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ㅡ5/29  고치시 도사지호텔~ 니요도강 (仁淀川)  가다 캠핑장(加田キャンプ場)

운행  62.54km



새벽에 깨어 창문을 열어보았지만 빗줄기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마음이 무겁다. 이왕 이리 된 거 느긋하게 떠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텔레비전 일기예보에서 고치 지역은 오후 3시 이후에 날이 개일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전이라도 빗발이 가늘어지면 떠나야지... 


아침 7시 호텔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니기리와 미소시루, 계란말이, 프랭크소시지, 김... 한쪽에 빵과 버터와 딸기잼...그리고 커피와 오차가 후식으로... 더 비싼 호텔들은 어떨지 몰라도... 어느 호텔이나 이렇게 나오는 것 같다. 출장 때 가본 후쿠오카나 도쿄의 비즈니스 호텔이나... 이번 여행에 몇 번 묵은 토요코인은 다 이랬다. 


어제 휴식소에서 비를 피하다가 만났던 와카야마 할아버지와 순례 22일째라며 다리를 절며 걷던 분 ... 모두 식당에서 만났다.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호텔이었는데...  어제. 그 상태에서 이 호텔을  못 만났다면 낭패를 당할 뻔 했다 싶었다.  


비를 맞기 싫어 최대한 늦장을 부리다 오전 10시 다 돼  출발했다.  갈비뼈에 금이 갔는지 눌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  떠나기 무섭게 랙팩을 위에 한 번 더 결속한 고무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크랭크에 휘감겼다.  빗발이 조금 가늘어지긴 했지만 길가에 선 채 비를  맞으면서 벗겨내느라 애를 먹었다. 단단히 꼬여들어간 고무줄을 가위로 한 가닥씩 잘라가며 떼어내야 했다. 기어를 풀고 텐션 가이드를 뒤로 밀면서 한 30분 애를 먹었다. 손아귀 근육이 곱아져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뭘 야무지게 집어서 당기지를 못한다. 일시적인 일이겠지만  일종의 장애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지도 방향이 거꾸로 돌아가 1km가량 반대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시 외곽, 유니클로와 대형 할인점 마루나가 그리고  다이소 등 거대한 쇼핑몰이 도열 해 있다. 대개 도시들이 다 그랬다. 


방금 '해먹은' 결속용  고무줄도 살 겸 다이소에 들렀다.식품은 여러 대형 쇼핑몰들이 혼전을 벌이고 있고,  동네의 가게들은 거의 다 소멸한 것 같다. 길목마다  편의점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고  다이소도 동네마다 들어서 있다. 20년 넘게 이른바 버블이 꺼진 뒤 경기침체가 지속돼온 일본은 다이소 세상이 된 것 같다. 다양한 생활용품과 간단한 식음료까지 안 파는 게 없다. 12번 쇼산지 가는 길에 산골 점방에서 시세에도 선블록을 600엔 주고 샀는데 이보다 용량도  더 큰 게 단 돈 100엔이다. 중국제인가 봤더니 메이드인 코리아다. 


31번 사찰 치꾸린지(竹林寺)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제 비를 뚫고 찾아가다 불의의 추락사고로 나를 좌절하게 만든  절. 자전거를 위한 길 안내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다시 터널을 건너고 강을 건넜다가 다시 넘어와 헤맸다. 세밀한 부분까지 내려받지 않아  지도에 등고선 표시가 안나타나는 게  문제였다.  길가에 서 있는 순찰차에 다가가 물어보니  골목길 끝 산 위로 올라가는 들머리를 가르쳐준다.  도보 순례자들은 촘촘히 붙어 있는 스티커를 따라가고  자동차에는 네비게이션이 있겠지만 자전거를 사정이 다르다. 


언덕길을 또다시 끌다 타다 하면서 올랐다. 만약 이 산이 아니라면 ...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이백미터쯤 남은 지점서 아까 만난 순찰차와 순경을 다시 만났다. '이 위에 치쿠린지가 있습니다.'  알려준다.  


