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8일, 화요일. 고난시(香南市)  야스(夜須) 역 인근 

야시파크 해변~ 고치시 도사지(土佐路)호텔   
주행거리:  35.92 km

새벽에 돌풍이 불고 비가 쏟아졌다. 텐트가 흔들릴 때마다 설핏 잠이 깼지만 그냥 잤다. 
그 수밖에는 없었다. 텐트 위에 튼튼한 지붕이 있고 텐트도 비바람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4시 반에 일어나 텐트를 정리했다.  간간히 비가 뿌리는데도 다섯 시부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자전거에 짐을 매달고 있는 나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바삐 걸었다. 날이 밝으면서 비는 그쳤다.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방심한 채 잠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를 두고 어린시절 친구들은 '잔 정이 없다'고 했다. 너무 깔끔을 떤다는 말일 것이다. 

대학 1,2학년 때 나는 서울에 홀라 남겨진 채 수원 못 미친 곳 부곡역 시골 집에 방을 하나 세 얻어 살았다.

역에서부터 캄캄한 시골길을 이십 분쯤 걸어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외딴집이었다. 

수원가는 전철은 종로5가에서 열한 시도 되기 전에 끊겼다.

 

스무 살의 우리들은 출신 고등학교에서 가까이에 있는 대학로에서 자주 어울렸다. 

튀김이나 동태찌게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며 합창을 하고... 

그 시절 대학생들이 많이 가던 저렴한 술집들의 풍경이 그랬다. 

 이 테이블에서 목청껏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면 옆 테이블에서 '진주난봉가'를 합창하고 

이렇게 돌림노래를 하듯이 노래를 주고받다가 '5월의 노래'를 다 함께 합창하는 식의...

 

나는 술을 마시면서 늘 막차 시간을 초조하게 확인하다가 열시 반이 넘으면 벌떡 일어나 

전절을 타러 달려가곤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내가 못 마땅하다고 했다. 

어울려서 같이 토하고, 등 두드려주고...또 친구집에 몰려가 뒤엉켜 자면서 깊은 정을 나누지 않고...

 발딱 일어나 기어이 막차를 타고야 마는 내게 '새끼가 잔 정이 없어...' 이런 말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나는 수원 전철 막차를 타고 가 캄캄한 부곡역 플래트포옴에 내려 밤길을 걸어서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는 자취방에 걸어들어가야만 안도감에 마음이 놓이곤 했다. 

자정무렵 부곡역에 내려면... 호숫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자욱한 날이 많았다.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려 있는 동안도 좋았지만... 휘엉청 밝은 달 아래 

인적 끊긴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가던 고즈넉한 그 정취가 좋았다.



아침 6시.  야스(夜須) 역 미찌노에키()에 나가보았다. 

미찌노에키마다 있는 안내센터 문에 9시반에문을 연다고 ... 와이파이도 가능하다고 써있었지만 

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야스 역에서 전철로 네 정거장 떨어진 곳에 호텔 온천이 있다고 해 

가보기로 했다. 예정에 없는 곳에서 겨우 야영은 한 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잠을 잤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쳐 잠도 설쳤다. 온천에라도 들러 씻고 피로를 풀어야 겠다 싶었다.




마침 28번 사찰 다이이치지 (大日寺)가는 길이다. 호텔 마당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프런트에 가서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니 10시부터 문을 연다고... 호텔온천을 무슨 10부터 연단 말인가. 

호텔은 일박에 5천240엔,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라고 했다. 호텔 앞에 순례자들을 위한 

무료 족탕 휴게소가 있다.지역농산물 판매장 앞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설을 해놓았는데,  

이곳 역시 닫혀있다. 아쉽지만 계속 길을 가는 수밖에 ...



당장에 쉴 곳이 없다.

28번 다이이치지 (大日寺고난시(香南市) ...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55번 국도에서 내륙쪽으로  4,5km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등교시간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무리지어 달리고 있다.  

남여를 불문하고  대개들 교복에 흰 핼멧을 쓰고 씩씩하게들 달린다.

속 사정은 어떤지 몰라도 아이들은 유쾌하고 건강해 보인다.  

