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ㅡ6/1 토  아시즈리곶(足摺岬) 핫토민박 ㅡ스쿠모宿毛 오시마(大島) 야영장

운행거리  81.57 km


간밤에 기록을 남기지도 못하고 골아 떨어졌다. 5시에 잠에서 깨어 하루 동안 지난 일들을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기록 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주인 아저씨 기타다상이 웃통을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아사히신문을 읽고 있다. 어린 시절 잠결에 깨어 졸린 눈을 부비고 보면 아버지가 조간신문을 읽고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본 신문들은  세로짜기에 컬러 인쇄도 별로 없다.  신문의 영향력이 여전히 센 것 같다. 



매체 환경의 변화는 우리나라가 가장 빠르지 않을까. 종이 신문이 몰락하고 ...  대신 SNS 등 뉴미디어가 컨텐츠 소통의 주요한 플랫폼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신문의 몰락은 자신들 스스로 '사실'이나 '객관'이 아니라 편향된 주의주장을 무리하게 ... 그것도 선정적으로 해댄 탓에 자초한 면이 있다. 


아침 밥은 여섯 시 반에 먹는다고 신문을 읽던 기타상이 말해준다. 어제 저녁에 안주인도 해준 말이다. 야영을 했다면 아침밥을 준비해야 하지만 느긋하게 짐을 꾸리고 식당에 가서 차려진 밥을 받아먹었다. 


아침상은 저녁에 비해 소박했다. 생선구이와 생선과 두부를 넣고 맑게 끓인 국, 김과 무즙, 단무지, 그리고 날 계란, 계란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는데... 핸로인 나카무라씨가 밥 위에 탁 깨트려서 간장을 뿌려 비벼 후루룩 먹는다. 따라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계란에 밥을 비벼 많이 먹었다. '심야식당'에 일본사람들의 '소울푸드'로  버터라이스가 나오는 걸 보면서 아하... 싶었던 적이 있다. 우리도 어린시절에 비록 버터는 없었지만 마가린에 간장을 뿌려 비벼먹곤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타다상의 '늠름한'(?) 가부장적인 태도는 일본에서도 이제  변방이랄 수 있는 아시즈리곶에나 겨우 남아있을 것일 터다. 도쿄나 이곳 시코쿠 섬의 도회지랄 수 있는 다카마쓰나 도쿠시마... 그리고 서울 거리에 마주치는 사내들이 어딘지 위축되고 쓸쓸해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   


나카무라(65세)씨와 핫토 민박을 떠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일 사람 미하일은 이미 길을 떠난 모양이었다. 


39번 절 엔코지(延光寺)까지는 기필코 최단거리로 가리라 결심. ... 그래도 직선거리로만 60km다.  실제 주행은 100km 가까이 하게 될 것 같다. 밥을 먹고 나니  기타다상이 약도를 가지고오더니 오르막 없는 길을 그려가면서 알려준다. 오른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우회전 해서 토사시미즈(土佐清水) 가는 길을 택하라고...그래야 오르막이 덜하다고 일러준다. 그 마음이 고맙다. 



기타다상이 일러준 길의 핵심은 아시즈리에서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토사시미즈를 향해 좌회전 한 뒤  토사시미즈시를 지나 한동안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28번 현도로 우회전을 한 뒤 소로가와 (宗呂川)을 따라 내륙으로 달려 스쿠모에 도착하는 것이다. 평면도 만으로는 선뜻 해안도로인 321번 도로를 버리고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강을 따라 달리는 길은 내내 평탄했고 고요했다. 


7시45분 핫또 민박집을 나서서 곤고후쿠지(金剛福寺)에 가서  참배를 하고 납경을 받았다. 



코보대사가 823년에 개찰한 절이라고 한다. 



절 경내에는 아열대 식물들과 차분한 연못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경내는 고즈넉 했다. 


태평양을 향해 탁 트여있을 아시즈리곶에서 바다를 본다. 심리적인 이유 때문일까... 우리 동해의 수평선도 광막한데 이보다도 훨씬 아득한 느낌이다.