치쿠린지(竹林寺)가 있는 산 이름이 고다이산(五臺山)이다. 724년...쇼무 천황이 중국에 있는 오대산을 닮은 산으로 이 산을 지정하고 스스로 문수보살을 새겨 절을 건립했다는 전설이 있다.   절 입구에 식물원도 있다.



 절에는 일부러 구경할 만한 고색창연한 일본식 정원이 잘 갖춰져 있다.  전통있는 절이라는 게 느껴진다.



 17세기 이후로... 이 절은 학문의 절로 인근 지역 신앙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험에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절이라고 한다. 



가늘게 흩뿌리는 빗속에 천천히 참배를 했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아니다. 돌이켜보면 여유는 있었다. 누가 강제하는 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날 안에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허둥대고 있었다.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초조감이 여전히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여행지에서마저 그렇게 허둥대는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기분은 참... 더럽다. 

절 위에 고치시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전망대가 있다고 했는데... 올라가보지 못했다. 오늘은 꼭 야영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자판기에서 비타음료 (150엔)를 사마시고 12:00 다시 출발.


32번 사찰 젠지부지(禅師峰寺)는 31번 주쿠린지로부터 6.8 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산을 내려와 좌회전을 한 뒤  강변 도로를 달리다 세번째 다리에서 우회전 해 다리를 건넌 뒤 2km 쯤 달려가 만나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있다.  바닷가에 있는 절이라고 방심하고 달리다가 또다시 업힐 구간을 만난다... 허를 찔린 기분.  


절 입구에는 대단히 규모가 큰 공동묘지가 함께 있다. 철죽 비슷한데,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회양목에 붉은 꽃이 피어있다. 원래는 꽃을 피우는 관목인데 추운나라에 와서는 꽃피우기를 거부해온 것인지...


허리가 땅에 닿을 듯... 거의 백세는 돼 보이는 꼬부랑 할머니가 쓰러질 듯 절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저 간절하고 절박한 걸음 앞에 나는 잠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악산 봉정암에 오르다 보면 그런 노파들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잿빛 옷들을 입고 기듯이 산을 향해 오르면서 연신 무엇인가 간절히 희구하던 그 분들의 표정도 그랬다. 노파들이 자신의 복락이나 극락행을 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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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전하는 차 뒷자석에만 오르면 '나무관세음보살' 부터 찾으시던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참배를 하고 계단을 내려 오는데, 후배 P의 부친상 소식이 문자메시지로 날아온다. 어차피 문상을 갈 처지가 아니니 집에 전화를 했다. 아내가 저녁에 조문하겠다고 한다. 다들 부모님들이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세대가 이렇게 갈리고 있는 것이다. 


젠지부지(禅師峰寺)는 토사만의 태평양이 조망되는 미네야마(峰山)위에 있어  미네지寺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코보 대사가 807년에 방문해 11면 관음보살상을 새겼다는 전설이 있다.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절로 여겨진다고 한다. 

1291년에 만들었다는 금강역사상은 국보라고... 




우리나라 동해안 강릉과 삼척 인근  해신당에는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처녀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20년 전에 ... 취재차 갔던 그 당집들에서... 나무로 깎은 남근을 제물로 올리며 제를 지내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누구를 모시고 무엇을 바치든... 풍어를 기원하고 재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은 같다.     



참배를 마치고나니 오후 1시 반. 계단을 내려와 절 주차장에 있는 휴식소에서 어제 산 빵과 주쿠린지에서 마시다 남겨온 비타음료와 함께 먹으며 잠시 쉬었다. 아까 계단을 기듯이 올라가던 할머니를 모시고 온 택시 기사가 다가와 관심을 나타내며 전부 자전거로 도는 것이냐고...대단하다고 ... 그러면서 일주일 전 23번 야쿠오지에서 어떤 예쁜 여자(かわい 女)가 당신처럼 자전거를 타고 순례를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호오... 그래요?  여자도 자전거 순례를 하는구나... 과연 내가 겪은 고난에 찬 과정을 그 여자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것도 혼자서... 싶었다. 