 

 

 

아침8시반 다이이치지 참배를 마쳤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순례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 절에서는 나를 이 순례길로 나서게 한 친구 W를 생각하며 향을 살랐다.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을 두고 갑자기 죽어버린 친구.  80년대에 그는 도무지 망설임이나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친구였다. 졸업을 한 뒤에도 그랬다. 그 때문에 두 번 구속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어느 순간에 '변혁'은 낡은 추상이 되었다. 그의 비타협적인 강직성은 때로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다들 속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약게 처신하면서 제 갈 길을 갔는데 ... 

그는 여전히 원칙에 대해 말했다. 함께 하던 후배들에게도 그는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선배가 되어 있었다. 



사진학과 출신인 그는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사진가로 사는 일을 잠시 유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도시살이에 점차 지쳐갔다. 귀농운동본부 귀농학교를 마치고... 

2000년대에 되살린 [뿌리깊은나무]라고 이야기되던 잡지에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잡지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폐간 됐다. 그는 거창군으로 귀농을 했다. ]

그러나 농사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끝없이 밖으로 나돌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시들어 가던 시골 초등학교에 교장공모제를 통해 진보적인 교장을 모시겠다고... 

경남 교육청 앞에서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는 암으로 쓰러진 뒤 불과 두어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현대의학의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죽기 전날까지 호기롭게 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길 수 있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 했었다. 

그가 항암치료를 받아들였다면 ... 어땠을까. 글쎄... 그의 삶이 수십 년 연장되는 반전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그는 암 투병마저도 자기답게 하다가... 떠나버렸다.    



29번고쿠분지(国分寺)까지는 6km 가량 떨어져 있다. 모내기를 마친 드넓은 들판과 마을 지나게 된다.
들판을 달리면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려있다. 

핸로미찌 스티커를 보면서...


도보순례자(아루키 헨로 遍路)들은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십이삼 일 이상 지난 탓에 

대개들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신록이 돋아나고...꽃들이 피어나는 봄...  


들판을 가로지라다보니 서산묘원이라는 묘지 옆에  젠콘야도(善根宿)가 있다. 

다다미 두 장과 소파 화장실이 있다.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 잠시 앉아서 쉬며 식빵 두 쪽에 딸기잼 발라 먹고 

사람들이 남겨놓은 기록을 들춰보았다.



어젯밤과 같이 비바람 몰아치는 밤이나...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밤... 

도보 순례자들에게 이런 공간은 얼마나 안락한 휴식을 주었겠는가.



순례자들에게 주는 교훈들도 유인물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살생을 하지말라거나... 음란한 마음을 갖지 말라거나... 이간질을 하지 말고...화를 내지 말라거나... 하는 말들...

 너무 뻔한 말이긴 하지만... 

순례자 매너에 대해서는... 오세타이(接待)를 베푸는 것은 수행을 전제로  것이니 

미혹을 갖지말라는 말...   남의 선의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바른지... 

나는 여전히 서툴다. 이들도 그런 착오가 서로들 있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병적일 정도로 예민한 선배가 한 사람 있다. 그는 내게...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언제 하차벨을 눌러야 할지 늘 고민스럽다. 

정류장을 떠나자마자 누르면 운전기사가 내가 지난 정거장에 못내린 사람으로 착각할 것 같고... 

너무 늦게 누르면,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미처 준비없이 멈추게 돼 성가시게 될까봐...'  

 

이 젠콘야도는 이 묘역을 운영하는 이가 순례자를 위해 베풀어 놓은 오세타이인 모양이다. 

동네 들판 한 가운데 묘원이 있는 것도 우리와는 조금 다른 정서고... 순례자들을 수행의 동지로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베푸는 태도도... 이 지역의 특색인 것 같다.



 순례자가 남겨놓은 기록에 보니... 1년에 한 번 시코쿠병원에 입원한다는 말...이 눈길을 끈다. 

내게도 일년에 서너 번 찾아가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이... 매주 한 번은 걷게 되는 집 근처 북한산이  

병원이었구나 싶었다.


헨로미찌 스티커를 따라가다보니... 이렇게 도로를 벗어나 들판을 가로질러 논두렁을 지나기도 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29번고쿠분지(国分寺)까지 11km 들판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길이었다. 

고쿠분지는 인왕문부터 삼나무들이 곧게 뻗어있어 꽤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그 절에서는 떠올린 사람은.. 우리 6남매의 맏이었던 큰형이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형에게 그 운명은 버거운 것이었다. 

스스로도 그런 삶이 힘겨웠을 것이다. 오히려 집안의 기둥이 된 사람은 둘째 형이었다.  

