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말 필리핀 네그로스섬에 다녀왔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던 사탕수수밭. 작물이 들어찬 들판을 보면서 어쩐지 사막처럼 갈증이 느껴져 목이 탔다.  


한살림이 민중교역 마스코바도설탕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필리핀 네그로스섬 농민 생산자들과 교류가 시작되었다. 

'민중교역'에 대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던 게 2008년이고, 설탕 취급이 결정된 것은 2016년. 무려 8년 동안 논의가 길어졌다.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한 수입물품을 취급하지 않는 원칙을 쉽게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대.  


네그로스 섬은 필리핀에서 4번째 큰 섬이다. 

면적은 강원도 정도의 넓이(강원도 : 16,873.51㎢ 네그로스 : 13,309.60), 인구는 440만명이라 한다.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닐라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섬의 주도랄 수 있는 바콜로드 공항까지 또 날아가야 했다. 

아침 8시에 인천공항을 떠나 마닐라에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때가 다 돼 바콜로드시에 도착했다. 





일본의 운동가들이 개척한 필리핀 민중교역에 대해, 부끄럽게도 필리핀에 가게 되고나서야 비로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중교역의 필리핀쪽 파트너들인 ATPI(필리핀공정무역Inc), ATPF(필리핀공정무역재단) 건물도 바콜로드 시내에 있었다.  




이 섬에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된 것은 1850년대 영국의 상인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필리핀은 이미 1565년부터 1898년까지 무려 333년 동안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우리나라에ㅅ는 선조가 즉위하던 해부터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들어선 해까지의 기간이다. 

그 뒤로도 1902년부터 미국의 식민통치가 1946년까지 44년동안 이어졌다. 


일제 통치 36년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언어와 의식은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다. 

여기 비하면 필리핀의 주민들이 감당해야 했을 고통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네그로스섬 전체를 뒤덮고 있던 사탕수수밭 역시 서구 제국주의가 원료 산지로 필리핀을 재편한 결과다.  

이러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왜 필리핀이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땅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사탕수수 재배가 확대된 것은 단순히 달콤한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이후 대량 생산된 설탕은 노동자들에게 열량으로 제공돼 산업혁명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열량으로 연소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와 남미와 필리피 등 적도 인근 기후 조건이 맞는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해 설탕을 조달하고 이는 유럽 등에서 사작된 대공장 노동자들의 열량으로 소비되게 함으로써 저임금 착취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고된 노동현장에서 설탕덩어리 일회용 스틱 커피가 열량을 보충하는 것도 비슷한 일이지 싶다. 




한살림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유니프왁(UNIFWAC) 공동체 마을 뒤 숲에 있는 농업용수 탱크. 코카콜라 재단에서 후원했다고 했다. 


한살림이 농업정책에서 각국 각지의 기후풍토에 맞는 농업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수출하는 곳도 수입하는 곳도 생태순환’ 원리에 맞게 먹을거리를 자급하자는 것이 우선이고 

불가피한 경우만 교역을 하자는 이유 때문이다. 수입에만 의존하면서 식량 자급기반이 무너진 것도 문제지만 

자급은 뒷전이고 팔기 위한 농업 일색으로 농업이 일그러진 현실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시장의 가격 논리에 따라 국가간 먹을거리 이동이 많아질수록 탄소 발생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먼 거리 이동과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먹을거리에 대한 유전자조작이나 약품처리 등도 늘어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를 조장하는 것은 물론 거대 식량 자본이다


과거에 무력으로 식민지를 침탈하던 제국주의와 오늘날의 이들은 얼마나 다를까.


농업과 자국 먹을거리 생산을 무역에만 의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교역이 헝클어지면서 발생한 1990년대 북한과 쿠바의 기아사태, 2008년 무렵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했을 때 필리핀 등에서 벌어졌던 식량파동에서 목격한 바 있다.  



한살림은 2016년부터 네그로스섬에서 생산되는 '마크코바도' 설탕을 민중교역을 통해 수입하고 있다. 

두레생협, 행복중심생협, 대학생협들과 함께 민중교역 법인 PTCOOP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수입하는 설탕 1kg 당 100원을 기금으로 적립해 (예를 들면 공급량 100,000kg x 100원 = 10,000,000) 이를  현지 농민들의 식량 자급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활용하고 있다. 




