에서 만났던 타이완 청년의 옷이 빛바래고 얼룩이 진 것이 생각났다. 새로 산 내 옷은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다. 여기서도 납경을 받았다.  

 

 

 

 

절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좁다란 샛길로 순례길 스티커가 있어 따라가 보았다. 동네 뒤로 자전거가 오르기에는 좁지 싶은 오솔길이 묘지를 지나게 돼 있었다. 이때까지는 몰랐는데, 대개의 절 옆에는 묘원이 있었다. 봉분은 없고,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일본의 묘지. 산 자들의 주거공간과 죽은 이들의 처소를 구분해 양택과 음택을 명확한 구분한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 한 가운데도 묘지가 늘어서 있는 일본은 생사관이 다른 것 같다. 


사별을 많이 겪으면서, 점점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죽음은 어린 시절에는 두려움이었고, 좀 더 자란 뒤에는 슬픔이었고, 이제 와 생각하면 ...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할 게 아니라... 잘 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든 뒤에  평생 지키온 신념과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죽어가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자~알 죽어야지... 암만...   




미처 몰랐는데, 헨로미치(遍路道)를 안내하는 이 빨깐 스티커들은 대개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별 생각없이 스티커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갔다가 뒤에 몇번 낭패를 겪게 된다. 


 

3번 곤센지(金泉寺)는 지도상으로, 고쿠라쿠지에서 2.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본당에 들렀다 나오려고보니, 버스를 타고온 단체 순례객들이 합창을 하듯 함께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다. 문자로는 똑같이 260자 한자로 표기돼 있지만, 당연히 그들이 독송하는 소리는 '방묘싱교...' 하는 식으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부부간에, 또는 혼자서 승용차로 순례를 시작하고 있었다. 더러는 어디서 왔느냐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할 거냐며 대단하다, 조심해라...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4번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곤센지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곤센지를 나와 오른쪽으로 달리다 아직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조금 버거운 업힐 구간을 만나 꽤 당황했다. 햇볕도 따가웠다. 

 

다이니치지 오르막 길은 앞으로 펼쳐질 순례길의 고행에 대한 어떤 암시와도 같았다. 거친 숨소리를 토해가며 절 앞에 도달해보니 사람도 거의 없고 조용했다. 도보 순례자들 몇 명과는 지나치며 가벼운 목례를 나누었다. 

 

5번 지조우지(地蔵寺)는 다이니치지에서 곧장 내리막길을 2km쯤 내려오다보면 금방 만나게 된다.  내려오는 길가에 무인 판매대가 있길래 아기사과 한 봉지(100엔) 오렌지 2개 (50엔)를 사서 앞쪽 패니어에 넣고 달렸다.  


6번 안라쿠지(安楽寺)는 12번 도로를 따라 5.3km 가량 떨어져 있다. 헨로미치 스티커는 도로 이면으로 난 마을 길로 안내 돼 있어 일부러 따라다녔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하기까지 한 마을을 정말 묵언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달렸다.  


 

 

4번 다이니치지에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조금 맥이 빠진 탓일까, 지치는 느낌이었다. 안라쿠지 마당 안에는 전통 가옥 지붕 양식이겠지 싶은 띠 같은 풀로 엮은 건물과 잘 가꾼 연못이 있었다. 절에 딸려있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100엔)을 사 먹으며 잠시 앉아서 쉬었다.  


 

7번 주라쿠지(十楽寺)는 안라쿠지에서 1.2Km 떨어져 있다. 일주문 옆에 대형 숙소가 마련돼 있어 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절에서 운영하는 숙소들도 요금은 6천엔 이상으로 만만찮은 것 같았다. 

 

 

88개 사철 어디나 초입에 사진 오른쪽에 있는 미즈야(水屋)가 있어 먼저 손과 입을 씻고 본당과 대사당에 참례하게 돼 있다. 손과 입... 그렇구나... 욕망을 짓는 것도 스스로를 모욕하게 만드는 것도 손과 입이구나... 자극은 눈으로도 오고 코로도 오겠지만 욕망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기관은 손과 입이겠구나... 


나는 초반에는 본당에만 참배하고 대사당은 그냥 지나쳤다. 코우보오대사(弘法大師)가 여전히 낯설었기 때문에 그랬다.  


카메라 배터리가 벌써 방전됐다. 당황스러웠다. 하루 정도는 버텨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이렇게 됐다. 오랫동안 써오던 캐논20D를 가져갈까 하다가 무게가 부담스러워 파나소닉 루믹스 LX3를 중고로 사서 가져갔는데, 후회가 됐다. 이제부터는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을 해야 했다. 문제는 스마트폰은 핸들바에 결합해 놓고, GPS로 쓰고 있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이것을 풀고 조으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때로는 사진이고 뭐고 귀찮아지는 순간도 너무나 많았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의 사진들이 좀... 그렇다.