부산에서 성장하다 사춘기를 갓 넘겨 서울에 올라온 뒤로... 타향살이도 힘겨웠을 것이다. 

대학 진학도 실패하고, 변변한 직업을 갖지도 못한 채 늘 집안 어른들로부터 면박을 당해야 했다. 

 

형은 신혼이던 1981년, 경산열차사고를 당했다. 부산 처가에 신행을 다녀오다  경산역에서 

추돌당한 통일호 열차 맨 마지막칸에 타고 있었다. 벗어둔 양복 재킷이 사망자 옆에 

떨어지는 바람에... 형과 형수는 뉴스 속보 사망자 명단에 발표가 됐었다. 

어머니가 실신을 하고... 그날 밤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다행히 큰형 부부는 부상을 당한 대구 시내 파티마 병원에 후송돼 있었다.  


그 사고를 겪은 뒤 형수는 뱃속에 있던 큰 조카를 출산했고, 얼마 뒤 부산으로 이주해 

형님은 버스회사 직원이 된 뒤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실하게 일했다. 

형편은 빠듯했지만 조카들도 잘 자라주었고...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때쯤... 형은 허망하게도 불과 육십에 죽고 말았다. 

 

고쿠분지에서 사른 향은 형을 위한 것이었다.


고쿠분지를 나설 때부터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고... 

뺨을 때리는 빗줄기를 감수하면서 ... 자전거를 타는 일이 쉽지 않았다.  



 

30번 센라쿠지(善楽寺)까지는 서쪽으로 들판과 산기슭으로 헨로미찌가 이어져 있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져 길가에 있는 남의집 차고 겸 농기구 보관소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한 30분쯤 망연자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소형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려다가...

나를 보고는 그냥 안심하라면서 집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뒤 따라 들어오던  할아버지도 괜찮다며 안심라는 손짓을 하고 뒤따라 들어갔다.

 

10년 동안 경기도 광주군... 끄트머리 시골집에 살 때,  우리집은 산 위 막다른 지점에 있었다. 

차들이 성묘를 위해 산을 올라오거나  길을 잘못 든 때문에 산으로 올라왔다가 차를 돌리려고, 

한동안 울타리가 없던 우리집 마당 안에 들어와 차를 돌려 나가고 어떤 이들은 마당에 있던 수도를 마음대로 틀어놓고,  아무데나 오줌을 누고  담배 꽁초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화가 치 밀어 오르곤했다. 왜 그리 여유가 없었을까. 

시코쿠 사람들의 한결갈은 친절한 태도를 보면서 마흔 살 전후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빗줄기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길을 나섰다. 작은 언던을 오르는 도중에 공장 축대 아래 비를 

가릴 수 있는 휴식소가 있었다.

신문을 오려서 붙여둔 것은 보니...공장에서 헨로들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간식이 들어 있다고 쓰여진 통도 열어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 달린 전선이

 하나 연결돼 있었다.


다리는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멈추고 설 때 관성에 출렁이는 자전거 패들이 맨 다리에 자잘한 상처를 

많이 냈다. 비를 피하고 있자니  두 사람 도보순례자들이 들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다 과묵하다. 한 분은 66번 사찰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돌고 있는데 22일 째라고 했는데 

다리를 많이 절었다. 또 한 분은 고야산이 있는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와  6일째 걷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은 구간을 끊어서 걷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은 복장도 순례자들의 정장이랄 수 있는 상하의를 

모두 갖춰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인상도 여간 강직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마냥 앉아 있을 수 없어 길을 나섰다. 헨로 스터커를 보고 따라 갔더니 비탈 경사가 심한 공동묘지를 통과하게 돼 있었다. 절은 이 묘지 아래 있었다.



30번 센라쿠지(善楽寺)까지는 6.9km였다. 긴 거리가 아닌데 비를 피하고 머뭇거리다보니 정오가 다 됐다

30번이 되었으므로 납경도 받았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비가 그렇게 만들었다. 뭔가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고치시(高知市)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센라쿠지 인근에 대형 할인점이 보이길래 들어가 옷도 말릴 겸 점심을 시켜 먹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우동덴뿌라정식... 500엔. 소박하다.



길가 작은 전차... 무심코 지나려다 보니...'헌법9조호' 라고 쓰여있는 게 눈길을 끈다.