광활한 바다를 등지고1852 나카하마만지로(中浜万次郞, 죤 만지로) 라는 사내의 동상이 서 있다. .. 



동상에 새겨진 설명을 읽어보니 이 지역 사람 만지로는 14살 때 고기잡이 나갔다가 무인도에 표류했다가 미국 포경선 존하울랜드호 선장에게 발견돼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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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 된 만지로는 24살 때까지 영어, 항해술, 측량술, 포경술 등을 배우고 1852년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막부 치하의 일본으로 돌아와 정책 조언을 하고 항해술, 포경술, 근대적인 조선술에 대한 자료를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고  도쿄대 전신이라는 개성학교(開城學校) 교수가 되어 어를 가르치다 71살 때 죽었다는 설명... 



바닷가에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이 우연한 표류가 그를  미국 유학생이 되게 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고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구나... 


섬의 끝... 관세음보살이 사는 보타낙가(普陀洛迦) 에 가장 가깝다는 전설이 있는 곳... 아시즈리곶(足摺岬).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곳 절벽에 와서 투신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보타낙가에 다다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일까. 


부산 영도 태종대에 있는 자살 바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스무 살 무렵, 사는 일이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 태종대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과 그냥 놀러 갔던 길이었다. 몇 걸음만 곧장 걸어가면 수직 절벽 아래.. 흰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까마득한 졀벽 있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붙어 있구나... 갑자기 손에 땀이 쥐어지고 어떤 긴장감에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있을 만한 곳에는 당연히 신사가 있다.




안내 책자에  민박집 인근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족탕이 8시에 문을 연다고 나와 있어 참배를 마치고 다시 되돌아가 보았다. 나카하마 만지로가 이 동네 대표선수는 선수인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해안 절벽 위에 바다를 바라보며 계단식으로 앉아 족욕을 할 수 있게 해놓은 족탕은 일부러 찾아간 일을 후회하지 않게 할 만큼  아릅다웠다.


기타상이 일러준 대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족탕을 하는 동안 나카무라 아저씨는 앞서 걷고 있었다. 그를 추월하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이별했다. 



토사시미즈 시(土佐清水市)로 가기 위해 해안도로에서 우회전 하는 지점 


토사시미즈 (土佐清水). 어제 저녁에 그냥 가던 길을 멈추고 숙소를 잡을까 망설이다 지나친 곳이다. 아시즈리곶에서  아침에 떠나 도착한 방향과 반대쪽으로 해질 무렵 우울한 마음으로 패달을 밟던 생각이 났다.   


쓰리에프에 들러 카페오레 5백밀리(110엔)과 쵸코빵 (152엔)을 샀다. 점원이 녹차 한 병을 오세타이(接待)라며 꺼내준다. 쓰리에프 편의점에서 이런 일은 두어 번 겪었다. 순례자들에게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일년에 15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섬을 찾아온다는데, 적은 비용이 아닐 것 같았다. 


가게 앞에서 고등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생인가? 아니오 고등학생이오. 오 그래?  이들도 강남스타일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나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오하이오고자이마스가 한국말로 뭐예요... 응 안녕하세요. 


사진에서 맨 왼쪽에 있는 친구는 개그맨처럼 계속 친구들을 웃겼다. 순진하고 유쾌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이 즐거워졌다. 


편의점 인근에 우체국이 보이길래 간밤에 써두었던 엽서를 발송했다.  오르막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일러준 기타다상에게 고마워하면서 달리고 달렸다. 



채석강을 연상하게하는 해변을 지나 터널을 지난 뒤 알려준 평탄한 길이 나온 것 같아 한번 더 물어보고  28번 현도로 우회전, 소로가와(宗呂川)를 따라 달렸다. 인적조차 드문 고요한 길이다. 

작은 오르내리막을 지나 고개 위이 터터널을 지난 뒤 스쿠모 시(宿毛市)까지 18km는  줄곧 하강길이었다.


오후 2시경 스쿠모에 거의 도달한 지점에 있는 스쿠모 서니사이드파크  미찌노에키에서  도시락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찬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김에 싸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다. 