7번 쥬라쿠지 앞에 있는 우동집에서 냉우동(500엔)을 사먹었다. 식당의 손님들은 모두 순례자들이었다. 승용차, 도보, 자전거 제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냉 우동은 점심요기로는 허전했다. 


8번 쿠마타니지 (熊谷寺)는 4.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산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길이 헷갈려 우왕좌왕하다가 트럭운전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오르막 길을 제대로 찾았다.   

 

중간에 일주문이 있길래, 금방인줄 알았더니 일주문을 통과한 뒤에 다시 도로를 건너고나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본당이 있었다. 

 



절마다 기부자들의 이름과 금액을 세워둔 이런 비가 늘어서 있었다.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차별은 없었다. 수백 년 전에 세워진 비들에는 단돈 일백엔이라고 적힌 비들도 있었다.  

 


아직 순례형 몸으로 다져지기 전이라 졸음도 쏟아졌다. 첫날인데, 이런식으로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사기가 떨어졌다. 납경소 앞 휴식소 벤치에 앉아 잠깐 졸기도 하고 의기소침해 앉아 있는데, 일흔도 더 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몇 마디 하시고 '순례하면 죽어서 좋은데 간다, 나는 14번째다. 간밧데! 간밧데라는 말 알고 있나?' 이렇게 격려를 해주고 갔다. 묘하게 힘이 났다. 말투와 표정이 어쩐지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아 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일제 치하에서 생계가 막연했던 친가 외가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불과 아홉 살 네 살의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며 자식들을 길러냈다. 7남매의 장남이던 아버지는 불과 아홉의 나이에 일본에서 공장에 다니며 할머니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은 종종 일본어로 대화를 하시곤 했다. 두 분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 게 싫어서 나는 해찰을 부리곤 했다. 무슨 말을 나누셨냐고, 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냐고... ㅎ 


 

다시 힘을 내 달렸다. 내리막 길이라 수월했다. 놀라운 것은, 도보순례자들의 속도가 예상보다 상당히 빠르다는 것이다. 7번 쥬라쿠지에서 마주쳤던 도보순례자 (아루키 헨로步き遍路)가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나를 추월해서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자전거 속도계를 보면 평지를 달릴 때는 시속 25~30Km, 오르막에서는 10~15km 정도는 유지한다. 걷는 속도는 빨라야 6km  남짓일 텐데... 이럴 수 있나 싶도록 빨랐다. 자전거로는 20일 내외, 걸어서는 40일 내외라고 할 때부터 내심 과연 그 정도 차이밖에 안 나나 ... ? 의구심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자전거로 순례를 하더라도 기간을 반 이상 줄이는 것은 무리였다. 도보순례자들은 최단거리로 산길을 넘어다니기도 하지만, 40킬로그램 가량 짐을 매달고 있는 자전거는 오르막에서 헐떡이며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9번 호린지 (法輪寺)는 구마니타지에서 내리막길을 한참 달린 지점, 2.4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후 4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절 앞에 탁발승이 있길래 100엔 동전을 시주했더니, 어디서 왔냐며 11번 절 앞에는 무료 숙소가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될 거라고... 13번 다이니치지에는 옥상(안주인)이 한국사람이니까  만나보라고... 이런 말을 했다.  한국사람이 주지스님의 부인이라는 말인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내가 일본어를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 하고는 그냥 지나쳤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숙박을 어떻게 할지, 막연한 상태였다. 


순례자들을 위한 무료숙소인 젠콘야도(善根宿)가 곳곳에 있다는 글은 읽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공원 같은데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지도 않았다. 뭐랄까...  남의 나라에 와 조금이라도 '실례'를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  그렇다고해서 계속 호텔에서 자면서 순례를 이어갈 만큼 돈을 준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조금 막연한 상태였다. 물론, 1~20km 인근에 캠핑장이 있다면 서슴없이 달려갈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늦어도 저녁 5시에는 이동을 중단하고 숙박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바이클리 사장님은 조언했었다. 나도 그 말을 들으며 당연히 그래야 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늦어도 하절기에는 5시, 동절기에는 4시에는 대피소나 하산지점을 통과해야 안전하다. 그 다음부터는 당황하게 되고, 체력도 떨어지고 렌턴마저 준비하지 못하면 조난의 위험도 있다. 

   


10번 기리하타지 (切幡寺)에 도달할 즈음 점점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도 막연한 가운데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기리하타지 아래 사하촌은 꽤 고풍스런 목조주택들, 상점과 여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만, 평일이라 그런지 대부분 문을 닫아 놓았다.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오르막길 입구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려던 한 사내가 거의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자물쇠로 묶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 오늘 어디서 잘 거냐? ' '한국에서 왔어요. 오늘 어디서 잘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11번 절 앞에 무료로 잘 수 있는 숙소가 있고 강변에 '캼프'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 그래요?' '그럼 또 만나자.' 그는 이런 '쿨한' 인사를 남기고 내리막길로 달려갔다.  이 사내는 뒤에 두 번 더 다시 만나게 되는 야마시타(山下)상이다.  


