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 5월 27일  저녁놀 캠핑장~ 츠키미산 어린이숲 (月見山 こどもの森) 

운행 87.6 km

새벽 4시쯤 잠에서 깼다. 꽤 깊은 산속에서 혼자였지만, 편히 잘 잔 편이다. 충전 안 한 걸 깨닫고 스마트폰스위치를 꺼놓았다. 스마트폰에 무척 많이 의존하고 있다. GPS, 사진, 메모... 충전을 안 한 채 하루를 시작하자면 막막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지만... 


취사장에 빨랫줄까지 걸어 놓고 텐트를 펼쳐 놓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어나 텐트도 걷고 짐을 꾸린 뒤 아침을 지어 먹었다. 가는 곳마다 새벽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빵을 굽고 이디야(EDIYA)에서 사온 분말 커피까지 곁들여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이 토스터는 한국에 돌아와 주로 맥주 안주로 오징어를 구울 때 잘 쓰고 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오늘 저녁에는 어딘가 숙소를 구해 정비를 해야겠다. 무로토 관광도 하고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일단 달리면 또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7시가 되기도 전에, 막  떠나려고 하는 순간...  캠프장 관리인이 미니 밴에 개를 싣고 올라왔다. 밤늦게 도착했고 전화번호가 없어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 캠핑장 사용료를 내겠다고 하니... 의례적으로 살짝 뭐 그냥 가도 좋다는 제스처를 한다. 그래도 캠핑을 했으니 돈을 내겠다고 하니... 그러면 1,000엔이라며 영수증까지 끊어주며...  샤워를 하겠냐고 묻는다. 간밤에 취사장 수도가에서 샤워...했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냥 괜찮다고 ... 화장실 쓰겠냐고... 썼으면 싶다고...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는 관리동 셔터를 올려준다. 


간밤에 아무리 찾아도 옥외에서는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를 찾을 수 없었기에... 충전 가능하냐? 물으니  관리동 사무실 안에 있는 콘센트를 안내해준다.  숙박계도 쓰라고 해서 주소를 한자와 가타가나로 로 써주니 한국사람이 한자를 어떻게 쓸 줄 아냐... 따로 공부했냐?고 묻는다.  한국도 한자를 쓴다. 다만 일본과 읽는 게 조금 다르다. 한국은 겨울이 춥냐? 아무래도 북쪽이니까 일본보다는 추운 것 같다. .. 이 근처에 한국 중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이 겨울에 훈련하러 온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본에는 쓰유(梅雨, 매화필 무렵에 오는 일본의 장마) 가 있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 ... 나도 비가 오면 어떻게 할까 고민중이다.



GPS로 쓰는 스마트폰과 카메라가 충전되기를 기다려며 관리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7시 30분, 짐을 챙겨 출발했다.  갈림길에서 캠핑장으로 내려오던 급경사 오르막은 천천히 끌고 올라갔다.

갈림길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정상에 있는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 보았다. 올라가 볼 수만 있다면 무로토곶에서 태평양을 향해 뻗어간 경치가 시원했을 텐데... 무슨 이유인지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었다.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파괴된 문명의 잔재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24번 사찰 호츠미사키지(最御崎寺). 어제 저녁 그냥 스쳐 지나간 호츠미사키지에 들러 참배를 했다.



어제 지나쳐온 천연동굴(미쿠라도우), 코보대사가 19살 때 수행했다는 그 곳과 관련 있는 절이라고 한다. 문화재를 전시한 미술관까지 있는 꽤 규모가 큰 절이다. 무로토미사키(곶)을 돈 기념으로 모처럼 납경을 받을까 싶었지만 납경첩을 절 아래 주차장에 세워둔 자전거에 두고 올라온 탓에 포기.