미치노에키 한쪽 끝에 남아 있는... 이 목조누각(하마다노 도마리야)는 고지현 서부지역에 남아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축제 준비 등 성인이 되어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담당해야 할 일 등을 교육시키는 장소였다고 한다. 


한동안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다시 해안도로인 321번 도로와 만나고, 스쿠모시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분주해졌다. 갑자기 날도 궂어지고 바람도 거세졌다. 스쿠모시에 들어서마 마쓰다 강(松田川)을 건너게 된다. 


 39번 사찰 엔코지(延光寺)는  강을 건넌 뒤 우회전 해서 8.5km 정도 들어가야 한다.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자전거는 역풍에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아침부터 이제까지는 순탄하게 달려온 편이었는데 걱정이 밀려왔다. 


캠핑을 하려고 마음 먹고 있는 오시마 (大島) 휴식의 광장 (憩いの広場) 캠핑장은 정 반대 방향이라 엔코지까지 갔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와 왼쪽 해변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거센 역풍을 뚫고 엔코지에 도달했다.  39번 사찰 엔코지(延光寺)에는 코보대사가 지팡이로 땅을 치니까 샘이 솟아나 물부족으로 고통받던 주민들을 구원했다는 전설이 있다. 



붉은 거북이가 용궁에서 범종을 가지고 왔다는 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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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를 하고 절을 나오다 자신을 은퇴한 회사원이라고 소개한 사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인생의 과제를 이제 내려놓았다는 듯한 홀가분한 표정으로 도보순례를 하고 있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런 길을 걷고 있다. 


어릴 때부터 각별하게 지낸 친구가 나보다 삼 년 먼저 결혼을 했었다. 그는 이십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내게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떤 점에서 자기로서의 자기는 이제 끝'이라고 다소 우울한 이야기를 했다. 유아기와 청년시절까지는 자신에 대해, 주로 어린 시절의 결핍과 억눌린 내면에 대해 골몰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장이 되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골몰하면서 나이를 먹는다. 그 짐을 내려놓고 나면 이제 늙어있다.


나는 친구가 했던 그 말에 대해 일면 수긍했고 일면 부정했다. 어떤 점에서 존재는 관계인데, 자신이 선택해 출발하는 가족 관계를 떠나 '나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물론, 시간과 노력의 대부분을 가족들과 먹고 사는데 쏟다 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살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드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의식도 감각도 없이 그저 출퇴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을 하는 순간에도 또 묵묵히 길을 걷는 순간에도 '나로서의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모색하면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잖은가... 그것이 나로서의 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엔코지를 나서자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하루 목표로 한 순례는 모두 마쳤다. 이제 이 한 몸 누울 자리를 찾기만 하면 된다. 비를 맞으며 스쿠모시로 달려나왔다. 


엘마트라는 편의점에 들어설 즈음에는 비가 너무 쏟아져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고등어통조림(147엔) 즉석카레 288 (엔) 식빵 (116엔)을 산 뒤   알바생에게  오시마에 캠핑장이 있는지,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친구도 기다렸다는 듯이 인근 약도를 꺼내더니 '네 캠핑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바다쪽으로 가신 뒤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바닷가에 있는 현립 자연공원에 갈 수 있고, 거기서 캠핑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똘똘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러더니 약도는 가지고 가라고... 


오시마(大島)는 이름과는 달리 스쿠모시 앞바다에 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었다.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올라선 뒤 국민호텔 (國民宿舍)를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바닷게에 공원이 있었다. 국민숙사라는 대중호텔들도 대개 일박에 6천5백원에 저녁과 아침을 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주말이라 호텔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야영을 하기로 했으니 그냥 지나쳤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혼자 텐트를 쳐도 될지 조금 망설여졌다. 비도 주룩주룩 내렸다. 