해가 기울고 있었기에 서둘러서 330개 계단을 밟고 본당에 올라가 참배를 했다.  




계단에는 액막이로 놓은 하얀 동전들이 놓여있었다. 주로 1엔짜리 백동전들이다.  


오후 4시10분경 절에서 내려왔다. 11번 절까지는 지도상으로는 10km 남짓 떨어져 있는데, 과연 다섯시 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안되면, 도중에 있다는 강변 캠핑장에서 자야겠다. 그런데 내가 가진 GPS에는 그 캠핑장이라는 것이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무슨 수로 찾아간단 말인가.   


11번 절 후지이데라(藤井寺)는 지도에 보면 절에서 내려와 시내를 관통한 뒤 요시노강을 건너 맞은 편 산 기슭에 있다고 나와 있다.  거리는 9.5Km 이미 4시 반이 다 됐다. 30분 안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절들은 납경도 다섯 시까지만 해준다. 향로도 꺼지고 발걸음도 끊긴다. 


요시노 강(吉野川)을 건너기 전 야와타 (八幡)라는 동네에서 우체국을 만났다. "당신, 다른 선물은 아무것도 필요 없지만 엽서는 꼭 써 보내야 해요."  여행 경비를 건네주며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내의 말보다, 불과 한국을 떠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울의 가족들이 벌써 그리웠다.  그림엽서 다섯 장과 일반 엽서 다섯 장 등  열 장을 샀다. 우체국에 들어가기 전에 엽서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직원 앞에 서니까 신기하게 생각이 떠올랐다. '하가끼(葉書) 부탁해요' 우체국 직원은 땀 범벅이 된 내가 안쓰러웠는지, 기념품 같이 준비해둔 '가제수건'을 한 장 건너주었다. 에어컨 때문에 시원한 우체국에서 나오기 싫을 정도로  태양이 뜨거웠다. '우체국 계단'에 앉아 첫 엽서를 썼다.  


요시노강은 아름다웠다. 강가에는 갈대가 무성했고 석양에 반짝이는 강 위에서 플라이 낚시를 하는 태공들이 몇 사람 보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산맥들... 내가 이 산들올 오르내려며 험한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강 위로 나즈막하게 깔려있는 다리를 건넜다. 차가 한 대씩 교행할 수 있고, 비가 많이 내리면 그대로 물에 잠기게 된 다리였다. 헨로미찌 안내 스티커는 강을 건너 계단을 넘어 직진하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이무렵 핸드폰 배터리마저 모두 방전됐다. 이제 GPS도 없다. 1번 료젠지에서 산 한글판 지도책을 펼쳐보며 답답한 운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느 강을 건넌 뒤 좌회전해서 시가지를 2,3Km쯤 지난 뒤 산쪽으로 우회전하면 쉽게 11번 절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충분히 달렸다 싶어도 절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없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언덕을 하나 더 넘은 뒤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을 보게 될 것라고 했다. 이쯤이겠구나 싶은 곳에서 오른쪽 오르쪽이 나오길래  헉헉대며 1km쯤 산쪽으로 올라갔지만, 절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 여자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길래, 후지이데라를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단다. 중1,2학년쯤 돼 보이는 귀여운 꼬마들이었다. 이럴 수가... 동네에 있는 유명한 절일 텐데... 모른다고? 내가 당황스러워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하고는 근처에 있는 수퍼에 들어가 한참을 물어보고 나온다. 흰색 헬멧을 쓰고 펑퍼짐한 교복을 입은 모습이 여간 귀엽지들 않다.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겠단다.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말릴 새도 없이 휘리릭 언덕 위로 달려가더니 학교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TT   


아이들이 고맙기도 해서 기다려볼까 했지만 이제 더 지체하면 정말 낭패를 당할 것 같아 초조해졌다.  아이들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언덕을 내려오며 다시 192번 도로 큰 길을 따라 달리다가 절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헨로미찌 스티커를 발견했다. 캠핑할 수 있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절 앞까지 가서 숙박지를 정하는 수밖에... 


절에 도착하니  이미 다섯 시 반이 지났다. 헨로미찌 스티커를 따라 갔다가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들고 산속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야 했다. 이때까지도 도보순례길과 자전거 갈 길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납경은 포기하고 본당에 가서 향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납경소에 있던 노인이 어디서 잘 생각이냐고 묻기에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돈을 약간 지불해도 괜찮냐고... 괜찮다고... 자기를 따라 내려 오라며 오토바이로 앞장선다.  도로를 따라 2~3Km쯤 내려오니  조용한 시골동네에 2층 건물 요시노 여관이 있다. 하룻밤 5천 엔 저녁은 다 떨어졌으니 나가서 먹고 오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체크인을 하고, 패니어와 랙팩을 들고 2층에 있는 다다미방에 옮겨다 놓고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방을 모두 떼어낸 자전거는 이래도 되나 싶도록 가볍고 홀가분했다. 장 봐 올 게 있을 것 같아 빈 패니어 하나만 앞에 달고  요시노가와시 시내로 달려갔다. 