계속 비가 내리다 그치다 한다 ...  정말 쓰유(梅雨)가 시작되기라 한 것인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30m 이상 고공에 떠있는 편도 1차선 다리를 건너야 했다. 우라도대교(浦戶大橋).  멋모르고 도로를 따라 올라갔는데 어느샌가 바다를 건너고 있다. 너무 무서웠다 까마득한 바다 위를 달리는 것도, 뒤에서 굉음을 내며 다가와 스치듯이 지나쳐가는 화물차들도 ...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난간에 철망이 쳐있어 심리적으로 조금 위로가 되었다.



다리를 건너면서 내리막길로 해안길에 내려선 후 바다를 끼고 3~4km 달린 뒤


33 번  셋케이지(雪蹊寺)까지는  10.2 km.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굳이 무시무시한 다리를 넘지 않고... 우측으로 조금만 더 가면 무료로 운행하는 도선장이 있었다. 배에 실려 직진할 수 있는 것을 다리를 건너 우회한 것이다. 



셋케이지는  다행히 평지에 있었다. 날이 개고 잠시 해도 났다.


16세기 후반, 이 절에서 수행하던 겟포우오쇼(月峰和尙)의 귀에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운율에 맞춰 짓는 일본의 옛 시가인 와가(和歌)의 후반부 구절만 되풀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겟포우화상은 이 귀신이 시를 짓는 게 서툴러 이를 한탄하느라 성불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뒷구절의 댓구가 될 앞부분을 지어주었더니... 울음소리가 그치고 귀신도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단다. 뭐 그런 일로... 울고불고... 남들에게 민폐를 끼친단 말인가... 소심한 귀신 같으니라고... 



 

참배를 바치고 내려오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진다. 절 입구 무인판매대에서 귤 한 봉다리를 200엔 주고 샀다. 껍질이 두껍고 씨가 있어 골라내야 하지만 달고 시원해서 음료를 사 마시는 것보다 ... 여러모로 좋았다. 


세케이지에서 해안도로쪽으로 나오다보면 34 번사찰 타네마지(種間寺)까지 이정표가 있다. 자동차 3.6km로 표시된 거리가  내가 달려야 할 길이다. 



34 번사찰 타네마지(種間寺)도 평지 길가에 있었다. 



코보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며 ...쌀, 보리, 좁쌀, 수수, 콩 등 5곡의 종자를 가져와 이 절에 뿌려서 채종했다는 전설이 있다. 절의 이름도 그래서타네마지(種間寺)라고...  


 577년에 이 절을 지을 때는 백제에서 화가 목수 등 장인들이 와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절이 완공된 뒤 귀국하려고 할 때 풍랑이 일었는데... 절에서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 뒤에 무사히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35번  기오타케지(清瀧寺) 까지는 로커스 GPS가 가리키는 방향과 교통표지판, 핸로미찌 스티커가 가리키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일단 도로표지판과 GPS를 보면서 달렸다.  


고즈넉한 동네였다. 오가는 차도 없고 비에 젖은 5월의 신록이 뿜어내는 숲의 고요.  

하천이 마을을 관통하는 동네를 지나 56번 국도를 한참 달린 뒤 니요도가와 (仁淀川) 강변에서 토사시(土佐市)시의 제법 번화한 시가지를 지나게 된다. 



길가에 있는 모스버거 매장을 지나...  갈림길에 휴식소가 보이길래 잠시 앉아 쉬면서 아침에 싸놓은 주먹밥을 먹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자전거로 순례하냐? 대단하다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더니 35번 기오타케지(清瀧寺)는 저쪽으로 가는데 알고 있냐며 살짝 지나친 갈림길에서 뒤쪽으로 뻗은 길을 가리킨다. 네에? 자세히 살펴보니 교차로 가로등에 핸로미찌 스티커가 붙어있다.  


더 늦으면 안되겠다 싶어 짐을 꾸려 떠나며 보니까...아까 그 아주머니가 길 건너편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 말 이해했어요? 괜찮겠어요? "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참 친절하고 사려 깊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이 많고 친절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는데... 싶었다.  