관리동이랄 수 있는 건물 안에는 코인샤워장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경찰관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 건물 안에서 화기 사용, 전원 사용을 하면 안 되고 ... 등등의 주의 사항은 조금 고압적인 어투로 붙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카메라와 핸드폰을 충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 건물 뒤 바닷가쪽 처마 밑에 텐트를 치고 동전을 넣고 더운물 샤워를 하고... 콘센트를 찾아 카메라 등 전기기구를 모두 충전시키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빗소리와 차분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 오늘도 캠핑장에는 혼자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 


지출 : 계.1513엔 - 쓰리에스 262 (카페오레 110, 쵸코빵 152)  미찌노에키 꼬치구이 100엔,  스쿠모 편의점 엘마트 551엔(카레 288 고등어통조림 147 식빵 116)  납경 2회 600엔  



11일-5/31 금   리버파크 ㅡ  아시즈리곶 (足摺岬), 38번 절 곤고후쿠지(金剛福寺) 인근 호토민박


운행95.78km

다섯 시 경 잠에서 깼다.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웠다. 한적한 야영장... 산책도 하고...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텐트 한 동이 있지만 인기척은 없다.



바베큐장 한쪽에는 텐트를 치고 한 쪽에는 빨래까지 해 널었다. 


관리동은 내가 야영한 공터 위쪽에 있었다. 주말에나 야영객이나 관리인들이 오는지... 덕분에 캠핑장 이용료는 무료. 


일본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지겹도록 많이 본 것이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안내문이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그런 안내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버리지 말라는 안내, 경고, 협박에 가까운 문안을 인적이 드문 곳이면 예외 없이 마주칠 수 있었다. 조금 지나치다 싶도록 많았다.  이 나라 사람들의 어떤 강박증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이 나라 역시 ... 인적 드문 길가나 하천변에서는 일부러 내다 버린 쓰레기가 적잖이 눈에 띠었다. 그 점에서 조금 안도감이 느껴졌다...면 ㅎㅎ  


외딴 강변에 있는 캠핑장  화장실에서 마주친 계몽적인 안내문도 그 연장선에 있다. '나 하나니까 하고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면 지상에 1억 개의 쓰레기가 버려지는 것'이라고... 이성에 호소하는 내용이 조금 색달랐지만 말이다. 


이곳에도 역시 예비 화장지까지... 누군가 관리 당번이 있는 게 분명한 듯 싶다. 


100엔 동전을 넣으면 3분 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코인샤워... 옷을 미리 벗고 어떤 순서에 따라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칠 것인지.. 계획을 세운 뒤 동전을 넣었다. 저녁에도 아침에도 ... 샤워를 했다. 언제 또 샤워장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므로... ㅎ 

 

라면을 끓여 저녁에 지어 놓은 찬 밥을 말아 아침을 먹었다. 며칠 전 슈퍼에서 산 일본 미소 라면인데, 입맛에 맞지 않아 조금 고역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짐을 다 꾸리고 나니 아침 8시. 햇살도 화사하고 몸과 마음이 다 개운했다.

비도 완전히 개이고... 날씨도 만족스럽다.  


늘의 목표는 시코쿠 섬의 최남단 아시지리곶 (足摺岬) 38번 절 곤고후쿠지(金剛福寺). 

직선거리로만 8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야영장을 찾아오느라 해안을 따라 뻗어가던 56번 국도에서 시만토다이쇼(四万十大正) 방향으로  20km 이상 들어와 있기 때문에 다시 해안쪽으로 나가지 않고 중앙을 가로질러 시만토시를 거쳐 도사시미즈까지 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걱정은, 지도상의 439번 지방도로가 산중으로 난 길을 가리키고 있는 점이다. 어제 겪을 만큼 겪었으니 오늘은 덜 호된 경사를 겪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야영장에서도 충전 콘센트는 찾을 수 없었기에... 핸드폰  파워뱅크에 연결해서 예비 배터리를 충전하면서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달리게 되었다. 


어쩐지 너무도 순조롭다 싶었다. 

야영장을 떠나기 전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다보니까... 무엇인가에 씌였는지... 자전거 변속기 와이어가 늘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기어가 풀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발동했다. 어쩐지 어젯 저녁 빗길을 달릴 때 기어 변속을 하고 난 뒤에 한두 번 다시 미끄러지면서 저단으로 떨어지던 일도 생각났다. ... 바이클리에서  정비교실도 이수하지 않았는가... 무심코 늘어져 있는 와이어에 연결된 조절 나사를 돌려서 조였다.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손 댄 것이다. 