논과 마을이 섞여있는 조용한 시골동네였다. 식당이 있겠지 싶은 한 시간 전에 지나쳐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가끔 박쥐들이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192번 도로변에서 한 접시에 99엔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회전 초밥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다섯 접시쯤 먹고(460엔) 수퍼에서  우유 1리터(150엔), 다음날 행동식으로 할 요량으로 카스테라 (130엔),  맥주 500밀리리터(160엔) 을 사서 완전히 어두워진 거리를 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래층 욕탕에는 뜨거운 욕조가 있고, 2층에는 코인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 카메라, 전조등, 핸드폰을 모두 충전해 놓고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지나갔다. 당장 오늘도 오늘이었지만 내일, 가장 험난 하다는 12번 쇼산지 (燒山寺)를 어떻게 갈 것인지... 거의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래도 잠은 잘 잤다. 


순례 첫날... 길고 긴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4


주행거리 86km : 다카마쓰 토요코인호텔~ 도쿠시마 달맞이언덕 텐트촌 (츠키미가오카 月見ヶ丘海岸)

 

 

본격 자전거 여행 첫 날.

무척 피곤했지만 잠 못들고 뒤척이다 늦게 잠들었는데도 4시 경 잠이 깼다. 긴장해 있었다. 짐을 다시 풀고 꾸리고, 7시 경 1층 로비에 내려가 주먹밥과 된장국, 감자셀러드와 계란말이, 단호박과 해조류 초절임 등. 입맛이 없었지만 달리면서 후회할 게 분명해  억지로 라도 먹어두었다. 그러나, 여행 마친 뒤에 이 사진 보면서 웃었다. 달리는 중에는 적어도 한 끼에 이보다는 세배는 더 먹었으니 말이다.


 

 패니어 네 개와 랙팩, 핸들바백까지 모두 다섯 개의 가방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보고 대충 손으로 들어보며 무게를 맞추고 이러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결국 아홉시 다 돼 호텔을 나섰다. 뙤약볕에 섭씨 30도가 넘는 더위, 갑자기 한 여름 복판으로 밀려들어와 있었다.  


호텔문을 나서니 방향조차 가늠하기 막막했다. 목표는 시코쿠 88개 사찰 중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에서 10km쯤 떨어져 있는 도쿠시마(德島) 공항 옆 바닷가 달맞이언덕 캠핑장. 이 낭만적인 이름의 바닷가 캠핑장이 어떤 곳일까? 이름만으로는  살짝 기대도 됐다. 


 

출발하기 전, 패니어를 달려고보니 앞쪽 오른쪽 랙 나사가 헐거웠다. 렌치로 조여보려고 해서도 계속 겉돌기만 했다. 일단 지도를 보면서, 해안을 따라 나 있는 11번 도로는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아 남쪽으로 가서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한 뒤 12번, 10번 도로 등을 조합해가며 도쿠시마로 가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길가에 자전거포가 있으며 들러서 전반적으로 점검을 받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를 만났다. 나사 이야기도 하고  점검을 부탁했다. 나사 몇개를 조이더니 1천엔이라고 했다.  이 정도였으면 내가 스스로 한번 더 꼼꼼히 살펴도 되는 것이었는데...하는 후회,이미 늦었다.

 

자전거포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어보니 계속 남쪽으로 가다보면192번 도로가 있고, 계속 가다 강을 건넌 뒤193번 도로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192번도 193번도 찾지 못했다. 오르락 내리락, 첫날답게 오전 내 무척 헤맸다. 10번 도로를 타고 도쿠시마가 있는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일관되게 달릴 수 있게 된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GPS의 표시도 달리는만큼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비로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됐다.

그런데, 계속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자전거를 멈추고  혹시 앞 펜다가 바퀴에 긁히는지 살펴도 그런 낌새는 없다.  좀 더 달리면서 보니 뒷 팬다를 고정해놓은 나사가  빠져 달아나고 랙팩을 묶어둔 줄도 풀려 뒷바퀴에 마찰되면서 긁히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긴장한 때문이리라. 배도 고팠다. 어디서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처음에는 막막했다.

 

정오가 조금 넘어,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365일 싸다는 코스모스 마트에 들어가 더위도 식히고,  사이다, 우유, 빵과 잼을 사서  그늘에 앉아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랙팩에 넣은 뒤 다시 달렸다.

