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북알프스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오래되었다. 1996년께부터였다. 그러나 꼭 가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그렇듯이 떠올려보고 마는 정도였다.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슬픔과 괴로움. 그에 맞서고 있는 나 자신을 휩싸고 있는 무력감... 이런 것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과정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일도 바빴다.


안내산행은 대개 7월 이후에나 일정이 잡혀있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잡지 마감이시작되고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6월 17일  혼자 도쿄로 가서 그날 밤11시 신주쿠에서 버스를 타고 아침 7시에 가미코지(上高地)에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나의 산행은 대개 혼자 오래 걷는 식이었다. 
지리산 종주나 설악산의 공룡능선, 서북능선을 걷는 식으로. 말이다. 
교회에 가는 일이나 요근래 직장 동료들이 떼로 몰려가고 있는 아바타 같은 자기 이해 과정들에 어떤 효용이 있다면... 
내가 산길을 오래 걷는 일과 비슷하겠거니... 혼자 걷는 일은, 온전히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며 
숲의 속삭임에 조응하는 일이기에... 상처투성이 내 몸과 마음은 그 과정에서 치유가 된다. 분명히 효과가 있다. 어차피 그런 목적으로 떠난 길이었다.  


가미코지에서 계곡을 따라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갓파바시(河童橋), 묘진칸(明神館), 도쿠사와(德沢) 요코오(橫尾)를 거쳐 
야리사와(槍沢)롯지 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계곡길이다. 울창한 숲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눈 쌓인 연봉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일반 관광객들은 대개 갓파바시나 묘진칸까지가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북알프스 관광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이 설악동에 가서 권금성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타거나 좀 더 결심을 해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비선대까지 올라 가서 계곡물에 발담그거나 조금 더 용기를 내 울산바위까지 올라가는 것처럼말이다. 



행동식은 모두 한살림물품으로만 가지고 갔다. 산에 갈 때마다 스니커즈같은 수입초콜릿 같은 걸 먹으면서 입안이 개운치 않았는데 한살림 건강 행독식은 참 좋았다. 화성한과의 약과와 땅콩캬라멜, 그리고 우리쌀 채소건빵.


묘진을 지난 뒤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모처럼 하산중인 팀 하나를 만났는데, 대학산악부로 보이는 세 명의 젊은이들, 배낭에 피켈을 달고 있었고 옷차림이나 행색이 격전을 치른 것처럼 보였다. '피켈이 필요한가?' 걱정이 됐다. 

오전 11시 야리사와 롯지를 떠나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흙길과 눈길이 뒤섞인 길 시작되더니  天狗原부터는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규모의 거대한 눈사면이다. 거대하게 뚫린 구멍 아래로는 삼킬듯이 산정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계곡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긴장이 됐다. 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이가 한 사람 있길래 길이 어떤가 물어보았다. '계속 눈이 쌓여있으니까 주의해야 한다' 며 여태 오버트라우저도 꺼내입지 않고, 또 아이젠도 없이 날나리같이 걸어올라가고 있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그래도 조금 더 그 상태로 그냥 걸어올라갔다.


더 이상 길도 없고 눈 사면 위로 나란히 꽂혀 있는 1m 남짓의 대나무깃대만이 가야 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눈이 쌓여있었도 기온이 낮은 것은 아니라서 처음에는 아이젠도 착용하지 않고 눈을 찍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2600미터쯤부터는 비바람에 시야도 흐려지고 거대한 자연 속에 나 혼자 그 불투명한 길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바지도 겨울바지로 갈아입고, 오버트라우저를 꺼내 덧 입은 뒤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고 카메라도 배낭 안에 넣고 행동식으로 기력도 보충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었다고나 할까. 고난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면이 있다면 대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르고 올라도 산장이 보이지 않았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으면 이미 능선에 올라도 벌써 올랐을 시간인데도 그랬다. 스케일이 다르다는 게 실감됐다. 

이제 방향 분간도 지형 판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대나무 표지에만 의지에 오를 뿐이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는 아무리 길어도 너댓 시간이면 능선에 도달하는데...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섯시간을 꼬박 걸어올라간 끝에 야리산장을 만났다. 

시계(視界)가 불과 10여 미터밖에 안돼 얼마나 더 가야할지 가늠할 수 없었고 이미 오후 4시가 다 돼 가고 있어 초조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눈 앞에 산장이 나타났다. 지도에는 중간에 삿쇼산장(殺生山荘)_이 있다고 했는데 안개때문에 보지 못했다. 눈 때문에 야리산장으로 직등하는 길이 생긴모양이다. 


산장의 외양은 우리나라 지리산이나 설악산 산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젖은 옷과 장비를 말릴 수 있는 건조실이나 잘 관리되고 있는 침실과 침구, 자연발효식 화장실 등에서는 일본사람들 특유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저녁과 아침을 주는, 1박2식에(9천엔), 다음날 도시락까지 포함하면 1만엔.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스트레칭을하고 식당에 내려가 밥을 먹고 캔맥주를 마시고 8시경 잠이 들었다. 

밤새 버스를 타고와 온종일 걸어 해발 3천1백미터지점에 와 눈비가 몰아치는 광경을 보면서 잠든 것이다. 나를 덮친 슬픔과 고난도 어쩌면 비현실적인 꿈처럼 그런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산 아래의 일들이 가물가물 현실감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터리 때문에 꺼두었던 전화를 켜 아내와 딸들과 통화를 했다. 