야영장을 빠져나올 때부터 기어가 헛돌며 미끄러졌다. 마을에서 저전거숍을 만나면 손 봐 달래야지 생각하면서 439번 도로로 만나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오르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어가 뜻대로 변속이 안 되는 상태에서 ... 마음은 초조해졌다. 지나는 이 한 사람 없는 산속으로 도로는 이어졌다. 


일본의 지방도로는 어떤 곳은 이게 마을 뒷길인지 번호가 버젓이 붙은 지방도로인지 구분이 안 되게 좁고, 별다른 표식도 없는 곳이 많았다.  



애매한 갈림길에서 좀 더 넓은(그래봐야 폭 3m 조금 더 되는 차선도 없는) 길을 439번 도로인 것으로 판단하고  선택한 게 잘못이었다. 지도상에는 이 이치노마타계곡(一の又渓谷) 온천이 오른쪽에 있어야 하는데 표지판은 왼쪽으로 안내하고 있지 않은가... 불길하다.



'이웃의 토토로' 에서 메이네 가족이 시골로 이사하며... 터널을 통과하면서 뭔가 신비롭게 원시적인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터널도 그랬다. 도로변에는 군데군데 토사가 허물어져 쌓여있고...부러진 나뭇가지들... 도대체 사람이 이용하기나 하는 도로인지... 해발 600m 지점까지 끌다 타다를 반복하면서 또다시 등산을 했다.


이러한 고난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면서 묵묵히 땀을 흘렸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는데도 GPS가 가리키는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뭔가 잘못 됐겠지... 나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은가...  


산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내가 오른 길은 도로라기 보다는 삼림을 관리하는 임도(林道)였던 것 같다. 도중에 ... 산사태로 무너진 산을 복원하는  공사장이 나오고... 그 길을 오가는 덤프트럭들을 만나고... 비포장도로를 지나면서... 캄캄하게 짙은 숲을 빠져나왔다. 


산을 다 내려와 드디어 마을을 만났다.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길 물으니 가뜩이나 말도 못 알아듣는데 사투리도 심해 더욱 알아들을 수 없다. 내 판단에는 산에서 내려 서면서 우회전을하면  남쪽에 있는 시만토 시(四万十市)를 거쳐 아시즈리곶 (足摺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을 돌다 내려와 방향이 헷갈린 모양이다. 



내가 생각한 것과 반대 방향인 왼쪽 방향으로  15km 가면 439 번도로를 만나게 된다고... 알려주신다.  


진로와는 무관하게... 도로를 오른쪽으로 벗어나 산 하나를 괜시리 올랐다가...원점에 가까운 지점으로 하산을 한 셈이다. 어흑... 


중력의 힘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는 의식하지 못했던 기어의 이상이 고스란히 신경을 자극한다.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고 기어 변속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 나는 도대체 바이클리 자전거교실에서 뭘 배웠단 말인가... 이런 자책도 심해졌다. 덜그럭덜그럭 소음을 내면서 느린 속도로 시만토시(四万十市)까지 달렸다. 숲속과는 달리 산 아래는 제법 더운 여름날씨. 자전거 상태가 안 좋고, 내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 하지 못했다 생각하니 기분도 나빠졌다. 


강변을 따라 한동안 달려 12 시 경 시만토 시(四万十市)에 도착했다. 시내에 들어오니 기분도 전환이 됐다.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는 차분한 도시. 길 가는 사람에게 자전거포가 어디에 있나 물어보니  두 곳을 알려준다 . '아케이드' 라는 지붕이 덮인 상가 안에 있다는 숍과 마을 안에 있다는 오래된 가게... 먼저 아케이드 안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별로 넓지 않지만 깨끗한 식장인데, 카페테리아처럼 진열된 반찬을 하나씩 골라서 가면 선택한 만큼 값을 치르게 된 곳이었다. 돈가스와 반찬 한두 개를 선택하고 후식으로 커피까지 ...600엔