 

다카마쓰를 벗어나 사누키시를 지나고... 사누키를 거의 다  벗어난 지점에서 오후 세 시경 우동을 사 먹었다. 맑은 국물에 국수가닥 뿐인데 맛은 괜찮았다. 국수만으로는 허전해서 튀김과 주먹밥까지 합쳐서 600엔.  



우동집에서 물통에 얼음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출발. 볕이 무척 따가웠다. 견딜만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꾸준히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평균속도 30Km 가까이 꽤 부지런히 달렸다. 긴장감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


 

바다다. 내륙의 단거리 길찾기를 포기하고 해안길을 달리기로 했다. 얼핏 지도에 보기에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로 가려면  히가시카가와 시 (東かがわ市)를 지난 뒤에 무척 고된 경사가 가파른 산을 넘어야 하지만, 어차피 첫날은 절에 갈 게 아니라 캠핑장이 있다는 도쿠시마공항 인근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계속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 변에 자전거 도로는 잘 정비돼 있었다. 오가는 차들 말고 사람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도쿠시마에 거의 다 도달해, 해안가 약수터를 발견했다. 다시 수통에 물을 채웠다. 물통을 가득 싣고와 물을 긷고 있던 아주머니가 관심을 가지고 어디로 가냐고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외진 도로변, 시멘트 옹벽안에 있는 약수터에 둘만 있는 걸 조금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비켜드렸다. 

 

도쿠시마에 들어선 뒤, 정신없이 국도 갓길에 난 자전거길을 따라 달리다보니 아래 사진처럼 길을 내려서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야영장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공단을 지나서

 

 

마을과는 동떨어진 공항 인근 동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공항 안내판에 도쿠시마아와오도리공향( 徳島阿波おどり空港)이라고 쓰여있다. 도쿠시마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댄스파티가 '아와오도리'라고 한다.

 

 

 

해안에서 멀지 않은 달맞이 언덕 캠프촌에 6시 도착했다. 빈 캠프장 철문이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무단 캠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맥이 빠졌다. 다행히 전화번호가 있길래,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 입니다. 캠핑을 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가능하지만, 내가 캠프장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린다. 괜찮냐? 텐트는 가지고 있냐?  일박에 600엔이다. " 

 


어찌되었든, 첫날 캠핑이 가능할 것 같아 마음이 느긋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니 노년의 내외가 작은 트럭을 타고 왔다. 600엔을 내고 아무데나 편한데다 텐트를 치라고 해서 샤워장,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쳤다. 그런데 사워를 하려면 100엔 더 내야 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드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 입었다. 주인 내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이 지쳐, 밥을 간단히 차려 먹으려고보니,  라이터가 없어 버너를 켤 수 없었다. 

 

공단을 가로질러 왕복 8킬로미터 .. 편의점 로손을 찾아 가스라이터를 사가지고 다시 아무도 없는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충전이 가능한 콘센트를 겨우 찾아  핸드폰 등을 충전해놓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도쿠시마 달맞이언덕 텐트촌 (츠키미가 오카 月見ヶ丘海岸)

주행거리 86km

자전거 여행 첫날.



뒤척이다 자정 넘어  잠들었지만  4시경 잠이 깼다. 긴장해 있었다. 짐을 풀고 다시 꾸린 뒤  7시경 1층 로비에 차려진 호텔 조식을 먹었다. 주먹밥과 미소된장국, 감자 샐러드. 식욕이 없었지만  온종일 달리며 후회할 것 같아 꾸역꾸역 먹어두었다.  


자전거 앞뒤에 매다는 패니어 4개,  랙 팩, 핸들에 고정하는 핸들바 백 등 모두 여섯 개의 가방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보며 양쪽의 균형을 맞추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9시가 다 돼 호텔을 나섰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이국의 도로.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한 여름 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첫날 숙박은 출발지점인 다카마스(高松)에서 시코쿠섬 북단의 반대쪽 도쿠시마(德島) 공항 옆 바닷가 '달맞이언덕 캠핑장'에서 할 작정이었다. 시코쿠 88개 사찰 중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에서 10km쯤 떨어진 곳이다. 지도상으로는 거리와 지형이 가늠되지 않는다. 대략  80km 이상 달려야 한다. 달맞이언덕.  낭만적인 이름의 바닷가 캠핑장?  살짝 기대도 됐다


 호텔 문을 나서면서부터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북쪽 해안을 따라 뻗어있는  11번 도로는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아 남쪽으로 가서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한 뒤 12번, 10번 도로 등을 조합해가며 도쿠시마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패니어를 부착하다 보니 앞바퀴 오른쪽 랙의 나사가 헐거웠다. 렌치로 조이려고 해도 계속 겉돌기만 했다. 다행히 얼마 달리지 않아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자전거 수리점을 만났다.  나사 몇 개를 조이더니 1천 엔이라고 했다. 휴대용 공구로 스스로 처리할 만한 일이었는데 싶었다.  