일본의 우경화... 인접국가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차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이른바 

'평화헌법'을 제정하고 군대의 보유와 교전 권한을 포기한다고 명시한 헌법 9조를 지금껏 지켜왔다.

 


20년 넘게 경기침체를 겪은 일본 국민들의 정서는... 최근 급격하게 국수적, 보수적인 경향을 띠어왔고.

 아베 같은 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겠지...  일본 아베정권은 ... 

헌법 개정 요건을 완화한 뒤에... 순차적으로 헌법 9조를 바꾸고 군사대국으로 탈바꿈 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내밀고 있다. 아마도 이 전차를 운행하는 노조가 헌법9조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성격이라 평화헌법 수호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을 여행하는 동안 ... 일본사람들로부터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북이 은하수 3호를 발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북한의 위협을 조금 과장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재무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 같았다.

 

"북한(기타조센北朝鮮)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같은 대립 상태를 끝내고 서로 사이좋게 오고가며 

평화롭게 지내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대답을 하면...일본 사람들의 표정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그들은 내가 뭔가 화끈하고 호전적인 말을 해주기를 기대했었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비는 잦아들지 않았다. 점점 더 거세졌다. 그래도 오후 2시도 되기 전이니 일단은 

좀 더 달리기로 했다. 31번 치쿠린지(竹林寺)까지는 8.4km 길도 시내의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일단 거기까지 달린 뒤에 잠자리를 고민하기로 했다.  



그런데...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방수 팩에 감아서 매단GPS를 확인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지쿠린지(竹林寺) 주변 도로들은 길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무시무시한 터널을 두 번이나 

오락가락 한 뒤에... 폭우가 쏟아지는 강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산 위로 올라가는 진입로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오후 4시가 지나면서부터는 마음도 초조해졌다. 침착하자.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을 하고... 헨로미찌 스티커가 있었던 시내쪽으로 다시 돌아가 일단 스티커를 

따라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사고가 생겼다.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좁은 골목길을 꺾고 꺽으며... 이게 아닌데...또 자전거가 갈 수 없는 산길로 

안내하는가? 의구심을 가지면서... 골목길을 꺾어드는 순간 자전거가 미끄러지면서 나는 어이없게도 

노변 배수로로 추락했다. 떨어지면서 가슴을 부딪쳤는데, 충격을 받았다.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이 오고 가슴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제기랄... 운행을 못 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을까? ...그 잠시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른 뒤 몸을 좌우로 틀어보았다. 

움직일 수 있었다. 자전거를 다시 세우고 큰 고장이 없는지 살핀 뒤에... 오던 길을 뒤돌아...

자전거를 끌며 걸어서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운행이고 뭐고 일단 대피가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무작정 빌딩들이 있던 시내 방향으로 달려보았다. 

퍼붓는 비를 뚫고 호텔이 있을 만한 곳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비지니스호텔 도사지(土佐路).  빗속에서 다행히 이 호텔을 발견하고 무조건 방이 있나 물어보았다. 

있다고... 일박에 4천300엔. 저렴하다. 아침도 준다고... 시설은 낡았다.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패니어를 모두 풀어 방으로 옮기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호텔이미지는 인터넷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빗속에서 사진 찍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난 저녁...야심차게 구워먹으려다 그냥 가방 속에 가지고 온 날 것 그대로의 돼지고기,  

도시락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찬밥들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했다. 고기는 호텔에서 조리를 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도시락에 챙겨두었다. 


저녁때까지 쉬면서 정신을 차린 뒤... 인근에 있는 할인점에 가서 장을 봐가지고 들어왔다. 

캔맥주500밀리리터(283엔) 즉석카레 (88엔) 우유 (138엔) 모리나가 카라멜(158) 쵸코 쿠키 (99엔) 

이런 것들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카레를 데워 찬밥에 부어 저녁을 먹고... 온탕에서 한참 동안 몸을 데운 뒤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것... 

창 밖에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빨래를 해서 방안에 줄을 매고 빨래를 널어 말렸다. 내일 아침... 어떻게 될 것인지... 일단 잠을 자기로...

 


호텔 4300엔 점심 500엔  빵196엔 ... 저녁에 장 본 것들...캔맥주500밀리리터(283엔) 

즉석카레 (88엔) 우유 (138엔) 모리나가 카라멜(158) 쵸코 쿠키 (99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