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에 갔다가 귀가하기 전에 알라딘 중고책방에 들어가보았다. 

<이노우에야스시 여행기>라는 책이 눈에 띄어 선 채 넘겨보다가 주말동안 읽어볼까 하고 사가지고 왔다. 

마침 같은 작가의 <빙벽>이 거실 책꽂이에 있어 다시 들춰보았다.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줄거리도 생소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다. 

진선출판사에서 포켓판, 4천원짜리 책인데... 책꽂이에서 배어나온 송진이 비닐껍질에 눌어붙어 있었다. 

1996년 코오롱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본격 등반을 해보고 싶어하던 90년대 말쯤 영풍이나 교보문고에서 산 것 같다.  

당시에는 대형서점에 제법 '산악도서' 서가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여러 취미코너에 합병돼 쪼그라들었지만...  



30대 그 무렵 <빙벽>을 읽으면서 열광하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산사나이들의 낭만도 그렇지만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한 유부녀(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것 이상은 아닌) 를 향한 두 순진한 산악인의 몰입에도 꽤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서 꽤 존경받는다는 이 작가의 내면도 소설의 줄거리도 엉성하고 어설프기만하다. 

이해가 되는 점은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58년인가... 그 무렵이다. 신소설만큼이나 옛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여전히 하녀가 등장하고 여성들은 남편이나 오빠의 그늘에서 자라는 존재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가 소설의 핵심인물이다. 

여자는 아름답다고 묘사된 것 말고는 도대체 왜...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지 이해할 수도 없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 높은 인격에 대한 이성적인 대응만은 아닐지라도...

무슨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한 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1980년대의 우리들은 아니 나는, '사랑'마저도 '이성적 결단'이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물론, 사람이, 또 사랑이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 이성과 합리를 아예 부정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다울 수 있나.   

우연적인 행위의 연속, 불가지론적인 사건들의중첩? 인생을 이렇게 치부해버리면 삶은 더 부질없어진다.  


2010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이어 사별하면서 몸과 마음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던 무렵 일본 나고야에 있는 북알프스 야리가다케에 올라본 적이 있어 

책에 나오는 카미고지上高地, 가라사와, 갓파바시, 요코오,  도쿠사와, 묘진, 호타카 같은 지명들이 낯익었다. 

소설은 줄곧,산에 가기 위해 일상을 견디는 우오즈와 고사카...두 젊은 산악인의 사랑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대학산악부 동문이며 겨울철 오호다카 동벽을 초등하기 위해 설을 앞두고 휴가를 내 북알프스에 간다. 

고사카는 야시로 미나코라는 젊은 유부녀를 사랑하지만 둘 사이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미나코는 한 번 고사카와 잠자리를 가진 일에 대해 자책하면서 거리를 둔다. 

결국 고사카는 당시 신개발품인 나일론 자일이 끊어지면서 겨울산에서 죽는다. 작가는 이들 산악인들이 '다다미에 누워서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내들이라고 묘사했다.  

고사카의 어머니도 '아들은 하고 싶은 등산을 하다 산에서 죽었으니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한다. 

산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일상을 벗어나 있는 공간이다.많은 산악인들이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산에서 충족시키려고 한다. 산악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우오즈는 슬리핑백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쭈욱 펴고 눈을 감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댔다.우오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기로 들면 생각할 일은 많았다. ... 그러나 우오즈는 언제나 그렇듯이, 산에 있을 때는 되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 위해 산에 온 것은 아니니까. '   


아무튼, 이노우에 야스시의 '빙벽'은 까맣게 잊고있던 산악문고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등산에 대한 간단치 않은 물음과 대답은 오히려 역시 평화출판사의 등산문고판으로 간행된 라인홀트 메스너의  <도전>에 잘 표현돼 있었다. 

들춰보니 이 책은 1994년에 간행됐고 원로 산악인 김성진씨가 번역했다고 표기돼 있다.


' 곰곰이 생각하면 등산가인 우리도 그 희피족과 닮은 게 아닌가. 우리도 등산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일종의 구제를 바라는 게 아닌가.  ... 결국 따지고 보면 숨막히는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산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산은 스포츠다.(그것 이상은 아니다) ... 산행이 끝나면 정신이 더 맑아졌다느니 인간적으로 가치를 더 갖게 되었다는 등,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큰 착각이며 자기 기만인 것이다. '  


이런 등산서적들이 꾸준히 발행되던 1970,80년대에 비하면 등산은 훨씬 더 대중화 되었다. 더 맛있는 음주를 즐기거나, 비만과 혈압 같은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처럼 훨씬 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야유회를 가듯이 산에 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아졌다. 

산행이 무슨 구도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과거처럼 무슨 특별한 사람들의 독특한 행위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고산등반이나 거벽 초등과 같은 도전을 이어가는 등산행위에는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한계를 확장해보고 싶은, 

인간들의어떤 욕망이 반영돼 있다. 