이 절에도 붙임바위가 있다. 아마도 우리 동네... 부암동 (付岩洞)도 바위에 돌을 붙여서 아이 갖기를 기원한 데서 동네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비슷한 염원들이 바위에 저렇게 굵고 선명한 흔적을 남겼으리라...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밤새 전화가 불통이라 걱정했다고... 경기도 광주에서 살다가 서울에 올라와 5년 가량 살던 집을 ... 오늘 팔기로 결심했다고... 일본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이 문제로 몇 번 통화를 했었다. 부동산 매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요즈음이었는데... 계속 집을 팔라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아마도 구기동 쪽으로 전철이 연결된다는 소문 때문에 뭔가 들썩이는 분위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올해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 내 빠듯한 월급으로 등록금과 학비 대는 일도 버거워져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최대한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집을 처분해 집 살 때 은행서 빌린 돈도 갚고 당분간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전세를 살자는 것이 내 의견이었고... 백사실 계곡 아래 홍제천변 꽤 호젓한 우리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내의 생각이었다... 좀처럼 결심을 못하더니 마음을 정했다고... " 좋아, 여보!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은행 빚도 없는 홀가분한 삶을 살아보자고..." 아내가 한 이 말이 계속 생각나 종일 피식 웃었다. 


절 입구 화장실 앞에 있는 벤치에서 헐거워진 킥스텐드 나사를 조이고 9시가 다 돼 다시 출발. 이제 다시 산을 내려간다.



어제 저녁... 암담한 마음으로 올라오던 오르막. 바다를 힐끗힐끗 보면서 오르기는 했지만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아침에 내려가면서 보자니 탁트인 해안선... 시원하다. 동일한 장소가 이렇게 달라보일 수 있구나...

 

내게 지금 절망스러운 일들이 있다면, 마음을 달리하고 뒤돌아 보기도 하자. 이렇게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니... 절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 순간 인생의 한 고빗사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곧 능선에 올라서게 되면 탁 트인 광경을 조망하게 될 수도 있겠지... 


목조주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무척 조용하고 깨끗한 시가지였는데...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지나친 게 아쉽다.



우리나라에 비해 ... 우체국이 여전히 많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몇 년 우표수집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이면 우체국에 가서 줄을 섰다가 사서 모으곤 했다. 광복30주년이니... 가봉의 봉고대통령 방한 기념이니...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기념 등...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취미와 결별했는데, 중학생이 되었으니 어쩐지 좀 더 어른스러운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진해에 살던 고종사촌 형이 서울에 놀러와서는 내 우표책을 부러워하니까 막내형이 선물로 주라고... 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알았어 가져! 하고는 빼곡하게 정리돼 있던 우표책 두 권을 통째로 줘버렸다.  


그 가운데 한 권은 빨간 표지에 갈피마다 유산지가 덮여있는 꽤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이 우표책을 갖고 싶어 몸살을 앓았다. 돈암동 로터리에 있던 우표가게에서 600원쯤에 팔던 것으로 기억한다. 라면이 하나에 20원 할  때였이니... 지금 시세로는 3만 원쯤 했을까? 내가 돈을 모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 구두를 닦아두면 기특하다고 10원이나 20원을 주시곤 했다. 손님들이 와서 용돈을 주는 일도 거의 없었고... 아버지께 망설이다가...우표책을 정말 갖고 싶다고 말씀드리니...아버지는... 내게, 한자를 1000자 외우면 사주시겠다고 했다... 10번씩 쓰면 그 글자는 외운 것으로 쳐주겠다고... 




1974년 여름방학 동안 외롭고도 고독하게...한자 쓰기를 했다.  천자문이나 그런 책이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동네 중학생 형들 한자 교과서를 빌려다가... 옥편을 찾아가면서 쓰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나는 700자 가량을 쓰고 외운 것 같다. 그랬는데도...아버지가 그 우표책을 사다주셨다. 그런 우표책을 고종사촌에게 다 넘기면서... 뭐랄까, 나는 유년시절과 결별하는 어떤 의식을 치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뭐 대단한 한자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때 한자투성이 인문교양서들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26번 절 곤고쵸지[金剛頂寺]나  27번 절 고노미네지(神峯寺)... 모두  높은 곳에 있다 하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 급경사에서는 걸어서 올라가야지... 오늘내일은 무리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를 일이다. 