밥을 먹고나서 먼저 마을 안에 있는 오래된 자전거포를 찾아갔다. 가게주인인 할아버지는... 자신은 이런 자전거는 못 다룬다며 아케이드 안에 있는 숍을 찾아가라고 했다. 텐진바쓰라는 깔끔한 숍에 가서 기어텐션을 조절해줄 수 있냐고...하니 가지고 들어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5분이나 걸렸을까... 기어 와이어를 풀고  천천히 조여가면서 장력을 조절한다. 그렇지...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지... 그의 손길에 따라 패달을 돌릴 때마다 기어가 기분 좋게 착착 변속이 된다.  수리비는 1500엔. 



브레이크 레버  나사를 조인 것은 서비스라고... 하면서 능청스럽게 씩... 웃는다. ㅎ하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이렇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럼 그것도 돈을 받을 생각이었냐...' 싶었다. 


오전 내내  괴롭던


 문제가 해결됐다. 패달을 밟는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  불구 상태에서 벗어난 기분이다. 여전히38번 절 곤고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50km나 남았다. 편의점에 들러 우유를  사서 패니어에 넣고  2시 다 돼 다시 출발. 



기어 텐션을 조정하는 문제는... 뒤에 귀국한 뒤 바이클리를 찾아가 사장님을 붙들고 나머지 공부를 하며 동영상으로 기록을 해두었다.  공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유투브에 올린 뒤 링크를 걸어놓기로 한다. 




어젯밤에 야영을 한 리버파크도 시만토(四万十)강변이었다. 이제 이 강은 섬의 내륙을 길게 돌고 돌아 태평양과 만나는 하구에 도달하고 있다. 



강을 건너 해안을 따라 곶의 끝단까지 달려가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해안길이니... 큰 경사는 없겠지.... 기대를 품고 달렸다. 



터널을 건너... 해안도로로 막 접어드는 시점에서 앞서 걸어가는 핸로 한 분을 만났다. 그는 뜻밖에도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36번 쇼류지(靑龍寺)를 향해 우사(宇佐)대교를 건너면서 ... 만나, 왜 반대편  요코나미(横浪) 스카이라인쪽으로 가지 않고 돌아나오는지 물어본 그 사람이었다. 






내가 이와모토지를 지나쳐 야영장을 찾아서 내륙을 헤매다 돌아나오는 동안 그는 해안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아시지리 서니로드 ...햇살이 쏟아질 것 같은 해안도로를 생각하면서...달렸다. 단순하게 생각한 길이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도에서 아시즈리를 가리키면서 왼쪽에서 돌아들어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니 오른쪽 바닷가를 택해서 내려가라고 일러주었다. 


고개를 오르내리락 하다보니 이미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시  방향을 잘못 선택해 왼쪽 해안가로 접어들지 않고  우측으로 빠져 길에서 만난 도보 순례자가 오르막 20km 라며 주의를 준 그 길로 접어들게 되는 도사시미즈 (土佐清水)시내로 오고 만 것이다. 항구를 끼고 있는 시내에는 호텔도 여럿 보였다. 운행을 중지하고 여기서 묶을까... 망설이면서도 자전거를 멈추지 못했다. 멈췄어야 했다. 

  

아시즈리 곶(足摺岬)을  꼭지점으로 놓고 볼 때 왼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접근하는 도로를 따라... 어둠이 짙어가는 도로를 달렸다. 38번 곤고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가보자... 어딘가 잘 곳이 있겠지...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어두워가는 바닷가를 암담한 마음으로 달렸다. 


절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절 앞에는 드넓은 주차장이 있고 과 잘 관리된 화장실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옆에 텐트를 쳐도 되겠구나... 


전망대가 보이는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 바다를 조망했다. 장쾌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에서 만나는 태평양과는 또 다른... 넓고 넓은 수평선... 파도는 해안을 향해 무섭게 달려와 부서지고 있었다. 