자전거포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으니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192번 도로가 있고,  그 길로 계속 가다 강을 건넌 뒤 193번 도로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192번도 193번도 찾지 못하고 오전 내 무척 헤맸다. 10번 도로를 타고 도쿠시마가 있는 동쪽으로 일관되게 달릴 수 있게 된 건 정오가 다 되어서다.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기 좌표를 읽고  GPS의 표시된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는데  계속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자전거를 멈추고  혹시 앞 펜다가 바퀴에 긁히는지 살펴봐도 그런 낌새는 없다.  다시 출발하다 멈춰 살펴보니 뒷 팬다를 고정해놓은 나사가  빠져 달아나고 랙 팩을 묶어둔 줄이 풀려 뒷바퀴에 마찰되면서 긁히고 있었다.  긴장한 탓에 간단한 이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도 고팠다. 어디서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처음에는 막막했다.


정오가 조금 넘어,  '365일 싸다'는 슬로건을 내 건 코스모스 마트에 들렀다. 사이다, 우유, 빵과 잼을 사서  그늘에 앉아 요기를 하고 나머지는 랙 팩에 넣은 뒤 다시 달렸다.


다카마쓰를 통과하고 우동으로 유명한 사누키 시도 거의 다  벗어난 지점에서 우동을 사 먹었다.  어느새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맑은 국물에 국수가닥뿐인데 맛은 좋았다. 국수만으로는 허전해서 튀김과 주먹밥까지 합쳐서 600엔.

물통에 얼음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출발. 볕이 무척 따가웠다. 견딜 만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꾸준히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평균속도 30Km. 꽤 부지런히 달렸다. 긴장감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


바다. 찾기 어려운 지름길은 포기하고 해안을 따라 달리기로 했다. 얼핏 지도에 보기에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로 가려면  히가시카가와 시 (東かがわ市)를 지난 뒤에 무척 경사가 가파른 산을 넘어야 하지만, 어차피 첫날은 절에 갈 게 아니라 캠핑장을 향해  계속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 변에 자전거 도로는 잘 정비돼 있었다. 일본의 행정구역 '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개념인 것 같았다. 마을을 통상 '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가는 차들 말고 사람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도쿠시마에 거의 다 도달한 해안에서 약수터를 발견하고 수통에 물을 채웠다. 트렁크에 물통을 가득 싣고 와 물을 긷고 있던 아주머니가 관심을 가지고 어디로 가냐고 질문을 했다. 외진 도로변, 시멘트 옹벽 안에 있는 약수터에 단 둘만 있는 게 불안하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해안길이 끝나고 도쿠시마에 들어선 뒤로는 시가지를 달려야 했다. 야영장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공단을 지나 마을과는 동떨어진 공항 인근 동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공항 안내판에 도쿠시마 아와오도리 공향( 徳島阿波おどり空港)이라고 쓰여있다. 아와오도리는 도쿠시마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댄스 페스티벌이라고 한다.


저녁 6시경 해안에서 멀지 않은 달맞이 언덕 캠프촌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상하던 바닷가 낭만적인 캠핑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게 잠긴 철문에 무단 캠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맥이 빠졌다. 안내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입니다. 캠핑을 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가능하지만, 내가 캠프장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린다. 괜찮냐? 텐트는 가지고 있냐?  일박에 600엔이다. " 물론 괜찮고말고 어차피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처지 아닌가.

시코쿠 첫 야영장. 달맞이언덕 캠핑장.  쓸쓸한 적막감만 감도는 곳이었다.

시코쿠에서 첫 캠핑이 가능할 것 같아 마음이 느긋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니 노년의 내외가 작은 트럭을 타고 왔다. 600엔을 내고 아무 데나 텐트를 치라고 했다. 샤워장,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쳤다. 그런데 사워를 하려면 100엔 더 내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입으니 주인 내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바글대던 시절이 있었을까. 늙고 낡은 캠핑장에는 쓸쓸한 적막감만 가득했다.


주인장 내외가 떠나고 나자 호젓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첫날 자전거 주행을 이렇게 마쳤구나.  밥을 차려 먹으려고 보니,  라이터가 없어 버너를 켤 수 없었다. 다시 자전거로 공단을 가로질러 왕복 8km. 편의점 로손을 찾아가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사 가지고 다시 텅 빈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옥외에서 충전이 가능한 콘센트를 겨우 찾아  핸드폰과 충전 배터리를  충전시켜 놓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초롱했다. 가족들도 저 별을 보고 있겠지.


 



부인하고 싶은 나이 쉰.  다시  가슴 뛸 일이 있을까.