굳이 힘든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등 따숩고 배부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어떤 욕망을 해소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8천미터 고산들을 단독으로, 무산소 등정하는가 하면 연이어 두 개 봉을 오르고, 인류 최초로 8천미터 이상 14좌를 등반하며 인간의 한계를 탁월하게 확장시킨 라인홀트 메스너는 예의 <도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돌아오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는데, 그것이 등산가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었다. 그런 위인들이 어떻게 등산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위험한 등반에서 겨우 살아온 뒤에도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정신의 근육이 우리와는 다른 경지일 것이다. 

모처럼...종이 책을 읽었다. 

우울감 때문에 달리기도 쉬고 있던 탓에 늘어진 근육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그 지점. 그 곳에 삶을 밀고가는 어떤 힘이 있는 게 아닐까.   

 

나, 다니엘블레이크 

2016. 12. 18 아트하우스 모모 

무기력하게 늙어가고 있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푸념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서 혼자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에 전개되는 영국의 현실이 한국과 다를 게 없는데,  예전처럼 분노도 저항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속 현실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고 부조리한 상황들이다. 끝없이 규정과 원칙을 내세우는 관료들. 이미 우편으로 송달된 통지서에 대해 항의를 하자, 규정이 정한 절차는 먼저 전화로 통지를 받고 의료지원금 신청을 하게돼 있으니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항고하라는 대답을 영혼없는 자동응답기처럼,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분이 안 가도록 끝없이 되풀이 하는 요령부득의 관리자들... 

다니엘 블레이크가 처한 난처한 처지보다 영혼이 증발한 것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이웃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도 '공포'일 것이다. '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이웃에게 조그만 관용도 베풀 수 없게 그들을 몰아갔을 것이다.  

20년 전에 본 '브레스드오프', '트레인스포팅', '빌리엘리엇' 같은 영국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영국이 그런 모양이다. 사람을 더 싸게 부리려는 자본의 탐욕이 인간을 구차하게 연명하는 그런 존재로 만들었다. 쌍용차 노조를 파괴하고 집단 해고를 강행해 20여 명을 자살로 내몰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역꾸역 굴러가고 있는 우리사회처럼...  

영화에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하시킨 영국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한 때는 윤택한 선진국 국민들이던 그들은 이제 일상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아사 직전에 식료품 구호소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따고 맨손으로 음식을 삼켜야 할 만큼, 사람들의 자존감은 완전히 짓밟혀 있다. 

심장 혈관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젊은 시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제법 비싸게 사들였을 중고가구들을 내다팔면서 안간힘을 쓴다. 의료연금 신청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와 이웃들이 사는 서민주택은 낡고 초라한 부엌가구, 칠이 벗겨지고 못이 삐져나온 계단... 영국의 서민들도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웃과 정을 나누고  염치와 예의를 알던 일상... 사람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던 그 일상을 집어삼킨 것은 데처 수상이 앞장섰던 신자유주의 광풍일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제어되지 않는 자본의 식욕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더 싸게 노동력을 팔다 용도폐기 되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한 때 그 사회의 자부심이었을 '사회안전망'도 앙상하게 골격만 남았다.

의사는 다니엘의 심장 혈관이 노동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지만 의료지원금을 신청은 기각된다. 판정 관리가 매뉴얼에 따라 던지는 바보같은 질문들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고 꼬박꼬박 질문을 던진 것이 그런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굴종하지 않고 질문하는 자에게는 사회는 가차없이 응징한다. 자존심을 세우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하노라..." 스무 설 적에 고민 없이 목청껏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굴욕을 감수하며 연명해야 하는가... 마음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연필세대라고 말하는 다이엘 블레이크는 의료연금 기각에 대해 재심청구를 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컴퓨터로만 접수하게 돼 있다. 써본 적 없는 인터넷에 매달려 끙끙대거나, 두 시간씩 대기 해야만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 ARS같은 절차 때문에 심장병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는다. 객석에서 지켜보다가 우리들이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관리들은 시종일관 매뉴얼이 정한대로만 대답을 한다. 이미 대회는 없다. 사람과 ARS의 차이도 무의미하다. 그들 역시 이미 외주화된 관리업체의 비정규직일 것이다. 그들도 속으로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없지는 않겠지...  그렇게 믿고싶다. 그러나 자동반복 테이프처럼 규정을 반복해 외울 뿐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내담자들에게는 낮은 평점을 매기는 식으로 '체제'에 부역을 하면서 말이다.   

연신 한숨이 내 쉬면서 끙끙 앓으며 영화를 보았다. 

옆 좌석의 젊은이들은 내내 흐느끼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메마른 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다들 눈물세상을 고단하게 헤쳐가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영상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돼 눈물을 쏟고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오' 이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다니엘블레이크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고 사람답게 처신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서기에 현실은 거대한 파도처럼 도저하다.


켄 로치 감독은 1936년생이라고 한다. 여든 살... 지레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답게... 그래 ... 

사람다운 자존감을 버린다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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