35번 기오타케지(清瀧寺) 역시 언덕 위에 있었다. 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통과한 뒤 산 위로 올라야 한다. 산 입구에는 어둑어둑 음산한 묘지가 있다. 땀 깨나 쏟으며 경사면을 한참 오른 뒤 기오타케지까지 500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맥이 풀렸다. 마지막 100m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핸들바백만 들고 올라 갔다. 시가지가 다 조망되는 자리다. 



코보대사가 금강장으로 대지를 찌르니 푸른 폭포가 생겼다는 전설에서 이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참배하고 하산하다 보니 오후 5시 시보가 울려퍼진다. 안개낀 밤의 데이트... 차임벨 연주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니... 애수가 밀려온다. 낡은 표현일지라도 그냥 애수(哀愁)라고 적고 싶은 그런 쓸쓸함. 동네마다 매 시각 시보를 울리는 건 같은데, 어떤 곳은 사이렌을 울리고...어떤 곳은 학교에서나 쓰는 딩동뎅동...실로폰연주를, 또 이렇게 귀에 익은 경음악들을 트는 곳도 있다. 담당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모양이다. 아무튼 이 동네 오후 5시 시보는 안개낀 밤의 데이트였다. 나는 언덕을 내려온 뒤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허전한 가슴을 추슬러야 했다.   


니요도가와(仁淀川) 강변에 있다는 캠프장까지는  직선거리로 4km 떨어져 있다고 GPS가 가리킨다. 아무리 멀어도 7km는 넘지않겠지... 4~50분 안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상은 접어두고 부지런히 패달을 밟았다. 


도중에 편의점 스리에프에 쌀이 있나 싶어 들어갔으나 2kg들이만 있어 포기했다. 한끼에 200남짓 먹을 텐데 내내 무게를 달고 다닐 게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대신 순례자코스에 있는 사찰 주변 숙박업소와 식당 등을 안내한 가이드북, 우유 1리터, 주스, 식빵 등을 샀다. 퇴근길 차량들이 이미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편의점에서 나와 강을 건너... 좌회전... 이제 캠프장까지 직선 거리는 2km. 강변을 따라 달리면 된다.  다시 빗발이 굵어진다. 마음이 바빠졌다. 가다(加田)캠프장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강변으로 내려가기 전 둔덕 위에 있는 화장실과 강변에 수도꼭지 대여섯 개 달린 급수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차들 강변에서 플라이낚시를 하는 이들이 세워둔 서너 대의 차량.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텐트도 한 동 세워져 있다. 


급수대에서 50m쯤 떨어진 지점에 텐트를 세우기로 했다. 텐트를 조립하고 있는데 작은 트럭이 다가왔다. 


운전석에서 앉은 채 순박해보이는 아저씨가 말을 건다. "기서 캠핑 할 거냐?" "네 캠핑해도 되나요? "  "됩니다. 바닥에 물이 있으니 텐트를 뒤쪽으로 옮겨요." 그런데 그가 말한 지점은 약간 움푹 패인 탓에 낙엽들이 쌓여있지만 물 구덩이였다. 캠프장 관리인인가 ?  싶었지만 그렇게 물어보기도 뭐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그가 차에서 내려 자기가 지정한 지점을 확인하더니... 미안하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차를 몰고 떠났던 그가 잠시 뒤 다시 왔다. 


"술 마시냐?" 이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캠핑장에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소린지... "조금..." 이렇게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 동네 토산품이라며 일본 술(사케) 한 팩을 주면서 "푹 자라"며 두 손을 포개 얼굴옆에 대며 자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귀엽다. 그리고 충분히 합법적인 야영을 하게 됐다 싶으니 긴장도 풀리고 마음이 푸근해졌다. 






비 안개가 자욱한 강변으로 가끔 왜가리같은 물새들이 느릿느릿 날아다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 이제 부러울 게 없는 밤을 보내면 된다. 다만, 쌀이 떨어진 게 허전했다. 첫날 다카마쓰역에 있는 A마트에서 산 1Kg을 다 먹은 것이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어지는 법이니라" 어머니가 내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고달프게 걷는 사람은  말만 타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싶지만 말을 타고 나면, 앞에서 이끌어줄 견마꾼(牽馬 -)마저 바라게 된다는 말인데, 나는 대학 2학년 때인가 어머니가 이 말씀을 하실 때  말뜻을 확실히 듣지 못했다. '견마가 아니라 경마가 아닐까? 천천히 걷던 사람이 말을 타면 더 빨리 경마도 하고 싶어진다는 말인가 보다.'  이렇게 지레 짐작을 했다.  