가네시게(KANESHIGE) 농장일본 운동가들의 자취


바콜로드 시내에 있는 ATPI 건물 4층 강당 벽면 '가네시게홀'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1980년대 중반, 온통 사탕수수 일색인 이 섬에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2%도 안 되는 설탕 아시엔다(hacienda- 수탈한 토지를 소수에 나눠 줘 발생한 대지주 농장)경지면적의 67% 소유하고 있던 상태에서 국제 설탕가격이 폭락하자 농장주들이 사탕수수 수확을 포기하고 방치하면서 농장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니세프 등에서 기아 상태에 빠진 14만 아동들을 지원해달라고 호소 하면서 그린코프생협 등이 조직한 ‘일본 네그로스 캠페인위원회’(JCNC: Japan Committee for Negros Campaign) 는 긴급하게 바나나를 수입하는 등 섬 주민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조금을 보내주는 방식으로는 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설탕노조 위원장은 '우리는 굶주리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 이라고  



연수 일정의 마지막날인 121일 가네시게(KANESHIGE) 농장을 방문했다


가네시게씨는 일본 그린코프의 초창기 전무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네그로스섬을 덮친 살탕파동당시 아이들이 굶어죽기까지 하는 비참한 상황을 겪던 네그로스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섬을 처음 방문하고, 1994년에 섬에 이주해 와 그린코프 등 일본 생협들과 시민사회의 참여 속에 부지를 1995년 이 농장부지를 매입한 뒤 유기비료 생산 시설과 교육과정 등을 준비하다가 1996년 지병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 뒤 이 농장에 뿌려졌다고 했다농장의 치타씨는 가네시게씨가 농장에 우리들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 했다


가네시게 농장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유기농업을 가르치고, 이들이 마을로 돌아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농장운영 경비는 팔시스템등 일본 생협들의 기금에 의지하고 있다고 했다.



농장의 가자 큰 특징은 BMW 농법이었다. 가축의 분뇨(糞尿)를 화강암과 현무암 등 자연석과, 부엽토 등으로 처리해 박테리아(Bacteria), 미네랄(Mineral)로 활성화시킨 물(Water) 변환시켜 가축의 음용수 등으로 활용하고 이 과정에서 침저된 오니 등은 유기질 퇴비로 경작지에 활용하는 생태적인 순환농법인 셈이다


몇 년 전 한살림을 방문했던 야스다 시게루 고베대 명예교수께서 BMW의 원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구상의 미네랄이라는 것들은 결국 우주 대폭발의 시기에 별들에서 떨여져 나온 것들이고 이들의 에너지와 미생물의 힘으로 축분들을 정화시키는 원리에 대해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할 뿐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갈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다. 다만, 밤 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몸이 이어져 있다는 낭만적인 상상이 미소를 머금게 할 뿐이다.

 


가네시게 농장의 돈사에 우리 일행은 별다른 소독도 없이 들어가 갓 태어난 새끼돼지들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BMW를 음용한 덕에 돼지들이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돈사 안에는 역한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돈사 앞에는 오니를 가라 앉히고 바이오 가스를 생산하는 탱그 앞으로 단계적으로 오수를 정화 하는 세 칸의 수조들가 이어져 있었고, 수조 안에는 화강암과 현무암 등 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자연암석들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암석의 미네랄 성분과 부엽토 등의 미생물들이 걸러낸 물은 실제로 최종단계에서는 사람이 마셔도 아무 탈이 없는 물로 걸러진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의 운동가들이 초석을 놓아 이미 진행되고 있는 민중연대, 민중교역의 현장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이미 30년 전부터 땀흘리며 민중연대의 씨앗을 뿌려온 일본 운동가들의 자취를 만났다








우리가 방문했던 얼터트레이드 3층 교육장에는 

가네시게 씨를 기리며 ‘KANESHIGE HALL’로 이라는 명패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마음으로 잠시 헌화하면서 묵상을 올렸다



소위 '86'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또래들의 집단 에너지는 한 때 대단했다.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활동가들이 1만 명 가량 되었다고도 하고 지금도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장을 지키고 있지만 


대부분은 운동의 전망을 포기한 채 각자 도생의 길을 가야만 했다. 운동의 지도부를 자임했던 이들은 대중운동 현장을 이탈한 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앞다투어 정치판으로 몰려가 오늘날의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뜨거웠던 80년대의 그 에너지가 왜 이토록 쉽사리 조로와 쇠락의 길을 가야 했을까. 


가네시게농장에서 씁쓸한 우리 현실에 겹쳐 

새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혁명'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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