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참 힘겨웠다.
견디기 힘들만큼 그랬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일들이 계속되었다.
내처 걷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이 위안을 주랴.

상명대 삼거리 홍지문에서 탕춘대 성을 따라 인왕산을 오른다... 인왕산을 다 걷고











무악재로 내려선 뒤, 다시 안산을 넘어
내처 걷다보면



안산 능선길은 연세대학교정으로 잦아든다. 1981년 연대 백일장에 왔던 기억이 난다. 시절이 그랬기 때문이겠지... 백일장 출품은 하지도 않고, 연대 탈반인지 농악대인지... 대학생들에 이끌려 만추의 숲속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그만 취해버렸던 청송대.

1990년 범민족대회때 함성이 뜨겁던 그 교정은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로 예전의 정취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월은 가고 ... 추억은 남았나?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악 20161019  (0) 2016.10.27
겨울 지리산 2010년  (0) 2010.12.24
서울성곽 걷기 2 (혜화문~창의문)  (0) 2010.11.27
서울성곽 걷기1 ( 창의문~ 혜화문)  (0) 2010.11.24
밤길  (0) 2010.10.18

 혜화동고개에서 일단 성벽은 끊긴다. 길을 건너 다시 들머리를 찾아야 한다.
삼선교,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들던 추억의 나폴레옹제과가 서있던 개천은 뜯겨 복원됐다. 나폴레옹제과는 성북동 입구로 옮겨가 있다. .  

하천복개가 박정희시대의 트렌드였다면, 뜯어서 인테리어 하듯이 꾸미는 게 이명박시대의 흐름인 모양이다. 어릴 때 늘 보던 낡은 주상복합아파트들이 사라지고 나니 개방감에 시원하기는 하다.


혜화문 맞는편 혜화성당 뒷담 쪽으로 성벽주변으로 나무 계단과 데크공사를 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조만간 고개에서 바로 성벽으로 길이 이어질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은 하천변에서 이 들머리를 찾아 성벽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냥 삼선교 달동네 뒤에 성벽으로 남아있을 때에야 누가 일부러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비교적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성벽이 남아있다. 멀리 인수봉까지 북한산 전경을 볼 수 있다. 

 삼선교 고개 위, 아마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동네겠지만.... 아직 옛 동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담배를 팔던 구멍가게였을 텐데, 행복은 무엇일까. 상호였을까. 행복상회. 이미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난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꼭 저렇게 생긴 담배가게로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60원짜리 신탄진 담배나 아침 찬으로 쓸 콩나물을 사러...

영화 '행복'을 떠올렸다. 도시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부나비처럼 살던 황정민이 병에 걸려 산속 요양원에 들어가... 약한 몸때문에 원래 그곳에서 살던 무공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지극정성으로 남자를 간호하고 둘은 살림을 차린다. 꿈같은 행복은 잠시. 남자는 권태에 빠져 도시를 기웃거린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는 말...
신문에 난 기사에 노후자금이 적어도 6억원은 필요하다는 내용을 보면서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여자는 '오늘처럼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도대체 6억원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넌 세상을 몰라' 남자는 물정모르는 여자에게 권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여자를 버려둔 채 다시 도시로 간다. 당연히 건강은 나빠진다. 그렇다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왔지만 여자는 이미 죽었다. 찰나같은 순간을... 우리는 끝없이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 누구나 제 깜냥껏 '행복'을 위해 삻의 순간마다 결단을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신문기자들이 자료를 조사해서 쓴 노후의 '행복'에 필요한 6억원...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 한달 생활비, 차량유지비, 외식비, 치료비 등등 예견할 수 있는 비용을 다 돈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텐데... 그렇다고 행복이 오나? 어차피 마음에 달렸다. 석가모니가 '룸비니 설산을 두 배로 늘려 황금으로 바꾼들 단 한 사람의 욕망도 채울 수 없다'고 했다던 말.... 달래 깨달은 이 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오른다. 모든 사람들이 굴러떨어진 시프스의 산으로 통나무를 굴리면서 행복을 찾겠다고...

낙산 위에서 성벽 사이로 암문이 있다. 그곳을 통과하면 동숭동 윗쪽의 낙산공원이다.

낙산에서 좌우로 내려다보이는 창신동과 동숭동의 낡은 집들이 언제까지 남게 될지 모르겠다. 재개발을 하면 똑같은 성냥갑 아파트를 쌓는 것 말고...대안은 없을까. 옥인동 일대를 아파트가 아닌 방식으로 개발하려고 했다던 건축가 김원씨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과연 시장이 이것을 용납할까.