 

어느새 쉰 살이 넘었다. 실감 나지 않는 나이. 아니, 부인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내 마음이 어떠하든 나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해 봄, 친구 S가 갑자기 죽었다. 암에 걸렸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랬다. 각별했던 사이라 장례식장을 나흘 내내 지키다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고향  벌교에 가서  묻고 올라오면서,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7년 근속하면 1개월  '안식월' 휴가를 쓸 수 있다. 7년을 넘겨 9년이  되도록 휴가 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일과 일상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게 되었다.

 

 S가 죽기 불과 열흘 전, 경주에 있는 자연치유원에서 경남 거창 그가 귀농해 살던  집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그는  다섯 살짜리 늦둥이 아들에 대해 회한을 토로했다. "책임감 강한 체 해왔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정말 책임감이 강하다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지, 애걸복걸하면서 건강 망치고 무엇 하나 책임을 못 지게 생겼잖아."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마음을 끓이며 집착하고 있는 일들이 다 허무해졌다.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일.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여행밖에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정도가 전부였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 Km.  걸어서 45일  이상 걸리는 먼 길. 자전거를 타고 돌면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시코쿠 순례를 시작하기 전 한강변을 연습 삼아 달려보았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 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 차라리 걷는 일이라면 홀가분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제나 제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내 마음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도로 위로 자동차들에 뒤섞여 그 정도를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큰 고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 무렵 나는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 가서 넣어달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전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 (지금은 용산역 인근으로 옮겨가 있다.)  5주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렘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바이클리의 교육은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 장력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로 알차게 짜여 있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MTB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겠다는 건축사,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 놓고 티베트와 인도 네팔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단 하겠다는 서른일곱 살 학원강사, 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을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을 해 도쿄에 일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내친김에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하겠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 번에 하겠다고 준비하던 젊은이. 알고 보니 바이클리는 전 세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거쳐가는 플랫폼이었다.   

 

도중에 체인이 끊어지면 이렇게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라는 브랜드의 여행용 자전거.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달 수 있는 모델이었다. 본래는 출퇴근 때 가끔 타던 생활자전거를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집에서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까지 왕 70Km를 한 번 왕복해본 뒤 아무래도 자전거를 바꾸는 게 좋겠다 싶었다. 자전거를 바꾸어도 걱정은 여전했다.  한강변 안전한 자전거길로 70km를 달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싶게 힘겨운데, 과연 20여 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해낼 수 있을까.

 

실제로 겪은 상황보다 미리 걱정하는 일이 더 힘겨웠다.

삶에서 겪는 일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떠나기 전 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안했다. 여행 준비는 엉성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일정 별로 진행 구간을 미리 정하는 등 세부 계획을 세우려고 했으나 일에 쫓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정보도 부족했다.

말도 서툰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다닐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스마트폰에서 바로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를 저장하고 이것을 로커스라는 앱에 불러온 뒤 시코쿠 88개 사찰과 시코쿠 섬 야영장 GPS 좌표를 얹었다.     

 

떠나기 전 날 독서실에서 자정 다 돼 돌아온 고등학교 2학년 작은 딸과 식탁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세상의 부조리한 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세상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바꿔보고 싶다고 했다. 두 아이는 기질도 성향도 판이하다. 어떤 면은 부모를 물려받은 것이지 싶고, 어떤 면은 도대체 어디서 온 성품인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두 아이에게 다 있다.

 

우리 세대는 청춘의 시절을 최루탄 난무하는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눈물과 땀에 범벅돼  거리를 달리면서  막연하게  우리 아이들은 좀 더 합리적인 세상에서 살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위태롭고 어떤 면에서는 더 숨 막히는 곳이 되었다. 우리가 채 다 못한 숙제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유전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야영을 하려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랙팩과 패니어 등 여섯 개의 가방에 실을 짐들

 

5월 21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한여름을 방불케 더운 날씨였다. 아침을 먹고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로 짐을 들고 지하철로 갔다.  전날 자전거를 타고 가서 분해해서 박스에 포장을 해두었기에 나머지 짐만 꾸려 랙팩과 핸들바백에 담았다. 먹을거리와 옷가지, 그리고 캠핑장비들까지...  어깨가 빠지게 무거웠다.   

 

자전거 박스에는 기내 반입이 어렵지 싶은 텐트 폴과 팩, 자전거 수리공구, 주머니칼 등과 침낭 옷가지만 넣었는데도 30kg이 넘었다. 다시 옷가지 텐트 등을 빼도 26Kg. 아시아나 홈페이지 안내에는  일본지역 무료 수하물은 이코노미의 경우  20kg까지고  5Kg 초과할 경우 다카마쓰까지는 2만 5천 원 차지를 물게 돼 있다. 그러나 공항터미널 담당 직원은 '네, 잘 다녀오세요!' 하더니 쿨하게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바이클리 사장님이 같은 날 캐나다 횡단을 위해 출국하는 로키님과 나를 삼성동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삼성동 공항터미널에서 짐을 부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세토대교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시코쿠섬 위를 날았다. 창밖으로 언뜻 내려다보기에도 평지는 별로 없고 온통 산과 계곡의 굴곡들뿐이라 덜컥 겁이 났다. 오토바이도 아니고, 내 심장을 동력으로 저 주름진 굴곡들을 이십여 일 달려야 하는구나.