25번 신쇼지(津照寺)까지는 지극히 평탄한 해변길을 따라 6.5km 쯤 달리면 된다.  절 앞에서 승용차로 순례를 하는 노 부부가 내게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88개 사찰 순례를 자전거로만 하느냐며... 대단하다고...   일흔 살쯤 돼 보이는 이들 부부는 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절들을 순례하고 있어... 평화롭고 다복해 보였다. 절 앞에 있는 상점(헨로노에키遍路)에서 물 2리터(260엔) 향 한 통(560엔)을 사고 갓 튀긴 고로케 (102엔)가 맛있어 보여서 사 먹었다.



신쇼지(津照寺) 는 바닷가 마을에 있는 절이라 ... 그런지... 풍랑 때문에 침몰 위기에 처한 어부들 앞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배를 안전하게 인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26번절 곤고쵸지(金剛頂寺)도 신쇼지(津照寺)에서 불과 3.8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1.5 km 가량은 해안도로에서 우측 마을로 꺾어진 뒤 이내 오르막이다. '고생총량의 법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 이제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다. 어차피 오늘 치러야 할 고생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절 아래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올라갔다.


 


이 절에는... 이 부근에 살던 상상 속의  괴물인 덴구 (天狗)가 사람들을 괴롭히자 코보대사가 덴구를 잡아서 타일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말라... 이르고 절에 자신의 상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것을 코보대사로 생각하고 덴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 섬과 절들에게서 코보대사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을 것 같다.


절에서 다시 해안도로로 내려오는데 조금씩 비가 뿌린다. 아직 채비가 부족한데... 마음이 바빠졌다. 인근 이사노사토라는 미찌노에끼 (道の駅)가 있다고 해 쉬어가려고 들렀더니 월요일은 정기 휴일이다. 바닷가에 야자수가 늘어선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다.  다행히 비는 그쳐있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바닷가를 향해 난 벤치에 앉아 마시고 있자니...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부부가 다가와 말을 건다. 해안도로에서 달리는 것을 보며 따라온 모양인지... 천진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익살스런 표정으로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해 보인다. 88 개 사찰 순례를 모두 자전거로 하냐고. 와 스고이데스네...  이런 인삿말을 나눈 뒤 ...  앉아서 주변 사진을 찍고 있자니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는 천엔짜리 지폐를 준다. 오세타이(接待)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 당황스러웠다.  


오세타이는(接待)는 ... 시코쿠섬에 자리 잡은 고유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순례자들을 코보대사와 함께 걷는 존재, 또는 코보대사의 현신이라고까지 여긴다. 순례자(오헨로御遍路)를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에게 시주를 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자기 집에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는 것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몇번 거절했는데도 '꼭 받아주세요.' 하는 말에...사양하기를 그만 두었다. 뜻밖의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남에게 무엇을 받는 일... 도움이든 친절이든 물건이든... 영 불편하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어떤 컴플렉스가 있는 게 아닐까 싶도록 ...그렇다. 그런 내게 아내는 우리 집 큰스님 다운 법어를 가끔 한다.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상대를 위하는 길이에요. '



뜻밖의 오세타이를 받은 뒤 ... 조금 더 달리다가 또 다른 휴식소 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 역시 어젯밤에 많이 지어둔 밥을 후리가케와 한국에서 싸온 김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렇게 화장실과 수도만 있다면... 충분히 하룻밤 묶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야밤에 도착해서 건물 옆에 조용히 텐트를 치고 간들...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일본이 신도(神道)의 나라라는 것을...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자연지형에는 이렇게 어김없이 작은 당집 같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나 당산나무에는 당집들이 있었다. 바위나 물가에 깃든 정령들을 경외하는 것... 이건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일본이든 우리나라든 자연물을 경외하는 것이... 전통적인 신앙일 텐데...박정희 정권 때 우리 고유 신앙은 전근대의 상징으로 지목 돼 대대적인 '청소'를 당하고 말았다. 종교가 근대 문명과 어긋나는 것은 기독교나 불교라고 해서 다를 게 없을 텐데...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 헌법은 자유롭게 믿고 가지라고 보장한다고 해놓았지만 관용되는 범위는 늘 한정돼 있다. 국가권력이나... 힘 있는 세력이 용인하는 수준까지만... 말이다. 