동숭동 창신동에도 꼭대기, 성벽을 따라 아직 이렇게 낡은 동네들이 남아있다. 적산가옥들 같기도 하고 전쟁뒤에 급하게 지은 블록건물들 같기도 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호랑이만한 고양이가 골목을 .... 떡하니 지키고 있다.

창신동과 동숭동 사이로 가르마처럼 나 있는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동대문으로 내려서게 된다. 이대부속병원이 있던 자리는 뒤로 물려 건물을 새로 짓는 것 같았다. 공간을 확보해 성벽을 끼고 성벽공원 조성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대문로터리, 창신동 입구에 있는 노점... 고구마와 양파와 감자... 동대문 주변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이 남루하고, 복닥거린다. 그것이 생명력이기도 할 것이다.

동대문, 이스턴 호텔 앞으로 해서 청계천을 건너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청계천의 개발방식에 도달한 것이 딱 우리 시대의 수준 아니었을까. 그것을 치적으로 삼아 대통령을 뽑고... 그 대가로 지난 3년 동안 온 국민이 겪고 있는 이 불안과 고통... 불평등과 불합리, 민주주의의 후퇴를 생각하면... 매년 수천억원을 들여 이 가설무대같은 인공구조물을 유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불합리...를 선택하고 감당하고 있는 것이 딱 우리 사회가 도달해 있는 합리성의 수준이었다는 생각.

요즘은 뜸한데... 곤지암 살 때 큰 딸내미는 초등 6학년 때 이미 동대문까지 진출했던 것 같다.
곤지암 산골에 살던 아이에게 이 거대한 옷가게들이 어떤 멀미를 주었을지 ...

공사중인 동대문운동장 있던 자리를 지난다. 동대문운동장도 흉물스러웠지만 새로 들어선다는 거대 구조물 역시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읽은 어떤 자료에선가... 좌청룡 우백호, 풍수지리에 따라 인왕산과 낙산이 좌우로 뻗어나가는데,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조금 기가 약해 지금의 서울 운동장 자리에 흙을 쌓아 기운을 보(輔)했다는 이야기.

어쨌거나 동대문운동장은 잠실이 생기기 전에 '서울운동장'이었다. 초등학교때 황금사자기 결승전을 보러 야구장에 간 적도 있었다.



광희문에서 다시 성벽의 흔적이 나타난다. 한 일,이백미터쯤 성벽을 복원해두었지만 이내 장충동 주택가로 성벽을 파묻혀버린다.

골목사이로 언뜻언뜻 성벽의 흔적을 만날 수 있지만 대개 개인주택의 축대로 쓰이고 있다.

장충동 고개위에서 다시 성벽이 나타난다. 신라호텔 담장으로 남산까지 성벽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에 성벽에 붙여서 산책로를 조성한 것 같다. 도보환경이 비교적 좋다.




간혹 성벽의 축조양식을 비교할 수 있는 이런 구간들이 나타난다. 제일 작은 돌들은 태조때 쌓은 것이라고 하고 조금 큰 것은 중종때, 제일 큰 돌들은 숙종때 양식이라고 한다. 돌틈을 자세히 보면 조그만 돌들을 끼워 맞춰 정교하게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수십년에 걸쳐 민초들을 동원한 어마어마한 국책사업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수고로 쌓은 성벽에서 과연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었나? 문외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병자혼란때도 인조는 청나라가 처들어온다는 소식에 잽싸게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체제에 돌입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이 견고한 돌성이 무슨 억제선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북한산성도 마찬가지였다고 알고 있다. 일부러 찾아가기에도 아슬아슬한 만경대나 원효봉에까지 산성을 쌓았는데, 과연 그 수고에 상응하는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성벽은, 애먼 백성들 '쎄빠지게' 고생 시키고 고작 집권세력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한 정도의 역할을 하게 한 게 아닐까. 아니면 그 엄청난 공사기간 동안 뒷돈 챙긴 집권세력들의 자금조달 사업이었던가 말이다.

신라호텔 뒷담을 지나면 장충동 한남동에서 장충동으로 넘어오는 고개 위에서 일단 길은 끝났다. 골프연습장 뒤로 길을 만들고 있던데 앞으로는 계속 이어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자유센터 마당으로 나와 도로를 횡단해 국립극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리도 좀 아파서 국립극장 1층에 있는 까페에서 커피와 스콘을 먹으며 다리쉼도 할겸 쉬었다.