절 앞에서... 한글판 지도를 펼쳐보니... 인근에 유스호스텔이 있다고 나와있다. 마침 관광객으로 보이는 젊은이에게 어딘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면서 지나가는 승용차를 세우더니 물어봐 준다. 차를 몰고가던 아주머니는 내게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언뜻 봐서는 유스호스텔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단층 주택. 가다카나로 유스호스텔이라는 팻말이 있는 집 앞에다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걱정한 대로...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숙박이 어렵다고 했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다행히 관광지라 인근에 호텔과 여관 민박 간판이 밀집해 있어...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유스호스텔에서 나올 때까지... 나를 안내해준 아주머니는 차의 미등을 켜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인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더니 그럼 자기를 따라오라고... 마을 안쪽에 있는 민박집 '호토'로 데리고 가더니 주인부부에게게 내 대신 흥정을 해준다. ... 우락부락한 인상이지만 마음씨 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가 나오더니... 들어오라고 ...  일박에 얼마냐고  물으니... 6천5백엔이라고... 소데스까... 하니까... 왜 비싸? 그럼 6천엔만 받을게 한다... ㅎㅎ 


주인 아저씨는 기타다 히로시 였다. 이미 식당에는 독일인 미하엘(37세)과  일본인 나카무라(中村 65세)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게 다다미방을 안내하고는 빨랫감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하는데 각각 100엔씩이라고... 저녁 식사가 늦었으니...밥을 먼저 먹고 목욕을 하라면서 욕실을 안내해주었다. 


저녁 밥상을 환상적이었다. 고등어 한 마리를 통째 회를 떠 놓고... 세 사람이 나눠 먹게 했다. 생선을 넣고 맑게 끓인 국과 생선구이, 셀러드... 무척 감동적인 밥상이었다. 핸드폰도... 카메라도 모두 방전돼 사진은 찍지 못했다.  


독일사람 미하엘은 나보다 일본어 실력이 훨씬 좋았다. 그는 독일 회사의 일본 지사에 2년 째 근무하고 있는데, 한 달간 휴가를 내 도보순례를 했고... 이제 휴가가 끝나 오늘을 마지막으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그는 내게 일본에 와 본 적이 있냐고... 예닐곱 번 와본 적 있다고 하니... 그게 언제 언제 인지 일곱 번을 다 물어 보았다. 독일 사람 성격이 그런 것인지... 그의 개성이 그런지 모르겠다.  


주인 아저씨 기타다 히로시는... 내게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박근혜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요? 저는 별로 안 좋아 합니다... 왜? ... 역사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서 그러냐? ... 누구의 딸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 때문인데,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 이렇게 말하니까... 호오... 그래요. 나는 한국 사람들이 다 박근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했다. 


또 하나는 예의 일본 사람들 표현대로 기타조센(北朝鮮)에 대한 이야기. ...  기타조센 때문에 걱정이 크다. ... 한국에서도 걱정이 많겠다. 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냐....  북한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빨리 이런 대결 상황이 해소되고 서로 사이좋게 오고 가고 서로 도우며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사람 역시 내게 무엇인가 북에 대해 화끈한 적대적인 말들을 기대하고 질문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일본 언론이 북한을 다루는 시각도 그런 것이겠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가 마치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래서 일본도 무장을 해야 한다는 식의 여론몰이... 


일본어 실력이 짧아서... 또...길게 말해봐야 생각의 차이만 확인할 것 같아서... 나는 그 뒤로 입을 닫고... 입맛이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맥주도 한 병 시켜서 천천히 마셨다. 분단 국가의 현실이 새삼 서글프게 다가왔다. 


실제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쏘아올렸다는 인공위성이 아니라 후쿠시마에서 폭발한 핵발전소고... 거기서 다량으로 분출되고 있는 방사성물질들이 아닌가... 그리고 아시아에서 다른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가장 많은 고통을 준 나라가... 어디였나... 



목욕을 하고 다다미방에 돌아와 조금은 울적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잠자리를 쾌적하고 방과 욕실은 깨끗했다. 밥도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주인집 부부도 친절했고... 그런데도 울적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지출: 점심600엔  자전거 수리 1500엔, 우유 150엔, 음료수 150엔,   민박집 60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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