비는 잠깐 뿌리고 말 모양인지 구름이 잔뜩 끼긴 했지만 비가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내처 달리기로...



길가에 있는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사서 (6백엔) 패니어에 넣고 조금 더 달린 뒤 후도이와(不動岩)미찌노에끼 ()에 있는 편의점 스리에프에서 커피우유 하나를 사서 단팥빵과 함께 먹었다.


 27번 절 고노미네지(神峯寺) 고도가 높대서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뭔가 먹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초조감이 있었다. 



고노미네지(神峯寺)는 고노미네산(神峯山 596m) 정상 가까이에 있었다.  26번절 곤고쵸지(金剛頂寺)로부터 31km ... 해안도로로부터 3.4km 내륙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자전거로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른 뒤, 또다시 자전거를 세워 놓고... 옆으로 질러 나 있는 도보자 순례길로 절에 올랐다. 시계에 있는 고도계로는 해발 200m 지점이다. 절은 해발 500m 쯤에 있다.



길가에 마무시(マムシ) 주의라는 말이 써있어... 무슨 뜻인지...사전을 찾아보니... 살모사라고... 오르내리는 길에 뱀을 보지는 못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절마다 절 입구에 있는 인왕문에 ... 이렇게 간절한 마음들이 매달려 있다. 짚신도 있고...천 마리 학도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표한 것이겠지 싶은...  I ♡MOM ... 저 주머니를 보자니 콧끝이 시큰해졌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지만 나 역시 어머니와 온전히 이별하지 못했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베풀었던... 그 경지... 모든 상식과 이성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그 경지 ... 



155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본당과 대사당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 산에서 내려오는 약수가 있다. 



고노미네지노미즈(神峯寺水)라는 이 약수는 중병을 앓고 있는 여인의 꿈 속에 코보대사가 나타나 이 물을 마시라고 해...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나 역시 이 물을 양껏 마셨다.



오후 3시 반.  고노미네지노미즈(神峯寺) 참배를 마치고 출발. 이제 잠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직선거리 27km 떨어진 곳에 츠키미야마(月見山) 어린이 숲 (月見山こどもの森) 야영장을 보고 부지런히 패들을 밟는다. 조금 초조해질 만한 시간이다.  코도모노모리는 GPS 지도상으로는 바닷가 얕은 언덕 위에 있는 야영장인 것 같다.



오야마 미치노에키를 지나고...   야영장이 있다는 고난시(香南市)10km 앞둔 지점, 아키시(安芸市)에서 조금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마트 두 곳을 들러 계란 한 줄(150엔)과 돼지고기 212그램( 207엔) 우유 1리터 물 오징어 한 마리 (98엔) 양상추 반 통 (58엔) 미소라멘 5개 덕용포장 (120엔) 이렇게 장을 봤다. 뭔가 대단한 저녁을 지어 먹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해안으로 뻗은 자전거 길이 기가 막힌다.



때로는 바닷가 송림 속으로... 15km 가량 뻗어 있다고 한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지만... 길이 너무 좋아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고 달렸다. 오르막도 없고... 자동차길과는 완전히 구분된 자전거도로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일부러 자전거 전용 터널을 낸 것인지... 아니면 옛길을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로 만들고 자동차용 새 길을 뚫은 것인지... 아마도 후자 인 것 같다... 자동차 도로는 산 위로 넓게 뚫려 있었다.