국립극장에서 석호정 위로 난 산책로로 팔각정쪽으로 올라갔다. 남산에 있는 성벽들은 다른 곳과 달리 벽돌로 쌓은 것 같은데, 원래 그런 것인지 복원할 때 임의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국민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동네 아이들을 선동해서 돈암동서부터 걸어서 남산까지 간 적이 있다. 동네에서는 아이들 다 사라졌다고 난리가 나고, 남산 놀이터 미로에서 신나게 치기장난을 하다가 광화문, 창경원을 거쳐 다시 걸어서 돌아와보니... 동네 분위기가 싸늘했다. 걱정시켰다고 큰 형에게 많이 맞았다. 그게 때릴 일인가... 싶기는 한데,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대여섯 살 때부터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서 낯선 동네로 참 많이 '모험'을 떠났던 것 같다. 그 버릇은 지금도 남아서 낯선 동네에 가면 꼭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봐야 직성이 풀린다.


서울이 아름답다고.. 재희형과 걸으면서도 이야기 했다. 정도전 같은 조선 건국 당시의 엘리트들이 이 땅에 그렸을 미래의 꿈... 얼마나 가슴 벅차 했을까... 하는 생각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특히 성북구쪽으로는 다닥다닥 재개발이랍시고 산들을 가리는 아파트들이 낡은 동네를 밀어내고 산들을 가리며 들어서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타워크레인들이 그런 일들을 하고 이다는 것... 



남산 식물원쪽으로 내려서서 백범광장으로 내려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연평도 포격전 소식을 전해준다. '정말?' 충격과 두려움. 사람들이 듣고 있는 뉴스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대피소로 피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느 나라 얘긴가요? ' 했더니 '연평도예요' 한다.

기어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당장에 성곽종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인가... 일단은 포격적 이후 소강상태라고 하니... 더 큰 일이야 벌어지겠나... 하면서 어차피 집으로 향한 길이니 걸어서 성곽을 따라 가기로 한다.

불 탄 남대문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놓았는데, 성벽에 쌓은 돌들이 안으로는 뾰족하게 치아처럼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대문옆 상공회의소 담장을 따라 성벽의 흔적을 복원해 놓았다. 그러나 유리로 처발라놓은 상공회의소 건물이 어쩐지 촌스러워보인다. 삼성본관 뒷담을 따라 서소문까지 성벽이 조금 흔적 남아있다.


부산 둘째형이 다니던 배재고등학교 자리다.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 형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서너 살밖에 안 됐던 것 같다. 제일 활달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형인데... 지금 너무 많이 편찮으시다. 배재학교 터를 지나면서 형을 떠올렸다. 매일 반야심경을 사경하고 있다.쾌유를 빌면서...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서대문 근처로 해서 경교장, 기상청쪽으로 길을 찾아가면 성벽 흔적을 볼 수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배재고등학교 있던 정동으로 해서 정동교회를 거쳐 이화여고 담장을 따라 경희궁까지 걸었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감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광화문 연가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이 길을 걸어서...


전쟁걱정을 하며 경희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이 연결돼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없었다. 다시 정문으로 나와 성곡미술관 앞으로 해서,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광화문 오피스텔들 사이로 해서... 사직공원까지 걸었다.


인왕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나도 마음이 바빠졌고 형도 급격히 기력이 떨어져 보였다. 간식이라도 준비해서 오를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둠에 휩싸여가면서 연평도 포격전 소식에 짙어가는 어둠과 떨어지는 기온에...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해졌다.


쉬엄쉬엄 걷기는 했지만, 연속으로 17km를 오르락내리락 걸었으니 무리가 올 만도 했다. 내내 쾌활했는데, 인왕산에서는 '옷을 너무 덥게 입고 왔다.' ' 이걸 하루에 다 하는 놈이 어딨냐.' '너는 하여튼 이게 문제야' 투덜투덜...
 

출발지점인 창의문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여섯시 반... 아침 10시30분에 떠났으니 꼭 여덟시간 걸렸다. 중간에 점심먹고 쉬고 경치 좋은 데서는 꼭 앉아서 재희형 담배 피우는 것 기다리고, 또 국립극장에서 커피마시면서 노닥거리고... 그런 것까지 합치면 걷는데만은 다섯시간쯤 소요되지 않았을까...

여섯시 반... 플래카드는 안 들었지만, 마중나온 아내와 셋이서 자하손만두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집 '드롭' 옆 '리틀프레스'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일정을 마무리 했다.

경치가 아름답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오르락내리락 운동도 되고...또 역사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고, 나같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어린시절의 추억까지 되살리게 되는 좋은 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잘 걷는 이들에게는 하루에 다 걷기에 뭐 그다지 무리한 길도 아니고 말이다.


'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지리산 2010년  (0) 2010.12.24
인왕산 ~안산  (0) 2010.12.09
서울성곽 걷기1 ( 창의문~ 혜화문)  (0) 2010.11.24
밤길  (0) 2010.10.18
2010년 가을, 설악산 (공룡능선)  (0) 2010.09.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