 

여섯 시가 다 돼 다카마쓰(高松) 공항을 빠져나왔다. 부피가 큰 자전거 박스에 대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관심을 표하며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자전거 여행을 할 생각이냐? 잠은 어디서 자냐?  88번 사찰 일주를 할 생각이다. 잠은 비즈니스호텔을 이용하거나 캠핑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어 공항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이클리 사장님 조언대로 택시에 박스 채 싣고 예약해둔 다카마쓰 나카진초 토요코인 호텔로 갔다. 택시는 근 40분을 달렸다. 석양이 지는 낯선 거리에 하굣길 학생들과 퇴근길 시민들이 자전거 물결을 이루며 한가롭게 달리고 있었다. 택시비는 4천 엔. 비싼 줄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나왔다. 하룻밤 숙박비다.

 

자전거 분해는 해봤지만, 조립은 처음이라 진땀깨나 흘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 분해하면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부위별로 볼트와 너트를 따로 모으고 패니어를 부착할 랙이나 빗물받이도 부착된 모습을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게 도움이 됐다.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말도 서툰데 자전거 박스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호텔 프런트에 이런 말을 떠듬떠듬하니까 자전거 박스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박스를 분해할 필요도 없다고.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날인 6월 13일에 다시 호텔로 돌아올 예정이라  예약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스를 맡기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자전거로  시내도 둘러보고 밥도 먹을 겸 밤거리를 달려보았다. 자전거도로가 잘 구획돼 있었다. 일직선으로 곧장 달려가니 다카마쓰 항구와 붙어 있는 역이었다. 문 연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사에 붙어있는 꽤 큰 할인점은 밤 10시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신선식품은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도시락, 맥주와 내일 운행할 때 간식거리와, 쌀 1kg을  샀다. 물가가 비싼지 싼 지 아직은 전혀 감이 없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렸다. 이런 저런 책에서 한두 번 얼핏 본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했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Km.  걸어서 45일쯤 걸어야 하는 먼 길이다. 자전거를 타며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오월 중순부터 휴가를 쓰겠다고 한달 반 전인 삼월 말에 미리 휴가계를 냈다.  그 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까지 가는 일도 실현 가능한지 모르겠고,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외국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할까. 차라리 걷는 일이면 홀가분 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장충동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게는 그것도 늘 조마조마했다. 도로 위로 자동차들 속에 뒤섞여 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더 큰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나. 늘 이런 걱정을 안고 자전거를 타는 수준이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도 홍은동에 있는 자전거 숍까지 끌고가서 넣곤 하는 수준말이다.  

 

배워서 준비하자검색을 시작했다. 다행히 강동구청 앞에 있는 바이클리라는 숍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건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그러나 5월 중순에 휴가를 내기로 했는데그 전에 진행하는 4월 강좌는 이미 만원이었다. 바이클리 운영자분께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발송했다. 일단은 정원이 모두 찼으니 혹 결원이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신이 왔다. 그리고 며칠 뒤 등록했던 대학생이 여름방학으로 여행 계획을 미루면서 빈 자리가 생겼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5주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자전거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갈 때면, 새로운 세계론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가슴이 설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설레임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여행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의 장력을 조절과  트러블 대처법, 자전거의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등 꼭 여행이 아니라도 자전거에 대해 꼭 필요한 내용들로 알차게 짜인 교육이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엠티비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투어를 하시겠다는 건축사분,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놓고 티벳과 인도 네판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당하겠다는 서른 일곱살 학원강사병역특례 근무를 마치고 여행 기획하다 복학 전에 워킹홀리데이 신청 해 도쿄에서 일 자리를 잡아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후 취업을 준비하다가  젊었을 때  뭔가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국내 여행을 준비하다가 내친 김에  바이클리 알게 되었고, 친구와 둘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청년,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와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번에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던 젊은이. 

 

 

다소 무리가 되었지만, 자전거는 새로 장만했다. 제이미스오로라. 크로몰리 바디에 앞 뒤에 패니어를 장착할 수 있게 랙을 설치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자전거를 지참하고 오라는 말에 걱정이 앞서 집에 있던 출퇴근용 생활 자전거를 타고 강의가 시작되기 전 주 주말에 집에서부터 강동구청앞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본 적이 있다. 왕복 70Km 가량을 주행하고는 당장 그 다음주부터 강의를 듣는 일이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았다. 70km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과연 20여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일이 현실성 있는 계획인가?

 

내가 20대 젊은이도 아니고 미쳤지 무모한 일이야. 그냥 포기할까. 이런 망설임이 떠나기 전날까지 나를  전전반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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