바닷가 솔숲가에 있는 니시번 젠콘야도...는 잠겨 있었다. 만약... 누군가 열어둔 사람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야영을 하고 싶었지만... 굵은 철사로 문마다 다 묶인 채 굳게 잠겨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 자전거길을 달린 뒤 고난시 야스(夜須)에 도착한 것은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였다. 역은 해안공원 앞에 있었다. 역 앞에는 꽤 규모가 큰 미찌노에키도 있고... 그 너머에는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먹을 것도 충분하고 이제 야영장에 가서 텐트를 치고 편안한 야영을 하면 된다.



야스역을 지나쳐  2km쯤 달린 뒤 우측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인근에 자위대 훈련장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산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 오르막을 한 동안 올라야 했다. 산 뒤로 돌아들면서 분위기가 침침해지면서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을이나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공동묘지만 어둠속에...펼쳐져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숲길을 힘겹게 올라갔지만 역시 아무도 없다. 캠핑장이라고 표시된 지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들도 폐허는 아니지만 너무 낡았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자동 센서가 있는지 불이 밝혀져 있었다. 화장지도 구비돼 있고 청소도 말끔히 돼 있다. 어디를 가나 화장실이 이렇게 잘 관리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제 캠핑 한 저녁놀언덕 캠프장과는 사뭇 다른 어떤 음습한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게다가 태풍이라도 불어오려는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나무들이 진저리를 친다. 어두운 숲 속, 바람마저 요란하니 여간 심란하지 않았다. 




쉽게 짐을 풀지 못한 채 일단 관리동 앞에 작은 수도가 있길래... 그 앞에서 바람을 가린 채 버너를 피워 밥을 지었다. 이때까지도 잠을 이곳에서 자야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자전거에서 패니어와 랙팩을 풀지 않고... 버너와 식량들만 꺼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 때문에 그랬다. 



일단 밥을 짓고 물 오징어를 그대로 구어서 남은 밑반찬들과 함께 허겁지겁 먹었다. 계란을 한줄 다 삶아 챙겨 넣고... 여기다 짐을 풀어야 하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4,50미터쯤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전등 불빛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안내인이 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라이트를 켜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저쪽에서 뜻밖의 반응이 왔다. 천천히 다가오던  불빛이 황급히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다. 이게 뭔가... 이때부터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며칠 동안 자전거 핸들과 브레이크를 쥐고 달린 탓인지... 근육이 곱아져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잘 집을 수없는 상태가 돼 있었다. 이 때문에 헤드램프 스위치가 눌러지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이유인지... 라이트를 끈 채 뭔가 나를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불빛 아래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라이트는 눌러도 꺼지지도 않고...  그대로 주머니 속에 넣어 일단 불빛을  가렸다. 도저히 여기서 잠을 잘 수는 없겠다 싶었다. 서둘러 짐을 꾸렸다. 대부분 랙팩에 주섬주섬 담고.. 황급히 그 음산한 언덕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바닷가 야스(夜須) 미찌노에키로 도망치듯 달렸다. 이국의 낯선 행인들 뿐이지만 사람들, 불빛 속으로  들어오니 안도감이 느껴졌다. 나는 내게 전혀 겁이 없는줄 알았는데... 이상스레 음산 분위기가 나를 겁 먹게 만들었다.  

미치노에키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지만 이미 상점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해안도로로 거쳐온 마을에 여관이 있으면 가서 자야겠다 싶어 왔던 길을 되짚어 가보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야밤에 여관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미치노에키에 오헨로상들이 더러 노숙을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라도 해보자... 싶어 가보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자동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그곳에서 선뜻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미치노에키를 좌우로 돌아다니다가 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았다. 바닷가에는 길게 나무테크가 깔려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자전거 라이트를 비추고 해변길을 달리다보니 곳곳에 아베크족들이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진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다.  바로 라이트를 끄고... 해변에 있는 화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  지붕이 있는 취사장 아래 텐트를 쳤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지붕 아래 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야영이 허용된 곳인지... 그것도 알 길이 없다. 


도대체 그 산속의 불빛은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심란한 야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차분한 파도소리... 새벽녘에 몇 차례 비가 쏟아졌다. 지붕 아래 텐트를 친 것은 잘 선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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