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부터 2006년,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 표영삼선생을 모시고 몇 차례 동학강좌, 답사를 진행했다. 비교적 소상하게 강의를 채록하고, 동영상도 편집해 모심과살림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두었었는데, 후임자들이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유실돼 안타까웠다.  

2008년 표영삼선생님도 돌아가셨다. '죽어서 저 세상에 가는 게 아니'라던 생전의 말씀처럼, 일체의 장례절차도 없이 서울 의대 해부학연구실에 시신기증 신청만 단행한(연로하여 실제로 기증되지는 않았다) 그분의 마지막도 극적이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선생의 강의록을 당시 홈페이지를 캡쳐해 노트에 붙여 보관하던 분(한살림연수원 박혜영팀장)을 만나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차례로 한 편씩 이 블로그에라도 되살려볼 생각이다.   

2004년 10월 강의는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진행했다. 저녁을 급히 먹고 7시부터 2시간 남짓 강의를 하신 뒤 선생님은 양평군 용문면의 댁까지 가셔야 했기에 당시 경기도 광주에 살던 내가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곤 했다.  

1. 2004년 10월 6일 

 

 

선생님의  강의는 흔히들 수운 선생이 신비체험을 한 1860년 4월 5일을 동학의 창도일로 여기는 통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은 신비체험일일 뿐이고, 실제 ‘동학'이라는 말을 쓴 것은 1862년 남원 교룡산성 아래 은덕암에서 지은 동학론에서였습니다. 이 동학론은 나중에 논학문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또한 서학의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학을 만들었다, 유불선 삼교를 종합하여 동학을 창도했다는 이야기도 일본인들이 동학을 폄하하려고 만든 관렴이라는지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용달유사에 나오는 "12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수운 선생의 시대인식에 이르러 표영삼 선생의 강의는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수운 선생은 나라 곳곳을 둘러보며 부패한 조선이 무너지고 있고, 또한 1844년 아편전쟁 전후 중국도 이미 기울어졌으며, 아편을 파는 것이 금지되자 군함을 앞세워 중국을 침탈한 서양도 썩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병들었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방향을 '다시 개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개벽은 연다는 의미입니다. 주역에 나오는 천지개벽은 천지가 처음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운 선생이 말한 '다시 개벽'은 새로 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환경의 개벽이라기보다 “개벽후 5만년”이라는 표현을 짚어볼 때, 인간의 문화체제, 삶의 틀이 성립된 지 5만 년이 되었는데, 그것이 병들어 회볶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벽 후 오만 년에 십이제국이 병들었으니 다시 개벽, 즉 우리 삶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들은 일정한 습속, 관습, 그리고 규범의 틀, 먹고 사는 경제 배분의 들, 또 하나는 시대마다 다른 표현의 틀, 그리고 생각하는 틀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틀이 서로 맞물려 교호작용하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수운 선생은 그중에서도 생각하는 틀, 시점(視點)을 바꾸어야 다시 개벽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수운 선생이 말한 도(道)는 생각의 틀을 이루는 싹, 씨앗 삶의 들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길. 신념체계를 의미합니다.

 

동학이라는 개념도 짚어보았습니다. 수운 선생이 “도는 비록 천도지만,학은 동학"이라고 한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은 현대적인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다, 실천한다. (인품이) 풍긴다는 의미로 수행체계, 수행의 틀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하는 신앙이나 기복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 한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동학 한다, 수행한다, 동학은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수운 선생은 이 '학'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1863년 4월 제자 강수가 찾아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물으니 , 성(誠), 경(敬), 신(信)을 제시했다고 나옵니다.그런데 1879년 발간된 동학 최초의 교단서인 <최선생문집 도원기서>에는 신(信),  경(敬), 성(誠)이라 하여 순서를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선신후성 (先信後誠)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수덕문>에 신(信)과 성(誠)이  의 의미를 우리가 아는 믿음, 정성과는 다르게 해석 합니다. 즉, 파자하여 사람 인(人)에 말씀 언(言), 즉 사람의 말에는 옳은 말이 있고 그른 말이 있는데,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거듭거듭 생각해서 잘 판단해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그리고 성 자도 파자하여 이룰 성(成)에 말씀 언(言).즉 뜻있는 말을 이루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여기에서 볼 때, 수운이 말한 동학은 하나의 수행체계였으며 '생각의 틀'을 바꾸고 그 뜻을 곰곰이 새겨 실천한다”는 의 미였습니다. 같은 의미로 13자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의 지(知)에 대한 수운 선생의 해석, 즉 그 도를 알아 그 앓을 실천하라( (知其道而受其知也) )는 해석을 볼 때도 생각을 몸에 배게 하는 수행이 동학의 핵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좁은 민족적 생각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또는 세계의 평화를 염두에 두는 쪽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고, 생각의 차원을 높여 그것을 몸에 배게 닦아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표영삼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수운 선생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 표 선생님을 붙들고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동학 한다”와 “동학 믿는다”를 분리하지 말고 하나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수운 선생이 기독교의 성서를 보았을까라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에 대해 짚어보시는 표 선생님의 열린 사고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성으로서 여성을 공경하는 것을 몸소 실천해 가기 위해 가사를 분담하여 선생님께서 스스로 밥을 짓고 계시며 사모님은 빨래, 청소를 하신다는 말씀은 참석자들을 경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모님께 경어로 존대하는데까지는몇 년이 걸렸다고 하시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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