늘 사는 게 아슬아슬 했지만, 1985년에 셋째 형을 그나마 몇 백만 원짜리 전세방을 구해 장가보낸 뒤 서울에 남은 어머니와 나는 갈 곳이 막연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단칸방을 구하러 아파트단지로 개발 되기 이전의 방학동, 의정부 등으로 버스를 타고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 내가 방을 구하면 뭐도 필요하고 뭐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까...그런 말씀을 하셨다.  경마가 아니라 이끌 견(牽)... 견마였다는 것은 한참 지난 뒤에 알았다. 소설에 그 속담이 나오길래 사전을 찾아보니... 그렇게 나와 있었다. 


텐트를 다 설치하고나서  짐을 정리하고 난 뒤 빈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동네에 가보았다.  다행히 골목 안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초로의  아주머니께 쌀이 있는가 물었더니  5kg들이밖에 없다고... 얼마나 원하냐고 ...  1kg이면 좋겠다고 하니까...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가게 안쪽 살림집에 있는 남편에서 허락을 받는다. 도시에서 만나던 ...어딘지 약하고 외로워보이는 일본 남자들과 달리.... 가장의 권위가 여전히 등등해 보이는 아저씨가 아뭇소리 없이 5kg 쌀푸대를 들고 나와 저울에다 1kg이 훌쩍 넘게 달아서 비닐 봉투에 담아준다. 고마웠다. 



물에 삶아 껍질째 먹는 줄콩이 있길래 달라고 하니 ... 먹을 줄 아는지 묻는다. 염려 말라고 달라고... 바나나 한 송이, 정어리통조림까지 먹을 것을 조금 더 샀다. 주판으로 계산하더니.1500엔인데.1000엔만 받겠다고... 또 잠시 실랑이를 했다. 그럴 수 없다고 1500엔을 내겠다고 ...  한사코 500엔은 오셋타이(接待)라고 하신다. 콧끝이 찡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게를 나와 자전거에 매달고 온 빈 패니어에 주섬주섬 장본 것들을 넣고 있으니  따라나와 단팥빵 하나를 쥐어주고는 내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하신다. 


이제 저녁은 과식을 할 지경이 되었다. 이틀 전...츠키미산 어린이숲 (月見山 こどもの森) 에서 구워 먹으려다가 갑자기 탈출하는 바람에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닌 돼지고기 200g.  호텔에서 버릴까 하다가 그럴 수는 없지 싶어... 끓는 물에 데쳐서 후추를 뿌려 꽁꽁 싸서 가지고 왔는데 ... 다행히 상한 것 같지는 않아 ... 토스터에 구웠다.  



정어리와 남은 김치... 가게에서 사가지고 줄콩을  반 넣어 찌개를 끓였다. 나머지 콩은 데쳐서 그냥 먹었다. 관리인 아저씨가 준 사케까지...  



게다가 캠핑장은 무료다. 다만 샤워시설이나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는 찾지 못했다.

  


뿌듯한 저녁을 ...다 먹고.. 쉬다가... 밤 10시가 넘어, 더 이상 통행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급수대 앞에 가서 코펠로 물을 떠 샤워를 했다. 급수 대 옆 가로등 스위치를  끄니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일본에 와서 노천에서 너무 자주 벗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캠핑장을 전세 낸 날이다.  



지출:  다이소 630엔 (반다나 105 선블륙 105 결속 파소토 105 전지 2종 210 케이블타이 105) 스리에프 1453(가이드북 880 우유 1L218 주스 500ml 157, 식빵 198)  무인판매대 귤(200엔)
가다 캠핑장  加田キャンプ場 인근 동네가게 1000엔 ( 쌀 1kg 바나나, 정어리통조림, 풋콩1 빵1) 

정종1캔 ㅡ 오셋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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