가고시마에서 왔다는 67살 동갑내기 친구들과 나, 산장에 묵은 손님은 네 명이 전부였다.  
가운데 서 있는 이가 코기라는 산악인이고 이 팀의 리더였다. 일본산악연맹과 관련이 있다고 하고, 전국에 안 가 본 산이 없다고 했다. 

예순일곱살에 나 역시 또 이 산을 오를 수 있을까. 그런 정신과 몸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겠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에서 혼자 잤다. 매트리스와 침구도 깨끗했다. 매트리스는 땀을 흡수하면 열이 나는 발열시트가 들어있다고 씌여있었다.

다음 날 가고시마 노인들과 앞서거니뒤서거니 야리다케에 올랐다. 

산장에서 불과 2,30분만 올라가면 정상에 도달하지만... 비바람 때문에 산 아래 광경은 전혀 조망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들은 야리사와를 거쳐 도쿠사와에 가서 자고 놀다 귀가한다면서 내게 미나미다케 능선길을 가보겠냐? 고 묻고는 조심하라고(오 기오츠케테 구다사이) 인사를 하고는 휙 내려가버렸다. 지난 5월 중순 월간 마운틴 이영준기자가 한중일 대학생들과 함께 그 길을 갔다와 쓴 기사에... 곳곳에 눈이 있어 애를 먹었지만 뭐 그리 심각하게 묘사해놓은 부분이 없었기에... 혼자였지만 가볼 수 있을 것 같아 아침 8시30분경, 야리산장을 떠나 그 길을 갔다. 지난 저녁에 주문해둔 도시락은 주먹밥 한 덩이와 패트병에에 든 오차가 전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나미다케(南岳)까지 가지 못한 채... 오후 3시쯤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바람이 거센데다 방향구분이 어려웠다.  

능선에 쌓인 눈때문에, 등산로 표지가 중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이라면 표지기나 표시판, 쇠줄 같은 게 곳곳에 박혀있었겠지만, 

일본은 달랐다. 바위에 간혹 흰페인트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경우가 있지만, 이것을 한 번 놓친 뒤로는, 사방에 가득찬 가스(안개) 때문에 방향 구분도 어렵고 등산로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등산로이겠거니 짐작되는 암릉을 한 시간 가량 너덜지대를 오르내리며 전진했지만 그 뒤로는 페인트 표시도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비바람이 조금 더 거세졌다. 이 산에 산다는 뇌조가 무슨 몽환적인 그림처럼 꾹꾹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스쳐갔다. 

방수 재킷을 뒤집어 쓰고 주먹밥과 오차를 마시며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자칫하면 이국의 산록에서 조난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히 능선 정상으로 되돌아온 뒤 야리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산장으로 돌아오니 산장 직원은 길을 못 찾았냐? 고 예사롭게 묻는다. 식당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몸을 덮히고, 오후 4시부터 하산하기 시작했다. 산장 직원은 시간이 늦었으니 바로 밑에 있는 야리사와 산장에 연락을 해둘 테니 거기 가서 자라고 했다. 

온 종일 비바람속을 혼자 걷다보니 호젓하고 좋았지만, 정도가 조금 심했다. 한국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원시적인 공포가 있었다.  

저녁 6시에 야리사와 롯지에 도착해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고 말해주고 그곳에서 잘까 하다가 빙하 녹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너무 시끄럽기도 했고 좁은 협곡에 자리잡은 산장이 갑갑하게 여기지기도 해 한 시간 더 걸어내려가 요코오 산장에 가서 지기로 했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한 시간 남짓 더 걸어내려갔다. 이제 산행은 다 끝났다. 

요코오 산장은 북알프스에서 오호다카와 야리가다케 갈림길에 있는 곳이다. 빙벽 같은 일본 소설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곳이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듯 깨끗하고 시설도 훌륭했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무엇보다 여기부터는 더운 물에 목욕도 할 수 있었다. 목욕탕도 훌륭했다. 다만, 산중에서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비누와 샴푸와 치약은 못쓰게 했다. 

예약도 하지 않고 늦게 도착했는데도 식당에는 다행히 밥이 남아있었다. 목기로 된 이중 밥통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양껏 밥을 떠먹게 했고, 뜨거운 미소된장국과 생선구이와 절임 야채 몇 가지, 달걀말이. 목욕도 했겠다.맥주도 한 병 시켜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여자와 함께 온 서양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하며... 자신은 터키사람이라고..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고구려가 중국과 대항할 때 투르크 족도 서쪽에서 그런 인연으로 연대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얼핏 그런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지만 긴가민가 했는데 터키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에 대해 그런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내 기억 속에는  한국과 터키는 터키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과 2002년 월드컵에 뜻밖에도 한국과 터키가 4강에 올랐던 점 정도말고는 별 배경지식이 남아있지 않았다. 

요코 산장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은... 등산이랄 게 없었다. 

느릿느릿 가미코지를 향해 내려오며 일반 관광객들처럼 기념품점을 구경하고 가미코지 안내관을 관람하고 ...도쿄행 버스를 기다리며 온천욕을 하고 밥을 먹은 일정도. 언젠가 초가을 다시 찾아와 야영을 하며 야리가다케 오호다카를 잇을 능선 종주를 해보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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